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집안에 꽉 찬 치마를 보며 그는 그 소녀가 이 치마들을 입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본다.하지만 그 무엇도 지금 이 순간의 놀라움을 이길 수 없다. 눈앞의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심지어 아주 저렴한 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비추고 있는데 강현수는 문득 눈시울이 빨개졌다.임유진은 거울로 치마 입은 제 모습을 한참 들여다봤다. 방금 이 치마를 보자마자 골랐는데 잔꽃 무늬가 어릴 때 외할머니가 사준 치마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아쉽게도 그 잔꽃 무늬 치마는 나중에 너덜너덜해져서 버렸다.그해 이 일로 임유진은 한바탕 울기도 했다!이 치마는 꽤 길었기에 스쿠터를 타도 노출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가격도 5만6천 원이라 아주 적당했다. 조금만 더 흥정하면 가격을 더 낮출수 있을지도 모른다.“어때요 손님? 마음에 드세요?”가게 점원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괜찮긴 한데 좀 더 싸게 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저희 가게는 이미 가격을 최대한 낮춘 거라...”점원은 마치 테이프가 감긴 것처럼 말끝을 흐리고 멍하니 임유진의 뒤쪽을 바라봤다.그녀도 어리둥절해 하며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는데 강현수가 갑자기 뒤에서 팔을 벌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목과 얼굴에 와닿았다.“너야?”강현수의 잠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서 얼른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하지만 강현수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그녀 목에 얼굴을 파묻고는 나지막이 되뇌었다.“진짜 너야? 너 맞지? 바로 너였어...”“강현수 씨, 이거 놔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임유진은 왠지 그가 그날 밤 술에 취한 모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다만 그는 지금 술에 취하기는커녕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너... 맞잖아. 아니야? 아닌데 왜 이렇게 닮았어? 대체 왜 너만 이런 느낌 주는 거냐고...”강현수는 마치 수년간 찾아 헤매던 그 소녀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하
임유진은 이제 숨 막힐 지경이었다.“나 아니에요, 아니라고요...”그녀는 겨우 말을 이었다.이제 곧 질식해 쓰러질 것만 같던 그 순간, 또 한 번 거센 힘에 의해 드디어 강현수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귓가에 퍽 하는 주먹 소리와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의자와 선반이 부딪치는 소리까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임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는데 강지혁의 얼굴이 두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혁이가 방금 그녀를 강현수의 품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임유진은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건지 의아할 따름이었다.그 시각 강지혁은 음침한 얼굴로 바닥에 드러누운 강현수에게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강현수는 초라한 몰골로 선반에 깔려 있었다. 방금 바닥에 쓰러지면서 선반까지 넘어지며 아수라장이 돼버렸다.그의 입가에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강지혁이 제법 거칠게 주먹질을 한 모양이다.“너 방금 뭐라고 했는지 알아?”강지혁은 굳은 얼굴로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칼바람처럼 살을 엘 것 같았다.보통 사람이라면 목소리만 들어도 몸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겠지만 강현수는 달랐다.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는 되레 입꼬리를 씩 올렸다.“알지.”“그래? 알면서 이러는 거야? 강현수, 너 진짜 우리 두 집안 등지게 할 셈이야?”강지혁이 거만하게 쏘아붙였다.강현수는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지혁아, 내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걸 너도 알잖아. 유진 씨가 아무래도 그 사람인 것 같아.”강지혁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강현수는 그에게 대답한 게 아니라 임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정말 기억 안 나요? 유진 씨 전에도 비슷한 잔꽃 무늬 원피스를 입고 한 남자아이를 구해줬잖아요. 분명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데 기어코 업고 하산해서 그 아이 목숨을 살려줬어요! 믿으라면서요, 유진 씨가 무조건 업고 하산한다면서 그 아이더러 믿으라면서요.”임유진은 어리둥절한 눈길
강지혁은 순간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 돌려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한없이 짙은 두 눈엔 그녀가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혁아, 내가 직접 얘기하게 해줘.”그녀는 강지혁의 손을 꼭 잡으며 마치 그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얇은 입술을 앙다물고 꼼짝없이 그녀만 쳐다봤다.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어쩔 바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임유진은 그의 뒤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왔고 강지혁도 가로막지 않았다.그녀는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강현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난 강현수 씨가 찾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방금 말한 그 일들 난 아무 인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현수 씨가 사람 잘못 찾은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강지혁의 두 눈이 살짝 반짝였고 강현수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니야, 말도 안 돼. 다 잊었어? 시간이 너무 길었지. 잊을 만도 해.”“나 기억력이 좋아요.”임유진이 말했다.“방금 현수 씨가 말한 것들 진짜 처음 듣는 얘기에요.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없어요. 아 그리고 내가 현수 씨 기억 속의 그 소녀를 닮은 거, 오늘 이 치마를 고른 거 굳이 설명하자면 모든 건 우연의 일치에요.”강현수는 싸늘한 표정에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임유진도 그런 그의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강현수는 한참 후에야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유진 씨가 맞든 아니든 난 무조건 찾아낼 겁니다!”말을 마친 강현수는 곧게 옷 가게를 나섰다.줄곧 그녀가 아니라고 여겨왔는데 오늘 이 잔꽃 무늬 치마를 고른 순간, 그 치마를 입고 나온 순간, 임유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그녀가 아닌데 왜 이토록 강렬한 느낌이 들겠는가?! 왜... 대체 왜 이렇게 닮은 거냐고?!‘애초에 유진 씨부터 낱낱이 조사해야 했어!’강지혁은 문득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혁아!”임유진이 고개 들어 그를 쳐다봤는데 정색한 얼굴이 살짝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너 왜 그래?”그녀의
강지혁은 아무 말 없이 곧게 앞으로 질주했고 마음속엔 전례 없는 당혹감이 들었다.대체 뭘 두려워하는 걸까? 강현수가 정말 임유진을 찾아낼까 봐? 아니면 임유진이 알게 된 후 강현수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생길까 봐 이런 걸까?아니, 강현수는 찾아낼 수 없다. 강지혁이 애초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손을 썼으니까.한편 유진이는... 아무래도 그해 일을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다. 강지혁이 조사해봤는데 그해 강현수를 찾은 이후로 임유진은 큰 병을 앓았고 곧장 S 시에 실려 왔다.고열이 심하게 났는데 아마 그 고열로 일부 기억을 잃은 듯싶다.이토록 철저하게 손을 써놨는데 대체 왜 두려운 걸까?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어 강지혁이 모르는 사이에 또 불쑥 일어날 것만 같았다.사진 속 강현수가 그녀를 안고 그녀 앞에서 눈물을 보일 때 임유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왜 이런 일들을 단 한 번도 강지혁에게 말하지 않았던 걸까?대체 뭘 숨기려고?!“혁아, 대체 어디 가는 거냐고? 나 오후에 가게 돌아가서 계속 배달 일 해야 한단 말이야.”임유진이 아무리 물어도 강지혁은 듣는 척도 안 하며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마지못해 탁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나 지금... 일이 좀 생겨서 금방 가게로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아니요, 괜찮아요,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언니.”통화를 마친 후 문득 통화기록을 보았는데 강지혁의 이름이 떠 있었고 통화시간도 1분 가까이 됐다.그녀는 분명 전화를 받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임유진은 불쑥 강현수가 떠올랐다.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을 때 가방과 휴대폰을 밖에 두고 갔고 마침 강현수 바로 옆에 놓아뒀다.설마 그때... 강현수가 이 전화를 받은 걸까?임유진은 그제야 강지혁이 왜 갑자기 옷 가게에 나타났는지 이해됐다.“아까 현수 씨가 네 전화 받았지? 나 그때 마침 옷 갈아입으러 들어가서 휴대폰 밖에 놔뒀거든. 오늘 현수 씨랑은 우연히 마주친 거야. 배달 갔다가 옷이 더러워져서...
"여기는 왜 온 거야?"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하지만 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앞 유리를 통해 S 시를 내려다보았다.이곳은 강선우가 살아생전 강지혁을 데리고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때 그는 강지혁에게 이렇게 말했었다."지혁아, 그거 아니?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사람은 더 외로워진다는 거.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지 않으면 제 운명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된단다."그래서 진정 손안에 자신의 운명을 쥐고 싶으면 끊임없이 높은 곳을 향해 오를 수밖에 없다.강지혁은 마음이 복잡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 때 항상 이곳으로 올라와 S 시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하지만 GH 그룹을 물려받은 후부터는 이곳에 발길을 끊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흔들릴 것 없이 운명을 자기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 그가 오늘 오랜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잡았다고 생각했던 그 운명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까 봐 불안해서일까? 아니, 혹 그의 운명은 진작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닐까?강지혁의 운명을 손에 쥔 그 누군가는 강지혁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며 때로는 두려움에 떨게도 한다.강지혁은 시선을 옆에 앉은 임유진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안전 벨트를 푼 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양손을 임유진의 다리 옆에 놓았다."자, 이제 얘기해봐. 왜 강현수와 우연히 그 옷가게에 있었는지. 그리고 왜 우연히도 내가 건 전화를 강현수가 받았는지."심연같이 어두운 눈동자를 가까이에서 마주한 임유진은 숨을 깊게 한번 들이켜더니 오늘 배달하러 갔다가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얘기해 주었다. 물론 정한나가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사실은 뺀 채, 옷이 그렇게 된 건 그저 어쩌다가 찻물이 쏟아진 것뿐이고 마침 그 모습을 강현수가 봐 버렸다고 얘기했다.다만 강현수가 그녀를 갑작스럽게 안아버린 건 임유진도 생각 못 했던 일이다."사람을 착각한 것 같아. 난 어릴 적 강현수 씨와 그렇게 만난 적 없거든."임유진의 말에 강지혁
‘왜라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하지만 지금 강지혁의 얼굴을 봐서는 대답을 꼭 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말해. 왜 강현수한테는 안 흔들릴 것 같은지."그의 재촉에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웠지만, 정확히 얘기해 주었다."내 마음을 흔들고 설레게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혁아. 그리고 난 강현수 씨에게 특별한 감정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네가 더는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정말 없어?강지혁의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 머릿속에서 강현수가 임유진을 꼭 끌어안고 있는 사진과 강현수가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린 사진들이 떠올랐으니까.그 사진들은 마치 강지혁이 무슨 수를 써도 강현수와 임유진 사이는 절대 끊어낼 수 없다고 되새겨 주는 것만 같았다."정말 없어? 나한테 숨기는 거 정말 아무것도 없어?"강지혁이 물었다."응, 없어. 너한테 말한 게 다야."임유진은 강지혁이 오늘 일에 관해 묻는 줄 알았기에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럼 유진아... 너는 나한테 얼마나 설레?"강지혁은 이제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왔고 차 안 분위기는 아까와 달라졌다. 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대답하기 부끄러운지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내가 아파하고 슬퍼하는 거 보면 못 견디겠어?"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곁에 없으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강지혁이 또다시 물었고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 생각은 얼마나 해? 시도 때도 없이 내 생각하고 있어?"그는 현존하는 어떤 악기보다도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임유진의 얼굴은 이제 불처럼 뜨거워졌다.얼마나 생각하냐고?강지혁의 얼굴, 목소리 그리고 숨결, 이 모든 것들은 마치 마법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임유진은 그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함께 살고 싶다고, 자신의 미래에 그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
증명이라니? 뭘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지?임유진은 조금 얼떨떨해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빛을 보고는 뭔가 깨달은 듯 잠깐 주춤하더니 곧 두 팔을 강지혁의 목에 둘렀다.그러고는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강지혁의 입술을 차가웠지만,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두근거리는 마음을 담은 입맞춤... 이것이 그녀의 증명이다.하지만 이런 가벼운 입맞춤은 강지혁의 성에 차지 않았다.그는 임유진이 슬슬 입술을 떼려고 할 때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강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것도 잠시 임유진은 바로 그의 키스에 빠져들었다.강지혁은 자기가 한 키스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까? 임유진은 그의 키스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고 그를 향한 감정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임유진이 힘든 듯 내는 신음에 강지혁은 서서히 입술을 뗐다."콜록콜록..."임유진은 갑작스럽게 흘러드는 신선한 공기에 저도 모르게 마른기침하며 숨을 깊게 들이켰다."혁아, 아까 너..."그녀가 뭔가 얘기하려는 듯 입을 열자 강지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부족해... 이거로는 부족해... 유진아, 이거로는 증명이 안 된다고..."강지혁은 조수석 옆 버튼을 누르고는 임유진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아직 안전 벨트를 풀기 전이었기에 임유진은 꼼짝없이 의자가 넘어가는 대로 뒤로 누워졌다.강지혁은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넘어오더니 상체를 세워 거추장스러운 넥타이를 아예 치워버리고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임유진은 깜짝 놀라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뉴스 메인을 차지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혁아!"그녀는 안전 벨트를 풀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임유진이 막 손을 안전 벨트 쪽으로 가져가려 할 때 그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왜, 증명하기 싫어?""아니, 싫은 게 아니라..."그녀는 몸을 흠
임유진은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강지혁은 지금 매우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유진아, 사랑해."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야 해."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안 돼.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강지혁은 임유진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기만을 원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 싶었다.한 사람을 사랑하면 모두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독재자가 되는 걸까?아버지도 어머니를 이토록 사랑하셨던 걸까? 그래서 어머니가 떠난 후 살아가는 것도 사치라고 느껴 목숨을 가볍게 여겼나?강지혁은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문을 잇기 위한 것일 뿐 사랑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사랑을 넘어 마치 하나의 낙인처럼 그의 마음에, 그의 머리에 새겨졌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진해져만 갔다.그녀는 강지혁이 제일 힘들 때 두 팔을 벌려 그를 꼭 껴안아 주었고 그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여주었다.강지혁은 그녀의 곁에 있을 때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고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누나라고 불러’라며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준 임유진의 한마디에 그는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강선우가 죽은 후 가족이라는 느낌을 받은 건 그때가 유일했으니까.이제 강씨 저택에서의 유일한 피붙이는 강문철뿐이지만 그에게 있어 강지혁은 어디까지나 가문을 잇는 도구일 뿐이었다. 만약 강지혁이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그에게 적당한 가문의 아가씨를 소개해줘 새로운 후계자를 만들어 내도록 했을 것이다.강문철은 자신의 손자에게 애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증오하고 있다. 강지혁의 몸속에는 그가 싫어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