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왜 온 거야?"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하지만 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앞 유리를 통해 S 시를 내려다보았다.이곳은 강선우가 살아생전 강지혁을 데리고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때 그는 강지혁에게 이렇게 말했었다."지혁아, 그거 아니?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사람은 더 외로워진다는 거.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지 않으면 제 운명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된단다."그래서 진정 손안에 자신의 운명을 쥐고 싶으면 끊임없이 높은 곳을 향해 오를 수밖에 없다.강지혁은 마음이 복잡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 때 항상 이곳으로 올라와 S 시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하지만 GH 그룹을 물려받은 후부터는 이곳에 발길을 끊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흔들릴 것 없이 운명을 자기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 그가 오늘 오랜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잡았다고 생각했던 그 운명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까 봐 불안해서일까? 아니, 혹 그의 운명은 진작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닐까?강지혁의 운명을 손에 쥔 그 누군가는 강지혁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며 때로는 두려움에 떨게도 한다.강지혁은 시선을 옆에 앉은 임유진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안전 벨트를 푼 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양손을 임유진의 다리 옆에 놓았다."자, 이제 얘기해봐. 왜 강현수와 우연히 그 옷가게에 있었는지. 그리고 왜 우연히도 내가 건 전화를 강현수가 받았는지."심연같이 어두운 눈동자를 가까이에서 마주한 임유진은 숨을 깊게 한번 들이켜더니 오늘 배달하러 갔다가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얘기해 주었다. 물론 정한나가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사실은 뺀 채, 옷이 그렇게 된 건 그저 어쩌다가 찻물이 쏟아진 것뿐이고 마침 그 모습을 강현수가 봐 버렸다고 얘기했다.다만 강현수가 그녀를 갑작스럽게 안아버린 건 임유진도 생각 못 했던 일이다."사람을 착각한 것 같아. 난 어릴 적 강현수 씨와 그렇게 만난 적 없거든."임유진의 말에 강지혁
‘왜라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하지만 지금 강지혁의 얼굴을 봐서는 대답을 꼭 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말해. 왜 강현수한테는 안 흔들릴 것 같은지."그의 재촉에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웠지만, 정확히 얘기해 주었다."내 마음을 흔들고 설레게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혁아. 그리고 난 강현수 씨에게 특별한 감정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네가 더는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정말 없어?강지혁의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 머릿속에서 강현수가 임유진을 꼭 끌어안고 있는 사진과 강현수가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린 사진들이 떠올랐으니까.그 사진들은 마치 강지혁이 무슨 수를 써도 강현수와 임유진 사이는 절대 끊어낼 수 없다고 되새겨 주는 것만 같았다."정말 없어? 나한테 숨기는 거 정말 아무것도 없어?"강지혁이 물었다."응, 없어. 너한테 말한 게 다야."임유진은 강지혁이 오늘 일에 관해 묻는 줄 알았기에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럼 유진아... 너는 나한테 얼마나 설레?"강지혁은 이제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왔고 차 안 분위기는 아까와 달라졌다. 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대답하기 부끄러운지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내가 아파하고 슬퍼하는 거 보면 못 견디겠어?"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곁에 없으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강지혁이 또다시 물었고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 생각은 얼마나 해? 시도 때도 없이 내 생각하고 있어?"그는 현존하는 어떤 악기보다도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임유진의 얼굴은 이제 불처럼 뜨거워졌다.얼마나 생각하냐고?강지혁의 얼굴, 목소리 그리고 숨결, 이 모든 것들은 마치 마법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임유진은 그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함께 살고 싶다고, 자신의 미래에 그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
증명이라니? 뭘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지?임유진은 조금 얼떨떨해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빛을 보고는 뭔가 깨달은 듯 잠깐 주춤하더니 곧 두 팔을 강지혁의 목에 둘렀다.그러고는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강지혁의 입술을 차가웠지만,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두근거리는 마음을 담은 입맞춤... 이것이 그녀의 증명이다.하지만 이런 가벼운 입맞춤은 강지혁의 성에 차지 않았다.그는 임유진이 슬슬 입술을 떼려고 할 때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강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것도 잠시 임유진은 바로 그의 키스에 빠져들었다.강지혁은 자기가 한 키스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까? 임유진은 그의 키스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고 그를 향한 감정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임유진이 힘든 듯 내는 신음에 강지혁은 서서히 입술을 뗐다."콜록콜록..."임유진은 갑작스럽게 흘러드는 신선한 공기에 저도 모르게 마른기침하며 숨을 깊게 들이켰다."혁아, 아까 너..."그녀가 뭔가 얘기하려는 듯 입을 열자 강지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부족해... 이거로는 부족해... 유진아, 이거로는 증명이 안 된다고..."강지혁은 조수석 옆 버튼을 누르고는 임유진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아직 안전 벨트를 풀기 전이었기에 임유진은 꼼짝없이 의자가 넘어가는 대로 뒤로 누워졌다.강지혁은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넘어오더니 상체를 세워 거추장스러운 넥타이를 아예 치워버리고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임유진은 깜짝 놀라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뉴스 메인을 차지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혁아!"그녀는 안전 벨트를 풀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임유진이 막 손을 안전 벨트 쪽으로 가져가려 할 때 그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왜, 증명하기 싫어?""아니, 싫은 게 아니라..."그녀는 몸을 흠
임유진은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강지혁은 지금 매우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유진아, 사랑해."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야 해."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안 돼.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강지혁은 임유진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기만을 원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 싶었다.한 사람을 사랑하면 모두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독재자가 되는 걸까?아버지도 어머니를 이토록 사랑하셨던 걸까? 그래서 어머니가 떠난 후 살아가는 것도 사치라고 느껴 목숨을 가볍게 여겼나?강지혁은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문을 잇기 위한 것일 뿐 사랑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사랑을 넘어 마치 하나의 낙인처럼 그의 마음에, 그의 머리에 새겨졌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진해져만 갔다.그녀는 강지혁이 제일 힘들 때 두 팔을 벌려 그를 꼭 껴안아 주었고 그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여주었다.강지혁은 그녀의 곁에 있을 때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고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누나라고 불러’라며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준 임유진의 한마디에 그는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강선우가 죽은 후 가족이라는 느낌을 받은 건 그때가 유일했으니까.이제 강씨 저택에서의 유일한 피붙이는 강문철뿐이지만 그에게 있어 강지혁은 어디까지나 가문을 잇는 도구일 뿐이었다. 만약 강지혁이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그에게 적당한 가문의 아가씨를 소개해줘 새로운 후계자를 만들어 내도록 했을 것이다.강문철은 자신의 손자에게 애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증오하고 있다. 강지혁의 몸속에는 그가 싫어
"혁아... 혁아..."임유진이다. 임유진이 또다시 그를 부르고 있다. 다만 왜 곧 울 것 같은 목소리인 거지?‘잠깐, 울고 있다고?’강지혁이 정신을 차리고 임유진을 바라보니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샌가 눈물이 맺혀있었다.‘설마 내가 울린 건가...?’그는 방금 이성을 잃었고 임유진은 그런 그가 무서워 눈물이 났다. 강지혁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는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동시에 마음이 아파 났다.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강현수 일 때문에 강지혁은 감정이 격해졌고 이제까지 자부해왔던 이성까지 잃었다."내가... 무서워?"그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물었다.강지혁이 원하는 건 임유진의 웃는 모습이다. 그녀가 행복해하는 얼굴로 ‘혁아’라고 불러줄 때면 그는 살아있음을 느낀다.그래서 임유진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모습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신의 손으로 그녀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다.임유진은 아직 진정이 안 된 듯 여전히 몸을 떨고 있다.무섭냐고? 확실히 무서웠다. 아까의 강지혁은 그녀의 반항이 아예 소용없다는 느낌을 주었고 어두운 감정을 그녀에게 전부 쏟아내듯 그녀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임유진은 너무 낯설었다.하지만 지금 임유진이 상처받았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진정으로 무서웠던 것 강지혁인 것만 같았다.분명 두 사람 중 우위에 있는 건 강지혁이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가 마치 툭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유리와도 같아 보였다.고요한 차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임유진은 촉촉한 눈가에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의자에 누워서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혁아, 네가 무서운 게 아니야. 아까는 내 목소리가 너한테 닿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강지혁을 안심시켜야만 할 것 같았고 이렇게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녀는 침을 한번 삼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이렇게 해야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허락할게."임유진은 강지혁을 위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도 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들키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오로지 강지혁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그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조금 놀란 얼굴로 눈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 무서워하고 있으면서 임유진은 지금 그를 위해 기꺼이 허락하겠다고 한다.강지혁은 가슴께가 따뜻하면서도 약간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까까지만 해도 온몸을 감싸고 있던 그의 불안을 단번에 진정시켜주었고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임유진밖에 없다...강지혁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외투를 임유진의 몸에 덮어주었다."미안해... 아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그는 낮게 속삭이며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아까 그는 하마터면 후회할 짓을 할뻔했다. 만약 임유진이 아까 강지혁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그녀에게 상처를 줬을 것이다.강지혁의 품에 안기자 임유진의 떨림도 서서히 멎어갔다. 드디어 그녀가 아는 혁이로 돌아온 것이다.‘이제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혹시... 강현수 씨 때문이야?"임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그런 거야. 강현수 씨가 찾는 사람, 나 아니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 그리고 찾는 사람이 정말 내가 맞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니까.""그래, 누나가 사랑하는 건 나야."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따라 똑같이 중얼거렸다.그러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아까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넥타이로 묶어뒀던 그녀의 손목을 바라봤다.그녀를 속박하고 있던 넥타이를 천천히 풀어보니 손목이 빨
"옷,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게."강지혁은 잠시 침묵하다 옷들을 그녀에게 건네주고는 뒤로 몸을 돌렸다.임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뒤돌아선 강지혁이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녀가 옷을 벗고 다시 입는 소리는 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강지혁을 설레게 하는 여자는 임유진뿐이고 이 감정은 아마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더 강렬해질 것이다. 게다가 강현수의 일도 있어 그는 지금, 마치 맹수가 먹이를 지키듯 위험 감지 센서가 곤두서 있다.다만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했다. 강지혁은 자신을 보는 임유진의 눈에 두려움과 공포가 서리게 하고 싶지 않았고 또다시 이성을 잃은 채 그녀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서야 강지혁은 몸을 돌렸다.그녀는 노란색 긴 원피스로 갈아입었고 다 찢어진 꽃무늬 원피스는 바닥에 버려졌다.강지혁은 그 원피스를 주운 후 그녀에게 말했다."내가 새로 사 줄게.""아니야. 괜찮아."그러자 임유진이 얼른 말을 이었다."어차피 그건 잠깐 입으려고 산 옷이라서. 그리고 네가 나한테 사 준 옷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새로 살 필요 없어.""그럼 이건 버리라고 할게."강지혁이 막 사용인을 부르려고 하자 임유진이 얼른 그의 손에서 옷을 빼앗았다."내... 내가 버릴게."만약 이걸 사용인에게 넘겼다가는 저택에 이상한 소문이 돌 게 뻔했다."그래, 그럼."강지혁은 대답 후 그녀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빨갛게 부었던 것이 어느새 많이 옅어졌다."내가 마사지해줄게. 이러면 좀 더 빨리 괜찮아 질 거야."그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부어오른 살 주위를 마사지했다.힘 조절이 적당해서 그런지 아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해 그의 말대로 빨리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좀 괜찮아?"강지혁이 물었다."응, 괜찮아.""그러면 일단 좀 쉬어."강지혁은 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내려놓으며 방을 나가려고 했다.하
서재의 컴퓨터 화면에는 강현수가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 띄워져 있었고 강지혁은 의자에 앉아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결국, 그는 이 사실을 꺼내지 않았다.왜 이날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강현수가 왜 이렇게 절절한 표정으로 끌어안고 있었으며 눈물까지 보였는지, 강지혁은 결국 임유진에게 묻지 않았다.그녀의 입에서 행여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나올까 봐 두려웠던 걸까?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강지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쓰게 웃었다. 대체 언제부터 천하의 강지혁이 이런 겁쟁이가 됐을까.오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있는 옷가게로 쳐들어가 강현수가 임유진을 끌어안고 한 절절한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온몸이 굳어버렸다.강현수가 임유진인 걸 알아볼까 봐 겁이 난 것이다. 그를 어릴 적부터 쭉 지켜봐 왔던 친구로서 그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강현수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임유진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됐으니까..."혁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원래 겁쟁이가 되는 거야."문득 귓가에 강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옛 기억이 떠올랐다."겁쟁이?"그때의 강지혁은 아직 어렸기에 강선우가 하는 말의 뜻을 몰랐다."그래, 겁이 많아지고 잃을까 봐 두렵고 그런 상태가 될 거야. 다른 말로 말하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네 약점이 되어버리는 거지."강선우는 큰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즐거울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인생은 너무 따분하고 지루할 테니까.""약점이라면서... 꼭 있어야 해요?"강지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나는 우리 혁이한테 꼭 생겼으면 좋겠어."강선우가 웃으며 말했다."예를 들면 내 약점은 바로 혁이 엄마야. 하지만 나는 혁이 엄마가 내 약점이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나는 혁이 엄마가 나를 바라봐 주고 사랑해줄 때 심장이 떨리고 인생이 즐겁게 느껴져. 그래서 나는 혁이도 언젠가 꼭 그런 사람을 만나길 바라."그때의 강지혁 엄마는 아직 강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