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임유라와 강현수가 헤어졌다는 소식은 빠르게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이따금 보이는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댓글은 빠르게 삭제되었다.임유진을 이 사건에서 완전히 제외하겠다는 강지혁의 판단이었다.강현수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조만간 헤어질 줄 알았다는 식의 글을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유라보다 훨씬 예쁘고 실력도 좋은 연예인들도 차인 마당에 임유라라고 안 차일까?전 여자친구들에 비해 임유라는 확실히 여러면에서 떨어졌다.또한, 많은 사람이 연예계에서 임유라의 지위는 오늘부로 바닥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떠받들었던 건 임유라가 강현수의 여자였기 때문이고 이제 그녀는 그저 전 여자친구일 뿐이니까.임유라의 집.임정호와 방미령은 지금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임유라를 보고 있다. 강현수와 자신들의 딸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그들은 아까 이웃집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그 이웃은 웃음을 참으며 그들을 비웃듯 말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강현수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게 어디 이번이 처음인가요? 유라가 여자친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거예요. 계속 단역만 맡았던 유라가 언제 또 여자 주인공을 해보고 광고를 받아보겠어요!"두 사람은 그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에서 나올 때 다른 주민들도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이것도 물론 평소 자기 집 딸이 강현수 여자친구라고 괜히 으스대며 동네 사람들과 자신들을 계급 나누듯 무시했던 그들의 업보였다.그들은 임유진이 감옥에 갔다 온 일로 한동안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둘째 딸까지 별 볼 일 없게 되니 또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유라야, 너 정말 강현수와 헤어진 거니? 어떻게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거야?"방미령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그래. 어떻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헤어지자고 할 수가 있어. 너희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사귀고 있었잖아."임정호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모든 게 다 임유진 때문이야! 내가 간신히 얻은 것을 그 년이 싹 다 망쳐놓은 거야!’하지만 임유라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녀가 얻었다고 표현한 그 모든 것들이 임유진 덕에 잠시라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막 배달을 끝낸 임유진이 가게로 들어오자 갑자기 그녀 옆으로 두 명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중 한 사람이 있는 힘껏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얼마나 세게 쳤는지 임유진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 되었고 입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까지 났다."이런 빌어먹을 년이, 동생이 잘 되는 게 그렇게도 배가 아프던? 그래서 동생 남자까지 뺏으려 했어? 임씨 가문에서 어떻게 너 같은 게 나왔을까!"뺨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다짜고짜 욕을 해대며 손까지 올린 방미령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방미령이 또 한 번 손을 올리려고 하자 임유진은 이번에 팔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고 그에 방미령이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왜, 엄마로서 자식 교육도 못 하니?""나한테 엄마는 한 분뿐이에요. 당연하게도 그게 당신은 아니고요."임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대체 나를 뭐로 아는 거니? 역시 뻔뻔한 것도 유전이라더니만, 엄마가 뻔뻔하니 그 딸도 뻔뻔하기 짝이 없네. 허구한 날 남의 남자를 뺏을 줄이나 알았..."방미령은 갑자기 날아든 뺨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너... 너 지금 나 때렸니?"방미령은 임유진이 손을 올릴 줄은 몰랐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요, 나는 못 때릴 줄 알았어요?"임유진이 차갑게 읊조렸다."게다가 뻔뻔한 거로 따지면 당신이 최고 아닌가?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엉덩이에 불붙은 똥강아지처럼 급하게 엄마 자리 꿰차고 들어온 게 누구였죠? 참, 그때 이미 배 속에 아이까지 배고 있었죠?"이제까지 임유진은 그래도 상대가 어른이기에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전부 참아줬었다. 하지만 저번에 엄마의 무덤을 핑계로 돈을 뜯어내려고 한 사건을 기점으로 더
임정호는 얼른 방미령을 부축하더니 임유진을 향해 호통쳤다."아무리 계모라도 상대는 어른이야. 버릇없게 굴지 말고 당장 사과해!"임유진은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예전에는 그의 인정을 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임유라에게 주는 애정 반만이라도 받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고 그걸 깨닫는 순간 임유진은 마음을 닫아버렸다."내가 사과를 왜 하죠? 거의 죽일 듯이 달려드는 사람에게 가만히 얼굴을 대줘야 맞는 걸까요? 나뿐만 아니라 저 여자는 지금 내 어머니까지 모욕했어요. 그런데도 나한테 참으라고요? 엄마한테 미안한 짓을 한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임정호의 얼굴에 잠시 난감한 기색이 스쳤지만 방미령이 난리를 피우자 금방 표정을 바꿨다."이 사람이 널 좀 때리면 또 어떠니? 그리고 유라한테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왜 말 안 해? 너만 아니었으면 네 동생 헤어지지도 않았어."그러자 임유진이 차갑게 웃었다."그렇게 싸고도는 임유라가 먼저 어떤 짓을 했는지 한번 제대로 물어보고 오세요.""무슨 헛소리야? 네 동생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잖아!"임정호가 무서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쓸데없는 말 필요 없고 지금 당장 이 사람한테 사과해!"방미령은 옆에서 동네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나 경찰 부를 거야. 너 이건 살인 미수야 알아?!"임유진은 두 사람이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몸을 돌려 탁유미를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언니. 저 때문에 장사에 영향이 가게 생겼네요.""아니야."탁유미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임정호는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임유진을 보면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로 달려들어 손찌검하려고 했다.그걸 알아챈 임유진이 재빨리 피하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뒤로 끌어당기더니 임정호를 그대로 발로 차 멀리 날려버렸다.꼴사납게 날아간 임정호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번에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가볍게 그를 제압했다
임유진은 확실히 그녀보다 운이 좋았다.탁유미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전에 그녀는 자신을 위해 세상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었지만 알고 보니 그 남자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안타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고 그녀는 지금 윤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여 임유진의 터진 입가와 부어오른 뺨을 확인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살 어루만지며 물었다."누가 이랬어?""여긴 어쩐 일이야?"임유진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근처라서 들렀어."들렀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임유진은 또다시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누가 이런 거야?"강지혁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말해줄 때까지 계속 물어볼 것 같은 느낌에 임유진은 방미령을 가리켰다."저 아줌마. 하지만 나도 때렸어."강지혁의 시선이 방미령을 향했고 차가운 그의 시선에 방미령은 소름이 돋았다."뭐, 뭐요. 내가 엄마라서 좀 때렸는데 뭐 문제 있어요? 그깟 치료비 내가 대주면 될 거 아니에요..."강지혁은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가더니 망설임 없이 바로 그녀의 뺨을 때려버렸다.방미령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어 졌고 거센 충격으로 피와 함께 이빨도 부러졌다."때렸어... 때렸어... 어떻게 나를!"강지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좀 때렸는데 뭐 문제 있어요? 그깟 치료비 내가 대줄게요."그는 방미령이 했던 말을 그대로 그녀에게 다시 돌려주었다.문제는 강지혁에게 치료비를 청구할 수 있는 배짱이 과연 그녀에게 있을까?얼마 안 가, 경찰이 도착했고 모든 사람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변호사를 붙여뒀기에 바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변호사도 그냥 변호사가 아니라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대형 로펌 변호사였다.임정호와 방미령은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고 손찌검을
임유진은 조금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나 식당 일 좋아. 그리고..."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혁아, 난 내 힘으로 돈이 벌고 싶은 거야. 만약 너희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네 여자친구라는 소문은 금방 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매달 출근 도장만 찍고 월급만 타는 그런 생활을 보내게 될 거야.""뭐가 문제야?"강지혁이 되물었다."나는 내 힘으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그리고 이대로 쭉 배달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야. 나 지금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자격증 시험 같은 것도 알아보고 있어."임유진은 단지 배달 일만 하는 것이 아닌 착실히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다.그 말에 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들어 부드럽게 그녀의 볼을 쓸어내렸다.그러자 임유진이 조금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집에 가자마자 약부터 발라야겠어. 그리고 내가 전에도 말했지.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전화부터 하라고. 왜 안 했어?"그러자 임유진이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게... 까먹었어..."너무나도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강지혁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무슨 일이 생기면 기대고 싶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강지혁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다음부터는 까먹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나부터 찾아. 알겠어?"강지혁이 당부했다."응, 알겠어."임유진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참, 아까 굳이 뺨을 때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 여자가 너 고소하기라고 하면 일이 더 복잡해 질 거야.""그러라고 해."강지혁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방미령을 때린 건 임유진을 건드리면 그게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그 두 사람은 널 왜 찾아온 거야?"강지혁이 물었다."임유라가 강현수 씨와 헤어진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봐."임유진은 실소를 터트렸다."그게 아니면 그저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임
유리창 너머에는 메인 홀이 보였고 거기에는 가수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시끄러운 홀과는 달리 룸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강현수는 마치 다른 세상 같은 메인 홀을 바라보며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구두 소리가 룸에 울려 퍼졌다.강현수는 고개를 돌려 들어온 사람을 향해 물었다."왔어? 너도 한 잔 줄까?""됐어."강지혁은 강현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용건만 간단히 하고 갈 거야."그에 강현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용건이 뭔데?""네가 임유라 그 여자와 헤어지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유진이 끌어들이지 마.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강지혁의 경고 섞인 말에 강현수의 눈빛이 변했다."무슨 뜻이야?""오늘 임유라 부모가 유진이를 찾아와서 행패 부렸어. 네가 그 여자와 헤어진 게 유진이 때문이라고."강지혁이 말을 이었다."그래서, 임유라 부모가 이런 짓을 벌이도록 원인 제공 한 사람이 임유라 그 여자야 아니면 너야?"강현수가 손에 든 찻잔을 돌리자 차향이 열기를 따라 룸 전체에 퍼졌다."지금 그게 중요해?""내가 이렇게 널 찾아온 거 보면 중요하지 않겠어?"강지혁이 말했다.강현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강지혁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또다시 울려 퍼졌다."그 여자하고 헤어진 게 유진이와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 거야?"그 질문에 강현수의 손이 움찔했고 강지혁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곧바로 알아챘다.강지혁의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룸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한참이 지난 후 강현수가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리더니 강지혁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내가 그렇다고 하면?"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전례 없이 차가워졌다."죽고 싶어?""너한테는 유진 씨가 매우 소중한가 봐. 하지만 내가 만약 유진 씨를 가지려고 마음먹으면 그게 강지혁 너라고 해도 쉽게 막지 못할 거야."강현수는 여전히 강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
강지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는 절대 강현수에게 그 기회를 내줄 리 없다, 영원히!한편 룸 안에서 강현수는 목에 건 백금 목걸이를 끌어냈는데 은으로 된 팔찌가 펜던트로 걸려 있었다.그는 손으로 가볍게 팔찌를 어루만졌다. 수년간 문지른 덕에 팔찌는 어느덧 반들반들해졌다.이 팔찌는 그의 전부였다.가슴에 새길 그리움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서 뼛속에 깊이 파묻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컷!”감독이 또다시 컷하며 살짝 화난 얼굴로 임유라에게 말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엄마를 여읜 슬픔을 표현하라고요. 이렇게 쉬운 연기도 못해요? 배우 일이 년 하나... 쯧쯧.”임유라는 감독의 질책에 머리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댔다.전에 이 감독은 그녀에게 매우 깍듯이 대했고 그녀의 신은 거의 한 번에 통과했다. 임유라 스스로 다시 찍겠다고 하지 않는 한 감독은 그녀에게 찍소리도 못했다.그랬던 감독이 지금 그녀에게 삿대질할 기세로 질책하고 있다.주위에 있는 다른 배우들도 야유와 경멸에 찬 눈길로 임유라를 쳐다봤다.임유라는 옆에서 다시 감정을 잡고 있다가 다른 여배우들의 조롱 섞인 말을 엿들었다.“연기를 잘하길 하나, 예쁘길 하나,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대.”“어쩌겠어. 그게 다 예전에 팔자가 좋아서 부자 남친을 만난 덕이지. 허구한 날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만 하더니 이젠 뭐야? 부잣집 도련님한테 뻥 차였네.”“그 남친분도 얼마나 역겨웠겠어. 제 친언니까지 일부러 해치는데, 쯧쯧. 망신당할 거면 혼자 당하지 아니 왜 제작팀까지 피해를 주냐고!”“감독님이 하도 신을 많이 삭제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우리 제작팀 해체 위기야!”임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이 작품으로 재기하려 했는데 제작팀에서 심각할 정도로 신을 줄였고 대본까지 수정해 현재 그녀의 분량은 조연배우들보다 적었다.위약금을 배상하지 않고 순조롭게 작품을
강현수가 혹시 마음이 바뀐 걸까?임유라는 좀 전까지 주위에 모여 그녀를 비웃던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는데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그래, 일단 다시 현수 씨 여친이 되면 이 사람들 싹 다 연예계에서 매장해버릴 거야!’그녀는 기세등등하게 제작팀을 떠났다.하지만 강현수를 만난 순간,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강현수가 그녀를 불러온 곳은 구치소였고 면회실 안에는 그녀의 부모님도 있었다.강현수는 의자에 앉아 여유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셨고 그녀의 부모는 전전긍긍하게 책상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포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임유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현수 씨가 왜 여기로 온 걸까?’임유라는 부모님이 구치소에 감금된 사실을 알지만 며칠만 있으면 바로 풀려나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언론매체에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현수 씨,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요?”임유라는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가여운 척하며 물었다.“뭐 그래도 날 만나주겠다니 너무 다행이에요. 나 좀 도와줘요. 엄마, 아빠가 작은 오해로 구치소에 갇혀 있는 게 너무 속상해요.”그녀는 또 적절한 타이밍에 효녀 연기를 내세웠다. 그리고는 부모님이 구치소에 갇힌 이유가 전부 오해 때문이라고 한다.“오해?”강현수가 차가운 눈길로 째려봤는데 짙은 눈동자에 삭막한 기운이 차 넘쳤다.“유라 씨 부모님이 유진 씨 찾아가서 소란 피운 거, 주소 유라 씨가 알려줬죠?”임유라는 표정이 확 변했고 구석에 움츠려 있던 임정호와 방미령도 몸을 움찔거렸다.“유라 씨는 이래서 똑똑하지 못하단 거예요. 내가 왜 일부러 이리로 왔겠어요? 유라 씨 부모님도 옆에서 들으라고 그런 거잖아요. 유라 씨 지금 하는 일 전부 접고 부모님 구치소에서 나오거든 온 가족이 함께 이곳을 떠요. 그리고 더이상 S 시에서 내 눈앞에 띄지 말아요.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었다간 그땐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임유라는 어안이 벙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