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벼운 키스였다.나는 놀란 두 눈으로 반경우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나와 연애하면서 날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물론 나중에 다른 여자를 떠났던 것처럼 언제든지 날 떠나도 되었다.내가 물으려던 그때 반경우가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잠깐 쉴 수 있는 뗏목이라도 찾은 것만 같았다.반경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날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아주 매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가 웃으면서 보자 반경우가 얼굴을 어루만졌다.“술맛 어때?”나는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술을 먹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반경우는 아무 말도 없다가 나를 데리고 술집을 나왔다.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나의 모습에 반경우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웃었다.“순진하긴. 자기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내가 물었다.“뭔데?”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해주고는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오히려 그의 진지한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대체 뭔데?”반경우가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나랑 키스한 느낌이 어땠어?”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를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동성으로 온 목적이 반경우였으니까.우리는 식사하러 한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근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반경우는 늘 똑같은 삶을 보냈고 나에게 앞으로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당분간은 운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그곳에는 만나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가 갑자기 말했다.“조민수 연락처 알려줘.”나는 컵을 잡고 물었다.“그건 왜?”“내가 교수님을 몇 분 아는데 자궁암에 관해서 연구가 깊어. 소개해주려고.”잠시 후 반경우가 갑자기 화를 냈다.“이 세상에 너보다 더 어리석은 애도 없을 거야. 남자 하나 때문에 널 이렇게까지 망치다니. 그나저나 고정재는... 포기할 거야?”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을 반경우에게 다 말했다. 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반경우가 여유롭게 물었다.“이유는?”“다른 사람한테 사랑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고 싶어. 가짜여도 상관없어.”지금까지 연애하고 싶은 이유가 늘 이것이었다.가로등이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반경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이 녀석아, 사랑받고 싶으면 그 사랑 내가 주면 되잖아. 근데 너랑 연애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난 평등한 사랑을 원하는데 네 마음속에는 내가 없잖아...”반경우가 절대 나를 거절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거절당했다. 그는 나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이렇게 말했다.“난 널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수 있어. 그리고 남자 친구처럼 연애도 하고 결혼할 수도 있고. 근데 넌 날 사랑해?”줄곧 비혼주의자라고 했던 반경우가 나와는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고 내가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이었다.나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미안. 내가 괜한 말 했어.”반경우는 시선을 늘어뜨렸고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일찍 쉬어. 내일 보자.”반경우가 떠난 후 나의 기분은 계속 복잡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것만 같았다. 그가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경우에게 문자를 보냈다.[날 사랑해?]날 사랑한다면 바로 동성시를 떠날 생각이었다. 반경우가 답장을 보냈다.[아직은 아니야.]진짜인지 확인할 수 없는 답장을 보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던 그때 길가에 서 있는 검은색 벤츠를 발견했다. 차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내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남자는 싸늘한 얼굴로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반경우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연수아, 거리를 누비면서 연애할 남자는 찾으니까 즐거워?”‘내가 즐겁냐고?’고현성이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나는 연애할 남자를 찾았지만 또 그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게 두려웠
자세히 들어보면 말투에 나약함이 묻어있었고 지금 마주한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예전에 이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좋아서 펄쩍 뛰었을 것이다.나는 두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고현성이 나를 내려놓고 덤덤하게 물었다.“방 번호가 몇 호야?”나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냥 방 하나 더 잡아요.”고현성은 내 말을 무시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 앞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음 곧장 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내 방 번호까지 알았어요?”‘이건 희연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는데?’고현성은 넥타이를 풀면서 차갑게 말했다.“네가 든 이 호텔이 우리 그룹 거거든. 그리고 하나 더. 최희연 씨는 나랑 연락한 적이 없어.”나는 놀란 두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러니까 이 호텔에 체크인했을 때부터 내가 동성에 있다는 걸 알았단 말이에요? 언제 왔어요?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요?”분명 고현성을 떠나고 싶어서 운성을 떠났는데 바보처럼 그의 영역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고현성은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을 냈었는데.나는 답답한 마음에 캐리어를 꺼내 짐을 챙겼다. 고현성은 말리지 않고 내가 다 정리하고 나서야 덤덤하게 말했다.“넌 도망가지 못해. 네가 어딜 가든 다 찾을 수 있어. 아무튼 남는 게 시간이니까.”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우리 둘은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계속 엮였다. 그리고 나의 문제가 아니라 뻔뻔스럽게 매달리는 고현성 때문이었다.기억을 잃은 고현성은 나에게 심하게 집착했다.“나랑 재결합하자. 내 아내가 되어줘.”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했다.“싫어요.”평생 다시는 그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았다.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고현성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나의 얼굴을 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덤덤하게 웃었다.“무슨 근거로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고현성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강을 쳐다보면서 매력적인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넌 연애하고 싶다고 했고 사랑받고 싶다고 했어. 그건 내가 다 줄 수 있어. 그리고 난 기억을 되찾고 싶고. 딱 어울리잖아. 수아야, 우리 서로한테 기회를 주자.”내가 원하는 연애와 사랑을 전부 나에게 줄 수 있다고 했다...전에 나에게 준 적이 있었지만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나의 세상에서 떠나버렸다. 그 후 다시 만났을 땐 내 친구를 감옥에 보냈을 때였다. 내가 아무리 빌어도 전혀 끄떡없던 그였다. 내가 아이로 간절하게 부탁해도 말이다.“현성 씨, 2년 전에 당신 때문에 아이를 잃었을 때도 난 뭐라 하지 않았어요. 의사가 나한테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해도 가만히 있었고요. 나한테서 엄마가 될 자격을 빼앗은 거로 희연이 한 번 봐달라는데 그것도 안 돼요?”그때 고현성은 임지혜를 끔찍이도 아꼈고 나에게는 이상하리만큼 잔인했다. 비교하니 내가 너무 가여워 보였다. 아무튼 그때의 고현성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사랑이 없는 남자가 무엇을 하든 다 이해가 되긴 했지만 용서는 안 되었다. 어쨌거나 내가 그의 아내였을 때도 이러했으니까.고현성은 아내인 나를 존중한 적이라곤 없었다.내가 고현성의 옆으로 다가가 깍지를 끼자 그가 화들짝 놀랐다. 나는 깍지를 들어 보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왜 나한테 부족한 게 당신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죠?”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나는 절대 고씨 가문 형제와 연애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물었다.“우리 사이에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했죠?”고현성이 손을 어찌나 꽉 잡았는지 손바닥이 다 하얘졌다. 나는 애써 차분한 척하며 웃었다.“9년 전 내가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남자를 나의 신념이라 생각하고 맨날 쫓아다녔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세상에서 사라졌죠. 그러다가 6년 후에 우리 아빠가 나한테 고씨 가문과
창밖에 또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강에 떨어지면서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렸다. 동성의 날씨는 운성과 비슷해서 눈과 비가 자주 내렸고 공기도 매우 습했다.고현성이 고개를 들었다.“연수아, 말끝마다 고정재를 사랑한다고 한 거 알아?”“맞아요. 난 고정재 씨를 사랑해요. 그래서 당신이 매달리는 게 너무 짜증 나요.”고현성이 언성을 높였다.“닥쳐, 연수아.”내가 빈정거리며 물었다.“왜요? 난 고정재 씨 얘기 꺼내면 안 돼요? 사랑한다고 하면 안 돼요? 진화 그룹이 3년 동안 선양 그룹 덕에 크게 발전한 거 잊었어요? 당신이 이걸 가질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짝퉁이어서예요. 근데 현성 씨는 당신 것이 아니었던 사랑마저도 차버렸죠. 그러면서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재결합하자고 하는 건데요?”나는 고현성을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에 모진 말을 내뱉었다.‘재결합은 개뿔.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 같아? 난 뭐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줄 알아? 재결합은 평생 꿈도 꾸지 마.’나의 모진 말에 고현성은 비틀거리며 침대에 앉았고 목소리마저 갈라졌다.“아무리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나의 존재를 이렇게 부정해선 안 되지...”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떻게 하면 나한테 상처가 되는지 잘 알고 있구나. 아주 내 심장을 쿡쿡 찔렀어. 이러면 복수의 쾌감이라도 들어?”이 말을 들으니 그가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더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 나는 두 눈을 감았다.“복수한 적 없어요.”나는 그저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이었다. 고현성이 나에게 준 상처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안되었다.“우리 형 고정재 말이야.”고현성이 갑자기 고정재 얘기를 꺼냈다.“아무한테나 다 다정한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구보다 매정한 사람이야. 성격이 오만해서 다른 사람이 눈에 차지 않거든. 우리 어머니가 입양한 딸 윤다은도 형을 오랫동안 좋아했고 계속 쫓아다녔는데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했어. 다은이가 조금이라도 선을
그냥 빨리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하지만 나는 그때의 고현성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하고 있다는 걸 몰랐고 그는 우리의 과거와 나를 향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그저 다른 방식으로 나와 다시 알아가고 싶었던 거다.그런데 나는 그를 가짜라고 하면서 그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다.그때의 고현성은 과거의 나처럼 속으로는 수없이 흔들리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상대에게 차갑게 거절당하고 상대의 말에 거듭 상처받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다.그때 고현성의 깊은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고현성은 떠나지 않았고 내가 캐리어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빗속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호수처럼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넌 여기 있어. 내가 갈게.”말과 함께 그는 긴 다리를 뻗어 가랑비 사이를 내디뎠고 쓸쓸한 그의 뒷모습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내리는 가랑비를 바라보며 내 눈앞도 흐려져 갔다.나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서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반나절 동안 고현성과 다툰 탓인지 심적으로 지쳐있었던 나는 항암 약을 꺼내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새 악몽을 꾸고 간간이 깨어나며 푹 자지 못했다.아침에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반경우가 연락이 와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자기, 이따 시간 돼?”예전 같으면 시간 있다고 했겠지만 어젯밤 사건 이후 마음 한구석에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졌고 나중에 더 깊게 얽힐 것 같아 거절했다.“나 곧 동성 떠날 거야.”반경우는 당황한 듯 물었다.“이제 막 동성에 왔는데 왜 갑자기 떠나?”나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이제 회사도 내 명의로 되어 있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 건강 검진받으러 상주에 가야 한다고 민수 오빠가 계속 당부했어.”조민수의 생활 스케줄에서 늘 최우선은 내 일이었고 그는 자신이 실수하는 것보다 내 몸이 망가지는 걸 더 용납하지 않았다.운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가 당부했었다.“
나와 반경우가 춤추고 키스하는 영상이었는데 누가 찍어서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경우가 나의 새로운 연인이라고 직접 해명하지 않는 이상 연씨 가문에는 확실한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그렇게 말해야만 사람들도 넘어갈 것이다.나는 어이가 없었다. 연예인도 아닌데 대기업 집안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고 전에 이혼한 것도 인기 검색어에 올랐었다.하지만 나는 그 영상이 연씨 가문에 미칠 영향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흰 셔츠에 넥타이는 없이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반경우가 점잖고 멋들어진 모습으로 나와 격정적인 춤을 추고 있었지만 잘생긴 그의 모습에 팬들은 그렇게까지 욕하지 않았다.그리고 나는 여태껏 본 내 모습 중에 가장 불처럼 뜨겁고 정열적이었다.그런 내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반경우는 나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댓글을 클릭해서 읽어보니 다들 나를 뻔뻔하다는 둥 욕하기 바빴다. 금방 이혼하고 또 새로운 남자를 만난 데다 내가 적극적으로 동성에 남자를 찾으러 갔다는 둥 아무튼 듣기 어려운 말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방구석 네티즌들은 참 할 일이 없나 보다.잠시 생각한 나는 그 영상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피곤한 상태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운 채 자고 깨기를 반복하며 비몽사몽으로 보내다가 오후가 되어 비서에게 연락이 왔다.전화를 받으니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어제 저희가 서당 유씨 가문 쪽에서 입찰을 따냈습니다. 이번 협업이 회사엔 중대한 사항인데 유씨 가문 쪽에서 갑자기 말을 바꾸면서 이미 협업을 취소하고 진씨 가문과 손잡을 예정이랍니다.”진씨 가문은 예전에도 적지 않게 접점이 있었기에 운성에서는 연씨, 고씨 다음으로 대기업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씨 가문에서 이번 계약을 파기하고 진씨 가문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연씨 가문보다 뒤처지는 그쪽을 유씨 가문이 선택한 이유가 뭘까.나는 비서에게 물었다.“이유를 알아요?”비서는 망설이다가 말했다.“고씨 가
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이분은 왜 여기에?”“대표님을 기다리려고 특별히 여기 머무는 것 같아요.”그녀를 보니 분명 이유가 있어서 여기 있는 것 같아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몇 살이세요? 마흔 됐나요?”그 말에 상대는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슨 헛소리에요?”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비서에게 말했다.“가죠.”나는 저런 사람들을 경멸한다.내가 가려고 하자 유지영은 나를 막으려 했고 비서가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나는 비서의 손에서 자동차 키를 빼앗아 주차장으로 향했다.비서가 날 데리러 온 차는 롤스로이스였는데 나는 먹는 것도, 쓰는 것도 최고만 누리면서 나 자신을 무척 아꼈다. 안 그러면 연씨 가문에서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다 어디에 쓰겠나.차를 몰고 연씨 별장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최희연에게 연락이 왔다.그녀가 물었다.[아직 동성에 있어?][아니, 운성이야.]차에서 내리는데 또다시 문자가 왔다.[너 보러 동성 가려고 했는데.]나는 물음표를 보내며 물었다.[그렇게 한가해?]지금 최희연은 진서준의 곁에 있을 텐데.[나 헤어질 것 같아.]나는 물음표를 몇 개 보냈고 최희연은 실망하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덧붙였다.[진서준이 며칠 전에 쪽지 하나 남기고 사라졌어. 나보고 자기를 잊으라네.]나는 최희연과 진서준 사이가 이젠 안정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그 남자, 그 맑은 눈의 남자...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나는 고민하다가 문자를 보냈다.[강해온 씨한테 알아보라고 할까?]최희연이 답장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와서 밥이나 먹자.]가고 싶지 않았지만 최희연이 기분이 안 좋아 동의했다.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볍게 화장을 한 뒤에 차 키를 들고 문을 나섰다.여전히 검은색 롤스로이스를 몰고 갔는데 최희연이 그걸 보고 부자라며 말했고 옆에는 윤다은도 같이 있었다. 나는 문득 고현성이 그녀가 고정재를 좋아한다고 말해줬던 게 떠올랐고 떠올리지 않으려
나는 놀라며 물었다.“운산이요?”혹시 석지훈이 그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한민수가 대답했다.“네. 원태웅 대신 유진이가 유럽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원태웅과 석지훈이 별장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석지훈 요리를 처음 맛보게 생겼네요!”나는 살짝 질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오늘 점심도 오빠가 나한테 해줬거든요.”한민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자랑은 그만하시죠!”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확인했다.석지훈의 게시물은 이미 ‘좋아요’가 백만 개 가까이 달렸고 내 팔로워 수는 10만을 넘어섰다.내 계정 아래에는 ‘원 대인’이라는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흑흑, 연수아 양이 제 댓글을 따라 하다니 감격이에요!”나는 낮게 웃으며 답을 남겼다.“셋째 오빠, 재밌어요?”잠시 후,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야, 그렇게 대놓고 밝히면 어떡해!”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나를 용서한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셋째 오빠, 이렇게 하면 팔로워 늘릴 수 있어요.”그는 요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고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혹시 석지훈이 오늘 나에게 프러포즈하려는 걸까?그런 사람이 대중 앞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할 것 같진 않았다.아마도 파티를 여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었을 테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정도로만 해줘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고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운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9시였다. 그곳에서는 석만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그는 나를 별장 정원안으로 아내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했다.별장 정원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가득했다.네온 불빛 아래에는 하
석지훈은 공적인 자리에서 애정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그의 이름으로 개설된 SNS라니.나는 태블릿을 들고 팔로워가 100명도 안 되던 그의 계정이 순식간에 20만 명으로 늘어나는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오빠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네요!”함 집사는 내 감탄하는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의 명성은 항상 높았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여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그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셀 수 없었죠. 하지만 그 누구도 대표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으며, 그의 연락처를 얻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SNS 계정을 개설하셨으니 팬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곧바로 약혼 소식을 발표했으니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겠지요.”함 집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드물게 자신의 직책을 넘어선 말을 덧붙였다.“대표님 눈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가주님 한 분뿐일 겁니다. 가주님, 제가 몇 년 동안 대표님과 함께 일하며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가주님께서는 평생 믿으셔도 될 사람입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제가 평생을 맡길 만한 사람이에요.”나는 태블릿을 함 집사에게 건네고 휴대폰을 꺼내 계정 이름을 ‘연수아’로 변경했다.그리고 계정과 비밀번호를 함 집사에게 알려주며 인증을 부탁했다.함 집사는 빠르게 나를 석씨 가문의 대표로 인증했다.나는 이 계정으로 석지훈의 게시글을 다시 리트윗하려 했지만 인기 댓글 중 하나를 보고 놀랐다.어떤 사용자가 ‘원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댓글을 남긴 것이었다.[흑흑, 드디어 석 대표님과 연수아 씨가 인연을 맺다니 감격스러운 순간이네요! 팬으로서 축하드립니다. 두 분 행복하세요!]이 귀여운 댓글을 보니 원태웅이 떠올랐다.우리가 사이가 틀어지기 전 그는 이런 성격이었다. 게다가 오늘 낮에 우리가 화해하지 않았던가.댓글 아래에는 나와 석지훈의 사진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나도 여전히 아름답
고정재도 예전에 나에게 경고했었다.함 집사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를 회사의 여러 부서를 둘러보도록 안내했다.석씨 가문의 산업망은 매우 광범위했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부서와 핵심 부서를 둘러볼 수 있었다.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굉장히 특별했다.이 부서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력의 분포를 관리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담당하고 있었다.또한 내가 처음 들어본 최씨 가문에 대한 정보도 이곳에 있었다.최씨 가문은 과거 정치 가문이었으며 상업적 활동은 크지 않았다.그러나 석지훈이 반년 전 쇠퇴한 이후 그들은 그의 유럽 세력을 신속히 흡수하며 부상했고 이제는 진유겸 다음가는 상업 거물이 되었다.나는 이 부서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어 함 집사에게 물었다.“왜 전에 석씨 가문에 이런 핵심 부서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때 준 자료에도 없었잖아요.”함 집사는 침착하게 설명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수백 년간 쌓아온 석씨 가문의 권력 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가주님께서 가문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석 집사님이 떠나시기 전 가주님을 점진적으로 교육하라는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배우실 수 있습니다.”나는 그가 숨긴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고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여기 있던데 지훈 오빠에 대한 자료는 없어요?”“아직 수집하지 못했습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그렇게 빠르게 업데이트되는데 왜 지훈 오빠 자료는 그렇지 않나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아닙니다. 다만 석 대표님 측의 보안이 매우 철저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면 더 이상 조사할 필요 없어요.”함 집사는 놀라며 말했다.“그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함 집사님, 이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
“저는 몰라요. 셋째 오빠는 알고 있어요?”내 말에 전화 너머에서 원태웅이 설명했다.“나와 한민수는 지훈이 형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기에 그가 석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나중에 윤 비서에게 들으니 형이 예전에 친부모를 찾으려 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때는 제대로 찾지 못했고 단서 몇 가지만 알았던 모양이야.”“이후 유럽 세력 재건으로 바빠서 그 일을 잠시 접어둔 것 같아. 나는 그 일에 마음이 쓰이다가 그를 대신해 조사를 했고 얼마 전 그의 친부모를 찾았어. 그런데 아주 평범한 한인 가정이더라고...”석지훈이 나웨이에서 친부모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때 나는 한민수의 속임수로 나웨이에 끌려가기도 했다.그곳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바로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둘째 오빠도 알아요?”원태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왜요?”“그 부부는 지훈이 형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이 더 있어. 막내는 겨우 아홉 살이고.내가 그냥 손님 신분으로 그 집에 가봤는데 그들은 정말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과거에 대해 물어봤어. 그들은 확실히 갓 태어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어...”“내가 그 아이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들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그 아이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였고 그들에게 짐이었을 수도 있거든.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을 거라고 했어. 아마 그들은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받는 걸 두려워할 거야.”원태웅은 석지훈이 실망할까 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태웅은 내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말했다.“과거 일은 더 이상 너와 따지지 않을게. 둘째 형이 이런 기회를 준 덕분에 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거든.”
석지훈이 나를 달래듯 말했다.“착하지.”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가져왔다.원태웅의 번호를 찾아내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나는 원태웅을 두려워했다. 그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그는 항상 나를 냉소적으로 대했었다.용기를 내어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그제야 그가 나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사실을 석지훈에게 알렸다.그러나 그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대신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그의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니!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언제 바꾼 거예요?”그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할 일 해.”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꼭 내가 셋째 오빠한테 말해야 해요?”“응, 상황이 긴박해.”긴박한 상황이라 해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만큼 급하지는 않을 텐데.나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원태웅에게 전화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그는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사실 이건 오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본래 내 잘못이었고 원태웅은 나에게 오랫동안 앙금을 품고 있었다.석지훈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했고 그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열고 원태웅의 번호를 찾았다.한민수는 예전에 나에게 말했었다.“원태웅이 끝내 널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스스로 굽힐 필요는 없어.”하지만 그는 석지훈의 형제였고 석지훈은 나의 남자였다.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석지훈은 나에게 화해의 기회를 준 것이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석지훈의 번호라서 그런지 그는 전화를 굉장히 빠르게 받았다.“형!”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오빠.”원태웅이 놀
좋았던 기분은 석지훈 어머니의 메시지를 본 뒤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나는 석지훈이 눈치채는 것이 두려워 화면이 꺼질 때까지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고 기다렸다.그는 나를 말없이 한참 안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나를 내려놓고 서재를 나섰다.나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고 그가 갑자기 멈춰서서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도 멈춰 서며 물었다.“왜 그래요?”그가 부드럽게 말했다.“고양이처럼 따라다니지 말고.”나는 무심코 대꾸했다.“고양이는 도도해요. 오빠가 말하는 건 아마 강아지겠죠.”말을 하고 나서 순간적으로 입을 막았다. 석지훈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못됐어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그가 계단 끝에 다다르자 뒤돌아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똥강아지,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해?”맙소사. 이 말은 정말 심쿵이었다.내 마음을 정확히 저격한 이 말에 나는 활짝 웃으며 달려가 그의 허리를 안았다.“오빠.”그는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게 대답했다.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나 오빠 좋아해요.”석지훈은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웃음 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그의 턱 밑에 얼굴을 기대며 물었다.“그럼 오빠는 나 좋아해요?”그가 차분하게 말했다.“응.”나는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응이라니,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아니에요?”내가 계속 물으니,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만 좀 해.”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어서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하지만 드물게 보이는 그의 어색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 나는 장난스럽게 계속 물었다.“그럼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에요?”결국 석지훈은 말없이 나를 안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나는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 살짝 서운했지만 그의 성격을 알기에 더 이상 집요하게 묻지는 않았다.계단을
고정재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담현아와 잘 되길 바랐다.잠시 후, 고정재에게서 답장이 왔다.[고마워, 꼬마 아가씨.]나는 휴대폰을 넣고 눈을 감고 쉬었다. 차 안은 내내 조용했다.석지훈은 대화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어려웠다.동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너무 고팠기에 석지훈은 곧바로 차를 몰아 석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멀리서 저택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과거에 자신을 석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이라 칭했던 여자였다.석지훈도 그 여자를 발견한 듯했고 그는 차를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운 후 안전벨트를 풀며 나에게 말했다.“저 여자가 날 찾은 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일 거야.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다.석지훈은 차에서 내려 안정된 발걸음으로 석나은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담담했지만 석나은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반면 석지훈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에서는 냉랭함만이 느껴졌다.석나은은 석지훈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마디로 응답했다.내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석나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세워둔 차를 타고 떠났다.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석지훈에게 다가갔다.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두웠고 나는 그의 손바닥을 살며시 잡으며 물었다.“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어머니가 나보고 다시 운성시로 오라고 하셨어.”‘우리는 방금 돌아왔는데.’나는 그에게 물었다.“그럼 갈 거예요?”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당분간은 가지 않을 거야.”석지훈은 나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서재로 들어갔고 나는 아래층에서 차를 한 잔 우려 그의 서재로 가져갔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차가운
윤다은은 과거에 고정재를 깊이 사랑했다. 몇 년간 그를 쫓아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해했지만 얼마 전 어렵게 고정재를 포기하고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내가 메시지에 답하지 않자 윤다은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나 임신한 지 거의 두 달 됐어요.”그녀가 결혼하려는 이유였다.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 남자를 사랑해?]며칠 전 그녀가 의사와 통화하던 모습을 보며 그녀가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하지만 그 마음이 정말 사랑일까?[네. 사랑해요.]윤다은의 대답이었다.나는 그녀가 사랑으로 결혼하길 바랐고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랐다.[축하해, 다은 씨.]윤다은은 곧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수아 언니, 내 들러리 좀 해줄래요? 희연 선배도 부르려고요. 아, 맞다. 담현아도 초대하려고 해요.]윤다은이 담현아까지 초대할 생각이라니.그 둘이 그렇게 친했었나?[좋아, 어디에서 결혼할 거야?][금운시요. 우리 둘 다 거기에 가족이 있거든요.][알았어. 희연이랑 같이 갈게.][고마워요, 수아 언니.]나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고 곧바로 최희연에게 윤다은의 결혼 소식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최희연이 바로 답장했다.[나도 방금 알았어. 한 달도 안 남았더라. 그런데 우리 둘이 누군가의 들러리를 서는 건 처음 아닌가? 너는 축의금을 얼마나 할 생각이야?][윤다은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서 적당한 금액이 얼마인지 모르겠어. 그때 가서 정해야지. 고씨 가문의 형제들도 참석할 거야.]나는 지금 고현성과 마주치는 게 가장 싫었다.최희연이 물었다.[석지훈 씨도 너와 함께 가는 거야?]나는 옆에서 운전 중인 석지훈을 흘깃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며 답장했다.[잘 모르겠어.]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겠지.산 아래로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담현아가 메시지를 보냈다.[고정재 씨의 여동생이 나를 들러리로 초대했어요. 그런데 나랑 그렇게 친
“친어머니를 원망하냐고요?”전에 나 자신에게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내가 석씨 가문을 맡은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그 당시 나는 석지훈의 어머니에게 한동안 괴롭힘을 당했었고 그녀가 아들만을 위한다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그러나 내가 그 여자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오히려 안도했으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마음에서 내려놓은 것처럼.나는 고개를 저었다.“사람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저를 포기한 것도 그분의 선택이었던 것처럼요. 게다가 저는 그분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원망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저에게 신장을 주셨으니 제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그분 덕분이잖아요.”그렇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분을 원망할 수 있을까?이 나이가 되고 나서야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내가 아이를 낳아보니 그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해도, 나는 그 여자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니까.그녀의 마음속에서 나는 결코 그녀의 딸이 아니었다.‘그 여자가 신장을 기증해 나를 구한 것도 아마 죄책감 때문이겠지. 어찌 됐든 지금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잘 알고 있구나.”나는 말없이 웃었다. 해는 이미 완전히 떠올랐고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흔들의자에 앉아 운성시에서 보기 드문 아침 햇살을 감상했다.나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좋아해요?”이곳은 곳곳이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석지훈이 많은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응, 조용한 곳이니까.”그것뿐일까?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어젯밤 꾼 꿈을 떠올렸다.“나 어젯밤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두 아이와 승아랑 함께 석씨 가문 저택에서 살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