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시선인지 뻔했다.하지만 윤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컵을 들고 머리를 숙여 한 모금 마셨다.역시 아까 마셨던 것과 같은 맛이었다.가까이에 있으니, 선우는 컵에 대고 조금씩 홀짝이는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보고 있자니 목구멍이 말라 드는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안경을 스윽 밀고는 간신히 시선을 옮긴 후 조용히 물었다.“이제 더는 신경 안 써?”이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선우는 빙그레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내 뜻은 사람들 말하는 거 신경 안 쓰냐고.”사실 앞뒤 물음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신경 쓰지 않으니까 사람들 말하는 게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사실이잖아.”수현과 그녀는 원래부터 쇼윈도 결혼이었으니 감출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윤아의 말에 안경 뒤에 감춰졌던 선우의 눈에는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그는 솔직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러는 윤아를 보니 오히려 더 가슴이 지끈거렸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윤아의 머리를 만졌다.“컸네. 많이 성숙해졌어.”온몸이 순간 굳어졌다.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선우를 쳐다보았다.이 인간 왜 이래?‘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내 머리를 만지기 좋아하다니. 어린애였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잖아.’의혹에 잠겨있을 때쯤 수현은 이미 몸을 일으켜 차가운 시선으로 선우를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따라 나와.”선우는 옅게 미소 지었다.“먼저 마시고 있어. 수현이 나한테 할 말 있나 봐.”“응.”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둘이 나간 후 룸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에게 눈짓을 건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윤아 곁에 다가가 물었다.“윤아야,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는데 선우는 아직도 너한테 잘 대해주는구나.”잘 대해준다고?윤아는 전에 자신이 듣기 싫은 말만 골라 하는 선우 때문에 너무 화난 나머지 울 뻔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
양훈은 자신의 술잔을 들고는 윤아의 옆자리에 앉은 후 웃으며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누가 함부로 떠들어 댔는지 현이가 제대로 밝혀낼 겁니다.”그 말인즉 헛소문을 퍼뜨린 게 수현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다.윤아는 그와 잔을 부딪치며 고맙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도와줘서 고마워요.”양훈은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수현이 친군데 그 녀석 아내를 돕는 건 당연하죠.”여기까지 들은 윤아는 시선을 돌렸다. 양훈이 쇼윈도 결혼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나서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바로 이때 양훈은 말을 이었다.“현이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윤아는 멈칫하고는 양훈을 바라보았다.그는 목소리를 일부러 낮게 깔면서 말했다.“사랑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을 때 소영이가 그의 목숨을 구해줬어요. 그래서 어떤 감정인지 쉽게 혼동해요.”윤아는 이제야 양훈이 무얼 말하려는지 말 것 같았다.“그런가요?”그녀는 담담하게 웃었는데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보이지 않았다.이런 윤아의 모습을 본 후 양훈은 입술을 꾹 다물다가 나중엔 한숨을 내쉬었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알 거예요. 심하게 물에 빠진 뒤로 트라우마가 남았어요. 그래서 소영이 목숨을 구해준 게 수현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있었던 거예요.”“알아요.”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수현에겐 아주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후회되었다.그날 왜 그를 구하러 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도대체 무얼 하다가 현장에도 가지 않은 건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물에 빠진 후 크게 아팠던 것 같다. 만약 그때 수현을 구한 게 자신이었으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하지만 때론 이렇게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이 만약 다른 어떤 거에 쉽게 흔들리고 심지어 다가가기를 거부하는 거라면 그건 정말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그래서 시간을 조금 주라고 말한 거예요.”“시간을 왜 줘요?”그녀는 잘 몰랐다.“자기 마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에요.”양훈은 답했다.여기까지
윤아는 찬물을 한 웅큼 떠서 얼굴을 썼었다. 찬물이 닿으니 흥분되었던 감정도 많이 사그라지면서 조금 진정되었다.손을 세면대에 반쯤 짚고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아까 양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차분하게, 진지하게 마음으로 느껴보라고?뭘 느끼라는 거야.윤아는 아직도 잘 몰랐다. 아까 양훈은 정도껏 말했고 게다가 룸엔 사람들도 많으니 계속 물어볼 타이밍이 아니었다.그저 조금 터무니없었다. 양훈의 생각이 수현과 다르다는 것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았다면 양훈은 자신과 수현을 엮는 것 같았다.왜? 엮더라도 소영과 엮어야 하지 않나?이제는 생각하기도 귀찮아진 윤아는 티슈로 손을 닦고는 밖으로 걸어갔다.“소영아, 더 이상 슬퍼하지 마.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만 않았어도 수현 씨가 이렇게 널 대하지는 않았을 텐데.”익숙한 목소리에 윤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원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화장실 입구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보았다.강소영과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아까 윤아에게 손찌검하려고 했었던 주연도 있었다.친구들 사이에 서 있는 소영은 지금 낮은 소리로 흐느끼고 있다.“너 때문이 아니야. 넌 그저 입바른 소리를 해서 그렇지, 앙심 없는 거 알아. 수현 씨도 분명 알 거야. 다만... 지금 나에게 마음이 없는 것뿐이야.”이 말을 듣자, 주연의 얼굴엔 독기가 스쳤다.“다 심윤아 그 계집년 때문이야. 그년이 지금 자기가 공식적인 수현 씨 아내라는 것만 믿고 수현 씨 꼬신 게 분명해. 그렇지 않은 이상 수현 씨가 어떻게 너한테 이래. 소영아, 걱정하지 마. 우리가 반드시 되갚아줄게.”“됐어.”소영은 주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는데, 눈가엔 눈물을 머금고 있어서 그런지 더 애처로워 보였다.“오늘 나를 위해 나서는 바람에 이렇게 됐는데 너한테 더 민폐 끼칠 수는 없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수현 씨가 화 풀거든 내가 널 대신해서 사과할게.”“소영아, 우리 절친이잖아. 그러니까 이
소영의 친구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주연이 말로만 욕하면 했지 진짜 손찌검을 할 줄은 몰랐다.소영과 만나고 다니는 사람들은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집안 회사는 비록 강 씨네 그룹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유명했다. 그런 집안의 여식들이 교양 없는 짓을 하며 집안에 먹칠할 리가 없었다.그래서 밖에서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욕하고 심지어 손찌검을 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하지만 주연이 이렇게 충동적일 줄은 몰랐다.이 장면을 본 소영도 매우 놀라웠다. 윤아가 아주 싫었고 또 따끔하게 혼내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진짜 손찌검이라도 했다간 수현과의 관계가 더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방법은 한 번도 그녀의 계획에 없었다.소영은 이 장면을 보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말리려고 했다.하지만 앞으로 반걸음 나갔을 대 그녀는 멈췄다.왜 꼭 말려야 할까. 이런 다툼 속에서 윤아의 아기가 잘못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임신 초기일 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없애치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계속 남겨둔다면 끝내 화근으로 될 게 뻔했으니까.그리고 끝내 들통난다 해도 그녀가 직접 손을 쓴 게 아니니 염려될 건 없었다.생각을 정리한 후, 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너무 놀란 나머지 어쩔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그녀의 친구들은 정말 놀라서 일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윤아는 비록 빨리 물러나긴 했지만 머리를 잡히고 말았다.순간, 두피가 찢어질 것 같았다. 찌릿한 아픔과 함께 밀려온 것은 바로 짜증이었다.그녀는 의기양양해 있는 주연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정말이지 사람을 맞고도 가만히 있는 바보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윤아는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픔을 참으면서 사정없이 주연의 발가락을 밟았다.오늘 하이힐을 신지 않았지만 신발 뒤꿈치로 발가락을 밟아놓으면 꽤 아플 것이다.역시나 주연은 너무 아픈 나머지 고통스럽게 소리 질렀고 표정도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져 아주 추해 보였다. 윤아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
소영은 이마가 계단에 부딪는 순간, 자신이 과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냥 살짝 넘어지려고 했지 얼굴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얼굴을 감쌌지만 그래도 심하게 넘어져 버렸다.쿵!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고 급히 소영에게로 달려갔다.“소영아!”그녀의 친구들도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잇달아 다가갔다.이때 마침 룸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왔다.윤아는 그 자리에 서서 아까 손을 뻗었던 동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손바닥을 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분명 소영에게 닿지 않았는데... 어떻게 넘어진 거지? 발목을 삐끗했나?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수현과 선우도 여기에 도착했다.“왜 그래?”윤아는 드디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수현은 머리가 헝클어진 윤아를 보자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즉시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몸을 자신 쪽으로 돌리게 하였다.“너한테 손댔어?”이 순간, 윤아는 멍해 있으면서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수현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자신을 봤다는 점이 제법 놀라웠다.수현의 마음속엔 영원히 소영만 있는 줄 알았다.양훈이 마음으로 보라고 했던 말도 이 뜻이었을까.하지만 이 말을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저쪽에서 누가 수현을 불렀다.“대표님, 소영이 얼굴에서 피나요!”이 말을 듣자,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수현을 바라보았는데 마침 수현의 그윽한 눈동자에 푹 빠져들었다. 그도 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 속엔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윤아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으로 느껴보라고.그럼, 이번 한 번만, 딱 이번만 마지막으로 마음으로 느껴볼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순간 윤아의 동공은 미세하게 흔들렸고 한껏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그녀는 수현의 손을 한눈 보았다. 수현도 눈치챘는지 입술을 꾹 다물면서 결심한 듯 낮은 소리로 그
손을 뿌리치면서 밀친 게 소영이었다고?만약 정말 윤아가 밀친 거라면 소영이 너무 심하게 다쳤잖아.다들 조심스러운 눈길로 윤아를 바라보았고 윤아는 그저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수현이 소영을 훌쩍 들어 안고는 서늘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다른 일은 먼저 신경 쓰지 말고 병원부터 가자.”그는 소영을 안고 윤아를 스쳐 지나갔다.소영의 친구들도 모두 따라갔고 윤아 곁을 지날 때 주연은 심지어 의기양양해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해명할지 두고 볼게요.”이렇게 독설을 퍼붓고 주연은 절뚝거리며 따라갔다.전에 룸에 있던 사람들도 지금은 제법 머쓱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어쨌든 선우의 환영식인데 이렇게 망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선우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선우도 제법 젠틀하게 괜찮으니 먼저 돌아가라고, 나중에 시간 되면 다시 모이자고 했다.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그들도 더는 남기 난처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대부분 사람이 돌아갔을 때 윤아도 몸을 돌려 밖을 향해 걸어갔다.선우는 그런 윤아를 보자 손을 뻗어 막아 세웠다.“데려다줄게.”윤아는 그의 손을 밀며 말했다.“호의는 고맙지만 혼자 갈게.”이렇게 말을 끝내고 선우가 어떤 반응인지 신경 쓰지 않은 채 밖으로 걸어갔다.모퉁이를 지날 때 혼자 서있는 양훈을 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양훈은 말하려다가 말았으나 윤아는 그를 향해 웃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먼저 갈게요. 다음번에 시간 되면 다시 모여요.”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 참으며 양훈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조심해서 들어가요.”“고마워요.”양훈은 가녀린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며 끝내 사라질 때쯤 시선을 거두고는 허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 진짜 인연이 아닌 걸까.-저녁의 바람은 제법 세게 불었다. 얼굴에 닿으면 아플 정도로.윤아는 홀로 호텔 입구의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 거기에선 현아의 격분한 목소
심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쥐 죽은 듯한 정적이 이어지자 주현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그 여자가 전에 널 도와줘서 좋은 감정이 남아있는 건 알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환상 속에 너무 갇혀서는 안 돼. 모든 행동이 계획적이란 생각은 안 해봤어? 솔직히 도와줬다고 해서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건 아니잖아. 은혜를 갚지 말자는 뜻은 아닌데 나중에 보답할 기회를 찾자는 거야.”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그녀의 우울함을 단번에 알아차린 주현아는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오늘 밤 우리 집 올래? 내일 연차 써도 되니까 밤새 수다 떨까? 그러면 기분이 좀 풀릴 텐데.”“괜찮아.”심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할머니가 아직 집에 계셔서 얼른 돌아가야 해.”오늘 밤 일어난 일로 인해 심윤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양훈의 말을 듣고 실낱같은 환상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산산조각났다.누굴 탓하겠는가? 터무니없는 희망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호텔 입구에 앉아있지 말고 얼른 돌아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인데 넌 아예 추위를 못 느끼나 봐?”절친의 세심한 배려에 심윤아는 웃음이 터졌다.“응, 지금 바로 들어갈게.”주현아는 평소 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얼른 들어가. 집 도착하면 연락하고.”“알겠어.”전화를 끊은 심윤아는 곧바로 자리를 뜨는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찬바람을 느끼고 있었다.일기예보에서 오늘 밤부터 기온이 크게 떨어지고 찬 공기가 밀려오니 따뜻하게 입으라고 하더니만 정말로 그런듯하다.외출할 때만 해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추위에 벌벌 떨며 코를 훌쩍이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심윤아의 옆에 앉았다.따뜻한 코트가 몸을 감싸고 코끝으로 상쾌한 담배 냄새가 느껴지자 그녀는 눈을 떴다.“안 아파?”이선우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윤아 얼굴에 난
그래서 나중에 알게 된 사람들은 이성이 아니라 친구로만 대했다.“뭘 멍하니 있어?”이선우는 재촉했다.“얼른 일어나. 여기 앉아있는 게 춥지도 않나 봐?”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심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야식은 됐어. 어차피 배도 안 고프고...”“환영회가 이 지경 됐는데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야식으로 퉁치자.”그 말을 듣자 심윤아는 뒤늦게 죄책감을 느꼈다.오늘은 그가 돌아온 걸 환영하는 자리였는데 심윤아와 강소영의 일로 다들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졌다.물론 심윤아가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으니 심사숙고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가자.”이선우는 활짝 웃으며 물었다.“먹고 싶은 거 있어?”20분 후, 두 사람은 죽집에 도착했고 야식 먹는 사람이 많지 않아 가게는 텅 비어있었다.심윤아는 창가를 골라서 앉았고 뒤를 돌아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선우를 보고 아차 싶어 그제야 재빨리 물었다.“네가 줄곧 해외에 있었다는 걸 깜빡했네. 이런 음식은 별로지? 아니면 뭘 먹고 싶은지 말해봐.”그녀의 말을 들은 이선우는 안경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괜찮아. 양식이 더 익숙한 건 맞는데 오랜만에 한식을 보니까 뭔가 뭉클한걸?”말을 마친 후 그는 의자을 꺼내 심윤아의 맞은편에 앉았다.이선우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배려심이 가득하다는 건 고스란히 느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심윤아는 해물죽이 먹고 싶었으나 비린내가 심할까 봐 걱정되어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야채죽을 주문했다.종업원이 떠나자 이선우는 챙겨온 티슈를 꺼내 젓가락을 깨끗이 닦은 후 자연스레 심윤아에게 건네주며 물었다.“죽 엄청 좋아하는 것 같네?”그 말을 들은 심윤아는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이선우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저 차 네 거야?”이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심윤아는 순간 죽 사러 아래층에 내려간 그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