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군가가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먹잇감을 뺏으려 든다면 아마 피를 보게 될 것이다.무슨 위로를 이렇게 해! 한지영은 도끼눈을 뜨며 그를 쳐다봤다."그럼 만약에 유진이가 어쩌다 강지혁 씨의 심기를 건드려버리면요? 그때 강지혁 씨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진지하게 물어보는 한지영에 백연신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톡 건드렸다."너 말이야. 네 친구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내가 보기에 두 사람 중 전전긍긍하고 있는 쪽은 강지혁이야."그러자 한지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전전긍긍이라니. 이게 과연 강지혁과 어울리는 단어인가?"장난하는 거죠?"한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장난 같아?"백연신이 진지하게 얘기했다."그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쪽은 지금도 앞으로도 네 친구일 거야.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연인 사이에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은 항상 주도권을 뺏기게 되고 그 관계에서 을이 된다. 그리고 강지혁과 임유진 사이는 누가 봐도 강지혁이 더 사랑하고 있다.마치 지금 이 두 사람처럼 말이다.백연신은 턱을 괴고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앞에 이 여자는 아직도 자신이 복수하려고 이러는 줄 알고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그저 한지영의 사랑일 뿐이다.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한지영이다. 처음에는 못마땅했지만 어느샌가 그도 이 여자에게 지배당하는 걸 바라고 있다.지금도 그녀의 한마디에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게 바로 그였으니까.이유는 그저 백연신이 한지영을 많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토요일, 임유진의 퇴근 시간에 맞춰 강지혁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같이 갈 곳이 있어."강지혁이 말했다."어디?""가보면 알아."임유진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강지혁이 데려간 곳은 임유진이 전에 살던 아파트, 즉 그의 아버지가 팔려고 내놨던 바로 그 집이었다.그는 집주인처럼 열쇠를 꽂고 들어간 후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설마 이 아파트, 네가 산 거야?"
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이상하게도 잡동사니들만 사라지고 그녀의 물건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마치 감옥에 들어가기 전 살았던 곳처럼 말이다.만약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물건이 있다면 그건 아마 침대 밑 상자 안일 것이다. 어머니의 유품들은 모두 그곳에 보관해 두었으니까.임유진은 침대 쪽으로 가 상자를 꺼내려고 했다."내가 할게."그때 강지혁이 무릎을 꿇더니 임유진을 도와 상자를 꺼내주었다.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했기에 그의 옷은 금세 더러워졌다."미안해."임유진은 그가 깔끔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월세방에 살았을 때를 제외하고 강지혁은 밖에 나가면 최대한 먼지투성인 것들과 멀리했었으니까."뭐가 미안해. 내 여자 도와주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내 여자라는 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잠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얼른 시선을 상자 쪽으로 돌렸다.여기에는 임유진이 아끼던 헤어핀, 어머니와 같이 그렸던 그림 그리고 어머니가 사줬던 인형들까지 전부 들어있었다.한 가지 아쉬운 건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임유진은 아직 어렸기에 유품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 커서 보니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임유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러고는 익숙한 물건들에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가 간직해왔던 것들이 그대로 들어있었다.출소 후 이것들을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반대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앨범도 다 태운 다음에야 손에 넣지 않았던가.그래서 이 물건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버려지지 않았고 고스란히 다시 그녀의 품에 들어왔다.닭똥 같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쉴 틈 없이 흘러내렸고 강지혁은 그 모습에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천천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리려고 한 건 아닌데."그는 임유진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만큼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고 매번 심장이 쿡쿡 질린 듯 아팠다."기뻐서 그래. 여기 있는 물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그가 기꺼이 지배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달갑게 꿇을 것이다.한편 그가 바라는 건 단 하나, 그녀가 떠나지 않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그해 아버지도 이토록 어머니를 사랑하셨겠지. 다만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떠나셨고 아버지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임유진은 그의 엄마와 다르다. 유진이라면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키스를 마친 후 임유진은 빨간 두 볼에 숨을 헐떡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강지혁이 그녀의 허리를 사로잡고 품에 꼭 껴안았다.“왜 그래?”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나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그는 고개 숙여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임유진은 눈을 깜빡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안 떠나지. 왜 갑자기 그런 생각 해?”“아마도...”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털어놨다.“방금 아버지랑 어머니가 생각나서. 한 사람을 사랑할수록 잃을까 봐 두려운 것 같아. 잃게 되면 남는 건 절망뿐이잖아.”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강지혁은 부모님에 관한 말을 거의 한 적이 없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제일 가난하고 힘들 때 곁을 떠났고 그 때문에 아버지도 한겨울에 눈밭에서 얼어 죽었다. 임유진이 아는 건 이것뿐이다.이 일은 강지혁에게 평생의 고통으로 남았다!그때 그는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했다!임유진의 머릿속에 문득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강지혁은 아버지의 낡은 옷을 입고 눈밭에 앉아 한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여기까지 생각하니 임유진은 심장을 콕콕 찌르듯 아팠다.그녀가 말했다.“혁아, 허리 좀 숙여봐.”강지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고분고분 허리를 숙였다.임유진은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그의 얼굴을 품에 쏙 껴안았다.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닿는 순간 귓가엔 쿵쾅대는 그녀의 심장 소리로 가득 찼다.“혁아, 너만 날 사랑해주면 나 어디도 안 가. 절대
다만 운명의 장난처럼 둘은 지금 함께하고 있다.“혁아, 난 출소하고 난 뒤로 사랑 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했어.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곤 아예 생각지도 않았어. 그랬던 내가 널 만나고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가끔은 네가 하늘이 내게 준 구원 같은 존재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이 종종 들어.”그녀는 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하늘이 봐도 그녀가 너무 비참해 절망 속에서 구원할 수 있도록 흑기사를 보내준 것 같았다. 임유진도 그때부터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았다.강지혁이 몸을 움찔거렸다. 구원? 그 언젠가 모든 진실을 알게 돼도 이렇게 생각할까?아니! 그는 영원히 그녀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그 언젠가’라는 날도 없다!사실 그녀야말로 강지혁에게 선물 같은 존재이다. 임유진을 못 만났더라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그는 아마 평생 모를 테니까.이젠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매일 안고 있어도, 다정하게 스킨쉽을 해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는 항상 메마른 상태이다!“유진아, 우리... 결혼하자!”강지혁은 갈망에 축축이 젖은 눈빛으로 이 말을 내뱉었다.“나랑 결혼해줘. 내 아내가 되어줘!”...결혼?!임유진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이럴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왜? 싫어?”그가 미간을 구기고 대답 없는 그녀를 바라보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지금... 프러포즈하는 거야?”한참 후에야 겨우 말을 내뱉는 임유진이다.“응.”그가 확고하게 대답했다.임유진은 두 눈을 깜빡였다. 프러포즈라... 두 사람이 벌써 결혼을 상의할 때가 되었나? 그와 알고 지낸 지 1년도 채 안 됐는데?!하지만 그녀는 강지혁을 사랑하고 강지혁도 그녀를 사랑한다. 결혼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청혼이 너무 성의 없어 보여? 아니면 내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해?”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방 안에 울려 퍼졌다.강지혁은 허리 숙여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내려
아이라... 강지혁 같은 집안은 대물림을 매우 중시한다.“그게 왜? 애초에 사귈 때도 말했듯이 난 평생 아이가 없어도 괜찮아. 내가 사랑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임유진 바로 너야.”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건 오직 임유진뿐이다.“하지만...”임유진은 여전히 망설였다.정말 괜찮을까? 이 세상에 과연 아이 못 낳는 여자를 받아들일 남자가 존재할까?“유진아! 아이는 단지 우리 가문의 미래 상속자일 뿐이야. 난 박애한 사람이 아니야. 이후에 만약 진짜 우리 둘만의 아이가 생긴다면 아마 이뻐하겠지. 아이가 없으면 보육원 가서 한 명 입양하거나 방계 친척들에게 한 명 입양해와도 돼. 난 둘 다 문제없다고 봐. 내가 신경 쓰는 건 오직 하나야. 나랑 결혼할래 유진아?”마지막 그 한마디를 내뱉으며 강지혁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임유진은 순간 그가 친 그물에 잡힌 것처럼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벗어날 수 없었다. 실은... 벗어나기 싫었다.그녀는 강지혁을 너무 사랑한다. 이 그물 안에서 전혀 벗어날 생각이 없을 만큼.“그래.”그녀가 드디어 대답했다.강지혁은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평생 이 손 안 놓을게.”손등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전류가 그녀의 마음까지 녹였다.강지혁에게 이토록 사랑받는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다.“알았어. 영원히 놓지 마, 혁아.”그녀는 말하면서 두 손으로 강지혁의 볼을 감싸고 그의 입술에 살포시 키스했다.이건 평생을 기약하는 키스이다.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평생 함께하자는 다짐이다!...“뭐라고? 너랑 강지혁 씨가 결혼 준비를?!”한지영은 친구와 데이트하다가 초특급 정보를 얻었다.“응.”임유진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나 친구 얼마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결혼식 날 네가 신부 들러리 해줘. 그래 줄 수 있지?”“당연한 소릴. 하지만...”한지영이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머뭇거렸다.임유라 사건을 강지혁이 배후에서 조종한 걸 알게 된 이후로 한지영은 이 남
“하지만 너 강지혁 씨에 대해 얼마나 알아?”한지영이 캐물었다.“많이 알고 있는 편이지.”임유진이 대답했다.“집안 상황, 사업, 겪어온 인생, 성격 등등 다 알고 있는데. 내가 또 강씨 저택에서 한동안 지냈잖아.”“그럼 강지혁 씨의 어두운 면은?”한지영이 솔직하게 물었다.임유진은 살짝 놀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고 이에 한지영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말은... 어쨌거나 강지혁 씨는 일반인이 아니잖아. 수단이 악랄하기로 소문이 났고 무릇 강지혁 씨를 건드린 사람은 누구 한 명 좋은 결말을 얻은 자가 없어!”임유진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그제야 친구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해 그녀가 옥살이할 때도 강지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을 댔다!하지만...“지영아, 어떤 일들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 전까지는 영원히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 난 이 한 걸음을 내디디고 싶어. 이 세상에 지혁이보다 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보거든.”임유진은 한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친구의 확고한 눈빛에 한지영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오며 그녀가 얼마나 가정을 꾸리고 싶은지 한지영이 제일 잘 알고 있다.인간은 부족한 것만 더 채우려고 애쓰니까.“하긴, 갈 데까지 가봐야 아는 법이지.”한지영이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 있어도 네 옆엔 항상 내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 우린 베프야.”“응.”임유진은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이 한마디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한지영이 없으면 오늘의 임유진도 없다!한지영은 그녀에게 이미 가족 같은 존재이다. 평생 은혜를 갚아야 하는 사람, 그게 바로 한지영이다!...며칠간 강현수는 몇 년을 지새운 것만 같았다.다시 임유진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그해 그 소녀와 만났던 마을로 가서 임유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캐냈다. 마치 그녀를 기억 속 그 소녀와 맞아떨어지게 할 기세였다.다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조사가 더 힘들어졌다.요 며칠 임유라가 유부남과 불륜 현장을 잡힌 일이 각 언론 매체에 대서
처음부터 그녀의 손을 꽉 잡았어야 했다!“왜 혼자 술 마시고 있어?”문득 이한의 목소리가 강현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오늘 어쩌다 나왔는데 재미없게 왜 혼자 여기서 마셔?”재미가 없다고?강현수는 술잔을 어루만지며 주변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오늘 이한의 초대로 이 파티에 참석한 이유는 요즘 너무 답답해서 숨 트일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정작 와보니 달라질 건 없었다.머릿속엔 온통 임유진뿐이고 그녀의 실루엣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아 참, 너 얼마 전에 지혁이랑 마찰이 있었다며? 어떻게 된 거야?”이한이 물었다.강현수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옛친구를 쳐다봤다.“소식 참 빠르네.”이한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진짜네?”그도 단지 전해 들은 소문일 뿐 진짜일 줄은 몰랐다.“왜 그런 건데? 무슨 일이야 대체?”다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이들 모임에서 가장 얼굴 붉힐 리 없는 자가 바로 강현수와 강지혁 두 사람이다.둘은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이고 매사에 이익 지상주의이다. 강지혁은 또 모든 일에 관심 없는 편인데 임유진을 알게 된 이후로 180도 달라졌다. 저번 연회에서 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이한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한편 강현수는 늘 차갑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편이다.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팔찌 주인에 관한 일이다.오죽하면 친구들끼리 모일 때 강현수가 대체 언제 팔찌 주인을 찾을지 내기하고 있을까.“궁금해?”강현수가 되물었다.“양가 집안의 사업 때문에 갈등을 빚었어?”이한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강현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마 여자 문제는 아닐 거잖아.”그가 혼잣말로 구시렁댔다.“맞다면?”강현수가 말했다.이한은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거렸다.“너... 너랑 지혁이가 어떻게...”진짜 여자 문제라면 설마... 임유진?!이한은 머리가 띵했다.임유진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심지어 감방까지 다녀왔는데 친구 두 놈이 다...“팔찌 주인 찾
‘뭐지? 강현수가 여자 때문에 이토록 초조해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방금 뛰쳐나간 것 좀 봐! 임유진이 대체 어떤 여자길래!’처음엔 여자 문제로 둘이 가볍게 실랑이를 벌인 줄 알았는데... 이한은 문득 걱정에 휩싸였다. 두 사람이 만약 진짜 한 여자를 놓고 다툰다면 S 시가 발칵 뒤집힐 수도 있다!하지만, 아니지! 아니야! 강현수는 줄곧 팔찌 주인만 찾아 헤맸다!그렇다면 설마... 이한은 감히 더는 생각해나갈 수 없었다.말도 안 되는 가설로 어떤 후과를 초래할지 그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건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공포였으니!...강현수는 차를 몰고 곧게 식당으로 질주했다.결혼? 그녀가 정말 지혁이와 결혼하는 걸까?진실을 알아내기 전까진 절대 두 사람의 결혼을 용납할 수가 없다!수년간 그녀만 찾아 헤맸고 그녀의 목소리, 외모까지 머릿속에, 뼛속에, 혈액 속에 깊이 침투됐는데 결과가 고작 이런 거라니?!강현수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그 시각 윤이 식당에서 임유진은 조금 미안한 얼굴로 탁유미에게 사직 얘기를 꺼냈다.결혼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들도 많고 강씨 일가 사모님이 된 이후엔 더이상 본인만 고려해선 안 된다. 그녀가 대표하는 건 강씨 일가의 체면이니 여기서 계속 일할 수가 없다.“유미 언니, 죄송해요. 나도 이렇게 빨리 그만둘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금방 내 자리를 메꿀 사람을 찾아올게요. 그러고 나서 사직할게요.”임유진이 말했다.탁유미는 이 상황을 진작 예상한 듯싶었다. 임유진의 남자친구가 강지혁이란 걸 안 순간부터 그녀가 이곳에 오래 머물 거란 생각을 접었다.다만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다. 그게 조금 의외일 뿐이다.“나중에 시간 될 때 자주 놀러와요. 윤이가 유진 씨 엄청 좋아하잖아요. 유진 씨 대타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랑 얘기해요. 금방 보내줄 테니. 결혼이야말로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요.”탁유미가 감개무량하게 말했다.애초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