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은 황급히 소영의 옷자락을 잡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소영아...”사실 그녀가 감히 이렇게 날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소영이 수현의 마음속에서 흔들릴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영이 그에게 사정하면 수현은 분명 따지지 않을 거라 여겼다.하지만 오늘 이렇게 망할 줄은 전혀 몰랐다.“소영아, 나 도와줘.”주연은 소영의 옷자락을 잡으며 낮은 소리로 빌었다.소영의 속도 얼기설기 엉켜있었다. 주연을 도와주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수현의 마음속에서의 무게를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수현의 의지는 너무 강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을 정도였다.저쪽 끝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양훈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강소영, 말리지 마. 수현이 지금 엄청나게 화난 상태야. 말려도 소용없어.”이 말을 듣자, 소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수현을 한눈 보았다.그는 눈을 축 내리깔았는데 검고 긴 속눈썹이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절반이나 감춰주었다. 하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사나운 아우라는 감추지 못하고 선명히 드러났다.그는 지금 화내고 있었다.소영은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 만약 이때 계속 주연을 위해 사정한다면 그녀가 수현 마음속에서의 이미지가 안 좋아 질 수도 있다는 것을.이렇게 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고 그 누구에게도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되었다.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주연의 손을 내치면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미안해, 주연아. 오늘 저녁엔 먼저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이 말에 주연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그녀에게 눈짓을 건넸다.소영이 이렇게 쉽게 자신을 내칠 줄 몰랐던 주연은 아주 불만스러웠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밉보여서는 안 되었고 그들의 눈엣가시로 될 수는 없었다. 심윤아만 빼고.‘심윤아!’주연은 독기 가득 들어찬 시선으로 사납게 윤아를 쏘
누구의 시선인지 뻔했다.하지만 윤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컵을 들고 머리를 숙여 한 모금 마셨다.역시 아까 마셨던 것과 같은 맛이었다.가까이에 있으니, 선우는 컵에 대고 조금씩 홀짝이는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보고 있자니 목구멍이 말라 드는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안경을 스윽 밀고는 간신히 시선을 옮긴 후 조용히 물었다.“이제 더는 신경 안 써?”이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선우는 빙그레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내 뜻은 사람들 말하는 거 신경 안 쓰냐고.”사실 앞뒤 물음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신경 쓰지 않으니까 사람들 말하는 게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사실이잖아.”수현과 그녀는 원래부터 쇼윈도 결혼이었으니 감출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윤아의 말에 안경 뒤에 감춰졌던 선우의 눈에는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그는 솔직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러는 윤아를 보니 오히려 더 가슴이 지끈거렸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윤아의 머리를 만졌다.“컸네. 많이 성숙해졌어.”온몸이 순간 굳어졌다.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선우를 쳐다보았다.이 인간 왜 이래?‘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내 머리를 만지기 좋아하다니. 어린애였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잖아.’의혹에 잠겨있을 때쯤 수현은 이미 몸을 일으켜 차가운 시선으로 선우를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따라 나와.”선우는 옅게 미소 지었다.“먼저 마시고 있어. 수현이 나한테 할 말 있나 봐.”“응.”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둘이 나간 후 룸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에게 눈짓을 건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윤아 곁에 다가가 물었다.“윤아야,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는데 선우는 아직도 너한테 잘 대해주는구나.”잘 대해준다고?윤아는 전에 자신이 듣기 싫은 말만 골라 하는 선우 때문에 너무 화난 나머지 울 뻔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
양훈은 자신의 술잔을 들고는 윤아의 옆자리에 앉은 후 웃으며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누가 함부로 떠들어 댔는지 현이가 제대로 밝혀낼 겁니다.”그 말인즉 헛소문을 퍼뜨린 게 수현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다.윤아는 그와 잔을 부딪치며 고맙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도와줘서 고마워요.”양훈은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수현이 친군데 그 녀석 아내를 돕는 건 당연하죠.”여기까지 들은 윤아는 시선을 돌렸다. 양훈이 쇼윈도 결혼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나서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바로 이때 양훈은 말을 이었다.“현이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윤아는 멈칫하고는 양훈을 바라보았다.그는 목소리를 일부러 낮게 깔면서 말했다.“사랑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을 때 소영이가 그의 목숨을 구해줬어요. 그래서 어떤 감정인지 쉽게 혼동해요.”윤아는 이제야 양훈이 무얼 말하려는지 말 것 같았다.“그런가요?”그녀는 담담하게 웃었는데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보이지 않았다.이런 윤아의 모습을 본 후 양훈은 입술을 꾹 다물다가 나중엔 한숨을 내쉬었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알 거예요. 심하게 물에 빠진 뒤로 트라우마가 남았어요. 그래서 소영이 목숨을 구해준 게 수현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있었던 거예요.”“알아요.”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수현에겐 아주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후회되었다.그날 왜 그를 구하러 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도대체 무얼 하다가 현장에도 가지 않은 건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물에 빠진 후 크게 아팠던 것 같다. 만약 그때 수현을 구한 게 자신이었으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하지만 때론 이렇게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이 만약 다른 어떤 거에 쉽게 흔들리고 심지어 다가가기를 거부하는 거라면 그건 정말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그래서 시간을 조금 주라고 말한 거예요.”“시간을 왜 줘요?”그녀는 잘 몰랐다.“자기 마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에요.”양훈은 답했다.여기까지
윤아는 찬물을 한 웅큼 떠서 얼굴을 썼었다. 찬물이 닿으니 흥분되었던 감정도 많이 사그라지면서 조금 진정되었다.손을 세면대에 반쯤 짚고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아까 양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차분하게, 진지하게 마음으로 느껴보라고?뭘 느끼라는 거야.윤아는 아직도 잘 몰랐다. 아까 양훈은 정도껏 말했고 게다가 룸엔 사람들도 많으니 계속 물어볼 타이밍이 아니었다.그저 조금 터무니없었다. 양훈의 생각이 수현과 다르다는 것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았다면 양훈은 자신과 수현을 엮는 것 같았다.왜? 엮더라도 소영과 엮어야 하지 않나?이제는 생각하기도 귀찮아진 윤아는 티슈로 손을 닦고는 밖으로 걸어갔다.“소영아, 더 이상 슬퍼하지 마.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만 않았어도 수현 씨가 이렇게 널 대하지는 않았을 텐데.”익숙한 목소리에 윤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원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화장실 입구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보았다.강소영과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아까 윤아에게 손찌검하려고 했었던 주연도 있었다.친구들 사이에 서 있는 소영은 지금 낮은 소리로 흐느끼고 있다.“너 때문이 아니야. 넌 그저 입바른 소리를 해서 그렇지, 앙심 없는 거 알아. 수현 씨도 분명 알 거야. 다만... 지금 나에게 마음이 없는 것뿐이야.”이 말을 듣자, 주연의 얼굴엔 독기가 스쳤다.“다 심윤아 그 계집년 때문이야. 그년이 지금 자기가 공식적인 수현 씨 아내라는 것만 믿고 수현 씨 꼬신 게 분명해. 그렇지 않은 이상 수현 씨가 어떻게 너한테 이래. 소영아, 걱정하지 마. 우리가 반드시 되갚아줄게.”“됐어.”소영은 주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는데, 눈가엔 눈물을 머금고 있어서 그런지 더 애처로워 보였다.“오늘 나를 위해 나서는 바람에 이렇게 됐는데 너한테 더 민폐 끼칠 수는 없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수현 씨가 화 풀거든 내가 널 대신해서 사과할게.”“소영아, 우리 절친이잖아. 그러니까 이
소영의 친구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주연이 말로만 욕하면 했지 진짜 손찌검을 할 줄은 몰랐다.소영과 만나고 다니는 사람들은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집안 회사는 비록 강 씨네 그룹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유명했다. 그런 집안의 여식들이 교양 없는 짓을 하며 집안에 먹칠할 리가 없었다.그래서 밖에서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욕하고 심지어 손찌검을 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하지만 주연이 이렇게 충동적일 줄은 몰랐다.이 장면을 본 소영도 매우 놀라웠다. 윤아가 아주 싫었고 또 따끔하게 혼내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진짜 손찌검이라도 했다간 수현과의 관계가 더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방법은 한 번도 그녀의 계획에 없었다.소영은 이 장면을 보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말리려고 했다.하지만 앞으로 반걸음 나갔을 대 그녀는 멈췄다.왜 꼭 말려야 할까. 이런 다툼 속에서 윤아의 아기가 잘못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임신 초기일 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없애치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계속 남겨둔다면 끝내 화근으로 될 게 뻔했으니까.그리고 끝내 들통난다 해도 그녀가 직접 손을 쓴 게 아니니 염려될 건 없었다.생각을 정리한 후, 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너무 놀란 나머지 어쩔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그녀의 친구들은 정말 놀라서 일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윤아는 비록 빨리 물러나긴 했지만 머리를 잡히고 말았다.순간, 두피가 찢어질 것 같았다. 찌릿한 아픔과 함께 밀려온 것은 바로 짜증이었다.그녀는 의기양양해 있는 주연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정말이지 사람을 맞고도 가만히 있는 바보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윤아는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픔을 참으면서 사정없이 주연의 발가락을 밟았다.오늘 하이힐을 신지 않았지만 신발 뒤꿈치로 발가락을 밟아놓으면 꽤 아플 것이다.역시나 주연은 너무 아픈 나머지 고통스럽게 소리 질렀고 표정도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져 아주 추해 보였다. 윤아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
소영은 이마가 계단에 부딪는 순간, 자신이 과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냥 살짝 넘어지려고 했지 얼굴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얼굴을 감쌌지만 그래도 심하게 넘어져 버렸다.쿵!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고 급히 소영에게로 달려갔다.“소영아!”그녀의 친구들도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잇달아 다가갔다.이때 마침 룸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왔다.윤아는 그 자리에 서서 아까 손을 뻗었던 동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손바닥을 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분명 소영에게 닿지 않았는데... 어떻게 넘어진 거지? 발목을 삐끗했나?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수현과 선우도 여기에 도착했다.“왜 그래?”윤아는 드디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수현은 머리가 헝클어진 윤아를 보자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즉시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몸을 자신 쪽으로 돌리게 하였다.“너한테 손댔어?”이 순간, 윤아는 멍해 있으면서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수현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자신을 봤다는 점이 제법 놀라웠다.수현의 마음속엔 영원히 소영만 있는 줄 알았다.양훈이 마음으로 보라고 했던 말도 이 뜻이었을까.하지만 이 말을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저쪽에서 누가 수현을 불렀다.“대표님, 소영이 얼굴에서 피나요!”이 말을 듣자,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수현을 바라보았는데 마침 수현의 그윽한 눈동자에 푹 빠져들었다. 그도 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 속엔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윤아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으로 느껴보라고.그럼, 이번 한 번만, 딱 이번만 마지막으로 마음으로 느껴볼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순간 윤아의 동공은 미세하게 흔들렸고 한껏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그녀는 수현의 손을 한눈 보았다. 수현도 눈치챘는지 입술을 꾹 다물면서 결심한 듯 낮은 소리로 그
손을 뿌리치면서 밀친 게 소영이었다고?만약 정말 윤아가 밀친 거라면 소영이 너무 심하게 다쳤잖아.다들 조심스러운 눈길로 윤아를 바라보았고 윤아는 그저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수현이 소영을 훌쩍 들어 안고는 서늘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다른 일은 먼저 신경 쓰지 말고 병원부터 가자.”그는 소영을 안고 윤아를 스쳐 지나갔다.소영의 친구들도 모두 따라갔고 윤아 곁을 지날 때 주연은 심지어 의기양양해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해명할지 두고 볼게요.”이렇게 독설을 퍼붓고 주연은 절뚝거리며 따라갔다.전에 룸에 있던 사람들도 지금은 제법 머쓱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어쨌든 선우의 환영식인데 이렇게 망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선우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선우도 제법 젠틀하게 괜찮으니 먼저 돌아가라고, 나중에 시간 되면 다시 모이자고 했다.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그들도 더는 남기 난처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대부분 사람이 돌아갔을 때 윤아도 몸을 돌려 밖을 향해 걸어갔다.선우는 그런 윤아를 보자 손을 뻗어 막아 세웠다.“데려다줄게.”윤아는 그의 손을 밀며 말했다.“호의는 고맙지만 혼자 갈게.”이렇게 말을 끝내고 선우가 어떤 반응인지 신경 쓰지 않은 채 밖으로 걸어갔다.모퉁이를 지날 때 혼자 서있는 양훈을 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양훈은 말하려다가 말았으나 윤아는 그를 향해 웃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먼저 갈게요. 다음번에 시간 되면 다시 모여요.”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 참으며 양훈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조심해서 들어가요.”“고마워요.”양훈은 가녀린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며 끝내 사라질 때쯤 시선을 거두고는 허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 진짜 인연이 아닌 걸까.-저녁의 바람은 제법 세게 불었다. 얼굴에 닿으면 아플 정도로.윤아는 홀로 호텔 입구의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 거기에선 현아의 격분한 목소
심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쥐 죽은 듯한 정적이 이어지자 주현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그 여자가 전에 널 도와줘서 좋은 감정이 남아있는 건 알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환상 속에 너무 갇혀서는 안 돼. 모든 행동이 계획적이란 생각은 안 해봤어? 솔직히 도와줬다고 해서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건 아니잖아. 은혜를 갚지 말자는 뜻은 아닌데 나중에 보답할 기회를 찾자는 거야.”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그녀의 우울함을 단번에 알아차린 주현아는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오늘 밤 우리 집 올래? 내일 연차 써도 되니까 밤새 수다 떨까? 그러면 기분이 좀 풀릴 텐데.”“괜찮아.”심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할머니가 아직 집에 계셔서 얼른 돌아가야 해.”오늘 밤 일어난 일로 인해 심윤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양훈의 말을 듣고 실낱같은 환상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산산조각났다.누굴 탓하겠는가? 터무니없는 희망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호텔 입구에 앉아있지 말고 얼른 돌아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인데 넌 아예 추위를 못 느끼나 봐?”절친의 세심한 배려에 심윤아는 웃음이 터졌다.“응, 지금 바로 들어갈게.”주현아는 평소 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얼른 들어가. 집 도착하면 연락하고.”“알겠어.”전화를 끊은 심윤아는 곧바로 자리를 뜨는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찬바람을 느끼고 있었다.일기예보에서 오늘 밤부터 기온이 크게 떨어지고 찬 공기가 밀려오니 따뜻하게 입으라고 하더니만 정말로 그런듯하다.외출할 때만 해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추위에 벌벌 떨며 코를 훌쩍이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심윤아의 옆에 앉았다.따뜻한 코트가 몸을 감싸고 코끝으로 상쾌한 담배 냄새가 느껴지자 그녀는 눈을 떴다.“안 아파?”이선우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윤아 얼굴에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