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또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강에 떨어지면서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렸다. 동성의 날씨는 운성과 비슷해서 눈과 비가 자주 내렸고 공기도 매우 습했다.고현성이 고개를 들었다.“연수아, 말끝마다 고정재를 사랑한다고 한 거 알아?”“맞아요. 난 고정재 씨를 사랑해요. 그래서 당신이 매달리는 게 너무 짜증 나요.”고현성이 언성을 높였다.“닥쳐, 연수아.”내가 빈정거리며 물었다.“왜요? 난 고정재 씨 얘기 꺼내면 안 돼요? 사랑한다고 하면 안 돼요? 진화 그룹이 3년 동안 선양 그룹 덕에 크게 발전한 거 잊었어요? 당신이 이걸 가질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짝퉁이어서예요. 근데 현성 씨는 당신 것이 아니었던 사랑마저도 차버렸죠. 그러면서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재결합하자고 하는 건데요?”나는 고현성을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에 모진 말을 내뱉었다.‘재결합은 개뿔.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 같아? 난 뭐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줄 알아? 재결합은 평생 꿈도 꾸지 마.’나의 모진 말에 고현성은 비틀거리며 침대에 앉았고 목소리마저 갈라졌다.“아무리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나의 존재를 이렇게 부정해선 안 되지...”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떻게 하면 나한테 상처가 되는지 잘 알고 있구나. 아주 내 심장을 쿡쿡 찔렀어. 이러면 복수의 쾌감이라도 들어?”이 말을 들으니 그가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더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 나는 두 눈을 감았다.“복수한 적 없어요.”나는 그저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이었다. 고현성이 나에게 준 상처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안되었다.“우리 형 고정재 말이야.”고현성이 갑자기 고정재 얘기를 꺼냈다.“아무한테나 다 다정한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구보다 매정한 사람이야. 성격이 오만해서 다른 사람이 눈에 차지 않거든. 우리 어머니가 입양한 딸 윤다은도 형을 오랫동안 좋아했고 계속 쫓아다녔는데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했어. 다은이가 조금이라도 선을
그냥 빨리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하지만 나는 그때의 고현성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하고 있다는 걸 몰랐고 그는 우리의 과거와 나를 향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그저 다른 방식으로 나와 다시 알아가고 싶었던 거다.그런데 나는 그를 가짜라고 하면서 그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다.그때의 고현성은 과거의 나처럼 속으로는 수없이 흔들리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상대에게 차갑게 거절당하고 상대의 말에 거듭 상처받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다.그때 고현성의 깊은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고현성은 떠나지 않았고 내가 캐리어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빗속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호수처럼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넌 여기 있어. 내가 갈게.”말과 함께 그는 긴 다리를 뻗어 가랑비 사이를 내디뎠고 쓸쓸한 그의 뒷모습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내리는 가랑비를 바라보며 내 눈앞도 흐려져 갔다.나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서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반나절 동안 고현성과 다툰 탓인지 심적으로 지쳐있었던 나는 항암 약을 꺼내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새 악몽을 꾸고 간간이 깨어나며 푹 자지 못했다.아침에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반경우가 연락이 와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자기, 이따 시간 돼?”예전 같으면 시간 있다고 했겠지만 어젯밤 사건 이후 마음 한구석에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졌고 나중에 더 깊게 얽힐 것 같아 거절했다.“나 곧 동성 떠날 거야.”반경우는 당황한 듯 물었다.“이제 막 동성에 왔는데 왜 갑자기 떠나?”나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이제 회사도 내 명의로 되어 있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 건강 검진받으러 상주에 가야 한다고 민수 오빠가 계속 당부했어.”조민수의 생활 스케줄에서 늘 최우선은 내 일이었고 그는 자신이 실수하는 것보다 내 몸이 망가지는 걸 더 용납하지 않았다.운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가 당부했었다.“
나와 반경우가 춤추고 키스하는 영상이었는데 누가 찍어서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경우가 나의 새로운 연인이라고 직접 해명하지 않는 이상 연씨 가문에는 확실한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그렇게 말해야만 사람들도 넘어갈 것이다.나는 어이가 없었다. 연예인도 아닌데 대기업 집안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고 전에 이혼한 것도 인기 검색어에 올랐었다.하지만 나는 그 영상이 연씨 가문에 미칠 영향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흰 셔츠에 넥타이는 없이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반경우가 점잖고 멋들어진 모습으로 나와 격정적인 춤을 추고 있었지만 잘생긴 그의 모습에 팬들은 그렇게까지 욕하지 않았다.그리고 나는 여태껏 본 내 모습 중에 가장 불처럼 뜨겁고 정열적이었다.그런 내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반경우는 나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댓글을 클릭해서 읽어보니 다들 나를 뻔뻔하다는 둥 욕하기 바빴다. 금방 이혼하고 또 새로운 남자를 만난 데다 내가 적극적으로 동성에 남자를 찾으러 갔다는 둥 아무튼 듣기 어려운 말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방구석 네티즌들은 참 할 일이 없나 보다.잠시 생각한 나는 그 영상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피곤한 상태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운 채 자고 깨기를 반복하며 비몽사몽으로 보내다가 오후가 되어 비서에게 연락이 왔다.전화를 받으니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어제 저희가 서당 유씨 가문 쪽에서 입찰을 따냈습니다. 이번 협업이 회사엔 중대한 사항인데 유씨 가문 쪽에서 갑자기 말을 바꾸면서 이미 협업을 취소하고 진씨 가문과 손잡을 예정이랍니다.”진씨 가문은 예전에도 적지 않게 접점이 있었기에 운성에서는 연씨, 고씨 다음으로 대기업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씨 가문에서 이번 계약을 파기하고 진씨 가문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연씨 가문보다 뒤처지는 그쪽을 유씨 가문이 선택한 이유가 뭘까.나는 비서에게 물었다.“이유를 알아요?”비서는 망설이다가 말했다.“고씨 가
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이분은 왜 여기에?”“대표님을 기다리려고 특별히 여기 머무는 것 같아요.”그녀를 보니 분명 이유가 있어서 여기 있는 것 같아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몇 살이세요? 마흔 됐나요?”그 말에 상대는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슨 헛소리에요?”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비서에게 말했다.“가죠.”나는 저런 사람들을 경멸한다.내가 가려고 하자 유지영은 나를 막으려 했고 비서가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나는 비서의 손에서 자동차 키를 빼앗아 주차장으로 향했다.비서가 날 데리러 온 차는 롤스로이스였는데 나는 먹는 것도, 쓰는 것도 최고만 누리면서 나 자신을 무척 아꼈다. 안 그러면 연씨 가문에서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다 어디에 쓰겠나.차를 몰고 연씨 별장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최희연에게 연락이 왔다.그녀가 물었다.[아직 동성에 있어?][아니, 운성이야.]차에서 내리는데 또다시 문자가 왔다.[너 보러 동성 가려고 했는데.]나는 물음표를 보내며 물었다.[그렇게 한가해?]지금 최희연은 진서준의 곁에 있을 텐데.[나 헤어질 것 같아.]나는 물음표를 몇 개 보냈고 최희연은 실망하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덧붙였다.[진서준이 며칠 전에 쪽지 하나 남기고 사라졌어. 나보고 자기를 잊으라네.]나는 최희연과 진서준 사이가 이젠 안정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그 남자, 그 맑은 눈의 남자...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나는 고민하다가 문자를 보냈다.[강해온 씨한테 알아보라고 할까?]최희연이 답장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와서 밥이나 먹자.]가고 싶지 않았지만 최희연이 기분이 안 좋아 동의했다.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볍게 화장을 한 뒤에 차 키를 들고 문을 나섰다.여전히 검은색 롤스로이스를 몰고 갔는데 최희연이 그걸 보고 부자라며 말했고 옆에는 윤다은도 같이 있었다. 나는 문득 고현성이 그녀가 고정재를 좋아한다고 말해줬던 게 떠올랐고 떠올리지 않으려
윤다은은 내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먼저 다가와 주었고 내가 방금 한 말에 기분이 상했음에도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그런 그녀를 보면서 내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방금 그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나는 말을 돌렸다.“밥 먹으러 가자.”윤다은은 방금 일어난 일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적극적으로 음식을 주문하며 말했다.“선배님과 오랜만에 만나서 얻어먹는 건데 오늘 제대로 먹어야죠. 술 마셔도 돼요?”최희연은 웃으며 말했다.“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가 못 내면 수아한테 빌리면 돼. 돈이 많거든.”내가 웃으며 물었다.“네가 산다며?”“빌리는 거야, 달라는 게 아니라.”최희연은 태연해 보였고 진서준을 잃은 것에 대해 크게 슬퍼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녀답지 않았다.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윤다은은 주문을 마친 뒤 호기심이 동해 나에게 물었다.“수아 언니, 우리 둘째 오빠랑 왜 이혼했어요?”그 말에 최희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윤다은, 네 둘째 오빠가 고현성이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어?”윤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나는 고씨 가문에 입양되어서 어머니의 성을 따랐으니까 대외적으로는 고씨 가문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오랫동안 숨겨서 죄송해요.”최희연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괜찮아, 나도 네 가족에 관해 물어본 적도 없고 네가 말할 필요도 없지. 그냥 놀라서 그래... 수아도 고씨 가문이랑 인연이 깊어서...”웨이터가 레드와인 한 병을 내오자 윤다은이 우리에게 한 잔 따라주며 설명했다.“계속 국내에 있었던 게 아니라서 둘째 오빠가 결혼한 걸 몰랐어요. 나한테 말한 적도 없고...”내가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와인잔을 집어 들자 최희연은 재빨리 내 손에서 잔을 낚아채 가며 말했다.“조민수가 네가 술 마시는 거 알면 날 죽일 거야! 그런데 다은아,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그 말에 윤다은은 고개를 푹 숙였고 최희연은 호기심
다만 왜 지금 갑자기 계약을 파기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비서가 말했다.“소문으로는 현재 유씨 가문 쪽 일은 거의 유서정 씨가 결정을 내리고 있답니다.”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내부 변동이 생겼어요?”비서가 부정했다.“그건 아니지만 유근수 씨는 나이가 들었고 유서정이 유씨 가문의 유일한 외동딸이라 지금 당장 별 변화가 없더라도 앞으로 유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유서정에게 넘어갈 겁니다.”“그럼 이번엔 유서정이 스스로 결정한 건가요?”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렇다면 그 여자는 진씨 가문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겠네요. 연씨 가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진씨 가문은 고씨 가문이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어린 사람이라 옆 사람들의 말을 더 듣겠죠.”운성에 몇 없는 대가문 사이에서 고현성이 진씨 가문을 대신해 유서정에게 말 몇 마디만 해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유서정은 연씨 가문과 원수 사이가 되더라도 진씨 가문을 택할 것이다.그녀는 사업가로서 늘 정직하고 올곧았으며 업계에서 평판이 좋았던 유근수와는 달랐고 아직 어렸다.비서는 힘없이 말했다.“이번 입찰에서 저희가 실패할 가능성이 큰데 이건 저희에게도 중요한 일입니다.”고현성과 이혼한 이후 연씨 가문의 사정을 전혀 몰랐던 나는 비서에게 물었다.“계약 내용이 뭐예요?”“유씨 가문을 위해 칩을 만드는 겁니다.”“유씨 가문에서 기술을 제공하나요?”비서가 설명했다.“연씨 가문은 자체의 기술력이 있지만 이번 합작을 기회로 삼아 이름을 알린다면 나중에 칩 제조 업계에서 전부 연씨 가문으로 몰려올 겁니다.”“그럼 이번 계약은 꼭 해야 한다는 건가요?”“대표님, 놓치면 안 됩니다.”...사무실에 나와 차를 몰고 가다가 음악 센터 앞을 지날 때 대문에 음악회가 열린다고 적혀 있기에 나는 차를 세웠다.길가에 차를 세우고 표를 사서 들어간 뒤 맨 마지막 줄에 앉았는데 문득 첫 번째 줄에 앉은 최희연과 윤다은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문득 오늘 누가 연주할지 짐작이 갔
바람이 사는 거리...바람은 이곳에 살지도 머물지도 않았다.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너와 나의 어린 시절 그 추억들을 전부 휩쓸어갔지. 넌 그렇게 바람을 따라 이곳을 떠났고 난 같은 자리에서 널 기다렸지만 바람은 이미 떠나버렸지.9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기다렸는데 그토록 자신했던 어린 시절도, 확실했던 사랑도 이젠 전부 농담처럼 들렸다.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내 인생 자체가 우스워졌다.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멜로디가 꿈결처럼 마음속을 한번 또 한 번 배회하니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내가 자리에 일어선 순간 음악이 뚝 멎었고 남자의 눈빛은 수많은 관객 사이를 비집고 정확하게 내게 떨어졌다. 맑고 투명한 그 눈빛 속에서 나는 고현성이 말했던 연민을 보아낸 것 같았다.나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고 바로 그때 1열에서 최희연과 윤다은이 의아한 눈빛으로 뒤돌아보다가 나를 보자 최희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내가 담담하게 고정재를 바라보는데 그가 문득 다시 연주를 이어갔고 나는 황급히 음악센터를 빠져나갔다.최희연이 나를 따라 나오며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나는 문에 붙은 광고를 가리키며 웃었다.“갑자기 음악이 듣고 싶어서. 여기서 저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최희연은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손을 뻗어 안아주며 말했다.“다 괜찮아질 거야.”진서준이 막 그녀의 곁을 떠난 것을 떠올리며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다 잘될 거야.”그녀를 향한 위로인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문득 최희연이 말했다.“나랑 좀 걸어.”“응, 서준 씨는 계속 연락이 없어?”3월의 바람은 약간의 한기를 품고 있었고 나는 최희연이 차분한 어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옷깃을 여미었다.“없어. 그 사람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나도 이렇게 애매한 상황은 싫어... 진서준은... 난 사랑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 마음속 열등감까지 어쩌진 못하겠어. 우린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다은을 먼저 고씨 가문으로 돌려보냈지만 차를 너무 가까이 대지는 않고 저택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윤다은은 입을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차에서 내려 우리와 작별 인사를 했고 나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녀에게 화답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오빠 안녕.”고정재가 짧게 대꾸하자 윤다은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그 눈빛에는 미련이 그대로 담겨있었다.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차에는 단둘이 있고...적어도 그녀의 눈에 나는 위협적인 존재일 테니까.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은 씨, 안녕.”나는 고정재에게 주소를 묻지 않고 어렴풋이 지난번 아파트까지 데려다줬던 기억을 떠올리며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다.나와 고정재만 남은 차는 유난히 조용해졌고 백미러를 통해 그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며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물었다.“고정재 씨, 앞으로 연주회가 더 남았어요?”“정재 씨.”그가 말하자 내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네?”“꼬마 아가씨, 날 정재 씨라고 부르라고.”그는 아무도 없을 때면 나를 꼬마 아가씨라고 불렀다.“아, 네. 알았어요.”나는 너무 긴장한 것 같았다.“연주회 일정이 잡혀 있지는 않았어. 오늘은 즉흥적으로 생각난 거야.”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내 연주 들으러 와줘서 고마워. 바람이 사는 거리... 수아 씨를 위해 연주한 거야.”바람이 사는 거리...그가 나를 위한 거라고 말했다.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내 마음이 속절없이 떨렸다.형언할 수 없는 느낌...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어린 시절 추억처럼, 9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답을 들은 것 같았다.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황홀했다.이젠 당신을 안 좋아해...어제 전날 보낸 문자 메시지는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다.내 마음이 나에게 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해준다.나를 위해 피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