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윤아의 뒤에서 들려왔고 잇따라 옅은 담배 냄새가 그의 청신한 향기와 어울려 은은하게 풍겨왔다.윤아는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5년이나 흐른 지금, 선우는 소년의 앳된 모습은 옅어지고 청년 남성의 중후함과 날카로운 느낌이 들었다. 살짝 올라간 눈썹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하얀 셔츠와 어두운색 슈트도 주름 하나 없이 말끔했다. 라이트 플로럴 계열의 넥타이에는 회색 넥타이핀도 끼워져있었는데 마침 윤아의 시선이 넥타이핀에 꽂혔다.5년이나 지났는데 이 넥타이핀을 아직도 갖고 있다니. 윤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윤아의 뜨거운 시선에 선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왜? 나 못 알아보겠어? 이 땅꼬맹아.”땅꼬맹이라는 말에 윤아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누구더러 땅꼬맹이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화가 잔뜩 나 빵빵해진 윤아의 볼을 보며 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잔뜩 부푼 복어 같이 굴면서 꼬맹이가 아니라고?”복어?윤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선우를 올려다봤다.“나 볼 때마다 별명 만들지 말아줄래?”“그래그래.”선우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한번 안아보자.”안아?윤아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몸을 숙이는 선우. 덕분에 옅게 맴돌던 담배 냄새가 점점 짙게 풍겨왔다.선우는 눈앞의 윤아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그의 코끝에 닿은 싱긋한 꽃향기에 그는 만족스러운 듯 두 눈을 꼭 감았다.오 년. 무려 오 년 만의 포옹이다. 오 년 동안 선우는 윤아를 품에 안을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가 출국하던 날 윤아가 배웅하러만 와줬어도 이렇게 기다리진 않았을 텐데.선우는 윤아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생생한 느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달되며 몸 곳곳에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공허했는데 아무래도 윤아를 놀라게 할까 봐 더 꽉 끌어안지 못한 탓인 듯싶었다.“꼬맹이. 많이 컸네
마음의 준비는 했다지만 수현의 주먹이 그에게 꽂혔을 때 선우는 수현의 거친 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수현은 주먹을 날리고는 남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곧바로 윤아의 손목을 붙잡고 자기 몸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경고 섞인 차가운 시선으로 윤아를 쳐다봤다.윤아:“...”아무 말도 안 했지만 수현의 표정은 이미 그녀에게 말해주는 듯싶었다. 정신이 있는 거냐고 없는 거냐고. 상대방이 안아오는 걸 왜 뿌리치지 않냐고 말이다.“쯧.”선우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우습다는 듯 수현을 한 눈 보고서야 입을 뗐다.“귀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큰 선물을 주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진수현?”익숙한 목소리에 수현이 잠시 멈칫하더니 시선을 돌려 선우를 바라봤다.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고 순간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방안을 맴돌았다.잠시 후 얼떨떨해하던 수현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듯 그늘진 얼굴로 서늘하게 운을 뗐다.“돌아왔구나.”선우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우아하게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내가 반갑지 않은가 보네?”수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검은 눈동자에 서린 불쾌함을 애써 누르며 서늘하게 말했다.“방금 뭐 하고 있었어?”그의 말에 선우가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윤아의 새하얀 얼굴을 한 눈 보고는 이윽고 수현과 눈을 맞추며 살짝 웃어 보였다.“윤아한테 우리 둘이 안고 있으면 진수현 네가 어떻게 나올지 보자고 했거든.”수현:“...”수현은 잠시 멈칫했다. 이윽고 그를 맴돌던 서늘한 냉기도 조금 수그러졌다.반응을 보려고 했던 거였다니. 수현은 설마 이선우가 윤아를...수현이 말이 없자 선우가 눈썹을 올리더니 말했다.“쯧. 네 반응이 이렇게 거셀 줄은 몰랐는데.”수현은 입을 앙다물더니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윤아의 손을 잡으며 그에게 말했다.“말도 없이 언제 왔어?”선우는 꼭 잡은 두 손을 한 눈 보고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늘 아침 비행
수현이 차갑게 대답했다.“갔어.”“혼자 갔어?”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하는 수현.“그럼 여기서 너 기다리겠어? 너 여기가 어떤 덴 줄 알기나 해?”윤아:“...”또다. 훈련병 훈계하는 듯한 이 말투. 매번 이런 식이지.윤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반박했다.“당연히 알고 있어. 그래서 뭐? 내가 가면 연수 씨가 내 업무를 다 봐야 할 텐데 미팅 같은 일은 같이 와서 봐줘야 하지 않겠냐고.”그녀의 말에 수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더니 말했다.“미팅을 이런 데서 해?”“그렇지 않으면?”수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뭐라고?”윤아는 안 그래도 오늘 밤 이강훈을 만난 걸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강훈이 윤아를 얕잡아보는 건 다 최근 수현이 소영을 회사에 드나들게 하는 바람에 회사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진 탓이 아닌가. 지금 사람들은 윤아를 수현이 버린 전처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나 윤아는 수현에게 신세를 진 게 있으니 그를 원망해서도, 원망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윤아를 모욕하던 인간들을 처리해 준 것도, 윤아의 아버지를 몰래 도와준 것도, 게다가 윤아를 회사에 데려와 많은 걸 가르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것도 모두 수현이였다.윤아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근데 왜...원망은 그녀도 모르는 새에 스멀스멀 자라나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증오의 꽃을 피웠다.윤아는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늘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누르며 수현과 소영을 미워하지 않도록 절제하고 참았다. 둘 다 그녀를 도왔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가끔 회사 사람들의 날 선 눈빛을 마주할 때면 참기 어려워지곤 한다.왜?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분명 할머님 수술만 무사히 마치면 다 끝날 걸 알면서. 윤아는 얼마 남지 않은 이 타이밍에 꼭 강소영을 회사에까지 데리고 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진수현이 미웠다.‘난 왜 널 좋아했을까. 그때 널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윤아의 이런 속마음을
돌아가는 차 안, 윤아와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현은 그늘진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는데 힘을 어찌나 세게 주는지 핸들이 뽑혀 나갈 것 같았다. 그는 차에 타기 전 윤아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였다.윤아가 그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선 아예 생각을 못 했었다. 때문에 오늘에야 수현은 뭔가 알게 된 기분이었다.그는 윤아를 힐끗 보았다.윤아는 차에 탄 후 몸을 웅크리고 마치 온 세상을 차단해 버리고 혼자만 남겨두려는 듯이 두 눈을 꼭 감았다.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윤아가 얼마나 자신을 증명해 내려 업무에 갖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수현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윤아의 그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수현은 연수의 전화를 받고 오는 길에 그녀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었다. 그러나 마지막쯤에 가서 연수는 말끝을 흐렸다. 그걸 그냥 놓칠 리 없는 수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캐물었고 윤아의 최측근답게 연수도 냉큼 말해줬다.“대표님. 그럼 화내지 말고 들으세요. 그리고 윤아 님한테 제가 말해드렸다고도 절대 얘기하지 마시고요.”미간을 찌푸리는 수현.“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얘기하죠.”“그럼, 저 말 해요?”연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이강훈 도련님이 윤아 님한테 일 열심히 하지 말라고 했어요. 대표님은 벌써 다른 여자를 회사에 들였으니 윤아 님은 곧 버려질 거라고요. 그리고 윤아 님은 집안도 망했으니, 그때가 되면 누구든 윤아 님을 함부로 대할 텐데 그래도 대표님은 절대 나서주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그 말에 수현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뭐라고요?”서늘한 목소리에 연수는 다급히 자기가 한 말이 아니라며 거듭 강조했다.수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현재, 그는 아직도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여 머리가 지끈거렸다.반 시간 후,별장에 도착한 수현은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웠다. 마침 몸을 웅크리고 있던 윤아도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
역시나 선월은 윤아를 기다리느라 여태 자지 않고 있었다. 윤아가 돌아와 그녀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서야 선월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네가 괜찮으면 됐어.”선월이 윤아의 손을 꼭 잡은 채 가볍게 두드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내 수술이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만약 잘 안된다면 더 이상 너흴 볼 기회가 없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이 나이 먹고 무슨 소원이 있겠냐만 이 할미는 그저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탈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선월의 말에 윤아의 표정이 바뀌더니 말했다.“할머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술은 꼭 성공적일 거예요. 할머님은 꼭 저희 곁에 오래오래 계셔야죠. 앞으론 그런 불길한 얘기는 하지 마세요. 또 그러시면 저 화낼 거예요.”윤아의 말투며 표정이 바뀐 걸 눈치챈 선월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날 걱정해 주는 건 우리 윤아가 제일이구나. 알겠다. 이 할미 꼭 오래오래 살아서 너희들 곁에 있으마.”선월은 빵빵하게 부푼 윤아의 볼을 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윤아 요것... 이 할미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비밀? 무슨 비밀이요?”윤아가 궁금한 듯 선월에게 다가가며 물었다.“수현이 그 자식 말이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글쎄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뛰쳐나가더구나. 어찌나 허겁지겁 가던지 이 추운 날에 외투도 안 걸치고 말이다.”윤아는 잠시 멈칫했다.선월이 수현을 대신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마 그녀도 요즘 윤아와 수현의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윤아가 말이 없자 선월이 넌지시 물었다.“저번에 싸운 일로 아직도 화해 안 했니?”윤아는 수현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기도 뭐해서 입을 앙다물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뇨. 이번엔 다른 일이에요.”“응?”선월을 설득하긴 쉽지 않을 게 뻔하니 윤아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는 어쩔 수 없이 적당한 핑계로 대충 둘러댔다.“업무상 의견충돌이 좀 있어서요...”그러나 쉽게 넘어가지 않는 선월. 그녀는 조금
하지만 결국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방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수현이 소파에 앉아있었다.조금 전 선월이 했던 말이 떠오른 윤아는 의식적으로 수현의 옷에 시선이 갔다. 선월의 말대로 그는 검은색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그와 어울리는 어두운색 계열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주위의 기운이 어찌나 우울한지 소파와 한 몸이 되어버릴 듯 파묻히고 있었다.오늘 있었던 다툼은 윤아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사실 부부랄것도 없이 둘은 그저 어릴 적부터 잘 지내오던 친한 친구다. 부부보다는 덜 가까운 그런 사이.부부라는 걸 배제하고 봤을 때 수현은 윤아에게 참 많은 도움을 줬었다. 그 때문에 윤아도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뭣 때문인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수현을 바라보던 윤아는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잠시 후 윤아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안방엔 이미 수현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고 다만 몇 통의 문자만 와있었다.윤아가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니 처음 보는 번호였다.「이거 내 번호니까 저장해. 땅꼬맹이.」윤아를 땅꼬맹이라 부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으니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윤아는 선우의 번호를 저장하고는 답장했다.「나 이제 키 컸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마침 선우도 핸드폰을 보고 있었던 건지 답장이 아주 빨랐다.「그럼 뭐라 불러?」「이름.」그녀와 선우 사이는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적당했다.「이름?」선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한참 후에야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그래도 되고. 그럼 앞으로 심공주라고 부를게.」심공주... 그 말에 윤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윤아를 심공주라 부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여태 수현밖에 없었다. 그것도 화가 났을 때 부르는 용으로 말이다.윤아가 답장하려고 할 때 마침 선우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됐어. 이렇게 부르는 걸로 하고. 난 이만 할 일이 남아서 이만. 잘 자고 내일 봐
어릴 때부터 수현과 윤아는 수많은 냉전을 거쳐왔지만 매번 둘 사이의 얼음을 먼저 깨는 건 수현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차가운 표정까지는 어찌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말이다.만약 이때 윤아가 고집스럽게 수현을 모른체 한다면 그는 아마 더 화가 나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녀와 얘기할 거다.생각 끝에 윤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응.”그제야 얼굴이 좀 펴지는 수현.아침 식사를 마친 후 윤아와 수현은 어김없이 함께 집을 나섰다. 윤아는 원래 스스로 운전 해서 출근할 생각이었으나 그녀가 차에 타기도 전에 수현이 차를 몰고 스르륵 다가왔다. 이윽고 창문을 내리더니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하는 수현.“타.”생각해 보니 저녁에 함께 모임에 갈 예정이니 윤아도 거절하지 않았다.둘은 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고 회사에 도착해서는 각자 갈 길을 갔다.윤아가 사무실에 들어서고 얼마 안 돼 그의 베프 현아가 보내온 문자를 받았다.「요즘 어때? 어르신 수술이 미뤄졌단 얘기는 들었어. 그럼 너희 이혼도 뒤로 미뤄졌겠네?」「응.」「그럼 수술은 얼마나 미루기로 한 거야?」「아직 모르겠어. 할머님은 아직 쉬고 계시니 아무래도 할머님 뜻에 따라야겠지.」「...」의미심장한 점 세 개. 윤아는 단번에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내 걱정은 하지 마. 알아서 잘할게.」윤아의 문자를 끝으로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지만 바쁜 일이 있겠거니 하고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마침 그때 서류를 한 무더기 들고 나타나는 연수.“윤아 님.”연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윤아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어젯밤 대표님과는 별일 없으셨어요?”“별일 없었어요.”“다행이네요.”연수는 들고 있던 서류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어젯밤 연수는 택시에 탄 후 바로 떠나는 대신 밖에서 윤아가 나오기를 기다렸었다. 이윽고 윤아와 수현이 함께 나오는 모습을 봤는데 둘은 곧장 떠나는 대신 길가에서 한참을 대화를 나눴었다. 그러다
현아의 목소리가 손쓸 새도 없이 방에 가득 울려 퍼졌다. 윤아가 황급히 핸드폰을 꺼버리려고 했으나 이미 현아의 음성메시지는 자동으로 재생된 이후였다.윤아:“...”현아가 급한 업무를 마치고 돌아와 평소처럼 또 사장님 욕이라도 하려는 건 줄 알았는데 아직도 윤아의 일에 관해 얘기할 줄이야.그때 윤아는 문득 뭔가 떠오른 듯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문을 열어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는 복도를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연수에게 문을 잘 닫고 나가라 당부했으니 아마 문밖에서 서성이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조금 전 음성메시지도 듣지 못했겠지.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윤아는 몇 걸음 더 걸어나가 주위를 살핀 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야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바로 전에 현아의 메시지를 삭제하고 그녀에게 한 소리 해줬다.윤아가 화를 내자 현아는 방금은 너무 흥분해서 그런 거지 다음부터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눈치 빠르게 사과했다.윤아와 현아가 한창 문자를 주고받던 그때,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비상계단에는 일남일녀가 서로 마주 본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성민과 연수 모두 표정이 가관이었는데 성민은 웃던 그대로 경직되었는지 웃는 것도 안 웃는 것도 아닌 괴상한 표정이었고 연수는 눈이며 입이며 동그랗게 커져 계란 하나 정도는 거뜬히 삼킬 것 같았다.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일 분 정도 지나자 그나마 진정이 빠른 성민이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는 말을 꺼냈다.“저희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어요?”연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네?”“제 말은 그니까 저 방금 심 비서님 사무실에 간 적 없죠?”연수:“...”연수의 표정을 보고서야 성민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었다. 지금 눈앞의 연수와 자신이 얼떨결에 알면 안 되는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것이다.잠시 후 성민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심 비서님 아이 아무래도 저희 대표님 아이겠죠?”아직 충격에서 빠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