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사는 거리...바람은 이곳에 살지도 머물지도 않았다.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너와 나의 어린 시절 그 추억들을 전부 휩쓸어갔지. 넌 그렇게 바람을 따라 이곳을 떠났고 난 같은 자리에서 널 기다렸지만 바람은 이미 떠나버렸지.9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기다렸는데 그토록 자신했던 어린 시절도, 확실했던 사랑도 이젠 전부 농담처럼 들렸다.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내 인생 자체가 우스워졌다.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멜로디가 꿈결처럼 마음속을 한번 또 한 번 배회하니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내가 자리에 일어선 순간 음악이 뚝 멎었고 남자의 눈빛은 수많은 관객 사이를 비집고 정확하게 내게 떨어졌다. 맑고 투명한 그 눈빛 속에서 나는 고현성이 말했던 연민을 보아낸 것 같았다.나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고 바로 그때 1열에서 최희연과 윤다은이 의아한 눈빛으로 뒤돌아보다가 나를 보자 최희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내가 담담하게 고정재를 바라보는데 그가 문득 다시 연주를 이어갔고 나는 황급히 음악센터를 빠져나갔다.최희연이 나를 따라 나오며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나는 문에 붙은 광고를 가리키며 웃었다.“갑자기 음악이 듣고 싶어서. 여기서 저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최희연은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손을 뻗어 안아주며 말했다.“다 괜찮아질 거야.”진서준이 막 그녀의 곁을 떠난 것을 떠올리며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다 잘될 거야.”그녀를 향한 위로인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문득 최희연이 말했다.“나랑 좀 걸어.”“응, 서준 씨는 계속 연락이 없어?”3월의 바람은 약간의 한기를 품고 있었고 나는 최희연이 차분한 어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옷깃을 여미었다.“없어. 그 사람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나도 이렇게 애매한 상황은 싫어... 진서준은... 난 사랑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 마음속 열등감까지 어쩌진 못하겠어. 우린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다은을 먼저 고씨 가문으로 돌려보냈지만 차를 너무 가까이 대지는 않고 저택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윤다은은 입을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차에서 내려 우리와 작별 인사를 했고 나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녀에게 화답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오빠 안녕.”고정재가 짧게 대꾸하자 윤다은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그 눈빛에는 미련이 그대로 담겨있었다.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차에는 단둘이 있고...적어도 그녀의 눈에 나는 위협적인 존재일 테니까.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은 씨, 안녕.”나는 고정재에게 주소를 묻지 않고 어렴풋이 지난번 아파트까지 데려다줬던 기억을 떠올리며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다.나와 고정재만 남은 차는 유난히 조용해졌고 백미러를 통해 그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며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물었다.“고정재 씨, 앞으로 연주회가 더 남았어요?”“정재 씨.”그가 말하자 내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네?”“꼬마 아가씨, 날 정재 씨라고 부르라고.”그는 아무도 없을 때면 나를 꼬마 아가씨라고 불렀다.“아, 네. 알았어요.”나는 너무 긴장한 것 같았다.“연주회 일정이 잡혀 있지는 않았어. 오늘은 즉흥적으로 생각난 거야.”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내 연주 들으러 와줘서 고마워. 바람이 사는 거리... 수아 씨를 위해 연주한 거야.”바람이 사는 거리...그가 나를 위한 거라고 말했다.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내 마음이 속절없이 떨렸다.형언할 수 없는 느낌...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어린 시절 추억처럼, 9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답을 들은 것 같았다.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황홀했다.이젠 당신을 안 좋아해...어제 전날 보낸 문자 메시지는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다.내 마음이 나에게 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해준다.나를 위해 피아노
꼬마 아가씨의 사랑에 드디어 대답이 돌아왔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이젠 그녀가 선뜻 나설 용기가 없었다.그래, 난 자신이 없다.맑은 눈을 반짝이는 눈앞의 남자 앞에서 내 마음은 여지없이 드러났고 오래전부터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상대는 알고 있었다.기억 속에 깊게 남은 그의 말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꼬마 아가씨, 왜 자꾸 따라와?”“왜냐면... 좋아하니까.”내가 널 좋아하니까.지금 그가 내 앞에 서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고 있다.“꼬마 아가씨, 나랑 만나볼래?”원했다. 간절히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9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애초에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찾으려고 운성에 왔다.내가 진짜 좋아하는 그 남자를 찾으려고.나는 시선을 내린 채 물었다.“나 좋아해요?”그는 내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침착하게 말했다.“응,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너뿐이야.”연주를 마치고 나온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 정장 차림이었고 훤칠한 체격까지 더해지니 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해 보였다.내키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참을 수 있었다.그때 내가 생각했던 사랑이 그랬으니까.절절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나는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물었다.“좀 걸을까요?”고정재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파트 근처에 강이 있었는데 내가 앞에서 걸어가자 문득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뜨거운 손바닥의 온도가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고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결국 빼지는 못했다.그는 내 손을 잡고 강변을 따라 걸었고 나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순종적으로 그의 곁을 따라 가면서 어떻게 그를 거절할지 생각했다. 어차피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으니까.일단 나는 그의 동생 전처다. 내 마음은 뒤로 하고 나한테 잘해주는 고승철만 해도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윤다은과 만나는 걸
그것 또한 대답이지만 나는 그 대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우리 둘은 십 분 넘게 걸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걸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침내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고 그의 뒷모습만 바라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지만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우리 둘 사이에는 미래가 없어요.”이 말에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고개를 기울여 살짝 어두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른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독였다.“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너만 나와 함께하겠다면 성가신 문제는 내가 다 해결할게.”나는 그의 손바닥에 비비적거리고 싶었지만 참았다.“그건 해결할 수 없어요.”“날 믿어, 연수아.”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가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고정재 씨, 나 이제 그쪽 안 좋아해요.”나는 이 한마디로 그를 거절했고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결국 침묵했다.내 손바닥을 잡고 있던 그가 갑자기 팔을 뻗어 나를 품에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꼬마 아가씨.”내가 턱을 그의 어깨에 대고 시선을 들자 윤다은과 그와 똑같게 생긴 남자가 보였고 그 남자는 지금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왜 사과해요?”“내가 너무 늦게 나타나서 널 많이 힘들게 했어. 이번에는 내가 널 기다릴게.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꺼이 기다릴게. 이번엔 내가 같은 자리에서 평생 널 기다리면 될까?”고정재는 평생 나를 기다리겠단다. 내 9년과 그의 평생을 맞바꿨다.한 마디 한 마디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두 사람의 귓가에 박혔고 윤다은은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고현성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태산 같은 굳건함을 유지했고 위기 속에서도 침착했다. 지금 날 안고 있는 사람이 그의 형인데도 말이다.고정재는 나를 놓아주고 몸을 돌려 고현성 일행을 발견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나와 작별 인사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원망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조씨 가문을 상대하기 위해 내가 이어받고 다시 연씨 가문을 저격하는 게 아니면 난 지금 운성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다.연씨 가문을 이어받는 것만으로 아주 성가시고 시간 낭비인데 그와 함께 서로 괴롭히면서 살자고?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나.나는 우습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조롱했다.“나한테 왜 그렇게 집착해요? 난 이제 당신이 너무 낯설어요. 이러면 당신이 날 못 잊은 거라고 내가 오해해요.”고현성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기억을 잃기 전엔 날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설마 우리 사이 일을 다 잊어버리고 나에 대한 사랑만 남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허, 내가 그걸 믿겠어요?”화가 난 고현성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어 내 목을 잡아 나를 품에 끌어당겼고 나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봐야 했지만 굴하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요?”고현성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짓누르더니 키스가 아니라 깊이 공격해 오며 내 입술을 세게 물었다.그러다 나를 확 놓으며 멀리 밀어버리자 중심을 잡지 못한 내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운성의 바닥은 축축했고 나는 바닥에 앉았을 때 한기가 느껴졌지만 바로 일어설 수 없었다.넘어지면서 삐끗한 발목이 너무 아팠지만 나는 앓는 소리도 내지 않고 바닥에 앉아 조롱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나와 자꾸만 얽히려는 그가 참 우스꽝스러웠다.그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한참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말했다.“연수야, 넌 참 겁도 없어.”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겁이 없겠나.그저 내 마음에 이미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뿐이다.나는 침묵했고 고현성은 화를 내며 돌아서다가 다시 내 앞에 돌아와 쭈그리고 앉더니 독한 말을 퍼부었다.“넘어져도 싸! 하루 종일 문제만 만들잖아. 동성에 가서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키스하는 영상까지 인터넷에 올라오더
“방금 한 말 사실이야?”툭 튀어나온 그의 질문에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뭐요?”고현성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고정재한테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말 진심이야?”나는 힘없이 말했다.“방금 대답했잖아요.”그는 웬일로 화를 내지 않고 말했다.“네가 말해주길 바랐어... 그 말이 진짜라고 기대했거든.”“...”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투던 우리는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가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고현성은 최선을 다해 화를 참고 있었다.그는 내게서 차 키를 빼앗아 운전석 문을 열며 멋대로 말했다.“내가 집에 데려다줄게.”거절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침묵으로 일관하며 뒷좌석에 있었다.연씨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차를 몰고 차고로 들어간 고현성은 내게 묻지도 않고 익숙한 자세로 나를 안아 연씨 별장에 데려다주었다.솔직히 마음이 불편했다.우리가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엘리베이터를 나선 고현성이 내 안방 비밀번호 1227을 누르고 나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말했다.“집에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비록 내가 넘어지고 발을 삐끗한 게 고현성 때문이지만 예의는 차려야 했다.내가 자주 서 있던 통유리창 앞에 서서 아래층을 내려다보던 고현성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문득 나에게 물었다.“이런 큰 집에서 살면 안 외로워?”“괜찮아요, 익숙해요.”고현성은 다시 시선을 돌려 항암제를 비롯한 수많은 약이 놓여 있는 화장대를 바라보았다.“항암 치료받는 거야?”잔뜩 굳어진 그의 목소리에 나는 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그가 갑자기 내 상태에 관해 물어봐서 놀랐다.“왜 갑자기 나에 관해 물어봐요?”그러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쳐다보더니 다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전에도 충분히 생각해 줬잖아?”나는 고개를
지금의 고현성은 많이 착해져서 내가 아무리 차갑게 말해도 너그럽게 넘어갔다.지금처럼 내가 비꼬면서 조롱해도 그는 멍하니 물을 뿐이었다.“해외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를 찾아줄까?”“...”나는 침묵했고 그는 싸늘한 내 반응이 더 말하지 않고 잠시만 머물렀다가 떠났다.오래도록 이곳에 억지로 남아있으려 하지는 않았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창으로 갔고 유리창 너머로 별장 앞 가로등 아래 서 있는 고현성이 보였는데 불빛이 그의 실루엣을 길게 끌어당겨 다소 외롭고 슬퍼 보였다.왜 고현성의 모습이 슬퍼 보인다는 착각이 들까.창문에 이마를 살짝 기댄 채 아래층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들었다. 내가 왜 고정재를 거절했는지도 모르겠다.나는 분명 그를 좋아하는데 결국 거절했다. 그리고 거절한 이유도 무척 우스웠다. 정말 좋아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고 이러한 이유로 그를 거절했다.그 생각에 심장이 무척 아팠다.나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는 고현성을 보았고 불을 붙인 그가 부드럽게 연기를 내뿜어내자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때 코트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는데 깊게 찡그린 채 불쾌한 표정을 짓는 걸 보아 또 누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전화를 끊고 다시 담배를 비벼 끄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현성의 비서가 그를 데리러 왔다.비서는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차에 타는 순간 고개를 돌려 내 방을 힐끗 바라보았다.나는 훔쳐본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문득 마음에 찔렸지만 밤에 이 유리창은 그저 검은 가림판이라는 게 떠올랐다.고현성이 차를 타고 떠나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 상황이 무척 우스웠다. 할 일이 없어서 미쳐가는 것 같았다.일어나서 욕실로 가 샤워를 마치고 따뜻한 물에 약을 먹은 뒤 침대에 눕는데 문자 한 통이 왔다.윤다은이 보낸 메시지였다.[수아 언니, 왜 오빠 거절했어요?]윤다은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기에 굳이 해명할 필요는
나는 윤다은의 메시지에 다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새벽까지 밤을 설치자 운성에는 또다시 비가 왔다. 마르지 않는 이 습한 도시는 한 번도 건조한 적이 없이 우울했지만 나는 이런 곳이 좋았다.이곳은 부모님이 머문 곳이자 연씨 가문이 뿌리를 내린 곳이었다.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든 나는 다음날 일어났을 때 머리가 무거웠다.힘겹게 일어나 약을 먹고 어렵게 금색 시스루 원피를 입었다.최희연은 내가 언제나 레드카펫이라도 걸을 사람처럼 산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녀가 이렇게 물었다.“수아야,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않아?”힘들긴 하지만 화려하게 사는 게 익숙하다.3년 동안 고현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는 더없이 나를 가꾸면서 살았고 모든 걸 내려놨을 땐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화장대 앞에 앉기 전에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거울에 비친 볼의 희미한 흉터를 보았다. 더 지울 수가 없어서 화장으로 가려야 했다. 나는 파운데이션을 집어 들고 섬세하게 발랐다.화장을 마치자 비서의 차가 도착했고 나는 높지 않은 굽의 옅은 금색 하이힐을 신었다.어젯밤에 발을 삐끗해서 걷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견딜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운전을 할 수 없어서 특별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오전에는 회사의 최근 업무에 대해 숙지하고 오후에는 유씨 가문과의 미팅 시간이 되었다고 비서가 알려주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서두를 거 없으니 조금 있다가 갈게요.”어젯밤 내가 늦게 도착해서 유서정이 간 건 맞지만 제시간에 도착했어도 바람맞혔을 거다.그들이 오늘 제대로 준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씨 가문을 불렀으니 분명 고씨 가문도 오겠지.우리 연씨 가문의 기를 죽이려고?하지만 난 누가 봐도 좋은 꼴 못 당하는 이런 자리에 결국 가야 한다....나와 비서는 늦게 도착했고 그가 문을 열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와 어젯밤 무례하게 굴던 여자 유지영이 있었고 내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 말했다.“연 대표님, 늦으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