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너머에는 메인 홀이 보였고 거기에는 가수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시끄러운 홀과는 달리 룸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강현수는 마치 다른 세상 같은 메인 홀을 바라보며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구두 소리가 룸에 울려 퍼졌다.강현수는 고개를 돌려 들어온 사람을 향해 물었다."왔어? 너도 한 잔 줄까?""됐어."강지혁은 강현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용건만 간단히 하고 갈 거야."그에 강현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용건이 뭔데?""네가 임유라 그 여자와 헤어지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유진이 끌어들이지 마.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강지혁의 경고 섞인 말에 강현수의 눈빛이 변했다."무슨 뜻이야?""오늘 임유라 부모가 유진이를 찾아와서 행패 부렸어. 네가 그 여자와 헤어진 게 유진이 때문이라고."강지혁이 말을 이었다."그래서, 임유라 부모가 이런 짓을 벌이도록 원인 제공 한 사람이 임유라 그 여자야 아니면 너야?"강현수가 손에 든 찻잔을 돌리자 차향이 열기를 따라 룸 전체에 퍼졌다."지금 그게 중요해?""내가 이렇게 널 찾아온 거 보면 중요하지 않겠어?"강지혁이 말했다.강현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강지혁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또다시 울려 퍼졌다."그 여자하고 헤어진 게 유진이와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 거야?"그 질문에 강현수의 손이 움찔했고 강지혁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곧바로 알아챘다.강지혁의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룸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한참이 지난 후 강현수가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리더니 강지혁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내가 그렇다고 하면?"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전례 없이 차가워졌다."죽고 싶어?""너한테는 유진 씨가 매우 소중한가 봐. 하지만 내가 만약 유진 씨를 가지려고 마음먹으면 그게 강지혁 너라고 해도 쉽게 막지 못할 거야."강현수는 여전히 강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
강지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는 절대 강현수에게 그 기회를 내줄 리 없다, 영원히!한편 룸 안에서 강현수는 목에 건 백금 목걸이를 끌어냈는데 은으로 된 팔찌가 펜던트로 걸려 있었다.그는 손으로 가볍게 팔찌를 어루만졌다. 수년간 문지른 덕에 팔찌는 어느덧 반들반들해졌다.이 팔찌는 그의 전부였다.가슴에 새길 그리움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서 뼛속에 깊이 파묻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컷!”감독이 또다시 컷하며 살짝 화난 얼굴로 임유라에게 말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엄마를 여읜 슬픔을 표현하라고요. 이렇게 쉬운 연기도 못해요? 배우 일이 년 하나... 쯧쯧.”임유라는 감독의 질책에 머리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댔다.전에 이 감독은 그녀에게 매우 깍듯이 대했고 그녀의 신은 거의 한 번에 통과했다. 임유라 스스로 다시 찍겠다고 하지 않는 한 감독은 그녀에게 찍소리도 못했다.그랬던 감독이 지금 그녀에게 삿대질할 기세로 질책하고 있다.주위에 있는 다른 배우들도 야유와 경멸에 찬 눈길로 임유라를 쳐다봤다.임유라는 옆에서 다시 감정을 잡고 있다가 다른 여배우들의 조롱 섞인 말을 엿들었다.“연기를 잘하길 하나, 예쁘길 하나,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대.”“어쩌겠어. 그게 다 예전에 팔자가 좋아서 부자 남친을 만난 덕이지. 허구한 날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만 하더니 이젠 뭐야? 부잣집 도련님한테 뻥 차였네.”“그 남친분도 얼마나 역겨웠겠어. 제 친언니까지 일부러 해치는데, 쯧쯧. 망신당할 거면 혼자 당하지 아니 왜 제작팀까지 피해를 주냐고!”“감독님이 하도 신을 많이 삭제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우리 제작팀 해체 위기야!”임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이 작품으로 재기하려 했는데 제작팀에서 심각할 정도로 신을 줄였고 대본까지 수정해 현재 그녀의 분량은 조연배우들보다 적었다.위약금을 배상하지 않고 순조롭게 작품을
강현수가 혹시 마음이 바뀐 걸까?임유라는 좀 전까지 주위에 모여 그녀를 비웃던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는데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그래, 일단 다시 현수 씨 여친이 되면 이 사람들 싹 다 연예계에서 매장해버릴 거야!’그녀는 기세등등하게 제작팀을 떠났다.하지만 강현수를 만난 순간,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강현수가 그녀를 불러온 곳은 구치소였고 면회실 안에는 그녀의 부모님도 있었다.강현수는 의자에 앉아 여유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셨고 그녀의 부모는 전전긍긍하게 책상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포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임유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현수 씨가 왜 여기로 온 걸까?’임유라는 부모님이 구치소에 감금된 사실을 알지만 며칠만 있으면 바로 풀려나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언론매체에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현수 씨,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요?”임유라는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가여운 척하며 물었다.“뭐 그래도 날 만나주겠다니 너무 다행이에요. 나 좀 도와줘요. 엄마, 아빠가 작은 오해로 구치소에 갇혀 있는 게 너무 속상해요.”그녀는 또 적절한 타이밍에 효녀 연기를 내세웠다. 그리고는 부모님이 구치소에 갇힌 이유가 전부 오해 때문이라고 한다.“오해?”강현수가 차가운 눈길로 째려봤는데 짙은 눈동자에 삭막한 기운이 차 넘쳤다.“유라 씨 부모님이 유진 씨 찾아가서 소란 피운 거, 주소 유라 씨가 알려줬죠?”임유라는 표정이 확 변했고 구석에 움츠려 있던 임정호와 방미령도 몸을 움찔거렸다.“유라 씨는 이래서 똑똑하지 못하단 거예요. 내가 왜 일부러 이리로 왔겠어요? 유라 씨 부모님도 옆에서 들으라고 그런 거잖아요. 유라 씨 지금 하는 일 전부 접고 부모님 구치소에서 나오거든 온 가족이 함께 이곳을 떠요. 그리고 더이상 S 시에서 내 눈앞에 띄지 말아요.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었다간 그땐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임유라는 어안이 벙
강현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임유라를 쳐다봤다. 공평? 이 세상에 언제 공평이 존재했었나? 강현수는 수년간 그 소녀를 찾아 헤맸는데 만약 노력과 성과가 비례한다면 그의 수년간 노력으로 진작 결실을 얻어야 했다.하지만... 전혀 아니다!마치 이 세상엔 그런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다만 그 사람은 분명 존재하잖아!“공평을 논하고 싶다면 임유라 씨 어머니가 유진 씨 뺨을 때렸으니 공평하게 유라 씨도 한 대 맞아요.”강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순간 임유라, 방미령, 임정호 세 사람은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방미령은 의자에서 벌떡 뛰어오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내가 왜 내 딸을 때려야 하죠?! 당신이 아무리 돈 많고 힘이 세도 이건 좀 지나치네요!”“본인 딸은 못 때리겠어요?”강현수는 한심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실소를 터트렸다.“그러면서 정작 본인과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의붓딸은 함부로 때려요? 그래요?”방미령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곧이어 강하게 반박했다.“왜... 그게 왜 함부로예요. 유진이가 파렴치하게 일부러 유라랑 그쪽 사이를 망가뜨렸잖아요...”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어서 옆에 있던 경호원이 방미령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가여운 그녀는 며칠 전에 강지혁에게 맞아서 이빨 한 대가 부러졌는데 아직 그 이빨을 치료하지도 못한 채 또 한 대 얻어맞았다. 그녀는 순간 억울했던지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한 번만 더 유진 씨 험담하면 그땐 당신들 입을 확 찢어버릴 거예요.”말을 마친 강현수는 더는 여기 남아있을 생각이 없어 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이때 임유라가 소리쳤다.“현수 씨 나한테 이러면 안 돼!”강현수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네 입술 모양이 ‘그 여자’를 닮은 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러면 너도 진작 내 손에 아작났어!”강현수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곧게 자리를 떠났다.면회실에는 임가네 가족 세 명만 덩그러니 남았다.방미령은 째질 듯이 아픈 입
심지어 일부 기자들은 임유라가 부동산과 액세서리를 끊임없이 팔고 있고, 그녀의 부모님이 살던 집까지 인터넷에 올려 판매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무래도 위약금을 물어내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 아닐까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또 어떤 기자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임유라가 미 완료한 모든 계약에 대해 배상해야 할 금액이 총 140억 원이라고 추산했다.이는 임유라 같은 보통 가정에,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되기 전 삼류배우였던 그녀에게 엄청난 금액이고 모든 가산을 팔아도 갚지 못할 금액이다.임유진은 휴대폰으로 기사를 확인했는데 본인 집이 부동산 중개업소에 걸린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그 기사에는 집 내부 사진이 퍼즐처럼 되어 있었고 그 인간들이 인터넷에 올린 판매가격은 11억6천이었다.애초에 임유진과 엄마의 추억이 담긴 집을 11억 6천이란 가격에 덜컥 내놓을 줄이야, 임유진은 살짝 감개무량해졌다.사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 집에는 엄마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집안엔 온통 임유라와 방미령이 지냈던 흔적만 꽉 차 있다.“뭐 보고 있어?”강지혁이 그녀 옆으로 다가오며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살짝 구겼다.“누나 예전에 살던 집을 파는 거야?”“응, 임가네 식구들이 내놨어.”임유진이 머리를 끄덕였다.“누나 사고 싶어?”강지혁의 물음에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살 마음이 있다면 강지혁이 당장 사줄 기세였으니까.“아니, 이 집은 내게 좋았던 추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더 많아.”엄마는 고작 저 안에서 3년만 지냈고 계모와 임유라가 20여 년을 살았다.“아 참, 너 강현수 씨랑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 현수 씨는 정말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야?”임유진이 물었다.강지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겉으론 전혀 티 나지 않았다.“그건 왜 갑자기 물어?”“방금 기사 하나 봤는데 강현수 씨가 만났던 여자들은 사실 한 여자의 대체품이라는 거야. 그 댓글 보고 문득 궁금해지데.”임유진이 말했다. 그녀는 그날 밤 술에 취한 강현수가 그녀를 안고
강지혁이 대답했다.“기왕 물은 거 다 말해줄게.”그가 지금 안 알려줘도 날이 지나면 임유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이 일은 S 시 상류층에서 더이상 비밀이 아니니까.남들에게 전해 듣는 것보단 그래도 강지혁이 직접 알려주는 게 낫다.“강현수가 사람 한 명 찾고 있는 거 맞아. 어릴 때 알고 지낸 여자아이인데 줄곧 못 찾았어. 여태껏 만난 여자친구들도 어쩌면 그 아이의 대체품일지도 몰라. 주인을 못 찾으니 무언가로 대체하고 싶었나 보지.”강지혁은 말하면서 임유진의 반응을 살폈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그러니까 강현수 씨가 한 여자아이의 대타를 찾는다고?”“강현수가 만난 여자친구들은 그 아이랑 은근 닮은 점이 많아.”“하지만 결국 현수 씨가 찾는 사람이 아니잖아. 이렇게 끊임없이 대체품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그녀가 물었다.“집념이 너무 깊어서 혹은 인제 절망의 수준에 다다라서? 강현수도 이젠 그해 그 소녀를 찾을 거란 희망을 잃은 것 같아.”강지혁이 문득 화제를 돌렸다.“누나가 만약 그 소녀였다면, 줄곧 누나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임유진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도 이런 가설을 해봤으니까.“감동 받고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갈 거야?”강지혁이 물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최면하는 것처럼 그녀의 진실한 답변을 유도했다.“아닐걸.”임유진이 말했다.“네 말처럼 단지 집념 때문이지 진짜 그 소녀를 깊이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닐 수 있잖아. 게다가 두 사람은 아주 어릴 때 만났다며? 어릴 때 감정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어?”“정말?”강지혁이 되물었다.“무조건 누나여야만 한다면?”임유진은 실소를 터트렸다.“그렇다고 나도 무조건 그 사람한테 가야 해? 더욱이 난 이미 네가 있어. 내가 원한다 해도 네가 안 놓아주겠지.”“맞아. 누나 곁엔 이미 내가 있어...”강지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나야 당연히 누나 안 놓아주지. 아무한테도 누나 안
정한나는 그녀가 여기서 배달 일을 하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일부러 윤이 식당에 배달을 시켰다. 임유진도 그런 그녀의 속셈을 훤히 알고 있다.“왜요? 주문에 무슨 문제 있어요?”카운터에 있던 탁유미가 물었다.“아니요.”임유진은 가볍게 웃으며 배달 음식을 들고 스쿠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음식을 스쿠터에 싣고 로펌 방향으로 출발했다.임유진이 배달 음식을 들고 로펌으로 걸어오자 정한나는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어머, 유진 씨,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또 유진 씨 번거롭게 굴었네요.”“번거로울 거 없어요. 제 일인데요 뭘.”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하며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다만 정한나는 음식을 받은 게 아니라 갑자기 그녀를 이끌고 로펌으로 들어오더니 모든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자, 여러분, 이분이 바로 방금 제가 말씀드린 사례의 당사자이자 우리 로펌의 옛 동료 임유진 씨입니다.”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임유진에게 쏠렸다.임유진은 불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정한나는 가식적인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다름이 아니라 요즘 제가 신인들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중이거든요. 유진 씨도 알다시피 가장 좋은 방법은 전에 논란이 됐던 사건들을 꺼내서 다 함께 토론하는 거잖아요. 지금 막 유진 씨 그해 사건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재판 기록이나 사건 진술을 보는 것보다 당사자인 유진 씨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훨씬 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정한나는 다정하게 임유진의 손까지 잡았다.“유진 씨 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죠? 그해 재판에서 그토록 억울하다고 하더니 지금 다시 말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다 같이 뜻을 모으면 어디에 허점이 있었는지, 어떤 단서를 놓쳤는지 찾아낼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유진 씨 사건을 뒤집을 수 있다고요.”임유진은 손발이 차갑게 식었다. 정한나의 매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아픈 상처를 모질게 찔렀다!뜻을 모아? 허점과 단서? 사건을 뒤집어?마냥 가소로울 따름이다!그해 임유진이 사고 났을 때, 진짜 도움이 필요했을 때 정한나는
“누가 누굴 도와요?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요? 역겨워서 정말!”임유진이 말했다.한편 주변 사람들도 전부 변호사 전공이지 바보가 아닌지라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금방 알아챘다. 저마다 의아한 눈길로 정한나를 쳐다봤는데 이것 하나만은 명확히 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정한나가 전에 쌓아온 이미지가 지금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는 것이다.그녀는 원래 오늘 임유진에게 꼽줄 생각이었다. 지난번 병원에서 건강검진 받을 때 임유진 앞에서 망신 당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려 오늘 제대로 분풀이할 참이었는데 결국 또다시 본인만 우스갯거리로 전락했다.정한나는 방금 마신 차 한 잔 들고 오더니 서슴없이 임유진에게 뿌렸다.임유진도 미리 경계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얼굴 대신 상의에 정곡으로 맞았다.날씨가 점점 무더워지다 보니 그녀는 위에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왔는데 찻물이 튀어 셔츠가 흠뻑 젖었다.주변 동료들도 정한나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임유진이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할 때 얇은 정장 외투가 그녀 몸을 뒤덮었다.“입어요!”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 목소리는... 고개 돌려 보니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표정을 지은 강현수가 뒤에 서 있었다!미간을 찌푸리고 분노가 어린 그의 두 눈을 본 순간 임유진은 살짝 의외였다. 그는 원래 주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무관심한 태도인데 지금 그녀에게 외투를 걸쳐주며 초라한 모습을 커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강현수 옆에는 로펌 대표님과 두 변호사까지 서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이전에 임유진이 로펌에 있을 때 그녀를 책임지고 가르쳤던 변호사였다.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상대의 눈빛에 복잡한 기운이 스쳤다.“어떻게 된 일이죠?”로펌 대표가 싸늘하게 물었다. 로펌을 찾아온 중요한 바이어 앞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참으로 불미스러운 일이었다.정한나는 좀 전까지 씩씩거리더니 금세 겁에 질린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