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는 절대 강현수에게 그 기회를 내줄 리 없다, 영원히!한편 룸 안에서 강현수는 목에 건 백금 목걸이를 끌어냈는데 은으로 된 팔찌가 펜던트로 걸려 있었다.그는 손으로 가볍게 팔찌를 어루만졌다. 수년간 문지른 덕에 팔찌는 어느덧 반들반들해졌다.이 팔찌는 그의 전부였다.가슴에 새길 그리움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서 뼛속에 깊이 파묻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컷!”감독이 또다시 컷하며 살짝 화난 얼굴로 임유라에게 말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엄마를 여읜 슬픔을 표현하라고요. 이렇게 쉬운 연기도 못해요? 배우 일이 년 하나... 쯧쯧.”임유라는 감독의 질책에 머리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댔다.전에 이 감독은 그녀에게 매우 깍듯이 대했고 그녀의 신은 거의 한 번에 통과했다. 임유라 스스로 다시 찍겠다고 하지 않는 한 감독은 그녀에게 찍소리도 못했다.그랬던 감독이 지금 그녀에게 삿대질할 기세로 질책하고 있다.주위에 있는 다른 배우들도 야유와 경멸에 찬 눈길로 임유라를 쳐다봤다.임유라는 옆에서 다시 감정을 잡고 있다가 다른 여배우들의 조롱 섞인 말을 엿들었다.“연기를 잘하길 하나, 예쁘길 하나,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대.”“어쩌겠어. 그게 다 예전에 팔자가 좋아서 부자 남친을 만난 덕이지. 허구한 날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만 하더니 이젠 뭐야? 부잣집 도련님한테 뻥 차였네.”“그 남친분도 얼마나 역겨웠겠어. 제 친언니까지 일부러 해치는데, 쯧쯧. 망신당할 거면 혼자 당하지 아니 왜 제작팀까지 피해를 주냐고!”“감독님이 하도 신을 많이 삭제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우리 제작팀 해체 위기야!”임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이 작품으로 재기하려 했는데 제작팀에서 심각할 정도로 신을 줄였고 대본까지 수정해 현재 그녀의 분량은 조연배우들보다 적었다.위약금을 배상하지 않고 순조롭게 작품을
강현수가 혹시 마음이 바뀐 걸까?임유라는 좀 전까지 주위에 모여 그녀를 비웃던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는데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그래, 일단 다시 현수 씨 여친이 되면 이 사람들 싹 다 연예계에서 매장해버릴 거야!’그녀는 기세등등하게 제작팀을 떠났다.하지만 강현수를 만난 순간,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강현수가 그녀를 불러온 곳은 구치소였고 면회실 안에는 그녀의 부모님도 있었다.강현수는 의자에 앉아 여유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셨고 그녀의 부모는 전전긍긍하게 책상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포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임유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현수 씨가 왜 여기로 온 걸까?’임유라는 부모님이 구치소에 감금된 사실을 알지만 며칠만 있으면 바로 풀려나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언론매체에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현수 씨,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요?”임유라는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가여운 척하며 물었다.“뭐 그래도 날 만나주겠다니 너무 다행이에요. 나 좀 도와줘요. 엄마, 아빠가 작은 오해로 구치소에 갇혀 있는 게 너무 속상해요.”그녀는 또 적절한 타이밍에 효녀 연기를 내세웠다. 그리고는 부모님이 구치소에 갇힌 이유가 전부 오해 때문이라고 한다.“오해?”강현수가 차가운 눈길로 째려봤는데 짙은 눈동자에 삭막한 기운이 차 넘쳤다.“유라 씨 부모님이 유진 씨 찾아가서 소란 피운 거, 주소 유라 씨가 알려줬죠?”임유라는 표정이 확 변했고 구석에 움츠려 있던 임정호와 방미령도 몸을 움찔거렸다.“유라 씨는 이래서 똑똑하지 못하단 거예요. 내가 왜 일부러 이리로 왔겠어요? 유라 씨 부모님도 옆에서 들으라고 그런 거잖아요. 유라 씨 지금 하는 일 전부 접고 부모님 구치소에서 나오거든 온 가족이 함께 이곳을 떠요. 그리고 더이상 S 시에서 내 눈앞에 띄지 말아요.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었다간 그땐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임유라는 어안이 벙
강현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임유라를 쳐다봤다. 공평? 이 세상에 언제 공평이 존재했었나? 강현수는 수년간 그 소녀를 찾아 헤맸는데 만약 노력과 성과가 비례한다면 그의 수년간 노력으로 진작 결실을 얻어야 했다.하지만... 전혀 아니다!마치 이 세상엔 그런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다만 그 사람은 분명 존재하잖아!“공평을 논하고 싶다면 임유라 씨 어머니가 유진 씨 뺨을 때렸으니 공평하게 유라 씨도 한 대 맞아요.”강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순간 임유라, 방미령, 임정호 세 사람은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방미령은 의자에서 벌떡 뛰어오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내가 왜 내 딸을 때려야 하죠?! 당신이 아무리 돈 많고 힘이 세도 이건 좀 지나치네요!”“본인 딸은 못 때리겠어요?”강현수는 한심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실소를 터트렸다.“그러면서 정작 본인과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의붓딸은 함부로 때려요? 그래요?”방미령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곧이어 강하게 반박했다.“왜... 그게 왜 함부로예요. 유진이가 파렴치하게 일부러 유라랑 그쪽 사이를 망가뜨렸잖아요...”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어서 옆에 있던 경호원이 방미령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가여운 그녀는 며칠 전에 강지혁에게 맞아서 이빨 한 대가 부러졌는데 아직 그 이빨을 치료하지도 못한 채 또 한 대 얻어맞았다. 그녀는 순간 억울했던지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한 번만 더 유진 씨 험담하면 그땐 당신들 입을 확 찢어버릴 거예요.”말을 마친 강현수는 더는 여기 남아있을 생각이 없어 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이때 임유라가 소리쳤다.“현수 씨 나한테 이러면 안 돼!”강현수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네 입술 모양이 ‘그 여자’를 닮은 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러면 너도 진작 내 손에 아작났어!”강현수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곧게 자리를 떠났다.면회실에는 임가네 가족 세 명만 덩그러니 남았다.방미령은 째질 듯이 아픈 입
심지어 일부 기자들은 임유라가 부동산과 액세서리를 끊임없이 팔고 있고, 그녀의 부모님이 살던 집까지 인터넷에 올려 판매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무래도 위약금을 물어내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 아닐까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또 어떤 기자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임유라가 미 완료한 모든 계약에 대해 배상해야 할 금액이 총 140억 원이라고 추산했다.이는 임유라 같은 보통 가정에,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되기 전 삼류배우였던 그녀에게 엄청난 금액이고 모든 가산을 팔아도 갚지 못할 금액이다.임유진은 휴대폰으로 기사를 확인했는데 본인 집이 부동산 중개업소에 걸린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그 기사에는 집 내부 사진이 퍼즐처럼 되어 있었고 그 인간들이 인터넷에 올린 판매가격은 11억6천이었다.애초에 임유진과 엄마의 추억이 담긴 집을 11억 6천이란 가격에 덜컥 내놓을 줄이야, 임유진은 살짝 감개무량해졌다.사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 집에는 엄마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집안엔 온통 임유라와 방미령이 지냈던 흔적만 꽉 차 있다.“뭐 보고 있어?”강지혁이 그녀 옆으로 다가오며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살짝 구겼다.“누나 예전에 살던 집을 파는 거야?”“응, 임가네 식구들이 내놨어.”임유진이 머리를 끄덕였다.“누나 사고 싶어?”강지혁의 물음에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살 마음이 있다면 강지혁이 당장 사줄 기세였으니까.“아니, 이 집은 내게 좋았던 추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더 많아.”엄마는 고작 저 안에서 3년만 지냈고 계모와 임유라가 20여 년을 살았다.“아 참, 너 강현수 씨랑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 현수 씨는 정말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야?”임유진이 물었다.강지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겉으론 전혀 티 나지 않았다.“그건 왜 갑자기 물어?”“방금 기사 하나 봤는데 강현수 씨가 만났던 여자들은 사실 한 여자의 대체품이라는 거야. 그 댓글 보고 문득 궁금해지데.”임유진이 말했다. 그녀는 그날 밤 술에 취한 강현수가 그녀를 안고
강지혁이 대답했다.“기왕 물은 거 다 말해줄게.”그가 지금 안 알려줘도 날이 지나면 임유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이 일은 S 시 상류층에서 더이상 비밀이 아니니까.남들에게 전해 듣는 것보단 그래도 강지혁이 직접 알려주는 게 낫다.“강현수가 사람 한 명 찾고 있는 거 맞아. 어릴 때 알고 지낸 여자아이인데 줄곧 못 찾았어. 여태껏 만난 여자친구들도 어쩌면 그 아이의 대체품일지도 몰라. 주인을 못 찾으니 무언가로 대체하고 싶었나 보지.”강지혁은 말하면서 임유진의 반응을 살폈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그러니까 강현수 씨가 한 여자아이의 대타를 찾는다고?”“강현수가 만난 여자친구들은 그 아이랑 은근 닮은 점이 많아.”“하지만 결국 현수 씨가 찾는 사람이 아니잖아. 이렇게 끊임없이 대체품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그녀가 물었다.“집념이 너무 깊어서 혹은 인제 절망의 수준에 다다라서? 강현수도 이젠 그해 그 소녀를 찾을 거란 희망을 잃은 것 같아.”강지혁이 문득 화제를 돌렸다.“누나가 만약 그 소녀였다면, 줄곧 누나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임유진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도 이런 가설을 해봤으니까.“감동 받고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갈 거야?”강지혁이 물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최면하는 것처럼 그녀의 진실한 답변을 유도했다.“아닐걸.”임유진이 말했다.“네 말처럼 단지 집념 때문이지 진짜 그 소녀를 깊이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닐 수 있잖아. 게다가 두 사람은 아주 어릴 때 만났다며? 어릴 때 감정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어?”“정말?”강지혁이 되물었다.“무조건 누나여야만 한다면?”임유진은 실소를 터트렸다.“그렇다고 나도 무조건 그 사람한테 가야 해? 더욱이 난 이미 네가 있어. 내가 원한다 해도 네가 안 놓아주겠지.”“맞아. 누나 곁엔 이미 내가 있어...”강지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나야 당연히 누나 안 놓아주지. 아무한테도 누나 안
정한나는 그녀가 여기서 배달 일을 하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일부러 윤이 식당에 배달을 시켰다. 임유진도 그런 그녀의 속셈을 훤히 알고 있다.“왜요? 주문에 무슨 문제 있어요?”카운터에 있던 탁유미가 물었다.“아니요.”임유진은 가볍게 웃으며 배달 음식을 들고 스쿠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음식을 스쿠터에 싣고 로펌 방향으로 출발했다.임유진이 배달 음식을 들고 로펌으로 걸어오자 정한나는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어머, 유진 씨,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또 유진 씨 번거롭게 굴었네요.”“번거로울 거 없어요. 제 일인데요 뭘.”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하며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다만 정한나는 음식을 받은 게 아니라 갑자기 그녀를 이끌고 로펌으로 들어오더니 모든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자, 여러분, 이분이 바로 방금 제가 말씀드린 사례의 당사자이자 우리 로펌의 옛 동료 임유진 씨입니다.”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임유진에게 쏠렸다.임유진은 불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정한나는 가식적인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다름이 아니라 요즘 제가 신인들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중이거든요. 유진 씨도 알다시피 가장 좋은 방법은 전에 논란이 됐던 사건들을 꺼내서 다 함께 토론하는 거잖아요. 지금 막 유진 씨 그해 사건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재판 기록이나 사건 진술을 보는 것보다 당사자인 유진 씨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훨씬 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정한나는 다정하게 임유진의 손까지 잡았다.“유진 씨 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죠? 그해 재판에서 그토록 억울하다고 하더니 지금 다시 말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다 같이 뜻을 모으면 어디에 허점이 있었는지, 어떤 단서를 놓쳤는지 찾아낼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유진 씨 사건을 뒤집을 수 있다고요.”임유진은 손발이 차갑게 식었다. 정한나의 매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아픈 상처를 모질게 찔렀다!뜻을 모아? 허점과 단서? 사건을 뒤집어?마냥 가소로울 따름이다!그해 임유진이 사고 났을 때, 진짜 도움이 필요했을 때 정한나는
“누가 누굴 도와요?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요? 역겨워서 정말!”임유진이 말했다.한편 주변 사람들도 전부 변호사 전공이지 바보가 아닌지라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금방 알아챘다. 저마다 의아한 눈길로 정한나를 쳐다봤는데 이것 하나만은 명확히 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정한나가 전에 쌓아온 이미지가 지금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는 것이다.그녀는 원래 오늘 임유진에게 꼽줄 생각이었다. 지난번 병원에서 건강검진 받을 때 임유진 앞에서 망신 당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려 오늘 제대로 분풀이할 참이었는데 결국 또다시 본인만 우스갯거리로 전락했다.정한나는 방금 마신 차 한 잔 들고 오더니 서슴없이 임유진에게 뿌렸다.임유진도 미리 경계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얼굴 대신 상의에 정곡으로 맞았다.날씨가 점점 무더워지다 보니 그녀는 위에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왔는데 찻물이 튀어 셔츠가 흠뻑 젖었다.주변 동료들도 정한나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임유진이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할 때 얇은 정장 외투가 그녀 몸을 뒤덮었다.“입어요!”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 목소리는... 고개 돌려 보니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표정을 지은 강현수가 뒤에 서 있었다!미간을 찌푸리고 분노가 어린 그의 두 눈을 본 순간 임유진은 살짝 의외였다. 그는 원래 주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무관심한 태도인데 지금 그녀에게 외투를 걸쳐주며 초라한 모습을 커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강현수 옆에는 로펌 대표님과 두 변호사까지 서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이전에 임유진이 로펌에 있을 때 그녀를 책임지고 가르쳤던 변호사였다.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상대의 눈빛에 복잡한 기운이 스쳤다.“어떻게 된 일이죠?”로펌 대표가 싸늘하게 물었다. 로펌을 찾아온 중요한 바이어 앞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참으로 불미스러운 일이었다.정한나는 좀 전까지 씩씩거리더니 금세 겁에 질린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는데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짓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강현수는 그녀에 관한 자료를 찾아봐서 그해 교통사고 때문에 진애령이 죽고 임유진이 감방에 들어간 사실을 알고 있다.하지만 상세한 내용은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는데 오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임유진이 재판에서 줄곧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본인은 억울하다 주장했다고 한다.정말 누명을 뒤집어쓴 걸까? 진애령의 죽음이 실은 그녀와 무관한 걸까?이 동료는 간단하게 상황만 설명할 뿐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지만 로펌 대표는 그 속에 담긴 수상한 낌새를 바로 알아챘다. 로펌 대표는 더 싸늘해진 눈길로 정한나를 째려보고는 고개 돌려 임유진을 쳐다봤다.“유진 씨,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이렇게 하시죠. 유진 씨가 손해 본 거 있으면 로펌에서 배상할게요. 나중에 리스트로 작성해주세요.”대표의 말에 임유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저는 이만 일이 밀려서 나가보겠습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옆에 있는 강현수에게 정장 외투도 돌려주었다.“고마워요.”흰 셔츠가 아직도 축축해서 반투명한 상태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이곳을 떠날 생각밖에 없었다.“입고 가도 돼요. 나 돌려줄 필요 없어요.”강현수가 말했다.옆에 있던 로펌 대표는 의아한 눈길로 강현수를 쳐다봤다. 그와 알고 지낸 몇 년 동안 연예계 황태자로 불리는 강현수는 차갑기 그지없고 남을 도와주는 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코앞에서 토막 살인을 당해도 꿈쩍하지 않을 사람인데 지금 임유진에게 이토록 신경 써주다니... 실로 경이로운 장면이었다.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들도 이런 대우는 못 받아봤을 텐데...“괜찮습니다.”임유진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외투를 돌려줬다. 셔츠가 반투명 상태라 남들이 보면 아주 뻘쭘하겠지만 수영복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속살이 비치는 셔츠보다 강현수와 자꾸만 엮이는 게 그녀는 더 싫었다.“방금 고마웠어요.”임유진은 깍듯이 인사하고 외투를 그의 손에 건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