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사는 거리...바람은 이곳에 살지도 머물지도 않았다.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너와 나의 어린 시절 그 추억들을 전부 휩쓸어갔지. 넌 그렇게 바람을 따라 이곳을 떠났고 난 같은 자리에서 널 기다렸지만 바람은 이미 떠나버렸지.9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기다렸는데 그토록 자신했던 어린 시절도, 확실했던 사랑도 이젠 전부 농담처럼 들렸다.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내 인생 자체가 우스워졌다.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멜로디가 꿈결처럼 마음속을 한번 또 한 번 배회하니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내가 자리에 일어선 순간 음악이 뚝 멎었고 남자의 눈빛은 수많은 관객 사이를 비집고 정확하게 내게 떨어졌다. 맑고 투명한 그 눈빛 속에서 나는 고현성이 말했던 연민을 보아낸 것 같았다.나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고 바로 그때 1열에서 최희연과 윤다은이 의아한 눈빛으로 뒤돌아보다가 나를 보자 최희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내가 담담하게 고정재를 바라보는데 그가 문득 다시 연주를 이어갔고 나는 황급히 음악센터를 빠져나갔다.최희연이 나를 따라 나오며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나는 문에 붙은 광고를 가리키며 웃었다.“갑자기 음악이 듣고 싶어서. 여기서 저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최희연은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손을 뻗어 안아주며 말했다.“다 괜찮아질 거야.”진서준이 막 그녀의 곁을 떠난 것을 떠올리며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다 잘될 거야.”그녀를 향한 위로인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문득 최희연이 말했다.“나랑 좀 걸어.”“응, 서준 씨는 계속 연락이 없어?”3월의 바람은 약간의 한기를 품고 있었고 나는 최희연이 차분한 어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옷깃을 여미었다.“없어. 그 사람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나도 이렇게 애매한 상황은 싫어... 진서준은... 난 사랑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 마음속 열등감까지 어쩌진 못하겠어. 우린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다은을 먼저 고씨 가문으로 돌려보냈지만 차를 너무 가까이 대지는 않고 저택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윤다은은 입을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차에서 내려 우리와 작별 인사를 했고 나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녀에게 화답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오빠 안녕.”고정재가 짧게 대꾸하자 윤다은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그 눈빛에는 미련이 그대로 담겨있었다.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차에는 단둘이 있고...적어도 그녀의 눈에 나는 위협적인 존재일 테니까.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은 씨, 안녕.”나는 고정재에게 주소를 묻지 않고 어렴풋이 지난번 아파트까지 데려다줬던 기억을 떠올리며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다.나와 고정재만 남은 차는 유난히 조용해졌고 백미러를 통해 그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며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물었다.“고정재 씨, 앞으로 연주회가 더 남았어요?”“정재 씨.”그가 말하자 내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네?”“꼬마 아가씨, 날 정재 씨라고 부르라고.”그는 아무도 없을 때면 나를 꼬마 아가씨라고 불렀다.“아, 네. 알았어요.”나는 너무 긴장한 것 같았다.“연주회 일정이 잡혀 있지는 않았어. 오늘은 즉흥적으로 생각난 거야.”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내 연주 들으러 와줘서 고마워. 바람이 사는 거리... 수아 씨를 위해 연주한 거야.”바람이 사는 거리...그가 나를 위한 거라고 말했다.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내 마음이 속절없이 떨렸다.형언할 수 없는 느낌...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어린 시절 추억처럼, 9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답을 들은 것 같았다.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황홀했다.이젠 당신을 안 좋아해...어제 전날 보낸 문자 메시지는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다.내 마음이 나에게 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해준다.나를 위해 피아노
꼬마 아가씨의 사랑에 드디어 대답이 돌아왔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이젠 그녀가 선뜻 나설 용기가 없었다.그래, 난 자신이 없다.맑은 눈을 반짝이는 눈앞의 남자 앞에서 내 마음은 여지없이 드러났고 오래전부터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상대는 알고 있었다.기억 속에 깊게 남은 그의 말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꼬마 아가씨, 왜 자꾸 따라와?”“왜냐면... 좋아하니까.”내가 널 좋아하니까.지금 그가 내 앞에 서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고 있다.“꼬마 아가씨, 나랑 만나볼래?”원했다. 간절히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9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애초에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찾으려고 운성에 왔다.내가 진짜 좋아하는 그 남자를 찾으려고.나는 시선을 내린 채 물었다.“나 좋아해요?”그는 내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침착하게 말했다.“응,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너뿐이야.”연주를 마치고 나온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 정장 차림이었고 훤칠한 체격까지 더해지니 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해 보였다.내키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참을 수 있었다.그때 내가 생각했던 사랑이 그랬으니까.절절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나는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물었다.“좀 걸을까요?”고정재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파트 근처에 강이 있었는데 내가 앞에서 걸어가자 문득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뜨거운 손바닥의 온도가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고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결국 빼지는 못했다.그는 내 손을 잡고 강변을 따라 걸었고 나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순종적으로 그의 곁을 따라 가면서 어떻게 그를 거절할지 생각했다. 어차피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으니까.일단 나는 그의 동생 전처다. 내 마음은 뒤로 하고 나한테 잘해주는 고승철만 해도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윤다은과 만나는 걸
그것 또한 대답이지만 나는 그 대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우리 둘은 십 분 넘게 걸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걸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침내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고 그의 뒷모습만 바라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지만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우리 둘 사이에는 미래가 없어요.”이 말에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고개를 기울여 살짝 어두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른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독였다.“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너만 나와 함께하겠다면 성가신 문제는 내가 다 해결할게.”나는 그의 손바닥에 비비적거리고 싶었지만 참았다.“그건 해결할 수 없어요.”“날 믿어, 연수아.”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가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고정재 씨, 나 이제 그쪽 안 좋아해요.”나는 이 한마디로 그를 거절했고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결국 침묵했다.내 손바닥을 잡고 있던 그가 갑자기 팔을 뻗어 나를 품에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꼬마 아가씨.”내가 턱을 그의 어깨에 대고 시선을 들자 윤다은과 그와 똑같게 생긴 남자가 보였고 그 남자는 지금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왜 사과해요?”“내가 너무 늦게 나타나서 널 많이 힘들게 했어. 이번에는 내가 널 기다릴게.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꺼이 기다릴게. 이번엔 내가 같은 자리에서 평생 널 기다리면 될까?”고정재는 평생 나를 기다리겠단다. 내 9년과 그의 평생을 맞바꿨다.한 마디 한 마디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두 사람의 귓가에 박혔고 윤다은은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고현성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태산 같은 굳건함을 유지했고 위기 속에서도 침착했다. 지금 날 안고 있는 사람이 그의 형인데도 말이다.고정재는 나를 놓아주고 몸을 돌려 고현성 일행을 발견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나와 작별 인사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원망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조씨 가문을 상대하기 위해 내가 이어받고 다시 연씨 가문을 저격하는 게 아니면 난 지금 운성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다.연씨 가문을 이어받는 것만으로 아주 성가시고 시간 낭비인데 그와 함께 서로 괴롭히면서 살자고?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나.나는 우습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조롱했다.“나한테 왜 그렇게 집착해요? 난 이제 당신이 너무 낯설어요. 이러면 당신이 날 못 잊은 거라고 내가 오해해요.”고현성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기억을 잃기 전엔 날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설마 우리 사이 일을 다 잊어버리고 나에 대한 사랑만 남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허, 내가 그걸 믿겠어요?”화가 난 고현성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어 내 목을 잡아 나를 품에 끌어당겼고 나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봐야 했지만 굴하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요?”고현성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짓누르더니 키스가 아니라 깊이 공격해 오며 내 입술을 세게 물었다.그러다 나를 확 놓으며 멀리 밀어버리자 중심을 잡지 못한 내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운성의 바닥은 축축했고 나는 바닥에 앉았을 때 한기가 느껴졌지만 바로 일어설 수 없었다.넘어지면서 삐끗한 발목이 너무 아팠지만 나는 앓는 소리도 내지 않고 바닥에 앉아 조롱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나와 자꾸만 얽히려는 그가 참 우스꽝스러웠다.그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한참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말했다.“연수야, 넌 참 겁도 없어.”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겁이 없겠나.그저 내 마음에 이미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뿐이다.나는 침묵했고 고현성은 화를 내며 돌아서다가 다시 내 앞에 돌아와 쭈그리고 앉더니 독한 말을 퍼부었다.“넘어져도 싸! 하루 종일 문제만 만들잖아. 동성에 가서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키스하는 영상까지 인터넷에 올라오더
“방금 한 말 사실이야?”툭 튀어나온 그의 질문에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뭐요?”고현성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고정재한테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말 진심이야?”나는 힘없이 말했다.“방금 대답했잖아요.”그는 웬일로 화를 내지 않고 말했다.“네가 말해주길 바랐어... 그 말이 진짜라고 기대했거든.”“...”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투던 우리는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가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고현성은 최선을 다해 화를 참고 있었다.그는 내게서 차 키를 빼앗아 운전석 문을 열며 멋대로 말했다.“내가 집에 데려다줄게.”거절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침묵으로 일관하며 뒷좌석에 있었다.연씨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차를 몰고 차고로 들어간 고현성은 내게 묻지도 않고 익숙한 자세로 나를 안아 연씨 별장에 데려다주었다.솔직히 마음이 불편했다.우리가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엘리베이터를 나선 고현성이 내 안방 비밀번호 1227을 누르고 나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말했다.“집에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비록 내가 넘어지고 발을 삐끗한 게 고현성 때문이지만 예의는 차려야 했다.내가 자주 서 있던 통유리창 앞에 서서 아래층을 내려다보던 고현성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문득 나에게 물었다.“이런 큰 집에서 살면 안 외로워?”“괜찮아요, 익숙해요.”고현성은 다시 시선을 돌려 항암제를 비롯한 수많은 약이 놓여 있는 화장대를 바라보았다.“항암 치료받는 거야?”잔뜩 굳어진 그의 목소리에 나는 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그가 갑자기 내 상태에 관해 물어봐서 놀랐다.“왜 갑자기 나에 관해 물어봐요?”그러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쳐다보더니 다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전에도 충분히 생각해 줬잖아?”나는 고개를
지금의 고현성은 많이 착해져서 내가 아무리 차갑게 말해도 너그럽게 넘어갔다.지금처럼 내가 비꼬면서 조롱해도 그는 멍하니 물을 뿐이었다.“해외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를 찾아줄까?”“...”나는 침묵했고 그는 싸늘한 내 반응이 더 말하지 않고 잠시만 머물렀다가 떠났다.오래도록 이곳에 억지로 남아있으려 하지는 않았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창으로 갔고 유리창 너머로 별장 앞 가로등 아래 서 있는 고현성이 보였는데 불빛이 그의 실루엣을 길게 끌어당겨 다소 외롭고 슬퍼 보였다.왜 고현성의 모습이 슬퍼 보인다는 착각이 들까.창문에 이마를 살짝 기댄 채 아래층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들었다. 내가 왜 고정재를 거절했는지도 모르겠다.나는 분명 그를 좋아하는데 결국 거절했다. 그리고 거절한 이유도 무척 우스웠다. 정말 좋아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고 이러한 이유로 그를 거절했다.그 생각에 심장이 무척 아팠다.나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는 고현성을 보았고 불을 붙인 그가 부드럽게 연기를 내뿜어내자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때 코트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는데 깊게 찡그린 채 불쾌한 표정을 짓는 걸 보아 또 누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전화를 끊고 다시 담배를 비벼 끄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현성의 비서가 그를 데리러 왔다.비서는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차에 타는 순간 고개를 돌려 내 방을 힐끗 바라보았다.나는 훔쳐본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문득 마음에 찔렸지만 밤에 이 유리창은 그저 검은 가림판이라는 게 떠올랐다.고현성이 차를 타고 떠나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 상황이 무척 우스웠다. 할 일이 없어서 미쳐가는 것 같았다.일어나서 욕실로 가 샤워를 마치고 따뜻한 물에 약을 먹은 뒤 침대에 눕는데 문자 한 통이 왔다.윤다은이 보낸 메시지였다.[수아 언니, 왜 오빠 거절했어요?]윤다은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기에 굳이 해명할 필요는
나는 윤다은의 메시지에 다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새벽까지 밤을 설치자 운성에는 또다시 비가 왔다. 마르지 않는 이 습한 도시는 한 번도 건조한 적이 없이 우울했지만 나는 이런 곳이 좋았다.이곳은 부모님이 머문 곳이자 연씨 가문이 뿌리를 내린 곳이었다.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든 나는 다음날 일어났을 때 머리가 무거웠다.힘겹게 일어나 약을 먹고 어렵게 금색 시스루 원피를 입었다.최희연은 내가 언제나 레드카펫이라도 걸을 사람처럼 산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녀가 이렇게 물었다.“수아야,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않아?”힘들긴 하지만 화려하게 사는 게 익숙하다.3년 동안 고현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는 더없이 나를 가꾸면서 살았고 모든 걸 내려놨을 땐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화장대 앞에 앉기 전에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거울에 비친 볼의 희미한 흉터를 보았다. 더 지울 수가 없어서 화장으로 가려야 했다. 나는 파운데이션을 집어 들고 섬세하게 발랐다.화장을 마치자 비서의 차가 도착했고 나는 높지 않은 굽의 옅은 금색 하이힐을 신었다.어젯밤에 발을 삐끗해서 걷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견딜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운전을 할 수 없어서 특별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오전에는 회사의 최근 업무에 대해 숙지하고 오후에는 유씨 가문과의 미팅 시간이 되었다고 비서가 알려주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서두를 거 없으니 조금 있다가 갈게요.”어젯밤 내가 늦게 도착해서 유서정이 간 건 맞지만 제시간에 도착했어도 바람맞혔을 거다.그들이 오늘 제대로 준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씨 가문을 불렀으니 분명 고씨 가문도 오겠지.우리 연씨 가문의 기를 죽이려고?하지만 난 누가 봐도 좋은 꼴 못 당하는 이런 자리에 결국 가야 한다....나와 비서는 늦게 도착했고 그가 문을 열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와 어젯밤 무례하게 굴던 여자 유지영이 있었고 내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 말했다.“연 대표님, 늦으셨
나는 놀라며 물었다.“운산이요?”혹시 석지훈이 그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한민수가 대답했다.“네. 원태웅 대신 유진이가 유럽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원태웅과 석지훈이 별장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석지훈 요리를 처음 맛보게 생겼네요!”나는 살짝 질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오늘 점심도 오빠가 나한테 해줬거든요.”한민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자랑은 그만하시죠!”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확인했다.석지훈의 게시물은 이미 ‘좋아요’가 백만 개 가까이 달렸고 내 팔로워 수는 10만을 넘어섰다.내 계정 아래에는 ‘원 대인’이라는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흑흑, 연수아 양이 제 댓글을 따라 하다니 감격이에요!”나는 낮게 웃으며 답을 남겼다.“셋째 오빠, 재밌어요?”잠시 후,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야, 그렇게 대놓고 밝히면 어떡해!”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나를 용서한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셋째 오빠, 이렇게 하면 팔로워 늘릴 수 있어요.”그는 요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고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혹시 석지훈이 오늘 나에게 프러포즈하려는 걸까?그런 사람이 대중 앞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할 것 같진 않았다.아마도 파티를 여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었을 테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정도로만 해줘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고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운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9시였다. 그곳에서는 석만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그는 나를 별장 정원안으로 아내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했다.별장 정원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가득했다.네온 불빛 아래에는 하
석지훈은 공적인 자리에서 애정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그의 이름으로 개설된 SNS라니.나는 태블릿을 들고 팔로워가 100명도 안 되던 그의 계정이 순식간에 20만 명으로 늘어나는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오빠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네요!”함 집사는 내 감탄하는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의 명성은 항상 높았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여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그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셀 수 없었죠. 하지만 그 누구도 대표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으며, 그의 연락처를 얻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SNS 계정을 개설하셨으니 팬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곧바로 약혼 소식을 발표했으니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겠지요.”함 집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드물게 자신의 직책을 넘어선 말을 덧붙였다.“대표님 눈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가주님 한 분뿐일 겁니다. 가주님, 제가 몇 년 동안 대표님과 함께 일하며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가주님께서는 평생 믿으셔도 될 사람입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제가 평생을 맡길 만한 사람이에요.”나는 태블릿을 함 집사에게 건네고 휴대폰을 꺼내 계정 이름을 ‘연수아’로 변경했다.그리고 계정과 비밀번호를 함 집사에게 알려주며 인증을 부탁했다.함 집사는 빠르게 나를 석씨 가문의 대표로 인증했다.나는 이 계정으로 석지훈의 게시글을 다시 리트윗하려 했지만 인기 댓글 중 하나를 보고 놀랐다.어떤 사용자가 ‘원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댓글을 남긴 것이었다.[흑흑, 드디어 석 대표님과 연수아 씨가 인연을 맺다니 감격스러운 순간이네요! 팬으로서 축하드립니다. 두 분 행복하세요!]이 귀여운 댓글을 보니 원태웅이 떠올랐다.우리가 사이가 틀어지기 전 그는 이런 성격이었다. 게다가 오늘 낮에 우리가 화해하지 않았던가.댓글 아래에는 나와 석지훈의 사진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나도 여전히 아름답
고정재도 예전에 나에게 경고했었다.함 집사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를 회사의 여러 부서를 둘러보도록 안내했다.석씨 가문의 산업망은 매우 광범위했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부서와 핵심 부서를 둘러볼 수 있었다.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굉장히 특별했다.이 부서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력의 분포를 관리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담당하고 있었다.또한 내가 처음 들어본 최씨 가문에 대한 정보도 이곳에 있었다.최씨 가문은 과거 정치 가문이었으며 상업적 활동은 크지 않았다.그러나 석지훈이 반년 전 쇠퇴한 이후 그들은 그의 유럽 세력을 신속히 흡수하며 부상했고 이제는 진유겸 다음가는 상업 거물이 되었다.나는 이 부서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어 함 집사에게 물었다.“왜 전에 석씨 가문에 이런 핵심 부서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때 준 자료에도 없었잖아요.”함 집사는 침착하게 설명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수백 년간 쌓아온 석씨 가문의 권력 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가주님께서 가문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석 집사님이 떠나시기 전 가주님을 점진적으로 교육하라는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배우실 수 있습니다.”나는 그가 숨긴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고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여기 있던데 지훈 오빠에 대한 자료는 없어요?”“아직 수집하지 못했습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그렇게 빠르게 업데이트되는데 왜 지훈 오빠 자료는 그렇지 않나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아닙니다. 다만 석 대표님 측의 보안이 매우 철저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면 더 이상 조사할 필요 없어요.”함 집사는 놀라며 말했다.“그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함 집사님, 이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
“저는 몰라요. 셋째 오빠는 알고 있어요?”내 말에 전화 너머에서 원태웅이 설명했다.“나와 한민수는 지훈이 형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기에 그가 석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나중에 윤 비서에게 들으니 형이 예전에 친부모를 찾으려 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때는 제대로 찾지 못했고 단서 몇 가지만 알았던 모양이야.”“이후 유럽 세력 재건으로 바빠서 그 일을 잠시 접어둔 것 같아. 나는 그 일에 마음이 쓰이다가 그를 대신해 조사를 했고 얼마 전 그의 친부모를 찾았어. 그런데 아주 평범한 한인 가정이더라고...”석지훈이 나웨이에서 친부모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때 나는 한민수의 속임수로 나웨이에 끌려가기도 했다.그곳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바로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둘째 오빠도 알아요?”원태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왜요?”“그 부부는 지훈이 형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이 더 있어. 막내는 겨우 아홉 살이고.내가 그냥 손님 신분으로 그 집에 가봤는데 그들은 정말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과거에 대해 물어봤어. 그들은 확실히 갓 태어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어...”“내가 그 아이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들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그 아이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였고 그들에게 짐이었을 수도 있거든.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을 거라고 했어. 아마 그들은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받는 걸 두려워할 거야.”원태웅은 석지훈이 실망할까 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태웅은 내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말했다.“과거 일은 더 이상 너와 따지지 않을게. 둘째 형이 이런 기회를 준 덕분에 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거든.”
석지훈이 나를 달래듯 말했다.“착하지.”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가져왔다.원태웅의 번호를 찾아내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나는 원태웅을 두려워했다. 그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그는 항상 나를 냉소적으로 대했었다.용기를 내어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그제야 그가 나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사실을 석지훈에게 알렸다.그러나 그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대신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그의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니!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언제 바꾼 거예요?”그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할 일 해.”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꼭 내가 셋째 오빠한테 말해야 해요?”“응, 상황이 긴박해.”긴박한 상황이라 해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만큼 급하지는 않을 텐데.나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원태웅에게 전화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그는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사실 이건 오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본래 내 잘못이었고 원태웅은 나에게 오랫동안 앙금을 품고 있었다.석지훈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했고 그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열고 원태웅의 번호를 찾았다.한민수는 예전에 나에게 말했었다.“원태웅이 끝내 널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스스로 굽힐 필요는 없어.”하지만 그는 석지훈의 형제였고 석지훈은 나의 남자였다.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석지훈은 나에게 화해의 기회를 준 것이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석지훈의 번호라서 그런지 그는 전화를 굉장히 빠르게 받았다.“형!”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오빠.”원태웅이 놀
좋았던 기분은 석지훈 어머니의 메시지를 본 뒤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나는 석지훈이 눈치채는 것이 두려워 화면이 꺼질 때까지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고 기다렸다.그는 나를 말없이 한참 안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나를 내려놓고 서재를 나섰다.나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고 그가 갑자기 멈춰서서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도 멈춰 서며 물었다.“왜 그래요?”그가 부드럽게 말했다.“고양이처럼 따라다니지 말고.”나는 무심코 대꾸했다.“고양이는 도도해요. 오빠가 말하는 건 아마 강아지겠죠.”말을 하고 나서 순간적으로 입을 막았다. 석지훈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못됐어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그가 계단 끝에 다다르자 뒤돌아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똥강아지,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해?”맙소사. 이 말은 정말 심쿵이었다.내 마음을 정확히 저격한 이 말에 나는 활짝 웃으며 달려가 그의 허리를 안았다.“오빠.”그는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게 대답했다.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나 오빠 좋아해요.”석지훈은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웃음 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그의 턱 밑에 얼굴을 기대며 물었다.“그럼 오빠는 나 좋아해요?”그가 차분하게 말했다.“응.”나는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응이라니,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아니에요?”내가 계속 물으니,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만 좀 해.”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어서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하지만 드물게 보이는 그의 어색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 나는 장난스럽게 계속 물었다.“그럼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에요?”결국 석지훈은 말없이 나를 안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나는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 살짝 서운했지만 그의 성격을 알기에 더 이상 집요하게 묻지는 않았다.계단을
고정재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담현아와 잘 되길 바랐다.잠시 후, 고정재에게서 답장이 왔다.[고마워, 꼬마 아가씨.]나는 휴대폰을 넣고 눈을 감고 쉬었다. 차 안은 내내 조용했다.석지훈은 대화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어려웠다.동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너무 고팠기에 석지훈은 곧바로 차를 몰아 석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멀리서 저택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과거에 자신을 석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이라 칭했던 여자였다.석지훈도 그 여자를 발견한 듯했고 그는 차를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운 후 안전벨트를 풀며 나에게 말했다.“저 여자가 날 찾은 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일 거야.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다.석지훈은 차에서 내려 안정된 발걸음으로 석나은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담담했지만 석나은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반면 석지훈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에서는 냉랭함만이 느껴졌다.석나은은 석지훈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마디로 응답했다.내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석나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세워둔 차를 타고 떠났다.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석지훈에게 다가갔다.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두웠고 나는 그의 손바닥을 살며시 잡으며 물었다.“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어머니가 나보고 다시 운성시로 오라고 하셨어.”‘우리는 방금 돌아왔는데.’나는 그에게 물었다.“그럼 갈 거예요?”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당분간은 가지 않을 거야.”석지훈은 나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서재로 들어갔고 나는 아래층에서 차를 한 잔 우려 그의 서재로 가져갔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차가운
윤다은은 과거에 고정재를 깊이 사랑했다. 몇 년간 그를 쫓아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해했지만 얼마 전 어렵게 고정재를 포기하고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내가 메시지에 답하지 않자 윤다은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나 임신한 지 거의 두 달 됐어요.”그녀가 결혼하려는 이유였다.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 남자를 사랑해?]며칠 전 그녀가 의사와 통화하던 모습을 보며 그녀가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하지만 그 마음이 정말 사랑일까?[네. 사랑해요.]윤다은의 대답이었다.나는 그녀가 사랑으로 결혼하길 바랐고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랐다.[축하해, 다은 씨.]윤다은은 곧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수아 언니, 내 들러리 좀 해줄래요? 희연 선배도 부르려고요. 아, 맞다. 담현아도 초대하려고 해요.]윤다은이 담현아까지 초대할 생각이라니.그 둘이 그렇게 친했었나?[좋아, 어디에서 결혼할 거야?][금운시요. 우리 둘 다 거기에 가족이 있거든요.][알았어. 희연이랑 같이 갈게.][고마워요, 수아 언니.]나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고 곧바로 최희연에게 윤다은의 결혼 소식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최희연이 바로 답장했다.[나도 방금 알았어. 한 달도 안 남았더라. 그런데 우리 둘이 누군가의 들러리를 서는 건 처음 아닌가? 너는 축의금을 얼마나 할 생각이야?][윤다은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서 적당한 금액이 얼마인지 모르겠어. 그때 가서 정해야지. 고씨 가문의 형제들도 참석할 거야.]나는 지금 고현성과 마주치는 게 가장 싫었다.최희연이 물었다.[석지훈 씨도 너와 함께 가는 거야?]나는 옆에서 운전 중인 석지훈을 흘깃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며 답장했다.[잘 모르겠어.]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겠지.산 아래로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담현아가 메시지를 보냈다.[고정재 씨의 여동생이 나를 들러리로 초대했어요. 그런데 나랑 그렇게 친
“친어머니를 원망하냐고요?”전에 나 자신에게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내가 석씨 가문을 맡은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그 당시 나는 석지훈의 어머니에게 한동안 괴롭힘을 당했었고 그녀가 아들만을 위한다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그러나 내가 그 여자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오히려 안도했으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마음에서 내려놓은 것처럼.나는 고개를 저었다.“사람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저를 포기한 것도 그분의 선택이었던 것처럼요. 게다가 저는 그분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원망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저에게 신장을 주셨으니 제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그분 덕분이잖아요.”그렇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분을 원망할 수 있을까?이 나이가 되고 나서야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내가 아이를 낳아보니 그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해도, 나는 그 여자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니까.그녀의 마음속에서 나는 결코 그녀의 딸이 아니었다.‘그 여자가 신장을 기증해 나를 구한 것도 아마 죄책감 때문이겠지. 어찌 됐든 지금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잘 알고 있구나.”나는 말없이 웃었다. 해는 이미 완전히 떠올랐고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흔들의자에 앉아 운성시에서 보기 드문 아침 햇살을 감상했다.나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좋아해요?”이곳은 곳곳이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석지훈이 많은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응, 조용한 곳이니까.”그것뿐일까?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어젯밤 꾼 꿈을 떠올렸다.“나 어젯밤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두 아이와 승아랑 함께 석씨 가문 저택에서 살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