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나도 언젠가 혁이가 곁에 없으면...’임유진은 자기가 생각하고도 웃긴지 실소를 터트렸다. 그녀의 혁이는 강현수가 아니고 임유진도 임유라가 아니다.「유진아, 너 임유라 소식 봤어?」한지영이 문자를 보내왔다.「응, 봤어.」그러자 임유진이 곧장 대답했다.「난 임유라가 조만간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꼴좋네. 아주 제대로 당해버렸잖아.」한지영은 신이 나서 문자를 썼다.임유라는 이제 재기 불가한 상태가 되었고 체면을 중히 여기는 남자라면 더는 그녀와 엮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이건 내가 들은 건데, 강현수가 임유라에게 가족들 데리고 S 시를 떠나라고 경고까지 했대.」한지영은 백연신에게서 들은 정보들을 임유진에게 들려주었다. 이 일은 몇몇을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한지영은 이걸 전해 들은 후 백연신의 정보력을 칭찬하기도 했다.물로 그 칭찬에 백연신은 혀를 차며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임유진은 강현수가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때 아버지가 집을 내놓은 것이 이 이유일 수도 있었겠네...’하지만 지금은 그 일가가 S 시를 떠나든 말든 임유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감옥살이했을 때부터 그녀는 그들을 더는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으니까.한지영은 임유진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드디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기분 좋나 봐?"그때 백연신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한지영은 그제야 눈앞에 백연신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데이트 중이다."당연하죠!"한지영은 디저트를 먹으면서 예쁘게 웃었다. 임유라가 이 꼴이 됐는데 어떻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을까!"임유라 그 여자 일 때문에?"백연신이 물었다."네. 임유라는 정말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나니 아주 속이 다 시원해요. 하늘도 다 보는 눈이 있는 거죠."한지영은 임유라를 비난하는 댓글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고 식욕마저 돌았다."하늘?
한지영은 백연신의 분석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감독 부인 멍청한 사람 아니야. 오히려 지나치게 똑똑한 여자지. 그런데 그런 여자가 자기한테 득 될 거 하나 없는 짓을 한다고?"백연신의 말에 한지영도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읊조렸다."그러니까 누군가가 뒤에서 일부러 임유라를 매장해 버리려고 한다는 거죠?"임유라를 싫어하던 라이벌 배우일까? 아니면 강현수? 그것도 아니면... 한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강지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뭐, 그런 거지."백연신이 담담하게 말했다."연신 씨는 그 누군가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한지영이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물었다."강지혁."백연신이 답했다."왜요?""이 일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어. 그리고 웬만한 사람은 그 감독 부인에게 이러한 제안을 할 수도 없었을 거야. 강현수라는 선택지도 있긴 한데 이런 일을 벌이면 강현수의 체면도 말이 아닐 거야. 임유라는 대외적으로 그의 전 여자친구이기도 하니까. 이러한 구설에 휘말리면 자기 이름이 나올 게 뻔한데 그런 멍청한 짓을 강현수가 했을 리가 없잖아."한지영은 백연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점점 강지혁이 한 일이 맞다는 결론에 다다랐다."강지혁도 자기가 한 일이라는 걸 감추려는 생각 없어 보이던데? 임유라를 이 세상에서 소리소문없이 처리할 방도는 많았을 테니까."백연신의 보기에는 강지혁이 정상적인 사고가 박혀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내리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았다. 임유진을 건드리면 임유라 꼴 난다고 말이다."유진이가 강지혁 씨 옆에 있게 된 게 정말 잘된 일일까요?"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한지영이 갑자기 이 한마디를 던졌다.백연신은 시선을 돌려 그제야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덜덜 떨고 있는 한지영을 발견했다."왜 그래?"그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물었다."어디 아파?"따뜻한 백연신의 체온이 전해지자 한지영도 서서히 떨림이 멈췄다."그냥... 강지
만약 누군가가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먹잇감을 뺏으려 든다면 아마 피를 보게 될 것이다.무슨 위로를 이렇게 해! 한지영은 도끼눈을 뜨며 그를 쳐다봤다."그럼 만약에 유진이가 어쩌다 강지혁 씨의 심기를 건드려버리면요? 그때 강지혁 씨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진지하게 물어보는 한지영에 백연신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톡 건드렸다."너 말이야. 네 친구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내가 보기에 두 사람 중 전전긍긍하고 있는 쪽은 강지혁이야."그러자 한지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전전긍긍이라니. 이게 과연 강지혁과 어울리는 단어인가?"장난하는 거죠?"한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장난 같아?"백연신이 진지하게 얘기했다."그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쪽은 지금도 앞으로도 네 친구일 거야.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연인 사이에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은 항상 주도권을 뺏기게 되고 그 관계에서 을이 된다. 그리고 강지혁과 임유진 사이는 누가 봐도 강지혁이 더 사랑하고 있다.마치 지금 이 두 사람처럼 말이다.백연신은 턱을 괴고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앞에 이 여자는 아직도 자신이 복수하려고 이러는 줄 알고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그저 한지영의 사랑일 뿐이다.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한지영이다. 처음에는 못마땅했지만 어느샌가 그도 이 여자에게 지배당하는 걸 바라고 있다.지금도 그녀의 한마디에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게 바로 그였으니까.이유는 그저 백연신이 한지영을 많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토요일, 임유진의 퇴근 시간에 맞춰 강지혁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같이 갈 곳이 있어."강지혁이 말했다."어디?""가보면 알아."임유진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강지혁이 데려간 곳은 임유진이 전에 살던 아파트, 즉 그의 아버지가 팔려고 내놨던 바로 그 집이었다.그는 집주인처럼 열쇠를 꽂고 들어간 후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설마 이 아파트, 네가 산 거야?"
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이상하게도 잡동사니들만 사라지고 그녀의 물건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마치 감옥에 들어가기 전 살았던 곳처럼 말이다.만약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물건이 있다면 그건 아마 침대 밑 상자 안일 것이다. 어머니의 유품들은 모두 그곳에 보관해 두었으니까.임유진은 침대 쪽으로 가 상자를 꺼내려고 했다."내가 할게."그때 강지혁이 무릎을 꿇더니 임유진을 도와 상자를 꺼내주었다.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했기에 그의 옷은 금세 더러워졌다."미안해."임유진은 그가 깔끔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월세방에 살았을 때를 제외하고 강지혁은 밖에 나가면 최대한 먼지투성인 것들과 멀리했었으니까."뭐가 미안해. 내 여자 도와주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내 여자라는 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잠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얼른 시선을 상자 쪽으로 돌렸다.여기에는 임유진이 아끼던 헤어핀, 어머니와 같이 그렸던 그림 그리고 어머니가 사줬던 인형들까지 전부 들어있었다.한 가지 아쉬운 건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임유진은 아직 어렸기에 유품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 커서 보니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임유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러고는 익숙한 물건들에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가 간직해왔던 것들이 그대로 들어있었다.출소 후 이것들을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반대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앨범도 다 태운 다음에야 손에 넣지 않았던가.그래서 이 물건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버려지지 않았고 고스란히 다시 그녀의 품에 들어왔다.닭똥 같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쉴 틈 없이 흘러내렸고 강지혁은 그 모습에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천천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리려고 한 건 아닌데."그는 임유진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만큼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고 매번 심장이 쿡쿡 질린 듯 아팠다."기뻐서 그래. 여기 있는 물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그가 기꺼이 지배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달갑게 꿇을 것이다.한편 그가 바라는 건 단 하나, 그녀가 떠나지 않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그해 아버지도 이토록 어머니를 사랑하셨겠지. 다만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떠나셨고 아버지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임유진은 그의 엄마와 다르다. 유진이라면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키스를 마친 후 임유진은 빨간 두 볼에 숨을 헐떡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강지혁이 그녀의 허리를 사로잡고 품에 꼭 껴안았다.“왜 그래?”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나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그는 고개 숙여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임유진은 눈을 깜빡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안 떠나지. 왜 갑자기 그런 생각 해?”“아마도...”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털어놨다.“방금 아버지랑 어머니가 생각나서. 한 사람을 사랑할수록 잃을까 봐 두려운 것 같아. 잃게 되면 남는 건 절망뿐이잖아.”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강지혁은 부모님에 관한 말을 거의 한 적이 없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제일 가난하고 힘들 때 곁을 떠났고 그 때문에 아버지도 한겨울에 눈밭에서 얼어 죽었다. 임유진이 아는 건 이것뿐이다.이 일은 강지혁에게 평생의 고통으로 남았다!그때 그는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했다!임유진의 머릿속에 문득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강지혁은 아버지의 낡은 옷을 입고 눈밭에 앉아 한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여기까지 생각하니 임유진은 심장을 콕콕 찌르듯 아팠다.그녀가 말했다.“혁아, 허리 좀 숙여봐.”강지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고분고분 허리를 숙였다.임유진은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그의 얼굴을 품에 쏙 껴안았다.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닿는 순간 귓가엔 쿵쾅대는 그녀의 심장 소리로 가득 찼다.“혁아, 너만 날 사랑해주면 나 어디도 안 가. 절대
다만 운명의 장난처럼 둘은 지금 함께하고 있다.“혁아, 난 출소하고 난 뒤로 사랑 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했어.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곤 아예 생각지도 않았어. 그랬던 내가 널 만나고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가끔은 네가 하늘이 내게 준 구원 같은 존재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이 종종 들어.”그녀는 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하늘이 봐도 그녀가 너무 비참해 절망 속에서 구원할 수 있도록 흑기사를 보내준 것 같았다. 임유진도 그때부터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았다.강지혁이 몸을 움찔거렸다. 구원? 그 언젠가 모든 진실을 알게 돼도 이렇게 생각할까?아니! 그는 영원히 그녀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그 언젠가’라는 날도 없다!사실 그녀야말로 강지혁에게 선물 같은 존재이다. 임유진을 못 만났더라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그는 아마 평생 모를 테니까.이젠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매일 안고 있어도, 다정하게 스킨쉽을 해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는 항상 메마른 상태이다!“유진아, 우리... 결혼하자!”강지혁은 갈망에 축축이 젖은 눈빛으로 이 말을 내뱉었다.“나랑 결혼해줘. 내 아내가 되어줘!”...결혼?!임유진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이럴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왜? 싫어?”그가 미간을 구기고 대답 없는 그녀를 바라보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지금... 프러포즈하는 거야?”한참 후에야 겨우 말을 내뱉는 임유진이다.“응.”그가 확고하게 대답했다.임유진은 두 눈을 깜빡였다. 프러포즈라... 두 사람이 벌써 결혼을 상의할 때가 되었나? 그와 알고 지낸 지 1년도 채 안 됐는데?!하지만 그녀는 강지혁을 사랑하고 강지혁도 그녀를 사랑한다. 결혼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청혼이 너무 성의 없어 보여? 아니면 내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해?”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방 안에 울려 퍼졌다.강지혁은 허리 숙여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내려
아이라... 강지혁 같은 집안은 대물림을 매우 중시한다.“그게 왜? 애초에 사귈 때도 말했듯이 난 평생 아이가 없어도 괜찮아. 내가 사랑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임유진 바로 너야.”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건 오직 임유진뿐이다.“하지만...”임유진은 여전히 망설였다.정말 괜찮을까? 이 세상에 과연 아이 못 낳는 여자를 받아들일 남자가 존재할까?“유진아! 아이는 단지 우리 가문의 미래 상속자일 뿐이야. 난 박애한 사람이 아니야. 이후에 만약 진짜 우리 둘만의 아이가 생긴다면 아마 이뻐하겠지. 아이가 없으면 보육원 가서 한 명 입양하거나 방계 친척들에게 한 명 입양해와도 돼. 난 둘 다 문제없다고 봐. 내가 신경 쓰는 건 오직 하나야. 나랑 결혼할래 유진아?”마지막 그 한마디를 내뱉으며 강지혁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임유진은 순간 그가 친 그물에 잡힌 것처럼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벗어날 수 없었다. 실은... 벗어나기 싫었다.그녀는 강지혁을 너무 사랑한다. 이 그물 안에서 전혀 벗어날 생각이 없을 만큼.“그래.”그녀가 드디어 대답했다.강지혁은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평생 이 손 안 놓을게.”손등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전류가 그녀의 마음까지 녹였다.강지혁에게 이토록 사랑받는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다.“알았어. 영원히 놓지 마, 혁아.”그녀는 말하면서 두 손으로 강지혁의 볼을 감싸고 그의 입술에 살포시 키스했다.이건 평생을 기약하는 키스이다.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평생 함께하자는 다짐이다!...“뭐라고? 너랑 강지혁 씨가 결혼 준비를?!”한지영은 친구와 데이트하다가 초특급 정보를 얻었다.“응.”임유진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나 친구 얼마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결혼식 날 네가 신부 들러리 해줘. 그래 줄 수 있지?”“당연한 소릴. 하지만...”한지영이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머뭇거렸다.임유라 사건을 강지혁이 배후에서 조종한 걸 알게 된 이후로 한지영은 이 남
“하지만 너 강지혁 씨에 대해 얼마나 알아?”한지영이 캐물었다.“많이 알고 있는 편이지.”임유진이 대답했다.“집안 상황, 사업, 겪어온 인생, 성격 등등 다 알고 있는데. 내가 또 강씨 저택에서 한동안 지냈잖아.”“그럼 강지혁 씨의 어두운 면은?”한지영이 솔직하게 물었다.임유진은 살짝 놀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고 이에 한지영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말은... 어쨌거나 강지혁 씨는 일반인이 아니잖아. 수단이 악랄하기로 소문이 났고 무릇 강지혁 씨를 건드린 사람은 누구 한 명 좋은 결말을 얻은 자가 없어!”임유진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그제야 친구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해 그녀가 옥살이할 때도 강지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을 댔다!하지만...“지영아, 어떤 일들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 전까지는 영원히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 난 이 한 걸음을 내디디고 싶어. 이 세상에 지혁이보다 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보거든.”임유진은 한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친구의 확고한 눈빛에 한지영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오며 그녀가 얼마나 가정을 꾸리고 싶은지 한지영이 제일 잘 알고 있다.인간은 부족한 것만 더 채우려고 애쓰니까.“하긴, 갈 데까지 가봐야 아는 법이지.”한지영이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 있어도 네 옆엔 항상 내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 우린 베프야.”“응.”임유진은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이 한마디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한지영이 없으면 오늘의 임유진도 없다!한지영은 그녀에게 이미 가족 같은 존재이다. 평생 은혜를 갚아야 하는 사람, 그게 바로 한지영이다!...며칠간 강현수는 몇 년을 지새운 것만 같았다.다시 임유진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그해 그 소녀와 만났던 마을로 가서 임유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캐냈다. 마치 그녀를 기억 속 그 소녀와 맞아떨어지게 할 기세였다.다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조사가 더 힘들어졌다.요 며칠 임유라가 유부남과 불륜 현장을 잡힌 일이 각 언론 매체에 대서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