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다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더 민망한 상황이 되어버렸다.강지혁이 입을 열었다."그 여자 맞아.""오, Hyuk, 대체 그 여자와 무슨 사이야? 연인인 거야?"아마 여기 있는 직원이었으면 절대 해당 외국인처럼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을 것이다.그때 강지혁이 영어로 한마디 더 보탰다."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야."그 말에 임유진은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꽉 부여잡은 것처럼 심장박동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회의가 끝나고 강지혁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왜 그래? 얼굴이 빨간데?""아, 아무것도 아니야."임유진이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자 강지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보더니 물었다."혹시 아까 저 사람들이 했던 얘기 때문에 그래?"임유진은 침묵으로 긍정했다."조만간 기회가 되면 소개해 줄게."강지혁이 말했다."응?!"임유진이 놀란 듯 묻자 강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왜, 싫어?"임유진은 강지혁과 눈이 마주치고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여기서 ‘싫어’ 라고 대답하면 그 말이 도화선이 되어 강지혁이 뭔가 할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우리가 연인이 된 지 얼마 안 됐기도 했고, 아까 저 사람들은 해외 지사 임원진들 아니야? 그런데 벌써 소개하는 건 좀... 빠르지 않나?""빠르다고?"강지혁은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난 오히려 늦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누나가 빠르다고 생각되면 누나가 괜찮을 때 소개해 줄게."임유진은 그제야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저기... 이제 식사 해야 하니까 이 손 좀 치워줄래?"임유진은 아직도 자신의 볼을 감싸고 있는 강지혁을 보며 민망한 듯 말했다."말랑말랑한 게 기분이 좋아서 놓고 싶지 않아."강지혁은 그녀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이것도 중독될 것 같아."임유진은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좀 혼란스러웠다.강지혁은 그렇게 한참을 더 만지작거리다 아쉬운
전화기 너머로 탁유미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 씨, 우리 윤이 수술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두 날 정도 적응하고 나면 소리를 듣는 훈련을 시작할 수 있대요.""너무 잘됐네요."임유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네, 그럼 이따 오후에 윤이 보러 갈게요."임유진은 윤이가 있는 병원과 병실을 전해 들은 후 통화를 마쳤다."그 귀가 안 들린다는 아이 말하는 거야?""응,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대. 이따 어차피 할 것도 없으니까 병원에 가보려고."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같이 가.""응? 같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물었다."하지만... 너 회사는 어쩌고?""비서한테 오후 일정을 뒤로 미루라고 하면 돼. 어차피 오늘은 급한 일도 없어."강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임유진은 이런 큰 규모의 회사에서 대표인 그에게 ‘급하지 않은 일’따위는 없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왜,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어?"임유진의 반응에 강지혁이 되물었다."아니, 그건 아니고."솔직히 말하면 강지혁이 같이 가겠다고 했을 때 뜻밖이긴 했지만 조금 설렜다."그럼 같이 가는 거로 결정 난 거지?"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렇게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올 때쯤 강지혁이 입을 열었다."누나, 앞으로도 이렇게 나를 위한 요리를 자주 해주면 안 돼?"그러자 임유진이 고개를 들었고 강지혁의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강지혁은 씩 웃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주었다. 임유진은 민망함에 얼굴이 또 핑크색으로 물들었다."응?"강지혁은 되물으며 그녀의 답변을 기다렸다."나 셰프님처럼 맛있게는 못해.""상관없어. 난 누나가 만든 음식이 좋은 거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이 아무리 음식에 까다롭지 않다고 해도 집에 있는 셰프님의 요리를 놔두고 왜 굳이 자신이 만든 ‘일반 음식’을, 그것도 자주 먹고 싶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냥 기분 좋아지라고
임유진은 강지혁의 마음속에 자신이 정말 그렇게나 소중할까 싶기도 했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 이제 고작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나?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임유진에게 강지혁이 이런 정성을 들여가며 거짓말할 이유는 또 없다."누나, 응?"강지혁은 또다시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목소리로 그녀의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그... 그럼 시간 날 때 많이 해줄게."임유진은 지금 전례 없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걸 느꼈다."그래."강지혁은 그제야 만족한 듯 옅게 웃었다.임유진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탁자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막 도시락통 덮개를 덮으려고 할 때 그녀는 ‘아!’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웅크렸다."왜 그래?"강지혁이 다급하게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손톱이 좀 부러진 것뿐이야. 이따 집에 가서 손톱깎이로 자르면 돼."임유진은 평소 정기적으로 손톱을 깔끔하게 자르곤 했지만 요즘 많이 바쁜 탓에 신경을 못 썼더니 평소보다 손톱이 자라있었다."어디 봐봐."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세히 들여다봤다."이 손가락 맞아?"그는 임유진의 검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손톱 겉 부분이 조금 부러지긴 했지만 자른 후 조금 다듬기만 하면 된다."응.""잠깐만."강지혁은 바로 핸드폰을 들어 여비서에게 연락했다."혹시 손톱깎이 있어?"임유진은 그 말에 경악하고 말았다.그리고 똑같이 경악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전화를 받은 여비서였다. 그녀는 설마 회사 대표가 자신에게 손톱깎이 유무에 관해 물어볼 줄은 몰랐다.여비서는 심히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손톱깎이를 들고 대표이사실로 들어왔다."대표님, 여기 요구하신 손톱깎이입니다."여비서는 공손하게 그에게 손톱깎이를 건네주었다."그래, 이제 나가 봐."여비서는 조용히 대표이사실 문을 열었고 막 닫으려 할 때 안쪽에서 한없이 다정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움직이지 마."비서는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임유진의 지시 아래 강지혁은 드디어 그녀의 부러진 손톱을 예쁘게 자를 수 있었다. 임유진은 차라리 자기가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며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하지만 그에 반해 강지혁은 이것마저도 중독이 된 사람처럼 그녀의 다른 손가락을 펴보더니 씩 웃으며 전부 자르기 시작했다.그는 그녀의 다른 손톱까지 다 자르고 나서도 뭔가 아쉬운 듯 말을 꺼냈다."혹시 또 손톱이 자라게 되면 내가 해줄 테니까 누나는 손대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아직 점심이라 윤이를 보러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강지혁은 다시 책상 앞으로 가서 회사 일을 처리했고 임유진은 핸드폰을 꺼내 이것저것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인기 검색어 하나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클릭해보니 거기에는 임유라에 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는데 임유라가 사랑과 커리어를 동시에 획득한 인생 승자라는 내용이었다.임유라는 곧 S 시에서 열리게 될 GF파티에 강현수의 파트너로 동행한다고 쓰여있었고 파티에 참석하는 인사들은 모두 S 시에서 알아주는 거물들이었다. 그로 인해 임유라는 다른 사람들 입방아에 한창 오르내리고 있는 강현수와의 결별설을 일축할 수 있게 됐다.기사에는 임유라가 브랜드 모델이 됐을 때 찍었던 사진 그리고 유명 잡지 표지모델이 됐을 때 사진들도 함께 첨부되었다.임유라는 지금 확실히 잘나가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강현수가 남자친구로서 지원해 줬기에 가능했다는 걸 임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강현수와 헤어지고 나면 분명히 임유라는 더 이상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아마 헤어짐조차도 유쾌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강현수는 귀찮게 달라붙는 걸 질색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들러붙는 전 여자친구들에게 얼마나 무정한 사람이었는지 임유진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봤었다.그럼 임유라는 강현수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임유진은 임유라를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실소했다
대체... 얼마나 잔 거야!"깼어? 좀 더 잘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나 왜 안 깨웠어? 깨우지...""너무 잘 자길래 그대로 좀 더 자게 뒀어."강지혁이 답했다."윤이 보러 가기로 약속했는데..."임유진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보고 다행히 3시밖에 안 된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시간은 충분할 거야. 지금 가자."강지혁은 몸을 일으켜 옆에 걸려있던 외투를 입고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뭔가 생각났는지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역시 잠을 잔 탓에 머리는 이미 헝클어져 있었고 그녀는 머리끈을 풀고는 빠르게 다시 묶었다. 이 모든 행동이 고작 6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고 강지혁은 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원래도 그렇게 빨리 했었어?""아니, 전에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긴 했는데 감옥 생활을 하다..."임유진은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췄다. 그녀의 감옥 생활이 두 사람에게는 좋은 추억은 아니었으니까."미안해."강지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아, 아니야... 네가 날 감방에 일부러 넣은 것도 아닌데."임유진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다시 살려보려고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감옥 생활이 힘들긴 했지만, 그 대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됐어. 어떤 사람이 진정한 내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가면을 쓰고 나한테 접근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됐거든." 그게 아니었더라면 임유진은 지금까지도 독선적인 사랑과 혈육의 정에 바보처럼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강지혁은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누나는 그 가면 쓰고 접근하는 사람이 나일까 봐 두렵지는 않아?"그러자 임유진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는 피식하고 웃었다."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한테 네가 가면을 쓰고 접근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그러게, 누나 말이 맞네."강지혁은 옅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자."임유진은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했
탁유미가 이경빈 옆에 있었을 때 이씨 일가와 강씨 일가는 비즈니스적으로 왕래를 하지 않았기에 당시에는 강지혁의 얼굴을 볼 일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경빈 곁을 떠나고 나니 탁유미는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벌써 두 번이나 강지혁과 마주쳤다. 그것도 매번 임유진의 주위에서.탁유미는 강지혁이 자신에게 했던 경고를 떠올리고는 임유진이 그에게 사랑받는 일이 잘된 일인지 아닌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됐든 탁유미는 그저 임유진이 행복했으면 했다."참, 과일을 깜빡했네요. 윤이가 석류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입원하기 전 임유진은 윤이에게 석류를 꼭 사 오겠다고 약속했었기에 다급히 핸드폰을 챙기고 병실을 나서려고 했다."유진 씨, 아니에요. 장난감도 이렇게 사 왔는데 뭐 하러 다시 가요. 석류는 내가 이따 내려가서 살게요."탁유미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세웠다."괜찮아요, 어차피 근처라서 제가 금방 다녀오면 돼요. 윤이와 한 약속은 지켜야죠."임유진은 그렇게 빠르게 병실을 뛰쳐나갔다.병실에는 탁유미와 탁유미 엄마 그리고 강지혁 이렇게 세 사람이 있었다.탁유미 엄마는 어제 딸의 입에서 강지혁이 어떤 사람인지 듣고는 그가 많이 불편했는지 윤이를 돌보는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그때 탁유미가 정적을 깨고 그에게 물었다."강지혁 씨, 차라도 드릴까요?""괜찮습니다."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시선을 윤이에게로 옮겼다."저 아이가 바로 당신과 이경빈 씨 아들입니까?"강지혁의 담담한 한마디에 탁유미와 탁유미 엄마는 얼굴이 확 굳어졌고 탁유미 엄마는 손까지 덜덜 떨었다.탁유미는 잠깐 놀라긴 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물었다."이것도 역시 날 조사해서 얻은 정보인가요?""정확히 말하자면 받은 정보에서 시간을 추측했을 뿐입니다. 그리고..."강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이경빈 씨는 아직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자기에서 이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탁유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윤이는 내 아들이에요. 이경빈은 처음
그럴 리가 없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사람은 임유진일 것이다.‘그럼 유진 씨가 강지혁 씨에게 도와달라고 얘기한 걸까? 윤이를 도와달라고?’그때 임유진이 손에 석류를 한가득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이제 윤이가 깨어난 후 의사 선생님 허가만 있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됐네요."임유진은 아주 예쁘게 활짝 웃었다."유진 씨, 고마워요."탁유미는 눈시울이 빨개져서 임유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작 석류 한 봉지인데요, 뭘."임유진은 탁유미가 윤이 때문에 울컥했다고 생각해 얼른 그녀를 달래주었다."언니, 윤이 수술 성공적으로 끝났잖아요. 이제는 인공와우에 적응하는 일만 남았어요. 위험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는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예요.""네, 모든 게 다 괜찮아 질 거예요."탁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탁유미는 임유진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이 임유진이 귀인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힘든 시기에 흔쾌히 가게에서 일하도록 해줬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면 임유진이 자신의 귀인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윤이는 절대 이런 치료를 받을 수 없을 테니까.강지혁과 임유진은 이제 가 봐야 했지만 윤이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다음에 또 보러 올게요."하여 임유진은 다음을 기약하고 인사를 한 뒤 강지혁과 함께 병원 주차장으로 향했다.그녀가 막 차에 타려고 할 때 강지혁이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나 보고 웃어 봐.""뭐?"임유진은 어리둥절했다."나 보고 웃어보라고. 병실에서 웃었던 것처럼."강지혁은 항상 임유진의 살짝 쑥스러운 듯한 옅은 미소밖에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아까 그녀의 활짝 웃는 얼굴을 봤을 때 마치 햇살처럼 빛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너 앞에서 나 꽤 잘 웃는다고 생각하는데?"임유진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누나가 아까 너무 예쁘게 웃어서 다시 한번 보고 싶어."강지혁은 낮은 목소
임유진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강지혁을 쳐다봤다."왜 그렇게 봐? 누나 전에 나 데리고 재래시장도 간 거 잊었어?"강지혁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때 일이고."임유진은 ‘혁이’가 강지혁인 줄 알았으면 절대 그를 데리고 재래시장으로 가 옷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뭐가 다른데? 어차피 예전이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누나에게 ‘혁이’일 뿐인데."강지혁의 눈빛은 정말... 반칙이었다."그럼 가든가..."임유진은 그와 같이 먹자골목으로 들어섰다.대학생 때, 임유진은 친구들과 자주 여기로 왔었다. 취직하고는 발걸음이 좀 뜸해졌고 그러다 감옥에서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출소하고 나서도 생계를 유지하기에 급급해 여기 올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었고 임유진과 강지혁은 걷다가 길거리 음식들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여기는 먹거리들뿐만 아니라 액세서리 같은 작은 물품들도 팔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기에 여기는 용돈이 많지 않은 학생들이 오기에 좋은 곳이었다.임유진은 길을 걷다가 수많은 여성의 시선을 느꼈는데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역시 강지혁이었다. 확실히 그는 눈에 튀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웬만한 아이돌들 보다 잘생겼다.전에 재래시장을 같이 거닐 때의 강지혁은 앞머리가 길어 거의 눈까지 덮여 있었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넘겨 잘생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임유진은 머리끈을 파는 가게 앞에 멈춰서서 말했다."나 머리끈 사야 해."그녀가 가지고 있는 머리끈은 다 저렴한 것이었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탄성을 잃어갔다. 원래는 인터넷으로 구매할 예정이었지만 마침 가게가 눈에 보였다.강지혁이 그녀가 한 머리끈을 자세히 보니 안에 있는 하얀색 고무줄이 다 튀어나와 있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여 고르다가 결국에는 제일 저렴한 것을 고르고 거기에서 가격을 흥정하려고까지 했다.그때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떠났다."나 아직 못 샀어."임유진이 다
김재호의 말대로 강지혁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물론 아이도 너무 중요하지만 임유진이 아이보다 몇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만약 임유진이 또다시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강지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의 얼굴도 강지혁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있었고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유진아,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낼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김재호가 아닌 날 믿어줘. 제발... 부탁이야...”초조함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임유진은 마치 심장을 누군가가 난도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다시는 강지혁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그를 불안하게 하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응, 널 믿을게.”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김재호는 임유진의 말에 빈정거리며 웃었다.“역시 임유진 씨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네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겠나 보죠?”임유진은 앞으로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혁아, 울지 마. 나는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녀는 강지혁의 예쁜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눈물을 멈추게 하고 강지혁이 더 이상 불안해하고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김재호의 멱살을 스르르 놓고는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약속할게.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김재호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비아냥거렸다.“아이의 생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나 보네요. 엄마가 돼서.”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물을 어느 정도 닦아준 후
“저는 어르신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그분의 충견으로 남을 겁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질문을 바꾸지. 대체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진이가 사라진 뒤에 네가 아이를 데려온 거지? 너는 우리 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움직인 건 전부 다 노인네 지시인 건가?”강지혁이 손에 힘을 가하며 그를 압박했다.김재호는 목이 서서히 졸려오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 강지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이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당시 최면으로 봉인됐던 기억이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기억이 모두 회복됐으면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을 테니까.임유진 역시 다시 강지혁 곁으로 돌아온 걸 보면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전부 다 회복한 건 아닐 테지만 아마 사라진 그 날의 기억은 고이준을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됐을 수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그 사실을 강지혁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강지혁의 멘탈이 완전히 부서질까 봐.김재호는 강지혁의 말로 아주 많은 것을 파악했다.그는 강지혁의 최면에 직접 개입한 사람이기에 강제로 기억을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절벽에서의 일을 강지혁 스스로가 기억해낸 게 아니면 얘기조차 꺼내지 말라고 고이준에게 신신당부했던 것도 다 이유 때문이다.‘당부한 대로 그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나 보네.’“제가 무엇을 했는지 정말 알고 싶으세요?”김재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임유진은 그 말에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외쳤다.“안 돼!”그녀의 외침에 강지혁과 김재호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강지혁은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김재호는 예상했다는 듯한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널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제가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고 말 테니까.”“응.”두 사람은 어딘가 결연한 얼굴로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경호원 세 명과 중년남성 한 명이 있었다.임유진은 몇 초과량 흐르고 나서야 그 중년남성이 바로 김재호라는 것을 알아챘다. 5년이나 지나 있어 그런지 그는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주름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전과 달리 흰머리도 나고 수염도 생겼으며 못 보던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일반 시민이었다.만약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났다면 아마 김재호인 걸 인지도 못 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김재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태연하게 미소를 띄웠다.“역시 회장님 곁으로 돌아오셨네요.”임유진은 천천히 자리에 멈춰서며 답했다.“네, 돌아왔어요.”5년이라는 시간 끝에 그녀는 드디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나가봐.”강지혁의 말에 경호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방에서 나갔다.“아이는 어디 있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라면 보내드렸잖아요. 한 명은 회장님 곁으로, 그리고 또 한 명은 임유진 씨 곁으로.”“내가 어떤 아이를 얘기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유진이 배 속에 있었던 건 세쌍둥이였어. 우리한테 한 명씩 보냈으면 나머지 한 명 또한 당연히 있어야지.”“회장님, 세쌍둥이 중에 두 명이나 생존했는데 그거로는 만족이 안 되세요? 실제로 세쌍둥이 중에 세 명 다 태어나는 경우는 적어요.”김재호의 빈정거림에 임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우리 아이... 살아있는 거죠? 그렇죠?”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설령 김재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엄마로서 아이의 행방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김재호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