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나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확 들었다.바로 이때 정한나와 상극이던 한 동료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누구는 꼴 좋네요. 이전 동료를 꼽주려다가 되레 본인만 개망신당했잖아요. 혹시 알아요. 내일이면 그 전 동료처럼 변호사도 못 하게 될지. 꽤 재미있는 사례가 되겠어요. 나중에 신입사원들에게 잘 설명해줘야겠어요!”정한나는 순간 사색이 되었다. 평상시 톡 쏘는 말주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눈에 당혹감만 가득 차 있었다.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변호사계의 우스갯거리로 남을 테니까!...로비를 나선 임유진이 스쿠터 쪽으로 걸어갈 때 강현수가 쫓아와서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왜 다 젖은 셔츠를 입고 길거리를 누빌망정 내 호의를 거절하는 거죠? 내가 싫어요? 그래서 내 물건도 건드리기 싫은 거냐고요?”임유진은 팔을 빼내려 했지만 그가 너무 꽉 잡은 탓에 도저히 빼낼 수 없었다.“나중에 양복 돌려주기가 귀찮아서 그랬어요. 어차피 지금 날씨도 좋아서 셔츠 금방 말라요.”임유진이 대답했다.“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떡하니 쳐다봐도 괜찮은 거예요?”그는 말하면서 시선이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임유진은 돌연 몸이 얼어붙었다.“성인군자라면 안 쳐다보겠죠.”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론 끝없이 되뇌었다.‘수영복이야, 그냥 비키니 입었다고 생각해!’“난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거든요.”강현수는 말하면서 강제로 그녀에게 외투를 걸쳐주었다.“이 꼴로 돌아다니면 딴사람들의 범죄율만 더 높아진다고요!”“현수 씨 진짜!”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이 외투도 나 돌려줄 필요 없으니까 그냥 입어요. 나중에 버리든지 다른 사람 주든지 마음대로 해요.”그는 단지 임유진이 사람들 앞에서 몸을 훤히 비친 모습이 싫었을 뿐이다.강현수도 실은 의아했다. 딴 여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임유진이 찻물에 흠뻑 젖은 걸 본 순간 가슴이 움찔거리고 저도 모르게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품에 꼭 안아서라도 보호해주고
뜻밖에도 강현수는 그녀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가 새 옷을 고르기 시작하자 그제야 본인의 정장 외투를 거두어들였다.임유진은 가게에서 가장 저렴한 티셔츠 한 장 골라서 얼른 갈아입었다.그녀가 옷을 고르고 있을 때 GH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에서 강지혁은 한껏 어두운 표정으로 개인 비서 고이준의 보고를 들었다.“네, 전에 여러 언론사들과 미리 얘기해서 무릇 임유진 씨에 관련된 기사라면 일절 내보내지 못하게 조치해놨습니다. 이번에 세 언론사들도 감히 기사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고이준이 말했다.세 언론사에서 동시에 익명의 메일을 받았는데 임유진과 강현수가 함께 있는 애틋한 사진이 첨부 파일로 들어있었다.“누구 짓인지 조사해냈어?”강지혁이 물었다.“지금 조사 중인데 상대가 들킬 걸 알고 미리 전문적인 수단으로 손을 본 것 같아요.”고이준이 대답했다.“가장 빠른 속도로 조사해내. 배후의 조력자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야겠어.”강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네!”고이준은 곧바로 대답했다.“이만 나가봐.”고이준이 사무실을 나선 후에야 강지혁은 컴퓨터로 메일함을 열어보았는데 고이준이 보낸 파일이 있었다.그중 하나를 클릭하니 임유진과 강현수의 사진들이었다.달빛 아래에서 남자는 여자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여자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기도 했으며 서로 마주 보는 사진도 있었다.마치... 한 쌍의 연인을 방불케 했다.강지혁의 눈빛이 점점 더 짙어졌고 마우스를 쥔 손등에 핏줄이 튀어 올랐다. 임유진과 강현수가 왜 포옹하고 있는 걸까? 둘은 또 무슨 얘기를 나눈 걸까?강지혁은 그중 사진 한 장을 보더니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사진 속에서 강현수의 얼굴에 무언가가 역반사 되었고 임유진은 살짝 놀란 듯이 그를 마주 봤다.강현수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니!강지혁은 예전에 어느 날 밤 그녀가 ‘눈물’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게 생각났다.그때 이 화제를 꺼낸 이유가 혹시... 강현수 때문일까?강지혁은 문득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녀와 강현수 사이에
강지혁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오직 그녀 목소리만이 그에게 안정감을 줄 듯싶다!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됐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강지혁이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혁이야?”그건... 강현수의 목소리였다.강지혁은 심장이 움찔거려 딱딱하게 물었다.“응, 나야. 네가 왜 유진의 전화를 받아?”“지금 옷 갈아입는 중이야. 전화랑 가방 모두 밖에 놓고 있어서... 이따가 다시 전화하라고 할게.”강현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강지혁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마친 후 강현수는 물끄러미 수중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방금 휴대폰 액정에 뜬 ‘혁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전화를 받아버렸다.평소라면 절대 다른 사람 전화를 받지 않을 텐데 아까는 왜... 전화 온 사람이 강지혁이라서 그런 걸까?그 어떤 여자도 좋아할 것 같지 않던 강지혁이 하필이면 그가 호감 가는 여자를 사랑하게 될 줄이야.하지만 결국 강현수가 손을 놓아줘야 한다. 그는 감히 강지혁과 경쟁할 엄두가 안 난다.게다가 그가 진정 원하는 사람은 임유진이 아니다.말은 그렇게 해도 매번 임유진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끌린다.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감돌고 심지어 팔찌를 볼 때마다 그녀 얼굴이 떠오른다.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강현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졌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여자란 걸 뻔히 알면서 대체 왜 자꾸만 다가가고 싶은 걸까?이때 탈의실 문이 열리고 임유진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잔꽃 무늬 롱 원피스로 갈아입었는데 그 모습을 본 강현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방금 그녀가 이 치마를 들고 있을 때까지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입고 나온 순간 그해 그 소녀를 방불케 하는 모습에 저절로 넋이 나갔다.그해 그 소녀는 바로 이처럼 작은 체구에 잔꽃 무늬 원피스를 입고 그를 업은 채 힘겹게 하산했다.굴곡진 길을 따라
온 집안에 꽉 찬 치마를 보며 그는 그 소녀가 이 치마들을 입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본다.하지만 그 무엇도 지금 이 순간의 놀라움을 이길 수 없다. 눈앞의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심지어 아주 저렴한 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비추고 있는데 강현수는 문득 눈시울이 빨개졌다.임유진은 거울로 치마 입은 제 모습을 한참 들여다봤다. 방금 이 치마를 보자마자 골랐는데 잔꽃 무늬가 어릴 때 외할머니가 사준 치마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아쉽게도 그 잔꽃 무늬 치마는 나중에 너덜너덜해져서 버렸다.그해 이 일로 임유진은 한바탕 울기도 했다!이 치마는 꽤 길었기에 스쿠터를 타도 노출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가격도 5만6천 원이라 아주 적당했다. 조금만 더 흥정하면 가격을 더 낮출수 있을지도 모른다.“어때요 손님? 마음에 드세요?”가게 점원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괜찮긴 한데 좀 더 싸게 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저희 가게는 이미 가격을 최대한 낮춘 거라...”점원은 마치 테이프가 감긴 것처럼 말끝을 흐리고 멍하니 임유진의 뒤쪽을 바라봤다.그녀도 어리둥절해 하며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는데 강현수가 갑자기 뒤에서 팔을 벌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목과 얼굴에 와닿았다.“너야?”강현수의 잠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서 얼른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하지만 강현수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그녀 목에 얼굴을 파묻고는 나지막이 되뇌었다.“진짜 너야? 너 맞지? 바로 너였어...”“강현수 씨, 이거 놔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임유진은 왠지 그가 그날 밤 술에 취한 모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다만 그는 지금 술에 취하기는커녕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너... 맞잖아. 아니야? 아닌데 왜 이렇게 닮았어? 대체 왜 너만 이런 느낌 주는 거냐고...”강현수는 마치 수년간 찾아 헤매던 그 소녀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하
임유진은 이제 숨 막힐 지경이었다.“나 아니에요, 아니라고요...”그녀는 겨우 말을 이었다.이제 곧 질식해 쓰러질 것만 같던 그 순간, 또 한 번 거센 힘에 의해 드디어 강현수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귓가에 퍽 하는 주먹 소리와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의자와 선반이 부딪치는 소리까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임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는데 강지혁의 얼굴이 두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혁이가 방금 그녀를 강현수의 품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임유진은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건지 의아할 따름이었다.그 시각 강지혁은 음침한 얼굴로 바닥에 드러누운 강현수에게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강현수는 초라한 몰골로 선반에 깔려 있었다. 방금 바닥에 쓰러지면서 선반까지 넘어지며 아수라장이 돼버렸다.그의 입가에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강지혁이 제법 거칠게 주먹질을 한 모양이다.“너 방금 뭐라고 했는지 알아?”강지혁은 굳은 얼굴로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칼바람처럼 살을 엘 것 같았다.보통 사람이라면 목소리만 들어도 몸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겠지만 강현수는 달랐다.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는 되레 입꼬리를 씩 올렸다.“알지.”“그래? 알면서 이러는 거야? 강현수, 너 진짜 우리 두 집안 등지게 할 셈이야?”강지혁이 거만하게 쏘아붙였다.강현수는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지혁아, 내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걸 너도 알잖아. 유진 씨가 아무래도 그 사람인 것 같아.”강지혁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강현수는 그에게 대답한 게 아니라 임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정말 기억 안 나요? 유진 씨 전에도 비슷한 잔꽃 무늬 원피스를 입고 한 남자아이를 구해줬잖아요. 분명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데 기어코 업고 하산해서 그 아이 목숨을 살려줬어요! 믿으라면서요, 유진 씨가 무조건 업고 하산한다면서 그 아이더러 믿으라면서요.”임유진은 어리둥절한 눈길
강지혁은 순간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 돌려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한없이 짙은 두 눈엔 그녀가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혁아, 내가 직접 얘기하게 해줘.”그녀는 강지혁의 손을 꼭 잡으며 마치 그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얇은 입술을 앙다물고 꼼짝없이 그녀만 쳐다봤다.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어쩔 바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임유진은 그의 뒤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왔고 강지혁도 가로막지 않았다.그녀는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강현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난 강현수 씨가 찾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방금 말한 그 일들 난 아무 인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현수 씨가 사람 잘못 찾은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강지혁의 두 눈이 살짝 반짝였고 강현수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니야, 말도 안 돼. 다 잊었어? 시간이 너무 길었지. 잊을 만도 해.”“나 기억력이 좋아요.”임유진이 말했다.“방금 현수 씨가 말한 것들 진짜 처음 듣는 얘기에요.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없어요. 아 그리고 내가 현수 씨 기억 속의 그 소녀를 닮은 거, 오늘 이 치마를 고른 거 굳이 설명하자면 모든 건 우연의 일치에요.”강현수는 싸늘한 표정에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임유진도 그런 그의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강현수는 한참 후에야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유진 씨가 맞든 아니든 난 무조건 찾아낼 겁니다!”말을 마친 강현수는 곧게 옷 가게를 나섰다.줄곧 그녀가 아니라고 여겨왔는데 오늘 이 잔꽃 무늬 치마를 고른 순간, 그 치마를 입고 나온 순간, 임유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그녀가 아닌데 왜 이토록 강렬한 느낌이 들겠는가?! 왜... 대체 왜 이렇게 닮은 거냐고?!‘애초에 유진 씨부터 낱낱이 조사해야 했어!’강지혁은 문득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혁아!”임유진이 고개 들어 그를 쳐다봤는데 정색한 얼굴이 살짝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너 왜 그래?”그녀의
강지혁은 아무 말 없이 곧게 앞으로 질주했고 마음속엔 전례 없는 당혹감이 들었다.대체 뭘 두려워하는 걸까? 강현수가 정말 임유진을 찾아낼까 봐? 아니면 임유진이 알게 된 후 강현수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생길까 봐 이런 걸까?아니, 강현수는 찾아낼 수 없다. 강지혁이 애초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손을 썼으니까.한편 유진이는... 아무래도 그해 일을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다. 강지혁이 조사해봤는데 그해 강현수를 찾은 이후로 임유진은 큰 병을 앓았고 곧장 S 시에 실려 왔다.고열이 심하게 났는데 아마 그 고열로 일부 기억을 잃은 듯싶다.이토록 철저하게 손을 써놨는데 대체 왜 두려운 걸까?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어 강지혁이 모르는 사이에 또 불쑥 일어날 것만 같았다.사진 속 강현수가 그녀를 안고 그녀 앞에서 눈물을 보일 때 임유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왜 이런 일들을 단 한 번도 강지혁에게 말하지 않았던 걸까?대체 뭘 숨기려고?!“혁아, 대체 어디 가는 거냐고? 나 오후에 가게 돌아가서 계속 배달 일 해야 한단 말이야.”임유진이 아무리 물어도 강지혁은 듣는 척도 안 하며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마지못해 탁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나 지금... 일이 좀 생겨서 금방 가게로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아니요, 괜찮아요,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언니.”통화를 마친 후 문득 통화기록을 보았는데 강지혁의 이름이 떠 있었고 통화시간도 1분 가까이 됐다.그녀는 분명 전화를 받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임유진은 불쑥 강현수가 떠올랐다.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을 때 가방과 휴대폰을 밖에 두고 갔고 마침 강현수 바로 옆에 놓아뒀다.설마 그때... 강현수가 이 전화를 받은 걸까?임유진은 그제야 강지혁이 왜 갑자기 옷 가게에 나타났는지 이해됐다.“아까 현수 씨가 네 전화 받았지? 나 그때 마침 옷 갈아입으러 들어가서 휴대폰 밖에 놔뒀거든. 오늘 현수 씨랑은 우연히 마주친 거야. 배달 갔다가 옷이 더러워져서...
"여기는 왜 온 거야?"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하지만 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앞 유리를 통해 S 시를 내려다보았다.이곳은 강선우가 살아생전 강지혁을 데리고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때 그는 강지혁에게 이렇게 말했었다."지혁아, 그거 아니?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사람은 더 외로워진다는 거.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지 않으면 제 운명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된단다."그래서 진정 손안에 자신의 운명을 쥐고 싶으면 끊임없이 높은 곳을 향해 오를 수밖에 없다.강지혁은 마음이 복잡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 때 항상 이곳으로 올라와 S 시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하지만 GH 그룹을 물려받은 후부터는 이곳에 발길을 끊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흔들릴 것 없이 운명을 자기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 그가 오늘 오랜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잡았다고 생각했던 그 운명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까 봐 불안해서일까? 아니, 혹 그의 운명은 진작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닐까?강지혁의 운명을 손에 쥔 그 누군가는 강지혁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며 때로는 두려움에 떨게도 한다.강지혁은 시선을 옆에 앉은 임유진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안전 벨트를 푼 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양손을 임유진의 다리 옆에 놓았다."자, 이제 얘기해봐. 왜 강현수와 우연히 그 옷가게에 있었는지. 그리고 왜 우연히도 내가 건 전화를 강현수가 받았는지."심연같이 어두운 눈동자를 가까이에서 마주한 임유진은 숨을 깊게 한번 들이켜더니 오늘 배달하러 갔다가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얘기해 주었다. 물론 정한나가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사실은 뺀 채, 옷이 그렇게 된 건 그저 어쩌다가 찻물이 쏟아진 것뿐이고 마침 그 모습을 강현수가 봐 버렸다고 얘기했다.다만 강현수가 그녀를 갑작스럽게 안아버린 건 임유진도 생각 못 했던 일이다."사람을 착각한 것 같아. 난 어릴 적 강현수 씨와 그렇게 만난 적 없거든."임유진의 말에 강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