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일부 기자들은 임유라가 부동산과 액세서리를 끊임없이 팔고 있고, 그녀의 부모님이 살던 집까지 인터넷에 올려 판매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무래도 위약금을 물어내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 아닐까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또 어떤 기자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임유라가 미 완료한 모든 계약에 대해 배상해야 할 금액이 총 140억 원이라고 추산했다.이는 임유라 같은 보통 가정에,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되기 전 삼류배우였던 그녀에게 엄청난 금액이고 모든 가산을 팔아도 갚지 못할 금액이다.임유진은 휴대폰으로 기사를 확인했는데 본인 집이 부동산 중개업소에 걸린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그 기사에는 집 내부 사진이 퍼즐처럼 되어 있었고 그 인간들이 인터넷에 올린 판매가격은 11억6천이었다.애초에 임유진과 엄마의 추억이 담긴 집을 11억 6천이란 가격에 덜컥 내놓을 줄이야, 임유진은 살짝 감개무량해졌다.사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 집에는 엄마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집안엔 온통 임유라와 방미령이 지냈던 흔적만 꽉 차 있다.“뭐 보고 있어?”강지혁이 그녀 옆으로 다가오며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살짝 구겼다.“누나 예전에 살던 집을 파는 거야?”“응, 임가네 식구들이 내놨어.”임유진이 머리를 끄덕였다.“누나 사고 싶어?”강지혁의 물음에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살 마음이 있다면 강지혁이 당장 사줄 기세였으니까.“아니, 이 집은 내게 좋았던 추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더 많아.”엄마는 고작 저 안에서 3년만 지냈고 계모와 임유라가 20여 년을 살았다.“아 참, 너 강현수 씨랑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 현수 씨는 정말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야?”임유진이 물었다.강지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겉으론 전혀 티 나지 않았다.“그건 왜 갑자기 물어?”“방금 기사 하나 봤는데 강현수 씨가 만났던 여자들은 사실 한 여자의 대체품이라는 거야. 그 댓글 보고 문득 궁금해지데.”임유진이 말했다. 그녀는 그날 밤 술에 취한 강현수가 그녀를 안고
강지혁이 대답했다.“기왕 물은 거 다 말해줄게.”그가 지금 안 알려줘도 날이 지나면 임유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이 일은 S 시 상류층에서 더이상 비밀이 아니니까.남들에게 전해 듣는 것보단 그래도 강지혁이 직접 알려주는 게 낫다.“강현수가 사람 한 명 찾고 있는 거 맞아. 어릴 때 알고 지낸 여자아이인데 줄곧 못 찾았어. 여태껏 만난 여자친구들도 어쩌면 그 아이의 대체품일지도 몰라. 주인을 못 찾으니 무언가로 대체하고 싶었나 보지.”강지혁은 말하면서 임유진의 반응을 살폈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그러니까 강현수 씨가 한 여자아이의 대타를 찾는다고?”“강현수가 만난 여자친구들은 그 아이랑 은근 닮은 점이 많아.”“하지만 결국 현수 씨가 찾는 사람이 아니잖아. 이렇게 끊임없이 대체품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그녀가 물었다.“집념이 너무 깊어서 혹은 인제 절망의 수준에 다다라서? 강현수도 이젠 그해 그 소녀를 찾을 거란 희망을 잃은 것 같아.”강지혁이 문득 화제를 돌렸다.“누나가 만약 그 소녀였다면, 줄곧 누나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임유진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도 이런 가설을 해봤으니까.“감동 받고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갈 거야?”강지혁이 물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최면하는 것처럼 그녀의 진실한 답변을 유도했다.“아닐걸.”임유진이 말했다.“네 말처럼 단지 집념 때문이지 진짜 그 소녀를 깊이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닐 수 있잖아. 게다가 두 사람은 아주 어릴 때 만났다며? 어릴 때 감정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어?”“정말?”강지혁이 되물었다.“무조건 누나여야만 한다면?”임유진은 실소를 터트렸다.“그렇다고 나도 무조건 그 사람한테 가야 해? 더욱이 난 이미 네가 있어. 내가 원한다 해도 네가 안 놓아주겠지.”“맞아. 누나 곁엔 이미 내가 있어...”강지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나야 당연히 누나 안 놓아주지. 아무한테도 누나 안
정한나는 그녀가 여기서 배달 일을 하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일부러 윤이 식당에 배달을 시켰다. 임유진도 그런 그녀의 속셈을 훤히 알고 있다.“왜요? 주문에 무슨 문제 있어요?”카운터에 있던 탁유미가 물었다.“아니요.”임유진은 가볍게 웃으며 배달 음식을 들고 스쿠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음식을 스쿠터에 싣고 로펌 방향으로 출발했다.임유진이 배달 음식을 들고 로펌으로 걸어오자 정한나는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어머, 유진 씨,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또 유진 씨 번거롭게 굴었네요.”“번거로울 거 없어요. 제 일인데요 뭘.”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하며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다만 정한나는 음식을 받은 게 아니라 갑자기 그녀를 이끌고 로펌으로 들어오더니 모든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자, 여러분, 이분이 바로 방금 제가 말씀드린 사례의 당사자이자 우리 로펌의 옛 동료 임유진 씨입니다.”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임유진에게 쏠렸다.임유진은 불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정한나는 가식적인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다름이 아니라 요즘 제가 신인들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중이거든요. 유진 씨도 알다시피 가장 좋은 방법은 전에 논란이 됐던 사건들을 꺼내서 다 함께 토론하는 거잖아요. 지금 막 유진 씨 그해 사건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재판 기록이나 사건 진술을 보는 것보다 당사자인 유진 씨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훨씬 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정한나는 다정하게 임유진의 손까지 잡았다.“유진 씨 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죠? 그해 재판에서 그토록 억울하다고 하더니 지금 다시 말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다 같이 뜻을 모으면 어디에 허점이 있었는지, 어떤 단서를 놓쳤는지 찾아낼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유진 씨 사건을 뒤집을 수 있다고요.”임유진은 손발이 차갑게 식었다. 정한나의 매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아픈 상처를 모질게 찔렀다!뜻을 모아? 허점과 단서? 사건을 뒤집어?마냥 가소로울 따름이다!그해 임유진이 사고 났을 때, 진짜 도움이 필요했을 때 정한나는
“누가 누굴 도와요?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요? 역겨워서 정말!”임유진이 말했다.한편 주변 사람들도 전부 변호사 전공이지 바보가 아닌지라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금방 알아챘다. 저마다 의아한 눈길로 정한나를 쳐다봤는데 이것 하나만은 명확히 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정한나가 전에 쌓아온 이미지가 지금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는 것이다.그녀는 원래 오늘 임유진에게 꼽줄 생각이었다. 지난번 병원에서 건강검진 받을 때 임유진 앞에서 망신 당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려 오늘 제대로 분풀이할 참이었는데 결국 또다시 본인만 우스갯거리로 전락했다.정한나는 방금 마신 차 한 잔 들고 오더니 서슴없이 임유진에게 뿌렸다.임유진도 미리 경계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얼굴 대신 상의에 정곡으로 맞았다.날씨가 점점 무더워지다 보니 그녀는 위에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왔는데 찻물이 튀어 셔츠가 흠뻑 젖었다.주변 동료들도 정한나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임유진이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할 때 얇은 정장 외투가 그녀 몸을 뒤덮었다.“입어요!”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 목소리는... 고개 돌려 보니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표정을 지은 강현수가 뒤에 서 있었다!미간을 찌푸리고 분노가 어린 그의 두 눈을 본 순간 임유진은 살짝 의외였다. 그는 원래 주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무관심한 태도인데 지금 그녀에게 외투를 걸쳐주며 초라한 모습을 커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강현수 옆에는 로펌 대표님과 두 변호사까지 서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이전에 임유진이 로펌에 있을 때 그녀를 책임지고 가르쳤던 변호사였다.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상대의 눈빛에 복잡한 기운이 스쳤다.“어떻게 된 일이죠?”로펌 대표가 싸늘하게 물었다. 로펌을 찾아온 중요한 바이어 앞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참으로 불미스러운 일이었다.정한나는 좀 전까지 씩씩거리더니 금세 겁에 질린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는데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짓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강현수는 그녀에 관한 자료를 찾아봐서 그해 교통사고 때문에 진애령이 죽고 임유진이 감방에 들어간 사실을 알고 있다.하지만 상세한 내용은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는데 오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임유진이 재판에서 줄곧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본인은 억울하다 주장했다고 한다.정말 누명을 뒤집어쓴 걸까? 진애령의 죽음이 실은 그녀와 무관한 걸까?이 동료는 간단하게 상황만 설명할 뿐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지만 로펌 대표는 그 속에 담긴 수상한 낌새를 바로 알아챘다. 로펌 대표는 더 싸늘해진 눈길로 정한나를 째려보고는 고개 돌려 임유진을 쳐다봤다.“유진 씨,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이렇게 하시죠. 유진 씨가 손해 본 거 있으면 로펌에서 배상할게요. 나중에 리스트로 작성해주세요.”대표의 말에 임유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저는 이만 일이 밀려서 나가보겠습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옆에 있는 강현수에게 정장 외투도 돌려주었다.“고마워요.”흰 셔츠가 아직도 축축해서 반투명한 상태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이곳을 떠날 생각밖에 없었다.“입고 가도 돼요. 나 돌려줄 필요 없어요.”강현수가 말했다.옆에 있던 로펌 대표는 의아한 눈길로 강현수를 쳐다봤다. 그와 알고 지낸 몇 년 동안 연예계 황태자로 불리는 강현수는 차갑기 그지없고 남을 도와주는 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코앞에서 토막 살인을 당해도 꿈쩍하지 않을 사람인데 지금 임유진에게 이토록 신경 써주다니... 실로 경이로운 장면이었다.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들도 이런 대우는 못 받아봤을 텐데...“괜찮습니다.”임유진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외투를 돌려줬다. 셔츠가 반투명 상태라 남들이 보면 아주 뻘쭘하겠지만 수영복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속살이 비치는 셔츠보다 강현수와 자꾸만 엮이는 게 그녀는 더 싫었다.“방금 고마웠어요.”임유진은 깍듯이 인사하고 외투를 그의 손에 건
정한나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확 들었다.바로 이때 정한나와 상극이던 한 동료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누구는 꼴 좋네요. 이전 동료를 꼽주려다가 되레 본인만 개망신당했잖아요. 혹시 알아요. 내일이면 그 전 동료처럼 변호사도 못 하게 될지. 꽤 재미있는 사례가 되겠어요. 나중에 신입사원들에게 잘 설명해줘야겠어요!”정한나는 순간 사색이 되었다. 평상시 톡 쏘는 말주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눈에 당혹감만 가득 차 있었다.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변호사계의 우스갯거리로 남을 테니까!...로비를 나선 임유진이 스쿠터 쪽으로 걸어갈 때 강현수가 쫓아와서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왜 다 젖은 셔츠를 입고 길거리를 누빌망정 내 호의를 거절하는 거죠? 내가 싫어요? 그래서 내 물건도 건드리기 싫은 거냐고요?”임유진은 팔을 빼내려 했지만 그가 너무 꽉 잡은 탓에 도저히 빼낼 수 없었다.“나중에 양복 돌려주기가 귀찮아서 그랬어요. 어차피 지금 날씨도 좋아서 셔츠 금방 말라요.”임유진이 대답했다.“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떡하니 쳐다봐도 괜찮은 거예요?”그는 말하면서 시선이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임유진은 돌연 몸이 얼어붙었다.“성인군자라면 안 쳐다보겠죠.”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론 끝없이 되뇌었다.‘수영복이야, 그냥 비키니 입었다고 생각해!’“난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거든요.”강현수는 말하면서 강제로 그녀에게 외투를 걸쳐주었다.“이 꼴로 돌아다니면 딴사람들의 범죄율만 더 높아진다고요!”“현수 씨 진짜!”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이 외투도 나 돌려줄 필요 없으니까 그냥 입어요. 나중에 버리든지 다른 사람 주든지 마음대로 해요.”그는 단지 임유진이 사람들 앞에서 몸을 훤히 비친 모습이 싫었을 뿐이다.강현수도 실은 의아했다. 딴 여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임유진이 찻물에 흠뻑 젖은 걸 본 순간 가슴이 움찔거리고 저도 모르게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품에 꼭 안아서라도 보호해주고
뜻밖에도 강현수는 그녀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가 새 옷을 고르기 시작하자 그제야 본인의 정장 외투를 거두어들였다.임유진은 가게에서 가장 저렴한 티셔츠 한 장 골라서 얼른 갈아입었다.그녀가 옷을 고르고 있을 때 GH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에서 강지혁은 한껏 어두운 표정으로 개인 비서 고이준의 보고를 들었다.“네, 전에 여러 언론사들과 미리 얘기해서 무릇 임유진 씨에 관련된 기사라면 일절 내보내지 못하게 조치해놨습니다. 이번에 세 언론사들도 감히 기사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고이준이 말했다.세 언론사에서 동시에 익명의 메일을 받았는데 임유진과 강현수가 함께 있는 애틋한 사진이 첨부 파일로 들어있었다.“누구 짓인지 조사해냈어?”강지혁이 물었다.“지금 조사 중인데 상대가 들킬 걸 알고 미리 전문적인 수단으로 손을 본 것 같아요.”고이준이 대답했다.“가장 빠른 속도로 조사해내. 배후의 조력자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야겠어.”강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네!”고이준은 곧바로 대답했다.“이만 나가봐.”고이준이 사무실을 나선 후에야 강지혁은 컴퓨터로 메일함을 열어보았는데 고이준이 보낸 파일이 있었다.그중 하나를 클릭하니 임유진과 강현수의 사진들이었다.달빛 아래에서 남자는 여자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여자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기도 했으며 서로 마주 보는 사진도 있었다.마치... 한 쌍의 연인을 방불케 했다.강지혁의 눈빛이 점점 더 짙어졌고 마우스를 쥔 손등에 핏줄이 튀어 올랐다. 임유진과 강현수가 왜 포옹하고 있는 걸까? 둘은 또 무슨 얘기를 나눈 걸까?강지혁은 그중 사진 한 장을 보더니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사진 속에서 강현수의 얼굴에 무언가가 역반사 되었고 임유진은 살짝 놀란 듯이 그를 마주 봤다.강현수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니!강지혁은 예전에 어느 날 밤 그녀가 ‘눈물’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게 생각났다.그때 이 화제를 꺼낸 이유가 혹시... 강현수 때문일까?강지혁은 문득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녀와 강현수 사이에
강지혁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오직 그녀 목소리만이 그에게 안정감을 줄 듯싶다!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됐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강지혁이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혁이야?”그건... 강현수의 목소리였다.강지혁은 심장이 움찔거려 딱딱하게 물었다.“응, 나야. 네가 왜 유진의 전화를 받아?”“지금 옷 갈아입는 중이야. 전화랑 가방 모두 밖에 놓고 있어서... 이따가 다시 전화하라고 할게.”강현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강지혁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마친 후 강현수는 물끄러미 수중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방금 휴대폰 액정에 뜬 ‘혁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전화를 받아버렸다.평소라면 절대 다른 사람 전화를 받지 않을 텐데 아까는 왜... 전화 온 사람이 강지혁이라서 그런 걸까?그 어떤 여자도 좋아할 것 같지 않던 강지혁이 하필이면 그가 호감 가는 여자를 사랑하게 될 줄이야.하지만 결국 강현수가 손을 놓아줘야 한다. 그는 감히 강지혁과 경쟁할 엄두가 안 난다.게다가 그가 진정 원하는 사람은 임유진이 아니다.말은 그렇게 해도 매번 임유진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끌린다.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감돌고 심지어 팔찌를 볼 때마다 그녀 얼굴이 떠오른다.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강현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졌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여자란 걸 뻔히 알면서 대체 왜 자꾸만 다가가고 싶은 걸까?이때 탈의실 문이 열리고 임유진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잔꽃 무늬 롱 원피스로 갈아입었는데 그 모습을 본 강현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방금 그녀가 이 치마를 들고 있을 때까지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입고 나온 순간 그해 그 소녀를 방불케 하는 모습에 저절로 넋이 나갔다.그해 그 소녀는 바로 이처럼 작은 체구에 잔꽃 무늬 원피스를 입고 그를 업은 채 힘겹게 하산했다.굴곡진 길을 따라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