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밤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다가 어딘가에서 나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왔다.처음에 유리는 안방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고 안방으로 갔다.그런데 안방에서는 엄마 혼자 자고 있었다.아이는 조심스럽게 엄마를 지나쳐 베란다로 왔고 그곳에서 집을 등지고 통화 중인 아빠를 보았다.아빠가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듣고 다가온 것이다.신유리는 아빠의 통화상대가 궁금해서 아빠를 불렀다.부소경은 잠옷차림에 맨발로 등 뒤에 서 있는 딸을 보고 얼른 딸을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아기,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들어가서 자.”“유리! 유리야?”수화기 너머로 유리의 목소리를 들은 반호영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신유리도 그 소리를 들었다.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물었다.“호영 삼촌이야?”부소경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반호영은 다급히 소리쳤다.“개자식아! 빨리 유리 바꿔줘! 당장 바꿔! 안 그러면 죽여버릴 거야!”부소경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협박을 들어본 적 없었다.이 집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신세희마저 이런 식으로 그를 협박한 적은 없었다.부소경은 수화기에 대고 욕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하지만 그는 끈질긴 인내심을 발휘해 충동을 참았다.그는 수화기를 유리의 귓가에 가져가며 부드럽게 말했다.“유리야, 이분은 네 삼촌이야. 아빠 동생.”말을 마친 부소경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살면서 모든 걸 이뤘고 막대한 부를 가졌지만 지금처럼 욕을 먹고도 반박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유리가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호영 삼촌, 삼촌 맞아?”새벽 세 시. 아이가 잠들 시간이었지만 그 앳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반호영은 분노가 전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반호영은 갑자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그는 원래 작은 방 입구에 앉아 있었는데 유리의 소리를 듣고 몸을 웅크리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한참 울던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입
떠나기 전에 그가 2억을 주고 나오기는 했지만 그 돈으로 언제까지 생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삼촌, 걱정하지 마. 명선 언니가 그러는데 언니 열심히 공부하고 있대. 나중에 대학 졸업하면 돈 벌어서 삼촌 보살피겠대. 그러니까 호영 삼촌도 건강 잘 챙기고 이제 나쁜 일하지 마.”신유리는 어른처럼 반호영을 달래주었다.반호영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유리 말이면 들어야지.”“삼촌, 유리 졸려. 삼촌도 이제 자. 알겠지?”신유리의 말에 반호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 유리야. 아이는 잘 자야 키도 크고 그러는 거지. 어서 자.”“잘자, 호영 삼촌. 좋은 꿈 꿔.”아이는 산뜻한 얼굴로 반호영에게 작별인사를 했다.“그래.”신유리는 아빠에게 핸드폰을 돌려준 뒤, 작은 소리로 아빠에게 당부했다.“호영 삼촌한테 너무 무섭게 하지 마. 호영 삼촌은 좋은 사람이야.”부소경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다가 아이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여보세요.”반호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가 잠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감금되었던 최여진이 자취를 감추었다.어디로 갔을까?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반호영, 무슨 일 있어?”부소경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물었다. 그는 만취 상태인 반호영이 혹시라도 안 좋은 생각이라도 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호영아, 호영아!”그는 다급히 반호영을 불렀다.그러자 반호영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다 너 때문이잖아! 그년이 도망갔어! 도망갔다고!”부소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가 도망갔다는 거야?”“그 망할 여자!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저지르고 다닌 여자가 도망갔다고!”반호영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사실 그는 최여진을 산 채로 굶겨 죽일 생각이었는데 도망가 버린 것이다.‘운 좋은 줄 알아! 이 망할 여자야!’“부소경, 내 말 명심해! 신세희랑 유리 잘 보살펴! 안 그러면 정말 죽여버릴 테니까!”말
부소경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놀랍지도 않은 내용이었다.구경민은 그런 친구를 힐끗 보고는 정색하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어?”“그 여자 우리 아버지랑 네 둘째 삼촌 도움받아서 반호영이 있는 곳에 보내졌잖아. 그리고 반호영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주장했지. 그런데 반호영은 그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확신했어. 그래서 화가 나서 좀 때렸다고 하더라고.”부소경은 덤덤하게 대꾸했다.“그 여자는 맞아도 싸지! 다시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다시 내 눈에 보이면 죽여 버릴 거야!”구경민이 차갑게 말했다.지금의 그는 옛정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매번 그는 최여진에게 기회를 주고 용서해 주었다.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도 잔인하게 대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최여진은 그 뒤로 너무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동부까지 가서 고윤희를 피 말려 죽일 생각을 하다니!한진수를 죽이고 겨우 마음 붙이고 잘 살아가려던 고윤희에게서 희망을 앗아갔다.이렇게 악독한 여자를 살려 둘 필요가 있을까?부소경은 담담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일 때문에 나 찾아온 거야?”구경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침에 전화하고 싶었는데 잘 자고 있는 임산부 깨울까 봐 전화 안 했지. 그래서 회사로 찾아온 거야.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여자 반호영 때문에 지금쯤 꼴이 말이 아닐 거야. 이제 더 잃을 것도 없는 미친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부소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말했다.구경민은 뭔가 수심이 깊어 보이는 친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무슨 고민 있어?”부소경은 최여진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데 반호영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그가 친구에게 생각을 털어놓으려는데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방문자는 서시언이었다. 그는 요즘 F그룹과 손을 잡고 많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이곳에 자주 방문하는 편이었다.게다가 그의 여자친구인 최가희도 여기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가끔은 매일이다시피 이
서시언은 눈치가 굉장히 빠른 사람이었다. 그도 현재는 한 회사의 대표로 부임했지만 부소경과 구경민이 아주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부소경의 사무실을 나온 서시언은 바로 최가희의 사무실로 왔다.그런데 최가희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서시언을 본 다른 동료들이 장난을 걸어왔다.“우리 잘생긴 서 대표님 오셨네요.”“대표님, 선물 없어요?”“선물이 부담되면 사탕 같은 것도 괜찮아요. 가희는 우리 부서에서 일을 가장 열심히 하고 외모도 가장 예쁜 보물 같은 존재니까요. 그런 인재를 홀랑 꼬셔 버리시다니! ”서시언은 웃으며 가방에서 수입산 초콜렛을 꺼내 부서 여직원들에게 주었다.어린 여직원들은 잔뜩 흥분해서 환호를 질렀다.“와!”“보기만 해도 군침 돌아요!”“가희 씨가 부럽네요.”“젊고 잘생기시고 돈도 많으시고, 그리고 착하고 성격까지 좋으시니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세상에 있을까 싶네요.”서시언은 여직원들의 칭찬이 조금 부담스러워서 어색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그런데 이때, 최가희가 자리로 돌아왔다.무슨 영문인지 그녀는 안색이 좋지 않았고 눈도 빨갛게 부어 있었다.그녀를 본 서시언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가희야 왜 그래? 혹시… 울었어?”최가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대표님 만나러 왔어요? 일은 잘 해결했어요?”서시언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점심 시간이 다 돼가는데 가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왜 오늘 기분이 안 좋은지 얘기해 보자.”그러자 최가희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요. 오늘은 오빠 좋아하는 곳으로 가요.”그렇게 두 사람은 회사를 나섰다.그들은 F그룹 맞은편에 있는 한식당으로 갔다. 한정식 세트를 주문한 서시언은 메뉴가 준비되는 사이, 그녀에게 타이르듯 말했다.“살 빠진 것 좀 봐. 앞으로 다이어트 같은 거 하지 마. 이상한 시리얼 같은 것도 먹지 말고
잔뜩 화가 난 최가희를 보자 서시언은 덜컥 걱정이 돼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최가희는 바로 전화를 끊고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미안해요, 오빠. 안 좋은 모습을 보였네요. 사실… 별거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고개를 떨어뜨렸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서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언 오빠, 이제… 밥 먹어요.”서시언은 최가희의 손을 잡으며 간곡하게 말했다.“가희야, 난 네 남자친구야. 앞으로 결혼할 사이라고. 네 일이 곧 내 일이야.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넌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나 그 정도의 능력은 있다고.”최가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정말 아무 일도 아니에요, 오빠.”“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나 피 말라 죽는 꼴 보고 싶어? 법원에 기소까지 한다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니야? 누가 널 귀찮게 해? 빨리 말해줘.”서시언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빤히 바라보던 최가희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힘없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오빠, 사실 나에게는… 욕심 많고 돈만 밝히는 엄마가 있어요. 아빠랑 이미 이혼한 사이인데도 자꾸 연락해서 돈을 달라고 귀찮게 해요.”“네 엄마라고?”그는 많이 당황한 표정으로 최가희를 바라보았다.최가희와 알게 된지도 벌써 한 달이 되어가는데 그동안 그녀에게서 한 번도 엄마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 없었다.가끔 아버지에 관한 얘기는 한 적 있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작은 와인가게를 하셨는데 도매도 하셔서 연매출이 꽤 괜찮았다. 최가희의 말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재벌가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부족한 것 없는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은 분명했다.그래서인지 최가희는 순수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 같을 때도 있었다.게다가 최가희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딸바보였다.딸을 위해서 요리를 배웠다는 가정적인
“아빠가 쫓아도 가지를 않고 어린 여자애를 길바닥에 내쫓으면 그 양아치들이 또 괴롭힐 게 뻔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아빠 집에서 먹이고 재워줬대요.”“그렇게… 내가 생겼고요. 아빠 말로는 그 여자가 날 낳을 때 고작 18살이었데요.”“그러니까 이제 겨우 40세가 되었네요. 오빠는 모를 거예요. 나이 마흔 먹은 젊은 여자가 일하기는 싫어하고 매일 게으름만 부리는 것도 모자라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 재산을 조금이라도 자기 주머니에 넣을까 그 생각만 한다니까요?”“그럼 아버님은 이혼하기 전부터 가게를 하셨어? 아니면 이혼한 뒤에 가게를 열게 된 거야?”서시언이 물었다.그런데 최가희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두 사람은 혼인신고도 안 했어요. 아빠가 그때 경제적으로 좀 힘들었는데 성유미 씨는 힘든 생활 싫다고 나랑 아빠를 버리고 도망간 여자예요.”“가게는 그 여자가 집을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 열게 된 거예요. 우리 가게는 성유미 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최가희는 많이 흥분한 상태였다.“손발 다 멀쩡하고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착실하게 일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공짜만 바라는지 모르겠어요! 아빠 그 가게 처음 시작할 때 정말 힘들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일군 가게인데 돈 좀 번다고 그 돈을 나눠달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아빠가 준다고 해도 내가 싫어요! 그냥 싫어요!”고작 스물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이 어린 여자는 말하다 보니 더 화가 나는지 눈물을 펑펑 터뜨렸다.다른 테이블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 쏠렸다.서시언은 이내 발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고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알았어. 울지 마. 진정하고. 우리 차근차근 해결해 보자. 그래도… 엄마잖아.”“그 여자는 내 엄마 아니에요!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나한테 사랑을 준 적도 없다고요! 어릴 때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준 사람도 아빠였어요! 가끔은 엄마가 재워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는데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눈을 떴을 때 가
그 말을 들은 서시언은 아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불가사의한 일이었다.아직 최가희의 생모를 만나지도 못했는데 벌써 만나기가 싫어질 정도였다.세상에는 참 다양한 엄마가 있다 싶었다.신세희처럼 책임감 강한 엄마가 있는 반면에 성유미처럼 모성애가 아예 없는 엄마도 존재했다.마흔 살이면 그와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날 텐데 그는 언젠가 최가희를 데리고 성유미를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다. 과거의 잘못은 그렇다 쳐도 이제 자신이 있으니 이런 무책임한 엄마가 최가희를 괴롭히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었다.“정말 너무하네. 아버지가 그렇게 잘해주셨는데 바람을 피우다니!”서시언이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최가희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사실 성유미 전에 아버지는 결혼을 한번 하셨어요.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안 생겼는데 그 여자가 아빠한테 원인이 있다고 하면서 아빠랑 이혼했거든요. 아빠는 상실감에 그 뒤로 여자를 다시 안 만났다가 성유미를 만났을 때는 이미 서른 살이었어요.”최가희는 씁쓸한 표정으로 서시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때 아빠랑 엄마가 사귀기로 했을 때 아빠 나이가 오빠랑 비슷했어요. 그래도 우리 아빠 정말 잘생기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어요. 오빠를 좋아하게 된 것도 오빠한테 아빠랑 닮은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에요.”“그런데 우리 아빠… 정말 너무 불쌍해요. 다시 여자 만날 생각도 없었는데 성유미를 구해주고 잠깐 집에 와서 있으라고 한 것뿐인데 성유미는 우리 아빠가 잘생기고 자상하게 대해주니까 달라붙기로 한 거예요.”“그런데 그 여자는 스물 아홉 정도 되었을 때 아빠가 힘들게 모은 돈을 가지고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연하인 남자랑 같이 새살림을 차렸죠!”“그때 아빠는 화병에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어요. 당시 아빠 나이가 40대 중반이었거든요? 그 여자는 아빠가 늙어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다른 남자에게 간 거예요!”“정말 죽여도 시원치 않을 여자예요!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그 남자도 자신을 버리니까 뻔뻔하게 아빠를 찾아오고 날
서시언은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에게 손을 댈 수도 없었다.최가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말했다.“미안해, 유리야. 내가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표정이 이상했나 봐. 언니가 사과할게.”신유리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알았어.”최가희는 서시언에게 고개를 돌리며 또 말했다.“시언 오빠, 유리 챙겨줘요. 이 큰 회사에 애 혼자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난 일하러 들어가 볼게요. 나 괜찮아요. 퇴근하면 전화할게요.”“알았어. 유리가 한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애가 어려서 철이 없어.”최가희는 웃으며 대답했다.“알죠. 괜찮아요, 오빠. 들어가 볼게요.”서시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최가희가 사무실로 들어가는 뒷모습까지 바라보았다.그런데 발등에서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고개를 숙이고 보니 신유리가 두 발로 그의 구두를 힘껏 짓밟고 있었다.“신유리!”화가 난 서시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둘이 연애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신유리 역시 잔뜩 화가 난 눈빛으로 서시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아이는 어른들 일에 간섭하는 거 아니야.”“내 삼촌이니까!”“삼촌도 안돼.”“저 언니 싫어!”항상 신유리를 예뻐하고 아끼던 서시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열 받아서 애를 엎드려 놓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고 싶었다.여기가 애 아빠 회사인 게 뭐?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너무 화가 났다.그는 손을 번쩍 들었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만두었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신유리는 서시언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이였다.그러니 어찌 그런 아이에게 손을 댈 수 있을까?그는 쭈그리고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유리야, 이렇게 외삼촌 연애하는 거 자꾸 방해하면 외삼촌 혼자 쓸쓸하게 늙어야 해. 알아?”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최가희랑 연애하지 말라고 했지 다른 여자 만나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세상에 여자가 최가희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