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아... 혁아..."임유진이다. 임유진이 또다시 그를 부르고 있다. 다만 왜 곧 울 것 같은 목소리인 거지?‘잠깐, 울고 있다고?’강지혁이 정신을 차리고 임유진을 바라보니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샌가 눈물이 맺혀있었다.‘설마 내가 울린 건가...?’그는 방금 이성을 잃었고 임유진은 그런 그가 무서워 눈물이 났다. 강지혁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는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동시에 마음이 아파 났다.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강현수 일 때문에 강지혁은 감정이 격해졌고 이제까지 자부해왔던 이성까지 잃었다."내가... 무서워?"그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물었다.강지혁이 원하는 건 임유진의 웃는 모습이다. 그녀가 행복해하는 얼굴로 ‘혁아’라고 불러줄 때면 그는 살아있음을 느낀다.그래서 임유진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모습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신의 손으로 그녀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다.임유진은 아직 진정이 안 된 듯 여전히 몸을 떨고 있다.무섭냐고? 확실히 무서웠다. 아까의 강지혁은 그녀의 반항이 아예 소용없다는 느낌을 주었고 어두운 감정을 그녀에게 전부 쏟아내듯 그녀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임유진은 너무 낯설었다.하지만 지금 임유진이 상처받았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진정으로 무서웠던 것 강지혁인 것만 같았다.분명 두 사람 중 우위에 있는 건 강지혁이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가 마치 툭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유리와도 같아 보였다.고요한 차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임유진은 촉촉한 눈가에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의자에 누워서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혁아, 네가 무서운 게 아니야. 아까는 내 목소리가 너한테 닿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강지혁을 안심시켜야만 할 것 같았고 이렇게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녀는 침을 한번 삼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이렇게 해야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허락할게."임유진은 강지혁을 위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도 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들키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오로지 강지혁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그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조금 놀란 얼굴로 눈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 무서워하고 있으면서 임유진은 지금 그를 위해 기꺼이 허락하겠다고 한다.강지혁은 가슴께가 따뜻하면서도 약간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까까지만 해도 온몸을 감싸고 있던 그의 불안을 단번에 진정시켜주었고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임유진밖에 없다...강지혁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외투를 임유진의 몸에 덮어주었다."미안해... 아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그는 낮게 속삭이며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아까 그는 하마터면 후회할 짓을 할뻔했다. 만약 임유진이 아까 강지혁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그녀에게 상처를 줬을 것이다.강지혁의 품에 안기자 임유진의 떨림도 서서히 멎어갔다. 드디어 그녀가 아는 혁이로 돌아온 것이다.‘이제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혹시... 강현수 씨 때문이야?"임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그런 거야. 강현수 씨가 찾는 사람, 나 아니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 그리고 찾는 사람이 정말 내가 맞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니까.""그래, 누나가 사랑하는 건 나야."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따라 똑같이 중얼거렸다.그러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아까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넥타이로 묶어뒀던 그녀의 손목을 바라봤다.그녀를 속박하고 있던 넥타이를 천천히 풀어보니 손목이 빨
"옷,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게."강지혁은 잠시 침묵하다 옷들을 그녀에게 건네주고는 뒤로 몸을 돌렸다.임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뒤돌아선 강지혁이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녀가 옷을 벗고 다시 입는 소리는 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강지혁을 설레게 하는 여자는 임유진뿐이고 이 감정은 아마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더 강렬해질 것이다. 게다가 강현수의 일도 있어 그는 지금, 마치 맹수가 먹이를 지키듯 위험 감지 센서가 곤두서 있다.다만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했다. 강지혁은 자신을 보는 임유진의 눈에 두려움과 공포가 서리게 하고 싶지 않았고 또다시 이성을 잃은 채 그녀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서야 강지혁은 몸을 돌렸다.그녀는 노란색 긴 원피스로 갈아입었고 다 찢어진 꽃무늬 원피스는 바닥에 버려졌다.강지혁은 그 원피스를 주운 후 그녀에게 말했다."내가 새로 사 줄게.""아니야. 괜찮아."그러자 임유진이 얼른 말을 이었다."어차피 그건 잠깐 입으려고 산 옷이라서. 그리고 네가 나한테 사 준 옷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새로 살 필요 없어.""그럼 이건 버리라고 할게."강지혁이 막 사용인을 부르려고 하자 임유진이 얼른 그의 손에서 옷을 빼앗았다."내... 내가 버릴게."만약 이걸 사용인에게 넘겼다가는 저택에 이상한 소문이 돌 게 뻔했다."그래, 그럼."강지혁은 대답 후 그녀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빨갛게 부었던 것이 어느새 많이 옅어졌다."내가 마사지해줄게. 이러면 좀 더 빨리 괜찮아 질 거야."그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부어오른 살 주위를 마사지했다.힘 조절이 적당해서 그런지 아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해 그의 말대로 빨리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좀 괜찮아?"강지혁이 물었다."응, 괜찮아.""그러면 일단 좀 쉬어."강지혁은 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내려놓으며 방을 나가려고 했다.하
서재의 컴퓨터 화면에는 강현수가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 띄워져 있었고 강지혁은 의자에 앉아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결국, 그는 이 사실을 꺼내지 않았다.왜 이날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강현수가 왜 이렇게 절절한 표정으로 끌어안고 있었으며 눈물까지 보였는지, 강지혁은 결국 임유진에게 묻지 않았다.그녀의 입에서 행여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나올까 봐 두려웠던 걸까?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강지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쓰게 웃었다. 대체 언제부터 천하의 강지혁이 이런 겁쟁이가 됐을까.오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있는 옷가게로 쳐들어가 강현수가 임유진을 끌어안고 한 절절한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온몸이 굳어버렸다.강현수가 임유진인 걸 알아볼까 봐 겁이 난 것이다. 그를 어릴 적부터 쭉 지켜봐 왔던 친구로서 그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강현수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임유진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됐으니까..."혁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원래 겁쟁이가 되는 거야."문득 귓가에 강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옛 기억이 떠올랐다."겁쟁이?"그때의 강지혁은 아직 어렸기에 강선우가 하는 말의 뜻을 몰랐다."그래, 겁이 많아지고 잃을까 봐 두렵고 그런 상태가 될 거야. 다른 말로 말하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네 약점이 되어버리는 거지."강선우는 큰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즐거울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인생은 너무 따분하고 지루할 테니까.""약점이라면서... 꼭 있어야 해요?"강지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나는 우리 혁이한테 꼭 생겼으면 좋겠어."강선우가 웃으며 말했다."예를 들면 내 약점은 바로 혁이 엄마야. 하지만 나는 혁이 엄마가 내 약점이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나는 혁이 엄마가 나를 바라봐 주고 사랑해줄 때 심장이 떨리고 인생이 즐겁게 느껴져. 그래서 나는 혁이도 언젠가 꼭 그런 사람을 만나길 바라."그때의 강지혁 엄마는 아직 강
"진작에 치워버려야 했어. 여론을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나도 그렇게 해줘야겠지?"강지혁이 차갑게 말했다."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고이준은 자신의 대표가 엄청나게 화나 있음을 바로 눈치챘다. 그러고는 인터넷에 떠다니는 임유라의 사진을 보며 혀를 찼다. 강현수와 헤어진 마당에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S 시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고이준은 벌써 임유라의 처참한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한편, 강현수는 현재 별장 화실에서 뚫어지게 한 그림을 보고 있다. 그가 보고 있는 그림은 다름 아닌 어린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업고 하산하는 그림이다.그는 매년 이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똑같은 구도의 똑같은 인물, 아마 그의 머릿속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바로 이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그의 그림 실력은 나날이 좋아졌고 그 덕에 똑같은 그림이라도 매년 그림 속 소녀의 모습은 점점 더 기억 속의 그 아이와 닮아갔다.전에 그의 엄마가 매번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강현수를 향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하기도 했다."왜 이렇게 매번 똑같은 그림만 그려? 한 장이면 충분하잖아."아니, 전혀 충분하지 않다. 만약 이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그는 기억이 점점 더 모호해져 갈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게 돼 영영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이 소녀는 임유진이 맞다.사실 강현수는 임유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릴 적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소녀가 크면 그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후 여러 가지 요소가 그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하지만 오늘, 임유진이 그 소녀와 비슷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을 때 그는 확신했다. 임유진이 바로 어릴 적 그 소녀라고!강현수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흔들어 놓은 여자는 임유진이 처음이고 품에 꽉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사람도 임유진밖에 없었으며 강지혁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낸 것이 이렇게나 후회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도 임유진뿐이다."네가 내 거라는 증거
호텔...?임유라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연예계에 오랜 기간 몸을 담고 있었기에 호텔로 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길이 그녀의 유일한 기회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헤어졌다고는 하나 임유라는 강현수의 여자 친구 자리까지 올라갔던 여자이기에 그녀의 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해당 감독은 연예계에서 꽤 입지가 굵은 감독이고 임유라가 지금은 여기저기에서 거절당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임유라는 방금 전화를 건 감독에게 촬영장 뒷일이나 클럽 공연 같은 일자리를 받게 되면 다시 강현수와 얘기해본 후 연예계에 발을 들일 생각이다.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오늘 이 기회를 잘 잡아야 했다. 전화를 건 감독은 40대이고 부인도 있다. 그러니 만약 그가 정말 그 목적으로 부른 것이 맞다면 임유라 역시 상대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잠자리를 가지기 전 그녀는 몰래 촬영해 증거를 얻을 예정이고 그것으로 상대에게 돈을 뜯어내든 다시 스타의 자리로 자신을 올려놓게 하든 협박할 예정이다.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면 지금 그녀를 하찮게 보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발아래에 둘 수 있다.임유라는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인기 여배우 자리에 올라갈 것이다.생각을 마친 그녀는 몸을 일으켜 옷장에서 강현수와 데이트 했을 때 입었던 옷을 고른 후 정성스럽게 화장까지 하고 약속한 호텔에 도착했다.얘기했던 호텔 방 앞으로 가 노크하니 감독이 문을 열어주며 임유라에게 안으로 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임유라는 씩 웃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자리에 앉은 후 감독이 그녀의 근황을 묻자 임유라는 잔뜩 불쌍한 얼굴로 요즘 많이 힘들어 S 시를 벗어날 생각까지 한다며 감독에게 도움을 청했다.감독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임유라에게 새로운 배역을 줘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며 약속했다."유라 씨, 사실 나 전부터 유라 씨가 마음에 들었어."감독은 말을
"찍지 마, 찍지 말라고!"임유라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 또다시 몸을 가리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다 문득 의자 위에 놓인 가방이 떠올라 그거로라도 몸을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가방은 사람들 손에 의해 바닥에 내쳐졌고 그 탓에 안에 숨겨두었던 카메라가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그러자 감독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이거 재밌네. 나만 찍었던 게 아니었잖아?"침대 위에 있던 감독도 그제야 임유라의 속셈을 눈치채고는 분에 못 이겨 발가벗을 몸뚱이로 임유라를 정신없이 내려쳤다."이런 미친년이! 불쌍해서 좀 봐주려고 했더니 감히 몰래 촬영을 해?!"임유라는 아까 여성에게 맞은 데다가 지금은 남자에게까지 맞게 되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모두 카메라에 담겼다.다음 날, 해당 영상은 금세 인터넷에 퍼졌다. 물론 적나라하게 드러난 더러운 몸뚱어리들은 다 모자이크 처리가 됐지만 다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금방 알아챘다."임유라, 진짜 미친 거 아니야?""그러니까 임유라는 지금, 저 상황에 남자 쪽을 협박하려고 했다는 거지? 정말 대단하다!""이런 여자인 걸 아니까 강현수도 진작에 버렸겠지. 그래도 전에는 임유라가 조금 불쌍하기도 했는데 지금 보니 오히려 강현수가 더 불쌍했네. 저런 더러운 걸 한동안 데리고 다녔으니."임유라는 전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욕을 먹었고 심지어 어떤 네티즌들은 그녀가 했던 짓들을 일일이 나열하며 조롱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다.물론 영상에 담긴 그 남자 감독도 똑같이 거센 질책을 받았다.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라고 해도 이런 영상까지 퍼진 마당에 이제 다시는 이 바닥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같은 시각, 어제 불륜 현장을 급습한 감독 부인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비서님, 정보 감사해요. 덕분에 지금까지의 울분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었고 이제 속 시원하게 이혼할 수 있을 것 같아요.""별말씀을요. 이번 일로 혹시 또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만약 나도 언젠가 혁이가 곁에 없으면...’임유진은 자기가 생각하고도 웃긴지 실소를 터트렸다. 그녀의 혁이는 강현수가 아니고 임유진도 임유라가 아니다.「유진아, 너 임유라 소식 봤어?」한지영이 문자를 보내왔다.「응, 봤어.」그러자 임유진이 곧장 대답했다.「난 임유라가 조만간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꼴좋네. 아주 제대로 당해버렸잖아.」한지영은 신이 나서 문자를 썼다.임유라는 이제 재기 불가한 상태가 되었고 체면을 중히 여기는 남자라면 더는 그녀와 엮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이건 내가 들은 건데, 강현수가 임유라에게 가족들 데리고 S 시를 떠나라고 경고까지 했대.」한지영은 백연신에게서 들은 정보들을 임유진에게 들려주었다. 이 일은 몇몇을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한지영은 이걸 전해 들은 후 백연신의 정보력을 칭찬하기도 했다.물로 그 칭찬에 백연신은 혀를 차며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임유진은 강현수가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때 아버지가 집을 내놓은 것이 이 이유일 수도 있었겠네...’하지만 지금은 그 일가가 S 시를 떠나든 말든 임유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감옥살이했을 때부터 그녀는 그들을 더는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으니까.한지영은 임유진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드디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기분 좋나 봐?"그때 백연신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한지영은 그제야 눈앞에 백연신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데이트 중이다."당연하죠!"한지영은 디저트를 먹으면서 예쁘게 웃었다. 임유라가 이 꼴이 됐는데 어떻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을까!"임유라 그 여자 일 때문에?"백연신이 물었다."네. 임유라는 정말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나니 아주 속이 다 시원해요. 하늘도 다 보는 눈이 있는 거죠."한지영은 임유라를 비난하는 댓글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고 식욕마저 돌았다."하늘?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