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무언가 떠올린 주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근데 오늘은 안 돼. 도착하면 밤일 테니까.”국제선 비행기는 비행시간이 길기 때문에 주현아도 오늘 윤아를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도착할 때쯤은 아마 한밤중일 것이기에 공항 근처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윤아와 가족을 만날 계획이었다.“밤이라고?”주현아게게 항공편 번호를 물은 뒤 검색해 보았다.“그럼 밤에 내가 데리러 갈게.”“에이, 괜찮아.”주현아는 즉시 윤아의 제안을 거절했다.“도착하면 한밤중이야. 네가 푹 자고 있을 때란 말이지. 우린 내일 보자.”윤아는 그녀의 다급해하는 모습에 피식 웃고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나 이제 탑승 준비해야 하니까 내일 전화할게.”“알겠어. 조심히 와.”전화를 끊자 곁에 있던 허연우가 다가와 물었다.“현아 씨, 친구예요?”주현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네. 오래전부터 친했던 친구요.”“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냈어요?”“네.”허연우가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좋겠어요. 전 학창 시절 때 친했던 친구들이랑 이제 연락도 잘 안 하고 지내요.”주현아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다 그렇죠. 저도 연락은 끊긴 지 오래고 이 한 명뿐이에요.”너도나도 사회에 들어서고 직장을 찾은 후엔 누가 옛날 학창 시절 친구를 여태 기억하고 있겠는가. 특히 결혼하고 나면 주변 친구들도 바쁜 일들로 만날 시간도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가끔 기억하거나 명절에 덕담 한마디씩 건네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두 사람은 이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탑승수속을 밟은 이후에는 각자의 길로 갔다.같은 좌석을 사지 않은 데다 목적지가 달랐다. 주현아는 인근 호텔에서 자고 허연우는 가족들이 데리러 올 예정이었다.하여 두 사람은 함께 있지 않기로 했고 주현아는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근처 호텔에서 샤워 후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이번 비행기는 좌석이 불편한 데다 장기 비행이었다. 환승할 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기내식이 입에 맞지 않았기에
윤아의 말에 주현아는 멍하니 있었다. 아마 윤아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공항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한참 가만히 있던 주현아가 입을 열었다.“이 밤중에 왜 깨어있어? 푹 쉬고 내일 만나자니까.”“친구가 귀국하는데 어떻게 마중도 안 나가?”휴대폰 건너편의 윤아의 목소리가 신이 나 있었다.순간 주현아는 가슴이 뭉클해져 눈시울을 붉히었다.“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얼른 와! 기다리고 있을게.”“하, 정말... 오지 말라고 분명 말했는데 이 밤중에 잠도 안 자고 마중 나왔다네요.”허연우는 그저 그런 친구를 둔 주현아가 부럽기만 했다.“좋겠어요. 그럼 우리 차 안 타도 되겠네요. 저도 걱정할 필요 없고요.”허연우는 정말로 진심 어리게 자신을 관심하고 있었다.“걱정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연우 씨도 얼른 돌아가 봐요. 가족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면 안 되잖아요.”“네. 그럼 나중에 시간 나면 연락해요.”“알겠어요.”허연우와 헤어진 후, 주현아는 자리에서 크게 심호흡한 후 짐을 찾으러 갔다.이번에 일을 그만두고 집을 향하는 길이기 때문에 짐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우회하여 짐을 찾아야 했다.짐을 찾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에 주현아는 다시 전화를 꺼내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윤아는 걱정 말고 짐을 찾으라며 살가운 답장을 보내왔다.이에 주현아가 물었다.“혼자 왔어?”“아니.”주현아는 그제야 안도했다. 이 늦은 밤중에 누군가 옆에 있으면 되었다. 윤아의 출중한 외모 때문에 나쁜 남자와 맞닥뜨려 사고가 생길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주현아는 뜻밖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착륙했어요?”몇 번을 확인해도 배주한이 보낸 메시지가 확실했다. 주현아는 이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채팅창을 닫고 개인 메시지를 여러 번 확인하기까지 했다.몇 번을 살펴본 후에야 배주한이 확실히 자신에게 보낸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주현아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두뇌 회전이 빨랐다.어쨌든
주현아도 얼른 윤아를 껴안았다.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었기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끌어안고 있었다.이 세 사람의 외모가 하도 출중했기에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그들을 바라보았다.수현은 서로 정겹게 껴안고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참고 또 참다가 마지막엔 결국 입을 열었다.“그만 안아도 되지 않나? 시간도 늦었는데.”“...”주현아가 어이가 없어 수현을 째려보았다.비록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윤아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아는 빙그레 예쁘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신경 쓰지 마. 이 사람 질투쟁이라서.”이에 주현아가 놀리듯 응답했다.“그래.”“오늘 기내식이 별로였어? 배고프면 같이 뭐 먹으러 갈까?”“아냐. 괜찮아.”주현아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내저었다.“이렇게 늦었는데 어떻게 그래. 마중 나와준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 호텔까지만 데려다주면 돼. 호텔에 도착하면 밖에 슈퍼에서 라면 좀 사다 먹으면 돼.”그녀의 말에 윤아가 눈살을 찌푸렸다.“라면을 먹는다고?”주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라면이 영양가가 있어? 그런 걸 왜 먹어?”“어차피 한 번인데 뭐 어때.”잠시 생각에 잠긴 윤아는 자신의 이중잣대에 깜짝 놀랐다. 자신이 라면을 먹는 것은 괜찮지만 절친이 한 끼 식사로 라면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영양가도 없고 건강에 좋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안 돼. 얼른 차에 올라타. 같이 뭐 좀 먹게.”주현아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결국 윤아에 의해 차에 태워졌다. 결국 두 사람의 의논 끝에 식당에서 콩국을 마시기로 했다.밤인 데다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선택지는 생각보다 적었다.수현은 콩국에 관심이 없었지만 윤아가 좋아하니 어쩔 수 없이 제 것도 주문했다.콩국이 진한 향기를 풍겼다.한 모금 크게 마신 주현아는 만두 두 개를 더 먹고 나서야 허기진 배가 조금 채워지는 것 같았다.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았기에 윤아는 줄곧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걱정했다.윤아가 주현아
만약 윤아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더라면 자러 가라는 제안을 할 때 얼른 그러겠노라 대답할 것이다.하지만 이제 결혼도 했고 혼자 사는 집도 아닌데 아무런 심리적 부담 없이 간다는 건 예의가 없는 것이다.하여 주현아는 가장 먼저 무의식적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이를 본 윤아가 물었다.“이 사람은 왜 봐?”말을 마친 윤아가 주현아의 시선을 따라 수현을 바라보았다.“설마 승낙 안 해주는 건 아니지?”아내의 시선에 수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말했다.“내가 어떻게 승낙을 안 해줘. 가자. 운전기사에게 전화해서 도우미한테 준비하라고 해야지.”주현아는 조금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짠돌이에 질투쟁이인 그가 승낙할 줄은 몰랐다.윤아는 신이 나서 주현아를 껴안았다.“그럼 오늘 밤은 너랑 자야겠다!”주현아는 난처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차에 오른 뒤 윤아와 함께 뒷좌석에 타던 수현은 주현아의 등장으로 조수석으로 밀려나게 되었다.조수석에 홀로 쓸쓸히 앉아 있는 수현의 얼굴은 흐려져 있었다.하지만 윤아에게 있는 단 한 명의 절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다 넓은 아량으로 품어주어야 할 상황이기에 불쾌한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그날 밤 주현아는 윤아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도우미가 평소에 자주 청소했기에 객실도 깨끗하고 이불도 새것으로 갈아져 있었다.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온몸의 피로를 씻은 후에야 주현아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보드라운 살결에 피부는 연분홍색이었다.그녀가 나왔을 때 윤아가 침대에 누워있었다.“윤아?”“샤워 끝났어?”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누운 윤아는 주현아가 나오자마자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같이 자겠다는 것이 그저 지나가는 말이라 생각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다이라 해도 수현이 허락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그런데 윤아가 정말 함께 자려고 왔을 줄이야.”“왜?”주현아가 제자리에 선 채 자신을 응시하자 윤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정신을 차린 주현아가 침대
윤아는 잠자코 듣다가 가끔 그녀가 필요로 할 때 한마디씩 대답하곤 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현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한번 화면을 힐끗 보니 발신자가 뜻밖에도 배주한이었다.“?”지금이 어느 땐데 이 시간에 전화를 건다고? 배주한은 밤에 잠도 자지 않는 건가?아니다.다시 생각해 보니 그가 있는 쪽은 낮이었다.주현아은 한번 크게 심호흡한 뒤 윤아에게 말했다.“전화 좀 받고 올게.”“응.”“여보세요? 대표님?”주현아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받아버렸으므로, 이렇게 빨리 통화가 될 줄 몰랐던 배주한은 침묵을 지켰다.소리를 듣지 못한 주현아가 휴대폰을 멀리 가져갔다 다시 귀에 대기를 반복하며 낮게 중얼거렸다.“설마 전화를 잘못 거신 건 아니죠?”배주한이 입을 열려고 할 때 곁에서 또 다른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누구야?”놀라운 기억력으로 배주한은 그 목소리를 단번에 기억해 냈다.처음에 주현아와 함께 찾아갔던 그 여인의 목소리, 바로 윤아였다.이제보니 메세지에 답장을 하지 않은 것도 절친과 만나 기뻐서 그만 잊었나보다.배주한은 마음속으로 그녀를 위해 핑곗거리를 찾아주었다.“쉿.” 주현아가 검지로 입술을 가리며 윤아에게 말하지 말라며 제스처를 취하자, 윤아가 입을 틀어막았다.이후 주현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대표님?”배주한이 그제야 짧게 대답했다.“네.”“조금 전엔 신호가 안 좋았나요? 대표님 목소리가 안 들렸어요.”“네. 신호가 잘 안 잡히나 보네요.”배주한이 담백한 목소리로 물었다.“호텔에 도착했어요?”“아니요, 오늘 밤은 친구 집에서 묵으려고요. 혹시 업무상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배주한이 한참 침묵을 지켰다. 주현아는 그의 한숨 소리를 들은듯했다.“네. 있었죠. 그런데 시차가 많이 나니 그냥 그만두는 거로 하죠.”“...”주현아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끊겠습니다.”배주한이 곧 전화를 끊었다.가차 없이 끊긴 전화에 주현아는 어이없어하며 폰을 집어던지고 윤아에게 투덜거리기 시작
주현아는 두 사람의 카톡 채팅 기록을 보여주려고 했다.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온 절친이었기에 숨길 것도 없었다.자신을 향해 화면을 비추자 윤아는 자연스럽게 주현아 쪽으로 몸을 돌려 폰을 바라보았다.채팅을 확인한 윤아가 입을 열었다.“마지막 메시지에 답장을 안 했네.”보여줄 때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현아가 윤아의 말을 듣고서야 휴대폰을 다시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채팅창에는 그녀가 관심해줘서 고맙다는 답장 외에 배주한에 나중에 보낸 메시지도 있었다.“안전에 주의하고 호텔에 도착하면 말해줘요.”그 후 긴 시간 동안 주현아는 답장하지 않았다.짐을 챙겨 급히 윤아를 찾아갔고 그 이후엔 야식, 그 이후엔 샤워, 그 이후엔 윤아와 이야기를 하느라... 이제 본 것이다.“일에 관해 물은 건 그냥 핑계인 것 같은데. 제일 중요했던 건 네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그녀의 말에 주현아가 고개를 들어 윤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왜 내 안전을 확인하고 싶어 해?”너무 이상했다.“음.”윤아가 눈을 감으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그분 밑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게다가 평소에 항상 같이 일했잖아. 사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냉혈한은 아니니까 오래 함께한 직원이 회사를 그만뒀고 또 한밤중에 착륙이니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안전조차도 확인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 차가운 사람이라는 거야.”윤아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던 긴장감도 사라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비볐습니다.“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럼 이제 성가시게 할 일은 없겠지.”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으므로 화제는 빠르게 전환되었다. 윤아는 그녀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니 그녀와 수현에 관해 묻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가 막 입을 열었을 때, 주현아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현아야?”윤아가 불러보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주현아의 가벼운 숨소리뿐이었다.어쩔 수 없지.
"윤이?"한 마디를 외친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윤이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리곤 여전히 늑장을 부리며 물었다.“지금 몇 시길래 윤이가 집에 왔어?”“엄마, 벌써 12시예요.”“열두...”몰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윤아가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엄마?”“벌써 12시라고?”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바라보니 주현아가 자고 있어야 할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현아?”“엄마, 현아 아줌마 찾아요?”“응. 어디로 갔는지 알아?”윤아가 물으며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현아 아줌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할머니랑 이야기 나누는 것 같아요.”“일찍 일어났어?”윤아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주현아가 일어나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거야?기분이 언짢아진 윤아가 입술을 짓씹었다.“그럼, 일 층에 내려가 봐야겠다.”그녀가 나가려 하자 윤이가 다리를 붙잡으며 투정 부렸다.“엄마, 안아주세요.”윤아는 허리를 굽혀 아이를 안아 올렸다.아래층으로 내려가 주현아를 찾으려던 그녀는 문을 나서자마자 수현과 마주치게 되었다.수현은 윤이가 몸도 약한 윤아에게 안겨 있는 것을 보곤 손을 내밀었다.“윤이, 아빠가 안아줄게.”엄마의 품을 특히 좋아하던 윤이는 아빠가 손을 내밀자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겼다.수현의 품에 안긴 윤이를 보고서야 마음을 놓은 윤아가 그에게 말했다.“그럼 아이는 네가 안고 있어. 난 아래층 내려가 볼게.”그녀가 수현의 곁을 지날 때 그가 윤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친구 찾으러?”“응. 오늘 일찍 일어났대.”“이미 갔어.”발걸음을 옮기려던 윤아가 자리에 우뚝 섰다.“갔어?”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냥 이렇게 갔다고? 나한테 말도 없이?”서운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수현이 마지못해 한숨을 쉬었다.“말하고 싶어 했는데 네가 잠을 너무 잘 자는 바람에.”“...”그의 말이 윤아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어이가 없어 한참 피식 웃던 윤아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내가 잠을 잘 자
하필 사고뭉치 아이가 윤아의 말을 듣고 손뼉 치며 기뻐할 줄이야.“좋아, 좋아요. 게으른 돼지엄마랑 게으른 돼지아빠.”“...”윤아는 침묵을 지켰다.수현은 딸이 지어준 별명에 아무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듯 기뻐하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윤이 대단하네. 이렇게 어린데 벌써 별명 지어줄 줄도 알고.”“...”윤아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현이 딸아이 때문에 콩깍지가 지나치게 씌워져서 이런 듣기 싫은 호칭도 칭찬하는 것이 아닐까.“아빠 이거 좋아해요?”윤이의 관심이 순식간에 수현에게로 옮겨졌고 아이는 아빠에게 별명을 지어주는 온갖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곁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윤아는 황당했지만 부녀가 노는 모습이 예쁘긴 했다. 윤이는 특히 아버지의 어깨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를 좋아했으며 수현도 딸바보처럼 헤벌쭉해서 즐기고 있었다.그들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저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에이, 고작 몇 개 듣기 싫은 별명을 지어준 것뿐인데. 다른 말썽꾸러기 아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긴 했다.금방 이해심이 넓어진 윤아는 한참 서 있다가 그제야 수현의 재촉에 정신을 차렸다.“먼저 내려가서 밥 먹어. 바보처럼 서 있지 말고.”“이미 먹었어?”“응.”“오케이. 그럼 먼저 갈게.”계단을 내려가기 전 윤아는 자신의 휴대폰도 잊지 않고 챙겼다.그녀가 계단을 내려오자 도우미가 주방으로 데리고 간 후 미리 준비한 음식을 올렸다.“감사합니다.”자리에 앉아 식사를 마친 뒤 휴대전화를 꺼내든 윤아는 마침 주현아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윤아야, 너 너무 잘 자더라.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먼저 갈게. 일어나면 연락해. 쪽.”메시지를 확인한 윤아는 이 메시지를 보낼 때 주현아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짐작이 가는 것 같았다. 윤아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장을 보냈다.“나 깼어.”답장을 보낸 윤아는 얼른 전화를 걸었다.주현아는 빠르게 연락을 받았다.“빨리 깼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