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표현해주었다. 사실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만약 그때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고 고정재와 결혼하고 이렇게 다정한 시아버지까지 만났더라면... 내 결혼 생활은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만약이라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괜찮아요. 다 해결할 수 있어요.”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고승철도 내 성격을 알고 있어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현성이 오늘 심리 상담받고 왔어.”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네?”“개인적으로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봤는데 현성이 지금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대. 그러니까 기억 속엔 네가 없는데 사람들이 자꾸만 현성이 과거에 수아 너뿐이라고 하니까...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긴 하지만 좋은 방법이 없어.”또 고현성의 좋은 얘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현성이 너보다 8살 많아. 널 당연히 엄청 예뻐했었어야 했는데... 그동안 상처 주게 해서 미안해... 수아야, 만약 가능하다면 편견을 내려놓고 현성이를 다시 알아가는 건 어떨까? 현성이 참을성 있고 쉽게 뜻을 굽히지 않는 남자야. 걔 사랑을 받은 여자는 행복할 거야. 너한테도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어.”나는 임지혜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수아 씨 앞으로 알게 될 텐데 사실 현성이 정이 깊은 사람이에요. 현성이의 마음에 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근데 눈 밖에 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가 될 거고요. 왜냐하면 수아 씨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아주 매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이젠 고승철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필요하지 않았고 게다가 고현성은 나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조금 전의 가설은 정말 말 그대로 가설이었다.내가 진지하게 말했다.“아버님,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그래도 두 사람이 다시...”고승철의 목소리에 기대가 가득
나는 재빨리 일어나 잠옷을 입고 침대 옆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남자 앞에 섰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고현성뿐이었다. 고정재는 절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고현성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내가 온 게 싫어?”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 나는 불쾌함을 참으면서 되물었다.“날 잊었다면서 우리 집 비밀번호를 기억해요?”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선을 그었다.“본론만 얘기해요.”고현성이 가만히 서서 말했다.“난 숫자에 예민해. 머릿속에 들어온 숫자는 잊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그리고 내가 잊은 건 너지, 너희 집 비밀번호가 아니야. 게다가 1227은 정재 형 생일인 것 같은데.”아무렇지 않게 고정재 얘기를 꺼내자 내가 불쾌함을 드러냈다.“함부로 추측하지 말아요. 고정재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그러자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다시 물었다.“관계가 없다고?”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무슨 관계이길 바라는데요?”고현성이 어두운 얼굴로 나의 손목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둘이 무슨 관계든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넌 앞으로 내 사람이야. 아무도 널 빼앗아가지 못해.”“허.”내가 코웃음을 쳤다.“어디서 잘난 척이에요? 고현성 씨, 우린 아무 사이 아니에요. 무슨 사이라고 해도 당신은 날 단속할 자격이 없어요. 차라리 가서 임지혜 씨나 단속하지, 그래요?”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았다.방안의 불빛이 어두웠다. 고현성이 나를 벽에 힘껏 밀어버린 바람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남녀 사이의 힘 차이를 제대로 느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난 진심으로 널 사랑해.”운성시로 돌아와서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나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날 잊었다면서요.”고현성의 숨결이 나의 얼굴에 고스란히 닿아 간질거렸다. 그는 나의 입술을 깨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응, 잊었어. 근데 널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고승철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3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은 고현성이었고 고현성은 내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이제 두 남자 모두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던 그 추억을 가슴속에 묻고 다시는 꺼내지도, 기대하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나는 갑자기 운성시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운성시로 돌아오고 나서 나를 더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기만 했을 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기분이 우울해져 두 눈을 꼭 감았다.‘왜 이렇게 뒤죽박죽이 됐지? 고정재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왜 머릿속에는 고현성만 떠오르냐고...’나는 입술을 깨물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운성시에 한시도 있을 수가 없었다.‘일단 나가서 피해있자.’이튿날 아침 나는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갔다. 상주시로 간 게 아니라 어머니의 고향인 동성시로 갔다.동성은 운성의 옆 도시라 날씨가 비슷했다. 오늘도 구름이 많은 흐린 날씨였다. 나는 호텔을 잡고 반경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반경우는 나의 친구였는데 너무 친한 사이는 아니어도 그래도 나름 가까웠다. 예전에 나에게 동성으로 오면 연락하라고 했었다.나의 전화를 받은 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동성에 왔어?”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응. 그래서 연락했어.”반경우도 나처럼 팔자가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은 항공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도 그때 그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다...우리 둘은 그해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 후 몇 번 만났었다.“잠깐만 기다려. 데리러 갈게.”“아니야. 먼저 둘러보고 있다가 저녁에 찾으러 갈게.”나는 전화를 끊은 다음 코트를 챙기고 근처 오래된 마을로 향했다. 아침에 비가 내려서 마을 전체에 안개비가 자욱했다. 그런데 금운의 오래된 마을보다 예쁘진 않았다.금운의 오래된 마을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예뻤다. 그곳은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예를 들어 눈사람도 그곳에서 만들었고 고현성의 따뜻함도 그곳에서 느꼈
[난 더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이 문자를 보낸 후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더는 복잡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고 과거로 자신을 가두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 짧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설령 나를 가여워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날 예뻐해 준다면, 사랑을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만 해준다면 다 괜찮았다.나는 휴대전화를 넣고 오래된 마을에 저녁까지 있었다. 외곽이라 그런지 저녁이 되니 칠흑같이 어두웠고 거리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자 혼자서 다니려고 하니까 조금 무섭기도 했다.나는 재빨리 택시를 잡았고 가는 길에 반경우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자기야, 어디야?”평소 반경우와 연락을 자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여자 마음을 참 잘 달래주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나의 기분을 생각해주었다. 이 또한 내가 동성에 오자마자 그에게 가장 먼저 연락한 이유였다. 반경우는 나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고 마침 나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도 사랑이었다.어차피 살날이 제한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대답했다.“택시 안이야.”“그래? 위치 보내봐봐.”반경우는 할 얘기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때 최희연이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어디야? 오늘 운성에 왔거든. 만나자.]나는 바로 답장했다.[나 지금 동성이야.]나는 택시 운전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후 돈을 낸 다음 길옆에서 반경우를 기다렸다.동성의 날씨가 조금 쌀쌀하여 코트를 입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최희연이 캐물었다.[동성 어딘데?]나는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물었다.[자세한 위치는 알아서 뭐 하려고?][너 혼자 있는 게 걱정돼서 그러지.]최희연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호텔 주소를 그녀에게 보냈다.잠시 후 반경우가 도착했다. 검은색 벤틀리를 타고 왔는데 라이트 때문에 눈이 다 부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차에서 내린 반경우가 나의 어깨를 잡고 장난쳤다.“내
반경우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차에 올라탄 후 그에게 물었다.“어디 가?”그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알아맞혀 봐.”나는 두 손을 펼쳐 보였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맞혀?”반경우는 차 문을 닫고 운전석에 탔다. 가까이 다가와 안전벨트를 해준 후에는 또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아버지가 얼마 전에 또 내가 만나던 여자를 도망가게 했어.”나는 사실을 콕 집어 말했다.“도망가지 않아도 그 여자랑 결혼하지 않을 거면서.”반경우는 옆에 여자가 없었던 적이 없었고 심지어 누구에게도 다 친절했다. 그런데 가장 매정하고 잔인한 사람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사이였더라도 결혼 얘기만 나오면 바로 가차 없이 차버렸다.반경우가 나에게 물었다.“결혼이 재미있어?”나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가정을 이루는 게 재미있긴 해...”반경우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너처럼 이렇게 이혼해도?”나는 말을 잇지 못했고 더는 반경우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동성시의 유명한 유흥가로 데리고 왔다.불빛이 번쩍이는 게 아주 번화했다. 반경우는 나의 손을 잡고 어느 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무대 위에 춤을 추는 젊은 남녀들이 가득했다.종업원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자리를 안내했고 반경우는 술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간 후 반경우가 웃으며 물었다.“연수아, 이런 데 처음 와보지?”나는 궁금해하며 물었다.“어떻게 알았어?”평소 늘 정직하게 살았고 선양 그룹을 물려받은 후에는 집, 회사, 식당뿐이었다. 고현성과 결혼한 후에는 고현성과 회사만 신경 쓰느라 이런 곳에 발도 디딘 적이 없었다.“너 엄청 궁금한 게 많은 것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잖아.”반경우가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긴장해 하지 마. 내가 여기 있으니까 마음껏 놀면 돼.”그때 종업원이 술을 가져왔다. 반경우가 술을 건네자 나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안 돼. 맨날 약 먹어서 의사 선생님이 술 마시지 말라고 했어. 술은 네가 마셔. 난 보기만 하면 되니까.”반경우는
아주 가벼운 키스였다.나는 놀란 두 눈으로 반경우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나와 연애하면서 날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물론 나중에 다른 여자를 떠났던 것처럼 언제든지 날 떠나도 되었다.내가 물으려던 그때 반경우가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잠깐 쉴 수 있는 뗏목이라도 찾은 것만 같았다.반경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날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아주 매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가 웃으면서 보자 반경우가 얼굴을 어루만졌다.“술맛 어때?”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술을 먹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반경우는 아무 말도 없다가 나를 데리고 술집을 나왔다.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나의 모습에 반경우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웃었다.“순진하긴. 자기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내가 물었다.“뭔데?”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해주고는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오히려 그의 진지한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대체 뭔데?”반경우가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나랑 키스한 느낌이 어땠어?”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를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동성으로 온 목적이 반경우였으니까.우리는 식사하러 한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근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반경우는 늘 똑같은 삶을 보냈고 나에게 앞으로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당분간은 운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그곳에는 만나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가 갑자기 말했다.“조민수 연락처 알려줘.”나는 컵을 잡고 물었다.“그건 왜?”“내가 교수님을 몇 분 아는데 자궁암에 관해서 연구가 깊어. 소개해주려고.”잠시 후 반경우가 갑자기 화를 냈다.“이 세상에 너보다 더 어리석은 애도 없을 거야. 남자 하나 때문에 널 이렇게까지 망치다니. 그나저나 고정재는... 포기할 거야?”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을 반경우에게 다 말했다. 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반경우가 여유롭게 물었다.“이유는?”“다른 사람한테 사랑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고 싶어. 가짜여도 상관없어.”지금까지 연애하고 싶은 이유가 늘 이것이었다.가로등이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반경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이 녀석아, 사랑받고 싶으면 그 사랑 내가 주면 되잖아. 근데 너랑 연애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난 평등한 사랑을 원하는데 네 마음속에는 내가 없잖아...”반경우가 절대 나를 거절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거절당했다. 그는 나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이렇게 말했다.“난 널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어. 그리고 남자 친구처럼 연애도 하고 결혼할 수도 있고. 근데 넌 날 사랑해?”줄곧 비혼주의자라고 했던 반경우가 나와는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고 내가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이었다.나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미안. 내가 괜한 말 했어.”반경우는 시선을 늘어뜨렸고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일찍 쉬어. 내일 보자.”반경우가 떠난 후 나의 기분은 계속 복잡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것만 같았다. 그가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경우에게 문자를 보냈다.[날 사랑해?]날 사랑한다면 바로 동성시를 떠날 생각이었다. 반경우가 답장을 보냈다.[아직은 아니야.]진짜인지 확인할 수 없는 답장을 보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던 그때 길가에 서 있는 검은색 벤츠를 발견했다. 차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내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남자는 싸늘한 얼굴로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반경우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연수아, 거리를 누비면서 연애할 남자는 찾으니까 즐거워?”‘내가 즐겁냐고?’고현성이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나는 연애할 남자를 찾았지만 또 그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게 두려웠
자세히 들어보면 말투에 나약함이 묻어있었고 지금 마주한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예전에 이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좋아서 펄쩍 뛰었을 것이다.나는 두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고현성이 나를 내려놓고 덤덤하게 물었다.“방 번호가 몇 호야?”나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냥 방 하나 더 잡아요.”고현성은 내 말을 무시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 앞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음 곧장 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내 방 번호까지 알았어요?”‘이건 희연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는데?’고현성은 넥타이를 풀면서 차갑게 말했다.“네가 든 이 호텔이 우리 그룹 거거든. 그리고 하나 더. 최희연 씨는 나랑 연락한 적이 없어.”나는 놀란 두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러니까 이 호텔에 체크인했을 때부터 내가 동성에 있다는 걸 알았단 말이에요? 언제 왔어요?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요?”분명 고현성을 떠나고 싶어서 운성을 떠났는데 바보처럼 그의 영역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고현성은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을 냈었는데.나는 답답한 마음에 캐리어를 꺼내 짐을 챙겼다. 고현성은 말리지 않고 내가 다 정리하고 나서야 덤덤하게 말했다.“넌 도망가지 못해. 네가 어딜 가든 다 찾을 수 있어. 아무튼 남는 게 시간이니까.”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우리 둘은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계속 엮였다. 그리고 나의 문제가 아니라 뻔뻔스럽게 매달리는 고현성 때문이었다.기억을 잃은 고현성은 나에게 심하게 집착했다.“나랑 재결합하자. 내 아내가 되어줘.”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했다.“싫어요.”평생 다시는 그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았다.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고현성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나의 얼굴을 어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