“소영아, 몸은 좀 어때? 다친 데는 괜찮아? 내... 내가 꽃 사 왔는데 네가 좋아할지 모르겠어. 과일도 좀 살까 고민했는데 또 네가 어떤 과일 좋아할지 몰라서 그만뒀어.”준태는 조심스럽게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소영의 귀엔 준태의 거친 목소리와 또 자신 하나 없이 잔뜩 움츠러진 말투가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아무리 불쾌해도 소영은 후회되는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웃음을 지었다.“아직 다 낫지는 않았어. 그리고 뭘 이렇게 많이 사 오고 그래. 네가 그냥 날 보러 와주는 것만으로도 족해.”“나도 염치가 있는데 빈손으로 어떻게 와.”병실이 있던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멸 가득한 표정이 자리 잡았다.“빈손으로 오라는 게 아니잖아. 뭘 사 오더라도 좋은 거 사면 안 돼? 어? 네가 사 온 꽃 좀 봐봐. 어우, 촌스럽고 못생겼다, 진짜. 설마 길에서 주운 거니?”“아, 그러게. 이런 걸 들고 소영이 병문안에 온 거야? 넌 창피하지도 않아?”자신을 깔보면서 업신여기는 말들을 듣자, 준태의 얼굴엔 음흉한 기색이 스쳤고 꽃을 들고 있는 손에마저 힘이 들어갔다.이 작은 동작을 본 소영은 입술을 꾹 닫았다가 시험해 보듯 다시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 준태가 날 보러와 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데. 그것도 준태 정성이잖아.”“준태야, 다음번엔 그냥 빈손으로 와도 돼. 특별히 다른 물건을 사 올 필요 없어.”아니나 다를까, 소영이 입을 열자마자 준태의 음흉한 기색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심지어 그녀가 말을 마치자 준태의 굳은 표정은 이미 얼음이 녹듯 사르르 풀어졌다.“응, 그럴게.”“소영아!”소영의 친구들은 못마땅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소영은 그저 웃으며 준태의 편을 들어주었다.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준태는 속으로 자신의 안목에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자 보는 눈이 참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전혀 자신을 얕보지 않는 마음씨 고운 여자를 말이다.다른 여자들은 원...친구들은 오늘의 소영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병실은 삽시에 조용해졌다.다들 주연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것이다.그리고 조용해진 이유는 아마 주연의 말을 들은 후 준태가 아무 쓸모도 없는 게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그는 양아치이다. 그것도 전과 수두룩할 그런 양아치.사람을 해치는 이런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친구들은 주연이 머리를 이렇게 빨리 굴릴 줄 몰랐다. 아마 환영식에서 윤아와 싸운 이후 윤아가 죽도록 미웠나봤다.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소영이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어머, 주연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준태더러 그런 일을 하라고 할 수 있어? 준태야, 주연인 그냥 헛소리 한 거야. 그러니까 못 들은 거로 해. 절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준태는 입을 놀리며 답했다.“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 소영아, 나 예전엔 너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난 맹세했어. 그 누구도 널 해치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감히 널 해친 사람은 나 최준태랑 원수진 거나 다름없어. 내가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준태야, 그땐 상황이 너무 혼란스럽다 보니 윤아 씨가 한 게 아닐 수도 있어.”“소영아.”주연이 소영의 말을 가로채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심윤아 편 좀 그만 들어. 너 지금까지 심윤아 사정 살펴 가며 좋은 소리만 골라 했잖아. 그런데 그년은 널 이렇게 만들고도 모자라 어쩌면 그림자도 보이지 않니? 어? 양심이 있다면 병문안이라도 와야잖아. 심윤아는 정말이지 씨알만큼의 죄책감도 없다니까. 알겠어?”소영은 눈을 축 내리깔았다.“난 그냥...”“됐어, 소영아. 더는 말하지 마. 네가 너무 착해서 그년 싸고도는 건 알겠는데 우리는 아니야. 당하고도 꾹꾹 눌러 참을 만큼 착하지 않다고!”준태는 이 대화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비친 독기는 어떤 결심이 섰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소영도 이런 시선을 본 후, 준태가 어떤 짓을 벌일지 가늠이 갔다.소영은 속으로
“그래요. 그러면 내가 비행기표 사줄게요, 여보.”“어머, 고마워요. 우리 여보.”둘은 알콩달콩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그에 비하면 뒤에서 따라가는 수현과 윤아는 아주 서먹했다. 둘 사이에 찬 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각자 갈 길을 갔다.윤아는 서로 다정하게 붙어가는 수현의 부모님을 보면서 수현과 이렇게 서먹하게 선월을 보러 가면 그다지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그녀는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는 수현에게 말했다.“차에서 기다릴게.”이 말을 듣자, 수현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윤아를 보았다.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라 그녀에게 하려고 했을 때 윤아는 이미 몸을 돌려 가버렸다.수현의 안색은 순간 변했다. 그는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윤아의 뒤를 쫓아갔다.이미 비행기표를 산 선희가 태범과 함께 머리를 돌려 아들과 며느리에게 말하려고 했으나 눈에 들어온 건 수현이 윤아를 쫓아가는 뒷모습뿐이었다.“어휴, 저 둘도 참...”선희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손을 휘저으며 남편에게 말했다.“됐어요. 우린 신경 쓰지 말아요. 우선 어머님께 가는 건 어때요?”“좋죠, 다 우리 여보 말을 따를게요.”태범도 실은 아들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클 만큼 다 컸으니, 자신의 감정도 처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부부는 빠른 걸음으로 선월을 데리러 갔다.-윤아는 수현에게 그렇게 말한 후 아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조금이라도 걸음을 늦추었다간 수현이 뒤따라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까 봐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병원 출구에서 나와 그녀는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고 머리에는 온통 선월의 수술에 관한 생각뿐이었다.‘요며칠 수술을 진행한다면 할머님께선 계속 집에서 지내야 하나, 아니면 요양원에 계셔야 하나...’‘아니야... 할머님께선 요양원을 싫어하시잖아. 그러니까 요양원은 안될 거야. 집에 계시면서 확실한 수술 날짜가 잡힐 때까지 기다리는
수현은 사실 자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 잘 몰랐다.그저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제는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내 내보낼 구멍을 찾지 못한 그런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정서가 생기게 만든 사람이 바로 심윤아란 것을.이런 답답함과 분노는 수현을 불안하게 만들기까지 했다.그는 아직도 윤아의 손목을 붙잡고 있으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마치 이렇게 쉽게 끝내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윤아는 이런 수현을 보자 다시 말을 꺼냈다.“지금 어떤 생각을 하든 할머님 수술이 끝난 후에 얘기해도 되지 않아? 별반 다를 게 없을 텐데.”수현이 그녀에게 정말 할 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와 소영에 관한 얘기일 것이다.저번에 소영이 넘어진 일은 아직 후속이 없는 듯했다.윤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은 것은 아마 선월의 체면을 보아서였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영이 넘어진 일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비록 그날 소영이 부주의로 넘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으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대신해 해명도 하지 않았고 진실을 밝히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만약 소영이 정말 자신에게 뭔 짓이라도 하려면 그건 아마 선월이 수술한 후일 것이다.하지만 그땐 윤아는 이미 수현과 이혼을 했을 것이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지금 윤아는 소영의 일로 수현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그저 중심을 선월에게 두고 싶었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다시 몸부림 쳐보았으나 뜻밖에도 수현은 아직도 그녀의 손목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심윤아: “...”이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안되는 걸까...이때 수현의 얇은 입술이 드디어 움직였다.“할머니께서 수술 받으신 후, 우리 둘 제대로 얘기할 수 있어?”이 말을 듣자 윤아는 즉시 대답했다.“당연하지.”가능하다면 좋게 만나서 좋게 끝내고 싶었다.너무 빨리 대답하는 그녀의 말을 듣자 수현
수현은 선월의 일을 다 처리한 후, 소영에게 선월의 수술 준비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문자를 보냈다.소영은 원래 수현이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준태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했지만, 수현이 곁에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었다.그래서 수현의 문자를 받았을 때 정말 하늘을 날 것같이 기뻤다.만약 선월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한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었다.소영은 조심스럽게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엔 아주 빨리 받았다.“수현 씨.”그의 목소리엔 피곤함이 묻어있었다.“응. 며칠 동안은 병원에서 치료 잘 받아. 시간 날 때 보러 갈게.”“수현 씨가 바쁜 거 잘 알고 있어. 시간 없으면 오지 않아도 돼.”소영은 물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투로 말했다.“어르신에 비하면 내 이마에 난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우선 어르신 일을 다 처리하고 나서 얘기하자.”소영이 병문안 가지 않은 자신 때문에 기분이 상할 거라 생각했던 수현은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그럴게.”“아, 맞다. 수현 씨, 어르신께서 조만간 수술하시는 거야?”수현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이번 주 내에 수술받으실 거야.”이번 주 내...이 시간을 듣자, 소영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훌쩍 올라갔다.“알겠어. 그러면 어르신께서 무사히 수술 잘 받으시길 기원할게.”“고마워.”전화를 끊은 후, 소영의 얼굴에 남아있던 미소는 순간 사라졌다. 그녀는 핸드폰을 꼭 쥐면서 이번만은 제발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만약 선월이 이번 주 내에 수술받는다면 준태가 이때 윤아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다간 분명 자신에게 불똥이 튕길 것이 뻔했다.그렇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어떻게든 선월이 수술받게 만들어야 했다.하루라도 수술받지 않는다면 수현과 윤아는 하루 더 이혼하지 않을 테니까.윤아에게 손을 쓰려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게 좋을 듯싶었다.하지만 최준태 그 양아치는 오래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오늘 그 독기 가
“저번에 수술을 미루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알아?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수현 씨랑 심윤아는 이미 이혼했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겠지.”여기까지 말한 후, 소영은 주연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했다.“주연아, 나는 네가 늘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어르신께서 순조롭게 수술을 받으시는 일이야.”“그래야만 나랑 수현 씨가 잘 될 수 있어. 계속 끌면서 이혼하지 않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위험한 일이거든.”“난 내가 준태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넌 늘 말주변이 좋잖아,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준태 좀 말려주면 안 될까? 충동적인 일 저지르지 말라고 말이야. 이제 진씨 집안 사모님 되면 절대 너에 대한 고마움 잊지 않을게. 응?”마지막 한마디까지 들었을 때, 주연은 마치 거대한 승낙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소영아, 걱정하지 마. 내 힘을 다해 널 도울게.”주연의 대답에 소영은 순간 감격의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주연아, 진짜 고마워. 넌 역시 내 절친이야.”병원을 떠난 후, 주연은 준태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불러냈다.다른 여자들은 평소에 늘 그를 깔봤고 무시하기 일쑤였으므로 준태는 그들에게 따로 호감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소영과 아는 사이만 아니었어도 그는 정말 사정없이 팼을 것이다.하지만 때리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좋을 리가 없었다.“무슨 일인데.”소영이 없을 때 준태는 양아치 행세를 숨기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주연은 화가 치밀어 올라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소영이 자신에게 했던 부탁이 떠올라 어쩔 수 없이 꾹꾹 삼켰다.“소영이 대신 찾아온 거야.”“소영이? 날 왜 찾는 거야?”소영의 이름을 듣자마자 준태의 표정은 순간 변했고 처음에 심드렁한 말투도 제법 진지해졌다.“소영이가 이 말 전해주라고 했어. 충동적으로 심윤아한테 나쁜 짓 하지 말라고.”이 말을 듣자, 준태는 피식 웃고는 잠시 후 말했
준태는 눈앞의 여자에 대해 인상이 있었다. 전에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오관이 정교하고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여겼지만, 뜻밖에도 이렇게 사람을 해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했었다.역시 그가 좋아하는 소영만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직하고 마음씨 고운 사람이지 다른 여자들은 모두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됐어. 여기까지 말할게. 이제 때가 되면 연락할 테니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둬.”주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난 후, 준태는 땅바닥에 침을 뱉었고 눈동자엔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나쁜 계집년, 소영이만 내 것으로 만든 후 너희들 하나도 가만 안 둬. 두고 봐.”-병원에서 수현과 했던 그 말 때문이었을까, 집에 돌아온 후 윤아와 수현은 모처럼 평온한 나날들을 보냈다.생각해 보면 소영이 귀국한 후 처음이었다.선월의 수술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수현은 다른 일정은 잡지 않고 이동 노선을 회사 아니면 집으로 고정했다. 이건 윤아도 마찬가지였다.그날 검진을 받은 후 진 선생은 통지를 기다리라 했다.태범은 출국하여 해외지사 업무를 처리하러 갔고 선희는 본가에 남아 매일 선월과 함께 나가 사진을 찍었다.수현의 어머니 선희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선월은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잇달아 활기로 가득했고 매일 며느리와의 데이트를 즐겼다.그러니 선월 쪽의 일도 윤아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아침에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낸 후, 윤아는 아래층에 내려가 디저트 가게를 둘러봤다. 케이크로 자신을 위로해 줄 생각이었다.이어폰을 귀에 꽂고 케이크 진열장 앞에 서서 오늘 살 케이크를 고르면서 현아의 꾸지람을 들었다.“아침에 일 다 끝냈어? 점심은 먹었어?”“먹으려고.”“뭐? 지금이 몇 신데 인제야 점심을 먹으려는 거야. 심윤아 너 지금 엄마라는 의식이 있기는 해? 어우, 내가 못 살아. 네가 배고프지 않아도 우리 아기는 고플 거잖아.”“알아. 그래서 미리 내려와서 점심 고르고 있던 참이었어.”현아의 말
펑!윤아의 여린 몸은 유리문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이 장면을 목격한 직원은 기겁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핸드폰 저편에 있는 현아도 이 소리를 듣고는 놀라서 물었다.“왜 그래? 어? 윤아냐, 무슨 일 있는 거야? 너 괜찮아?”부딪힌 어깨에서 전해오는 찌릿찌릿한 아픔에 윤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직원도 얼른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어깨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윤아의 첫 반응은 오히려 자신의 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손을 들어 배에 살폿이 올려 어루만진 후, 그저 어깨만 아플 뿐 다른 문제는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윤아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친 사람을 바라보았다.누군지는 몰라도 들어올 때 조금 조심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었다.게다가 자신을 친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과 한마디 없다는 점이 꽤 거슬렸다.이러한 불만을 가지고 고개를 들고 보니 뜻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안겨 왔다.한 삼 사초 정도 지났나.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최준태?”“뭐, 뭐?”현아는 윤아의 목소리를 듣고는 핸드폰 저편에서 의혹스럽다는 듯 물었다.“누구지? 스읍,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아, 맞다. 윤아야, 너 아까 무슨 일 있었어? 괜찮아?”윤아의 선홍빛 입술이 움직이면서 최준태라는 이름이 나올 때 최준태 본인도 잠시 놀랐다.이렇게 고결한 부자집 아가씨께서 몇 년이나 지난 지금 첫눈에 자신을 알아볼 줄 몰랐다. 게다가 그의 이름까지 아주 정확하게 불러내니 말이다.어찌 되었든 윤아가 속해 있는 재벌 사교계에서 준태 같은 양아치는 그저 하찮은 먼지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나 여기 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 데 조금 있다가 다시 연락할게.”이렇게 말한 후 윤아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현아도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는 아무 말라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있었는데 윤아 쪽의 상황 발전을 들을 생각인 듯했다.“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