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우가 여유롭게 물었다.“이유는?”“다른 사람한테 사랑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고 싶어. 가짜여도 상관없어.”지금까지 연애하고 싶은 이유가 늘 이것이었다.가로등이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반경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이 녀석아, 사랑받고 싶으면 그 사랑 내가 주면 되잖아. 근데 너랑 연애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난 평등한 사랑을 원하는데 네 마음속에는 내가 없잖아...”반경우가 절대 나를 거절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거절당했다. 그는 나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이렇게 말했다.“난 널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어. 그리고 남자 친구처럼 연애도 하고 결혼할 수도 있고. 근데 넌 날 사랑해?”줄곧 비혼주의자라고 했던 반경우가 나와는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고 내가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이었다.나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미안. 내가 괜한 말 했어.”반경우는 시선을 늘어뜨렸고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일찍 쉬어. 내일 보자.”반경우가 떠난 후 나의 기분은 계속 복잡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것만 같았다. 그가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경우에게 문자를 보냈다.[날 사랑해?]날 사랑한다면 바로 동성시를 떠날 생각이었다. 반경우가 답장을 보냈다.[아직은 아니야.]진짜인지 확인할 수 없는 답장을 보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던 그때 길가에 서 있는 검은색 벤츠를 발견했다. 차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내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남자는 싸늘한 얼굴로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반경우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연수아, 거리를 누비면서 연애할 남자는 찾으니까 즐거워?”‘내가 즐겁냐고?’고현성이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나는 연애할 남자를 찾았지만 또 그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게 두려웠
자세히 들어보면 말투에 나약함이 묻어있었고 지금 마주한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예전에 이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좋아서 펄쩍 뛰었을 것이다.나는 두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고현성이 나를 내려놓고 덤덤하게 물었다.“방 번호가 몇 호야?”나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냥 방 하나 더 잡아요.”고현성은 내 말을 무시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 앞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음 곧장 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내 방 번호까지 알았어요?”‘이건 희연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는데?’고현성은 넥타이를 풀면서 차갑게 말했다.“네가 든 이 호텔이 우리 그룹 거거든. 그리고 하나 더. 최희연 씨는 나랑 연락한 적이 없어.”나는 놀란 두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러니까 이 호텔에 체크인했을 때부터 내가 동성에 있다는 걸 알았단 말이에요? 언제 왔어요?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요?”분명 고현성을 떠나고 싶어서 운성을 떠났는데 바보처럼 그의 영역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고현성은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을 냈었는데.나는 답답한 마음에 캐리어를 꺼내 짐을 챙겼다. 고현성은 말리지 않고 내가 다 정리하고 나서야 덤덤하게 말했다.“넌 도망가지 못해. 네가 어딜 가든 다 찾을 수 있어. 아무튼 남는 게 시간이니까.”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우리 둘은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계속 엮였다. 그리고 나의 문제가 아니라 뻔뻔스럽게 매달리는 고현성 때문이었다.기억을 잃은 고현성은 나에게 심하게 집착했다.“나랑 재결합하자. 내 아내가 되어줘.”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했다.“싫어요.”평생 다시는 그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았다.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고현성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나의 얼굴을 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덤덤하게 웃었다.“무슨 근거로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고현성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강을 쳐다보면서 매력적인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넌 연애하고 싶다고 했고 사랑받고 싶다고 했어. 그건 내가 다 줄 수 있어. 그리고 난 기억을 되찾고 싶고. 딱 어울리잖아. 수아야, 우리 서로한테 기회를 주자.”내가 원하는 연애와 사랑을 전부 나에게 줄 수 있다고 했다...전에 나에게 준 적이 있었지만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나의 세상에서 떠나버렸다. 그 후 다시 만났을 땐 내 친구를 감옥에 보냈을 때였다. 내가 아무리 빌어도 전혀 끄떡없던 그였다. 내가 아이로 간절하게 부탁해도 말이다.“현성 씨, 2년 전에 당신 때문에 아이를 잃었을 때도 난 뭐라 하지 않았어요. 의사가 나한테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해도 가만히 있었고요. 나한테서 엄마가 될 자격을 빼앗은 거로 희연이 한 번 봐달라는데 그것도 안 돼요?”그때 고현성은 임지혜를 끔찍이도 아꼈고 나에게는 이상하리만큼 잔인했다. 비교하니 내가 너무 가여워 보였다. 아무튼 그때의 고현성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사랑이 없는 남자가 무엇을 하든 다 이해가 되긴 했지만 용서는 안 되었다. 어쨌거나 내가 그의 아내였을 때도 이러했으니까.고현성은 아내인 나를 존중한 적이라곤 없었다.내가 고현성의 옆으로 다가가 깍지를 끼자 그가 화들짝 놀랐다. 나는 깍지를 들어 보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왜 나한테 부족한 게 당신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죠?”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나는 절대 고씨 가문 형제와 연애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물었다.“우리 사이에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했죠?”고현성이 손을 어찌나 꽉 잡았는지 손바닥이 다 하얘졌다. 나는 애써 차분한 척하며 웃었다.“9년 전 내가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남자를 나의 신념이라 생각하고 맨날 쫓아다녔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세상에서 사라졌죠. 그러다가 6년 후에 우리 아빠가 나한테 고씨 가문과
창밖에 또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강에 떨어지면서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렸다. 동성의 날씨는 운성과 비슷해서 눈과 비가 자주 내렸고 공기도 매우 습했다.고현성이 고개를 들었다.“연수아, 말끝마다 고정재를 사랑한다고 한 거 알아?”“맞아요. 난 고정재 씨를 사랑해요. 그래서 당신이 매달리는 게 너무 짜증 나요.”고현성이 언성을 높였다.“닥쳐, 연수아.”내가 빈정거리며 물었다.“왜요? 난 고정재 씨 얘기 꺼내면 안 돼요? 사랑한다고 하면 안 돼요? 진화 그룹이 3년 동안 선양 그룹 덕에 크게 발전한 거 잊었어요? 당신이 이걸 가질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짝퉁이어서예요. 근데 현성 씨는 당신 것이 아니었던 사랑마저도 차버렸죠. 그러면서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재결합하자고 하는 건데요?”나는 고현성을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에 모진 말을 내뱉었다.‘재결합은 개뿔.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 같아? 난 뭐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줄 알아? 재결합은 평생 꿈도 꾸지 마.’나의 모진 말에 고현성은 비틀거리며 침대에 앉았고 목소리마저 갈라졌다.“아무리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나의 존재를 이렇게 부정해선 안 되지...”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떻게 하면 나한테 상처가 되는지 잘 알고 있구나. 아주 내 심장을 쿡쿡 찔렀어. 이러면 복수의 쾌감이라도 들어?”이 말을 들으니 그가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더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 나는 두 눈을 감았다.“복수한 적 없어요.”나는 그저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이었다. 고현성이 나에게 준 상처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안되었다.“우리 형 고정재 말이야.”고현성이 갑자기 고정재 얘기를 꺼냈다.“아무한테나 다 다정한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구보다 매정한 사람이야. 성격이 오만해서 다른 사람이 눈에 차지 않거든. 우리 어머니가 입양한 딸 윤다은도 형을 오랫동안 좋아했고 계속 쫓아다녔는데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했어. 다은이가 조금이라도 선을
그냥 빨리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하지만 나는 그때의 고현성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하고 있다는 걸 몰랐고 그는 우리의 과거와 나를 향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그저 다른 방식으로 나와 다시 알아가고 싶었던 거다.그런데 나는 그를 가짜라고 하면서 그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다.그때의 고현성은 과거의 나처럼 속으로는 수없이 흔들리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상대에게 차갑게 거절당하고 상대의 말에 거듭 상처받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다.그때 고현성의 깊은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고현성은 떠나지 않았고 내가 캐리어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빗속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호수처럼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넌 여기 있어. 내가 갈게.”말과 함께 그는 긴 다리를 뻗어 가랑비 사이를 내디뎠고 쓸쓸한 그의 뒷모습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내리는 가랑비를 바라보며 내 눈앞도 흐려져 갔다.나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서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반나절 동안 고현성과 다툰 탓인지 심적으로 지쳐있었던 나는 항암 약을 꺼내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새 악몽을 꾸고 간간이 깨어나며 푹 자지 못했다.아침에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반경우가 연락이 와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자기, 이따 시간 돼?”예전 같으면 시간 있다고 했겠지만 어젯밤 사건 이후 마음 한구석에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졌고 나중에 더 깊게 얽힐 것 같아 거절했다.“나 곧 동성 떠날 거야.”반경우는 당황한 듯 물었다.“이제 막 동성에 왔는데 왜 갑자기 떠나?”나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이제 회사도 내 명의로 되어 있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 건강 검진받으러 상주에 가야 한다고 민수 오빠가 계속 당부했어.”조민수의 생활 스케줄에서 늘 최우선은 내 일이었고 그는 자신이 실수하는 것보다 내 몸이 망가지는 걸 더 용납하지 않았다.운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가 당부했었다.“
나와 반경우가 춤추고 키스하는 영상이었는데 누가 찍어서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경우가 나의 새로운 연인이라고 직접 해명하지 않는 이상 연씨 가문에는 확실한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그렇게 말해야만 사람들도 넘어갈 것이다.나는 어이가 없었다. 연예인도 아닌데 대기업 집안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고 전에 이혼한 것도 인기 검색어에 올랐었다.하지만 나는 그 영상이 연씨 가문에 미칠 영향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흰 셔츠에 넥타이는 없이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반경우가 점잖고 멋들어진 모습으로 나와 격정적인 춤을 추고 있었지만 잘생긴 그의 모습에 팬들은 그렇게까지 욕하지 않았다.그리고 나는 여태껏 본 내 모습 중에 가장 불처럼 뜨겁고 정열적이었다.그런 내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반경우는 나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댓글을 클릭해서 읽어보니 다들 나를 뻔뻔하다는 둥 욕하기 바빴다. 금방 이혼하고 또 새로운 남자를 만난 데다 내가 적극적으로 동성에 남자를 찾으러 갔다는 둥 아무튼 듣기 어려운 말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방구석 네티즌들은 참 할 일이 없나 보다.잠시 생각한 나는 그 영상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피곤한 상태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운 채 자고 깨기를 반복하며 비몽사몽으로 보내다가 오후가 되어 비서에게 연락이 왔다.전화를 받으니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어제 저희가 서당 유씨 가문 쪽에서 입찰을 따냈습니다. 이번 협업이 회사엔 중대한 사항인데 유씨 가문 쪽에서 갑자기 말을 바꾸면서 이미 협업을 취소하고 진씨 가문과 손잡을 예정이랍니다.”진씨 가문은 예전에도 적지 않게 접점이 있었기에 운성에서는 연씨, 고씨 다음으로 대기업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씨 가문에서 이번 계약을 파기하고 진씨 가문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연씨 가문보다 뒤처지는 그쪽을 유씨 가문이 선택한 이유가 뭘까.나는 비서에게 물었다.“이유를 알아요?”비서는 망설이다가 말했다.“고씨 가
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이분은 왜 여기에?”“대표님을 기다리려고 특별히 여기 머무는 것 같아요.”그녀를 보니 분명 이유가 있어서 여기 있는 것 같아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몇 살이세요? 마흔 됐나요?”그 말에 상대는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슨 헛소리에요?”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비서에게 말했다.“가죠.”나는 저런 사람들을 경멸한다.내가 가려고 하자 유지영은 나를 막으려 했고 비서가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나는 비서의 손에서 자동차 키를 빼앗아 주차장으로 향했다.비서가 날 데리러 온 차는 롤스로이스였는데 나는 먹는 것도, 쓰는 것도 최고만 누리면서 나 자신을 무척 아꼈다. 안 그러면 연씨 가문에서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다 어디에 쓰겠나.차를 몰고 연씨 별장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최희연에게 연락이 왔다.그녀가 물었다.[아직 동성에 있어?][아니, 운성이야.]차에서 내리는데 또다시 문자가 왔다.[너 보러 동성 가려고 했는데.]나는 물음표를 보내며 물었다.[그렇게 한가해?]지금 최희연은 진서준의 곁에 있을 텐데.[나 헤어질 것 같아.]나는 물음표를 몇 개 보냈고 최희연은 실망하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덧붙였다.[진서준이 며칠 전에 쪽지 하나 남기고 사라졌어. 나보고 자기를 잊으라네.]나는 최희연과 진서준 사이가 이젠 안정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그 남자, 그 맑은 눈의 남자...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나는 고민하다가 문자를 보냈다.[강해온 씨한테 알아보라고 할까?]최희연이 답장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와서 밥이나 먹자.]가고 싶지 않았지만 최희연이 기분이 안 좋아 동의했다.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볍게 화장을 한 뒤에 차 키를 들고 문을 나섰다.여전히 검은색 롤스로이스를 몰고 갔는데 최희연이 그걸 보고 부자라며 말했고 옆에는 윤다은도 같이 있었다. 나는 문득 고현성이 그녀가 고정재를 좋아한다고 말해줬던 게 떠올랐고 떠올리지 않으려
윤다은은 내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먼저 다가와 주었고 내가 방금 한 말에 기분이 상했음에도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그런 그녀를 보면서 내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방금 그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나는 말을 돌렸다.“밥 먹으러 가자.”윤다은은 방금 일어난 일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적극적으로 음식을 주문하며 말했다.“선배님과 오랜만에 만나서 얻어먹는 건데 오늘 제대로 먹어야죠. 술 마셔도 돼요?”최희연은 웃으며 말했다.“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가 못 내면 수아한테 빌리면 돼. 돈이 많거든.”내가 웃으며 물었다.“네가 산다며?”“빌리는 거야, 달라는 게 아니라.”최희연은 태연해 보였고 진서준을 잃은 것에 대해 크게 슬퍼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녀답지 않았다.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윤다은은 주문을 마친 뒤 호기심이 동해 나에게 물었다.“수아 언니, 우리 둘째 오빠랑 왜 이혼했어요?”그 말에 최희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윤다은, 네 둘째 오빠가 고현성이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어?”윤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나는 고씨 가문에 입양되어서 어머니의 성을 따랐으니까 대외적으로는 고씨 가문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오랫동안 숨겨서 죄송해요.”최희연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괜찮아, 나도 네 가족에 관해 물어본 적도 없고 네가 말할 필요도 없지. 그냥 놀라서 그래... 수아도 고씨 가문이랑 인연이 깊어서...”웨이터가 레드와인 한 병을 내오자 윤다은이 우리에게 한 잔 따라주며 설명했다.“계속 국내에 있었던 게 아니라서 둘째 오빠가 결혼한 걸 몰랐어요. 나한테 말한 적도 없고...”내가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와인잔을 집어 들자 최희연은 재빨리 내 손에서 잔을 낚아채 가며 말했다.“조민수가 네가 술 마시는 거 알면 날 죽일 거야! 그런데 다은아,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그 말에 윤다은은 고개를 푹 숙였고 최희연은 호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