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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그냥 빨리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고현성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하고 있다는 걸 몰랐고 그는 우리의 과거와 나를 향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다른 방식으로 나와 다시 알아가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나는 그를 가짜라고 하면서 그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다.

그때의 고현성은 과거의 나처럼 속으로는 수없이 흔들리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상대에게 차갑게 거절당하고 상대의 말에 거듭 상처받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다.

그때 고현성의 깊은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

고현성은 떠나지 않았고 내가 캐리어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빗속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호수처럼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넌 여기 있어. 내가 갈게.”

말과 함께 그는 긴 다리를 뻗어 가랑비 사이를 내디뎠고 쓸쓸한 그의 뒷모습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내리는 가랑비를 바라보며 내 눈앞도 흐려져 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서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반나절 동안 고현성과 다툰 탓인지 심적으로 지쳐있었던 나는 항암 약을 꺼내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새 악몽을 꾸고 간간이 깨어나며 푹 자지 못했다.

아침에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반경우가 연락이 와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

“자기, 이따 시간 돼?”

예전 같으면 시간 있다고 했겠지만 어젯밤 사건 이후 마음 한구석에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졌고 나중에 더 깊게 얽힐 것 같아 거절했다.

“나 곧 동성 떠날 거야.”

반경우는 당황한 듯 물었다.

“이제 막 동성에 왔는데 왜 갑자기 떠나?”

나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제 회사도 내 명의로 되어 있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 건강 검진받으러 상주에 가야 한다고 민수 오빠가 계속 당부했어.”

조민수의 생활 스케줄에서 늘 최우선은 내 일이었고 그는 자신이 실수하는 것보다 내 몸이 망가지는 걸 더 용납하지 않았다.

운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가 당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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