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순간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 돌려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한없이 짙은 두 눈엔 그녀가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혁아, 내가 직접 얘기하게 해줘.”그녀는 강지혁의 손을 꼭 잡으며 마치 그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얇은 입술을 앙다물고 꼼짝없이 그녀만 쳐다봤다.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어쩔 바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임유진은 그의 뒤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왔고 강지혁도 가로막지 않았다.그녀는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강현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난 강현수 씨가 찾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방금 말한 그 일들 난 아무 인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현수 씨가 사람 잘못 찾은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강지혁의 두 눈이 살짝 반짝였고 강현수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니야, 말도 안 돼. 다 잊었어? 시간이 너무 길었지. 잊을 만도 해.”“나 기억력이 좋아요.”임유진이 말했다.“방금 현수 씨가 말한 것들 진짜 처음 듣는 얘기에요.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없어요. 아 그리고 내가 현수 씨 기억 속의 그 소녀를 닮은 거, 오늘 이 치마를 고른 거 굳이 설명하자면 모든 건 우연의 일치에요.”강현수는 싸늘한 표정에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임유진도 그런 그의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강현수는 한참 후에야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유진 씨가 맞든 아니든 난 무조건 찾아낼 겁니다!”말을 마친 강현수는 곧게 옷 가게를 나섰다.줄곧 그녀가 아니라고 여겨왔는데 오늘 이 잔꽃 무늬 치마를 고른 순간, 그 치마를 입고 나온 순간, 임유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그녀가 아닌데 왜 이토록 강렬한 느낌이 들겠는가?! 왜... 대체 왜 이렇게 닮은 거냐고?!‘애초에 유진 씨부터 낱낱이 조사해야 했어!’강지혁은 문득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혁아!”임유진이 고개 들어 그를 쳐다봤는데 정색한 얼굴이 살짝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너 왜 그래?”그녀의
강지혁은 아무 말 없이 곧게 앞으로 질주했고 마음속엔 전례 없는 당혹감이 들었다.대체 뭘 두려워하는 걸까? 강현수가 정말 임유진을 찾아낼까 봐? 아니면 임유진이 알게 된 후 강현수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생길까 봐 이런 걸까?아니, 강현수는 찾아낼 수 없다. 강지혁이 애초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손을 썼으니까.한편 유진이는... 아무래도 그해 일을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다. 강지혁이 조사해봤는데 그해 강현수를 찾은 이후로 임유진은 큰 병을 앓았고 곧장 S 시에 실려 왔다.고열이 심하게 났는데 아마 그 고열로 일부 기억을 잃은 듯싶다.이토록 철저하게 손을 써놨는데 대체 왜 두려운 걸까?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어 강지혁이 모르는 사이에 또 불쑥 일어날 것만 같았다.사진 속 강현수가 그녀를 안고 그녀 앞에서 눈물을 보일 때 임유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왜 이런 일들을 단 한 번도 강지혁에게 말하지 않았던 걸까?대체 뭘 숨기려고?!“혁아, 대체 어디 가는 거냐고? 나 오후에 가게 돌아가서 계속 배달 일 해야 한단 말이야.”임유진이 아무리 물어도 강지혁은 듣는 척도 안 하며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마지못해 탁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나 지금... 일이 좀 생겨서 금방 가게로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아니요, 괜찮아요,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언니.”통화를 마친 후 문득 통화기록을 보았는데 강지혁의 이름이 떠 있었고 통화시간도 1분 가까이 됐다.그녀는 분명 전화를 받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임유진은 불쑥 강현수가 떠올랐다.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을 때 가방과 휴대폰을 밖에 두고 갔고 마침 강현수 바로 옆에 놓아뒀다.설마 그때... 강현수가 이 전화를 받은 걸까?임유진은 그제야 강지혁이 왜 갑자기 옷 가게에 나타났는지 이해됐다.“아까 현수 씨가 네 전화 받았지? 나 그때 마침 옷 갈아입으러 들어가서 휴대폰 밖에 놔뒀거든. 오늘 현수 씨랑은 우연히 마주친 거야. 배달 갔다가 옷이 더러워져서...
"여기는 왜 온 거야?"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하지만 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앞 유리를 통해 S 시를 내려다보았다.이곳은 강선우가 살아생전 강지혁을 데리고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때 그는 강지혁에게 이렇게 말했었다."지혁아, 그거 아니?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사람은 더 외로워진다는 거.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지 않으면 제 운명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된단다."그래서 진정 손안에 자신의 운명을 쥐고 싶으면 끊임없이 높은 곳을 향해 오를 수밖에 없다.강지혁은 마음이 복잡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 때 항상 이곳으로 올라와 S 시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하지만 GH 그룹을 물려받은 후부터는 이곳에 발길을 끊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흔들릴 것 없이 운명을 자기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 그가 오늘 오랜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잡았다고 생각했던 그 운명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까 봐 불안해서일까? 아니, 혹 그의 운명은 진작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닐까?강지혁의 운명을 손에 쥔 그 누군가는 강지혁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며 때로는 두려움에 떨게도 한다.강지혁은 시선을 옆에 앉은 임유진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안전 벨트를 푼 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양손을 임유진의 다리 옆에 놓았다."자, 이제 얘기해봐. 왜 강현수와 우연히 그 옷가게에 있었는지. 그리고 왜 우연히도 내가 건 전화를 강현수가 받았는지."심연같이 어두운 눈동자를 가까이에서 마주한 임유진은 숨을 깊게 한번 들이켜더니 오늘 배달하러 갔다가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얘기해 주었다. 물론 정한나가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사실은 뺀 채, 옷이 그렇게 된 건 그저 어쩌다가 찻물이 쏟아진 것뿐이고 마침 그 모습을 강현수가 봐 버렸다고 얘기했다.다만 강현수가 그녀를 갑작스럽게 안아버린 건 임유진도 생각 못 했던 일이다."사람을 착각한 것 같아. 난 어릴 적 강현수 씨와 그렇게 만난 적 없거든."임유진의 말에 강지혁
‘왜라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하지만 지금 강지혁의 얼굴을 봐서는 대답을 꼭 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말해. 왜 강현수한테는 안 흔들릴 것 같은지."그의 재촉에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웠지만, 정확히 얘기해 주었다."내 마음을 흔들고 설레게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혁아. 그리고 난 강현수 씨에게 특별한 감정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네가 더는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정말 없어?강지혁의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 머릿속에서 강현수가 임유진을 꼭 끌어안고 있는 사진과 강현수가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린 사진들이 떠올랐으니까.그 사진들은 마치 강지혁이 무슨 수를 써도 강현수와 임유진 사이는 절대 끊어낼 수 없다고 되새겨 주는 것만 같았다."정말 없어? 나한테 숨기는 거 정말 아무것도 없어?"강지혁이 물었다."응, 없어. 너한테 말한 게 다야."임유진은 강지혁이 오늘 일에 관해 묻는 줄 알았기에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럼 유진아... 너는 나한테 얼마나 설레?"강지혁은 이제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왔고 차 안 분위기는 아까와 달라졌다. 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대답하기 부끄러운지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내가 아파하고 슬퍼하는 거 보면 못 견디겠어?"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곁에 없으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강지혁이 또다시 물었고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 생각은 얼마나 해? 시도 때도 없이 내 생각하고 있어?"그는 현존하는 어떤 악기보다도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임유진의 얼굴은 이제 불처럼 뜨거워졌다.얼마나 생각하냐고?강지혁의 얼굴, 목소리 그리고 숨결, 이 모든 것들은 마치 마법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임유진은 그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함께 살고 싶다고, 자신의 미래에 그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
증명이라니? 뭘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지?임유진은 조금 얼떨떨해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빛을 보고는 뭔가 깨달은 듯 잠깐 주춤하더니 곧 두 팔을 강지혁의 목에 둘렀다.그러고는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강지혁의 입술을 차가웠지만,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두근거리는 마음을 담은 입맞춤... 이것이 그녀의 증명이다.하지만 이런 가벼운 입맞춤은 강지혁의 성에 차지 않았다.그는 임유진이 슬슬 입술을 떼려고 할 때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강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것도 잠시 임유진은 바로 그의 키스에 빠져들었다.강지혁은 자기가 한 키스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까? 임유진은 그의 키스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고 그를 향한 감정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임유진이 힘든 듯 내는 신음에 강지혁은 서서히 입술을 뗐다."콜록콜록..."임유진은 갑작스럽게 흘러드는 신선한 공기에 저도 모르게 마른기침하며 숨을 깊게 들이켰다."혁아, 아까 너..."그녀가 뭔가 얘기하려는 듯 입을 열자 강지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부족해... 이거로는 부족해... 유진아, 이거로는 증명이 안 된다고..."강지혁은 조수석 옆 버튼을 누르고는 임유진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아직 안전 벨트를 풀기 전이었기에 임유진은 꼼짝없이 의자가 넘어가는 대로 뒤로 누워졌다.강지혁은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넘어오더니 상체를 세워 거추장스러운 넥타이를 아예 치워버리고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임유진은 깜짝 놀라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뉴스 메인을 차지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혁아!"그녀는 안전 벨트를 풀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임유진이 막 손을 안전 벨트 쪽으로 가져가려 할 때 그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왜, 증명하기 싫어?""아니, 싫은 게 아니라..."그녀는 몸을 흠
임유진은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강지혁은 지금 매우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유진아, 사랑해."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야 해."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안 돼.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강지혁은 임유진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기만을 원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 싶었다.한 사람을 사랑하면 모두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독재자가 되는 걸까?아버지도 어머니를 이토록 사랑하셨던 걸까? 그래서 어머니가 떠난 후 살아가는 것도 사치라고 느껴 목숨을 가볍게 여겼나?강지혁은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문을 잇기 위한 것일 뿐 사랑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사랑을 넘어 마치 하나의 낙인처럼 그의 마음에, 그의 머리에 새겨졌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진해져만 갔다.그녀는 강지혁이 제일 힘들 때 두 팔을 벌려 그를 꼭 껴안아 주었고 그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여주었다.강지혁은 그녀의 곁에 있을 때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고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누나라고 불러’라며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준 임유진의 한마디에 그는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강선우가 죽은 후 가족이라는 느낌을 받은 건 그때가 유일했으니까.이제 강씨 저택에서의 유일한 피붙이는 강문철뿐이지만 그에게 있어 강지혁은 어디까지나 가문을 잇는 도구일 뿐이었다. 만약 강지혁이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그에게 적당한 가문의 아가씨를 소개해줘 새로운 후계자를 만들어 내도록 했을 것이다.강문철은 자신의 손자에게 애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증오하고 있다. 강지혁의 몸속에는 그가 싫어
"혁아... 혁아..."임유진이다. 임유진이 또다시 그를 부르고 있다. 다만 왜 곧 울 것 같은 목소리인 거지?‘잠깐, 울고 있다고?’강지혁이 정신을 차리고 임유진을 바라보니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샌가 눈물이 맺혀있었다.‘설마 내가 울린 건가...?’그는 방금 이성을 잃었고 임유진은 그런 그가 무서워 눈물이 났다. 강지혁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는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동시에 마음이 아파 났다.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강현수 일 때문에 강지혁은 감정이 격해졌고 이제까지 자부해왔던 이성까지 잃었다."내가... 무서워?"그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물었다.강지혁이 원하는 건 임유진의 웃는 모습이다. 그녀가 행복해하는 얼굴로 ‘혁아’라고 불러줄 때면 그는 살아있음을 느낀다.그래서 임유진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모습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신의 손으로 그녀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다.임유진은 아직 진정이 안 된 듯 여전히 몸을 떨고 있다.무섭냐고? 확실히 무서웠다. 아까의 강지혁은 그녀의 반항이 아예 소용없다는 느낌을 주었고 어두운 감정을 그녀에게 전부 쏟아내듯 그녀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임유진은 너무 낯설었다.하지만 지금 임유진이 상처받았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진정으로 무서웠던 것 강지혁인 것만 같았다.분명 두 사람 중 우위에 있는 건 강지혁이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가 마치 툭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유리와도 같아 보였다.고요한 차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임유진은 촉촉한 눈가에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의자에 누워서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혁아, 네가 무서운 게 아니야. 아까는 내 목소리가 너한테 닿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강지혁을 안심시켜야만 할 것 같았고 이렇게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녀는 침을 한번 삼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이렇게 해야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허락할게."임유진은 강지혁을 위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도 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들키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오로지 강지혁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그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조금 놀란 얼굴로 눈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 무서워하고 있으면서 임유진은 지금 그를 위해 기꺼이 허락하겠다고 한다.강지혁은 가슴께가 따뜻하면서도 약간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까까지만 해도 온몸을 감싸고 있던 그의 불안을 단번에 진정시켜주었고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임유진밖에 없다...강지혁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외투를 임유진의 몸에 덮어주었다."미안해... 아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그는 낮게 속삭이며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아까 그는 하마터면 후회할 짓을 할뻔했다. 만약 임유진이 아까 강지혁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그녀에게 상처를 줬을 것이다.강지혁의 품에 안기자 임유진의 떨림도 서서히 멎어갔다. 드디어 그녀가 아는 혁이로 돌아온 것이다.‘이제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혹시... 강현수 씨 때문이야?"임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그런 거야. 강현수 씨가 찾는 사람, 나 아니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 그리고 찾는 사람이 정말 내가 맞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니까.""그래, 누나가 사랑하는 건 나야."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따라 똑같이 중얼거렸다.그러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아까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넥타이로 묶어뒀던 그녀의 손목을 바라봤다.그녀를 속박하고 있던 넥타이를 천천히 풀어보니 손목이 빨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