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미러로 고정재의 외로운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나의 건강이 좋지 않아도 당신은 날 가여워할 자격이 없다고요.”다른 사람은 날 가여워해도 고정재와 고현성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연씨 별장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나는 씻은 후 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선양 그룹에서 올린 영상이 맨 위에 있었고 이런 댓글이 눈에 띄었다.[때린 게 사실인데 이유가 필요해요?]처음으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정면으로 맞섰다. 게다가 아주 강경한 태도로 말이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대성 그룹에서도 묵묵히 리트윗하고 있었고 같은 문구를 덧붙였다. 그리고 작은 기업들에서도 리트윗했다.선양 그룹과 대성 그룹에서 입장을 밝혔으니 다른 기업들도 우리에게 잘 보이려면 줄을 잘 서야 했다.그들은 전부 상업계에서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이라 머릿속엔 이익뿐이지 진실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다.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야말로 옳다고 생각했다.강해온에게 댓글을 쓰라고 할 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대성 그룹이 이 일의 성공에 박차를 가했을 뿐.여론이 한순간에 기울기 시작했다. 이젠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이 영상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기업들이 다 선양 그룹의 편을 들고 있어요. 영상 속 이 여자 연기한 거 아니겠죠?]의심의 목소리가 한 번 나타나자 뒤이어서 봇물 터지듯 터졌다. 임지혜는 아무런 이득도 보질 못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고현성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그렇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현성은 한 번도 임지혜를 위해 나서지 않았고 어젯밤에도 경찰서에서 나만 데리고 나갔다.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한가지 가설이 있긴 했는데 바로 고현성이 날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만약 이 가설이 성립된다면 고현성이 이젠 임지혜를 싫어하게 되었고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섣달그믐날 전에 고현성이 날 찾아와 재결합하자고 했었다. 임지혜가 자살 소동만 벌이지 않았더라면 임지혜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하지도
하지만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표현해주었다. 사실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만약 그때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고 고정재와 결혼하고 이렇게 다정한 시아버지까지 만났더라면... 내 결혼 생활은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만약이라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괜찮아요. 다 해결할 수 있어요.”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고승철도 내 성격을 알고 있어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현성이 오늘 심리 상담받고 왔어.”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네?”“개인적으로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봤는데 현성이 지금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대. 그러니까 기억 속엔 네가 없는데 사람들이 자꾸만 현성이 과거에 수아 너뿐이라고 하니까...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긴 하지만 좋은 방법이 없어.”또 고현성의 좋은 얘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현성이 너보다 8살 많아. 널 당연히 엄청 예뻐했었어야 했는데... 그동안 상처 주게 해서 미안해... 수아야, 만약 가능하다면 편견을 내려놓고 현성이를 다시 알아가는 건 어떨까? 현성이 참을성 있고 쉽게 뜻을 굽히지 않는 남자야. 걔 사랑을 받은 여자는 행복할 거야. 너한테도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어.”나는 임지혜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수아 씨 앞으로 알게 될 텐데 사실 현성이 정이 깊은 사람이에요. 현성이의 마음에 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근데 눈 밖에 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가 될 거고요. 왜냐하면 수아 씨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아주 매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이젠 고승철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필요하지 않았고 게다가 고현성은 나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조금 전의 가설은 정말 말 그대로 가설이었다.내가 진지하게 말했다.“아버님,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그래도 두 사람이 다시...”고승철의 목소리에 기대가 가득
나는 재빨리 일어나 잠옷을 입고 침대 옆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남자 앞에 섰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고현성뿐이었다. 고정재는 절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고현성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내가 온 게 싫어?”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 나는 불쾌함을 참으면서 되물었다.“날 잊었다면서 우리 집 비밀번호를 기억해요?”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선을 그었다.“본론만 얘기해요.”고현성이 가만히 서서 말했다.“난 숫자에 예민해. 머릿속에 들어온 숫자는 잊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그리고 내가 잊은 건 너지, 너희 집 비밀번호가 아니야. 게다가 1227은 정재 형 생일인 것 같은데.”아무렇지 않게 고정재 얘기를 꺼내자 내가 불쾌함을 드러냈다.“함부로 추측하지 말아요. 고정재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그러자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다시 물었다.“관계가 없다고?”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무슨 관계이길 바라는데요?”고현성이 어두운 얼굴로 나의 손목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둘이 무슨 관계든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넌 앞으로 내 사람이야. 아무도 널 빼앗아가지 못해.”“허.”내가 코웃음을 쳤다.“어디서 잘난 척이에요? 고현성 씨, 우린 아무 사이 아니에요. 무슨 사이라고 해도 당신은 날 단속할 자격이 없어요. 차라리 가서 임지혜 씨나 단속하지, 그래요?”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았다.방안의 불빛이 어두웠다. 고현성이 나를 벽에 힘껏 밀어버린 바람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남녀 사이의 힘 차이를 제대로 느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난 진심으로 널 사랑해.”운성시로 돌아와서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나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날 잊었다면서요.”고현성의 숨결이 나의 얼굴에 고스란히 닿아 간질거렸다. 그는 나의 입술을 깨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응, 잊었어. 근데 널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고승철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3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은 고현성이었고 고현성은 내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이제 두 남자 모두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던 그 추억을 가슴속에 묻고 다시는 꺼내지도, 기대하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나는 갑자기 운성시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운성시로 돌아오고 나서 나를 더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기만 했을 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기분이 우울해져 두 눈을 꼭 감았다.‘왜 이렇게 뒤죽박죽이 됐지? 고정재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왜 머릿속에는 고현성만 떠오르냐고...’나는 입술을 깨물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운성시에 한시도 있을 수가 없었다.‘일단 나가서 피해있자.’이튿날 아침 나는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갔다. 상주시로 간 게 아니라 어머니의 고향인 동성시로 갔다.동성은 운성의 옆 도시라 날씨가 비슷했다. 오늘도 구름이 많은 흐린 날씨였다. 나는 호텔을 잡고 반경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반경우는 나의 친구였는데 너무 친한 사이는 아니어도 그래도 나름 가까웠다. 예전에 나에게 동성으로 오면 연락하라고 했었다.나의 전화를 받은 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동성에 왔어?”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응. 그래서 연락했어.”반경우도 나처럼 팔자가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은 항공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도 그때 그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다...우리 둘은 그해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 후 몇 번 만났었다.“잠깐만 기다려. 데리러 갈게.”“아니야. 먼저 둘러보고 있다가 저녁에 찾으러 갈게.”나는 전화를 끊은 다음 코트를 챙기고 근처 오래된 마을로 향했다. 아침에 비가 내려서 마을 전체에 안개비가 자욱했다. 그런데 금운의 오래된 마을보다 예쁘진 않았다.금운의 오래된 마을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예뻤다. 그곳은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예를 들어 눈사람도 그곳에서 만들었고 고현성의 따뜻함도 그곳에서 느꼈
[난 더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이 문자를 보낸 후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더는 복잡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고 과거로 자신을 가두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 짧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설령 나를 가여워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날 예뻐해 준다면, 사랑을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만 해준다면 다 괜찮았다.나는 휴대전화를 넣고 오래된 마을에 저녁까지 있었다. 외곽이라 그런지 저녁이 되니 칠흑같이 어두웠고 거리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자 혼자서 다니려고 하니까 조금 무섭기도 했다.나는 재빨리 택시를 잡았고 가는 길에 반경우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자기야, 어디야?”평소 반경우와 연락을 자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여자 마음을 참 잘 달래주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나의 기분을 생각해주었다. 이 또한 내가 동성에 오자마자 그에게 가장 먼저 연락한 이유였다. 반경우는 나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고 마침 나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도 사랑이었다.어차피 살날이 제한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대답했다.“택시 안이야.”“그래? 위치 보내봐봐.”반경우는 할 얘기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때 최희연이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어디야? 오늘 운성에 왔거든. 만나자.]나는 바로 답장했다.[나 지금 동성이야.]나는 택시 운전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후 돈을 낸 다음 길옆에서 반경우를 기다렸다.동성의 날씨가 조금 쌀쌀하여 코트를 입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최희연이 캐물었다.[동성 어딘데?]나는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물었다.[자세한 위치는 알아서 뭐 하려고?][너 혼자 있는 게 걱정돼서 그러지.]최희연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호텔 주소를 그녀에게 보냈다.잠시 후 반경우가 도착했다. 검은색 벤틀리를 타고 왔는데 라이트 때문에 눈이 다 부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차에서 내린 반경우가 나의 어깨를 잡고 장난쳤다.“내
반경우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차에 올라탄 후 그에게 물었다.“어디 가?”그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알아맞혀 봐.”나는 두 손을 펼쳐 보였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맞혀?”반경우는 차 문을 닫고 운전석에 탔다. 가까이 다가와 안전벨트를 해준 후에는 또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아버지가 얼마 전에 또 내가 만나던 여자를 도망가게 했어.”나는 사실을 콕 집어 말했다.“도망가지 않아도 그 여자랑 결혼하지 않을 거면서.”반경우는 옆에 여자가 없었던 적이 없었고 심지어 누구에게도 다 친절했다. 그런데 가장 매정하고 잔인한 사람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사이였더라도 결혼 얘기만 나오면 바로 가차 없이 차버렸다.반경우가 나에게 물었다.“결혼이 재미있어?”나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가정을 이루는 게 재미있긴 해...”반경우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너처럼 이렇게 이혼해도?”나는 말을 잇지 못했고 더는 반경우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동성시의 유명한 유흥가로 데리고 왔다.불빛이 번쩍이는 게 아주 번화했다. 반경우는 나의 손을 잡고 어느 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무대 위에 춤을 추는 젊은 남녀들이 가득했다.종업원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자리를 안내했고 반경우는 술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간 후 반경우가 웃으며 물었다.“연수아, 이런 데 처음 와보지?”나는 궁금해하며 물었다.“어떻게 알았어?”평소 늘 정직하게 살았고 선양 그룹을 물려받은 후에는 집, 회사, 식당뿐이었다. 고현성과 결혼한 후에는 고현성과 회사만 신경 쓰느라 이런 곳에 발도 디딘 적이 없었다.“너 엄청 궁금한 게 많은 것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잖아.”반경우가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긴장해 하지 마. 내가 여기 있으니까 마음껏 놀면 돼.”그때 종업원이 술을 가져왔다. 반경우가 술을 건네자 나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안 돼. 맨날 약 먹어서 의사 선생님이 술 마시지 말라고 했어. 술은 네가 마셔. 난 보기만 하면 되니까.”반경우는
아주 가벼운 키스였다.나는 놀란 두 눈으로 반경우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나와 연애하면서 날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물론 나중에 다른 여자를 떠났던 것처럼 언제든지 날 떠나도 되었다.내가 물으려던 그때 반경우가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잠깐 쉴 수 있는 뗏목이라도 찾은 것만 같았다.반경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날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아주 매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가 웃으면서 보자 반경우가 얼굴을 어루만졌다.“술맛 어때?”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술을 먹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반경우는 아무 말도 없다가 나를 데리고 술집을 나왔다.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나의 모습에 반경우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웃었다.“순진하긴. 자기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내가 물었다.“뭔데?”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해주고는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오히려 그의 진지한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대체 뭔데?”반경우가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나랑 키스한 느낌이 어땠어?”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를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동성으로 온 목적이 반경우였으니까.우리는 식사하러 한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근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반경우는 늘 똑같은 삶을 보냈고 나에게 앞으로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당분간은 운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그곳에는 만나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가 갑자기 말했다.“조민수 연락처 알려줘.”나는 컵을 잡고 물었다.“그건 왜?”“내가 교수님을 몇 분 아는데 자궁암에 관해서 연구가 깊어. 소개해주려고.”잠시 후 반경우가 갑자기 화를 냈다.“이 세상에 너보다 더 어리석은 애도 없을 거야. 남자 하나 때문에 널 이렇게까지 망치다니. 그나저나 고정재는... 포기할 거야?”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을 반경우에게 다 말했다. 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반경우가 여유롭게 물었다.“이유는?”“다른 사람한테 사랑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고 싶어. 가짜여도 상관없어.”지금까지 연애하고 싶은 이유가 늘 이것이었다.가로등이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반경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이 녀석아, 사랑받고 싶으면 그 사랑 내가 주면 되잖아. 근데 너랑 연애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난 평등한 사랑을 원하는데 네 마음속에는 내가 없잖아...”반경우가 절대 나를 거절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거절당했다. 그는 나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이렇게 말했다.“난 널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어. 그리고 남자 친구처럼 연애도 하고 결혼할 수도 있고. 근데 넌 날 사랑해?”줄곧 비혼주의자라고 했던 반경우가 나와는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고 내가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이었다.나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미안. 내가 괜한 말 했어.”반경우는 시선을 늘어뜨렸고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일찍 쉬어. 내일 보자.”반경우가 떠난 후 나의 기분은 계속 복잡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것만 같았다. 그가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경우에게 문자를 보냈다.[날 사랑해?]날 사랑한다면 바로 동성시를 떠날 생각이었다. 반경우가 답장을 보냈다.[아직은 아니야.]진짜인지 확인할 수 없는 답장을 보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던 그때 길가에 서 있는 검은색 벤츠를 발견했다. 차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내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남자는 싸늘한 얼굴로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반경우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연수아, 거리를 누비면서 연애할 남자는 찾으니까 즐거워?”‘내가 즐겁냐고?’고현성이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나는 연애할 남자를 찾았지만 또 그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게 두려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