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량천옥이 싸울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그때 의사 선생님 사무실에 있었어요. 우리 쪽 사람들은 전부 언니 병실 앞에 있었고요.”의사 사무실은 고은지의 병실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그 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의사 선생님이 그때 우리를 떼어놨어요.”“그리고는?”“그리고 내가 량천옥의 2억을 가져왔고 지금 내 차 트렁크에 있어요.”“네가 량천옥의 2억을 갖고 왔다고? 그건 또 어떻게 된 일이야?”베준우는 정말 머리가 아팠다.지금도 상황이 복잡한데 왜 하나같이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고은영이 대답했다.“량천옥이 의사를 매수하려고 했던 2억이에요. 내가 량천옥을 쫓아내고 돈을 갖고 왔어요.”이렇게 맞고도 2억을 가져왔다니 따지고 보면 손해는 아니었다.그러나 배준우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이 욕심쟁이야.”고은영이 말했다.“난 그 돈을 탐낸 게 아니에요.”배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요. 내가 맞고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 윽 아파.”“뭐 맞고만 있지 않았다고?”배준우는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이 계집애가 정말 간이 얼마나 큰 거야?’고은영이 하소연하는 것을 들으면서 배준우는 량천옥과 어떻게 싸우게 된 건지 대충 알 수 있었다.원래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아무 중요한 존재였다. 량천옥이 주치의를 매수해 고은지를 죽이려 한 걸 알았을 때 고은영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잘못을 따진다면 고은영은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그러나 고은영은 너무 충동적이었다. 그때 자기 사람들이 옆에 없었는데도 고은영은 용감하게 뛰어들었다.지금 량천옥은 미친 상태라 몸에 흉기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미친 여자와 싸우다니.고은영이 말했다.“나도 량천옥을 많이 할퀴었어요.”배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여자들을 뭐라고 해야 해?’량천옥은 전에 고은영에게 세상의 좋은 건 뭐든지 주고 싶다고 했었다.그런데 이제는 고은영과 싸우면서 미친 짓을 버리고 있었다.
진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걱정하지 마. 나도 알고 있어.”진성택은 박경숙의 아이인 진유경을 수년 동안 키워왔고 얼마나 애지중지 진유경을 아끼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만약 진성택이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고 평가한다면 그때 이미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이다.지금 또다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진윤은 비록 진씨 그룹을 탐내지 않았지만 이 회사의 대부분은 어머니가 남긴 것이다.진성택이 그것을 진유경에게 주려고 한다면 진윤은 허락할 수 없었다.게다가 사건이 폭로된 후 김영희가 보인 태도도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진정훈의 핸드폰이 윙윙 울렸다.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진성택이야?”진정훈은 짧게 응이라고 대답한 뒤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끊어버렸다.진윤이 말했다.“주말에 와서 밥 먹어. 네 형수 요리 솜씨가 아주 좋아.”“뭐라고?”진정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 그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눈빛으로 진윤을 바라보았다.형수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진정훈은 기분이 묘했다.솔직히 말해서 진정훈은 윤설을 형수로서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강성에 아무 소문도 없었지만 그건 표면적인 것이고 뒤에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늘 침착하고 냉정하던 진윤이 사랑 문제에서 이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진윤이 말했다.“배준우도 고은영을 데리고 올 거야.”고은영이 온다는 말을 듣자마자 진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여동생이 온다면 진정훈은 당연히 갈 것이다.고은영을 떠올리니 진정훈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형 이제 모든 게 밝혀졌는데 이쯤에서 여동생한테 뭘 좀 줘야 하지 않을까?”진정훈은 이 말을 꺼내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그는 그저 이런 방식으로 진유경을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고은영을 떳떳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진윤의 생각은 진정훈과 조금 달랐다.진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여동생뿐이었다. 고은영이 진씨 가문으로 돌아오든 말
진정훈은 진성택이 회사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얼굴이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직접 회사에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분노를 억누르며 사무실에 들어가니 진성택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안경을 쓴 진성택의 모습은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지쳐 보였지만 진정훈은 이제 그런 진성택을 보고도 전혀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앞으로 다가간 진정훈은 진성택의 맞은편에 앉았다.진성택은 진정훈을 보자마자 분노의 눈빛이 일렁였다.“이제야 돌아오는 거니? 네가 이 회사를 포기한 줄 알았는데.”“포기할지 말지는 이제 제 마음이에요. 어차피 이 회사는 이미 제 것이니까요.”진정훈은 무심하게 말했다.그의 말에는 보이지 않는 경고와 강경한 태도가 담겨 있었다.진정훈은 진성택의 마음에서 진유경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에 지금은 더 이상 그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경고를 진성택에게 날렸다.그러나 이미 진정훈을 완전히 실망하게 한 진씨 가문은 이 순간에도 더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진성택은 고은영에 대한 얘기를 바로 꺼내지 않고 입을 열자마자 진유경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나와 네 할머니는 유경이를 타운 하우스에 보내기로 했다.”타운 하우스는 진성택이 소유한 별장으로 강성에서 부유층이 사는 유명한 곳이었다.진씨 가문을 떠나 타운 하우스로 이사한다는 것은 여전히 진유경을 진씨 가문의 보호 아래 두겠다는 뜻이었다.진정훈은 비웃음을 날리더니 말없이 진성택을 바라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분명 진성택이 이것을 조건으로 다른 뭔가를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걸 진정훈은 알고 있었다.역시나 진정훈의 예상이 맞았다.다음 순간 진성택이 입을 열었다.“회사의 지분 1퍼센트를 유경이에게 주려고 해.”진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날카롭게 굳었다.진성택은 진정훈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했다. 진정훈은 진성택이 어떻게 지분 1퍼센트를 얘기할 용기가 있는지 궁금했다.진정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진성택은 이어서 말했다.“앞으로 유경이는 다시 진씨 가문으로 돌아
진성택은 기억하지 못했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진성택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중심 거리에 있는 30개의 가게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두 채의 별장과 한 채의 아파트도 잃어버린 아이를 위해 남겨놨자는 사실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진성택은 죄책감이 들어 눈을 감으며 말했다.“미안하다. 요즘 내가 병 때문에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그래.”이는 진성택의 병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모든 걸 기억했지만 요즘은 많은 기억들이 흐릿해졌다.하지만 진성택의 미안하다는 말과 병 때문에 그렇다는 말은 진정훈의 태도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못했다.오히려 진정훈운 진성택을 더욱 비웃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말 정신이 없으신가 봐요. 아까 타운 하우스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다른 곳이 있다는 걸 기억하셨어요? 펜트 팰리스는요? 내셔널 타운은요?”그렇게 많은 재산 중에 왜 하필 어머니가 여동생에게 남긴 것을 굳이 진유경에게 주려는 것일까?이 순간 진정훈은 진성택에 대한 실망을 넘어 관계를 끊고 싶을 정도였다.진성택은 다급하게 말했다.“안 줘. 다 안 줄 거야.”잃어버린 아이를 위해 남겨진 것들이니 다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 말에도 진정훈의 마음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진정훈은 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첫째 제가 말한 진유경을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겠다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시길 바라요. 둘째 회사의 지분은 꿈도 꾸지 마세요. 진유경이 거지처럼 떠돌아다니는 한이 있어도 우리 진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이번에 진정훈은 진유경에게 완전히 냉정해졌다.진성택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떨며 말했다.“그래도 넌 유경이를 오랫동안 여동생으로 대해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정할 수 있는 거야?”“아버지의 역겨움이 절 이렇게 무정하게 만들었어요.”진정훈이 정말로 냉정해진 이유는 단지 진유경이 유전자 검사 보고서를 조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더 중요한 것은 진유경이 박경숙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을
“네.”김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훈이 김현지에 관해 묻자 김현성은 자기도 모르게 눈꺼풀이 떨렸다.이어서 진정훈이 말했다.“여자아이는 그래도 자립해야 해. 너무 응석을 받아주지 마.”진정훈은 고은영을 생각하며 말했다.고은영은 배준우라는 변태 밑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 변태를 성공적으로 사로잡기까지 했다.맞다. 진정훈의 눈에 매부는 완전히 변태였다.진정훈은 지금 젊은 나이에 늙은이처럼 굴고 있었다.최근에 진정훈은 고은영이 배준우와 함께 있었던 일에 대해 많이 알아보았다. 배준우가 예전에 고은영을 자주 괴롭히고 겁을 주어 많이 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진정훈은 화가 치밀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은 지금 결혼까지 했다.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배준우는 절대 진정훈의 매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김현성은 진정훈의 말을 듣고 온몸이 굳어버렸다.“여자아이들은 그래도 많이 아껴줘야 해요. 그래야 나쁜 남자에게 속지 않거든요.”“그 말도 맞아.”김현성의 말을 들은 진정훈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순간 진정훈은 고은영에 대해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어린 시절 너무 힘든 환경에서 자랐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또 배준우의 옆에서 지내고 있었다.고은영은 다른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배준우에게 쉽게 마음이 휘둘렸고 진정한 좋은 남자가 어떤 건지 몰랐다.살짝만 달래줘도 고은영은 속아 넘어갔다. 더 화나는 건 심지어 아이까지 낳았다는 것이다.진정훈이 왜 김현지를 언급했는지 김현성에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진정훈은 계속 이어서 말했다.“김현지한테 시간 되면 날 찾아오라고 해.”이 말에 김현성은 눈꺼풀이 다시 한번 떨렸다.다음 순간 진정훈은 다시 말했다.“아니 오게 하지 말고 여자가 좋아할 만한 물건 목록을 적어서 나한테 보내라고 해.”‘여자들이 좋아하는 목록? 그러니까 자기 여동생한테 선물을 사주고 싶었던 거야?’맞다. 진정훈은 지금 고은영에게 모든 것을 다 사주고 싶었지만 뭘 사줘야 할지 몰랐다.비록 전에 진정훈은 진유경에게 많은
입사 2년 차 고은영은 동영그룹 비서실 직원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고 성실하게 일해왔다.그런데 어젯밤, 그녀는 거대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고은영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잡고 살짝 뒤집었다. 알몸 상태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남자의 넥타이를 잡고 방탕한 여자처럼 유혹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아직 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헉!”얕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그 장면이 꿈이 아니라니! 어떻게 직속 상사를 상대로 그런 미친 짓을 벌인 거지?배준우, 동영그룹 대표이자 그녀의 직속 상사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너무도 큰 충격에 고은영은 자신도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재빨리 일어나서 옷부터 입었다.그리고 배준우가 깨기 전에 이 끔찍한 범죄현장에서 도망쳤다.떨리는 다리로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애써 어젯밤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그런데 화장 중이던 안지영이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어제 대표님 방까지 모셔다드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전화해도 안 받던데 어떻게 된 거야?”고은영은 가슴이 철렁해서 말까지 더듬었다.“나? 바람 좀 쐬고 좀 늦게 돌아왔는데 너 자고 있길래 조용히 들어왔어. 아침에 대표님 호출이 있어서 나갔다 이제 들어온 거야!”조금 긴장했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대답이었다.대표실 직속 비서로서 수시로 호출을 받는 일도 잦았고 지금은 출장 중이라 밤에 바람 좀 쐰다고 나갔다 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안지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화장에 집중했다.무사히 넘어갔다는 생각에 고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로 가서 씻고 출근준비를 했다.두 사람은 식당으로 가서 대충 아침을 먹고 회의실로 바로 직행했다.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은 고은영은 평소의 진지하고 성실한 직원으로 돌아왔다.가방에서 핸드폰 진동음이 들리고 발신자에 찍힌 “대표님”이라는 글자를 확인했을 때,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지금 당
고은영은 어떤 마음으로 휴게실을 빠져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전시회장으로 돌아왔다.그녀를 본 안지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파?”고은영은 중학교 때부터 자신과 함께한 친구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그 모습을 본 안지영은 급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급히 그녀를 끌고 화장실로 가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대표님한테 혼났어?”안에서 문을 잠그자 고은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안지영은 다급히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대표님 너 이런 모습 보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동영그룹 배준우 대표는 매사에 철저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다.아무리 예쁜 여직원이라도 일하는 시간에 울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절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과거에 어떤 여직원이 실연 당하고 회사에 와서 몰래 눈물을 흘린 적 있었는데 배 대표는 대차게 그 부서 전체에 징계를 내렸다.여자라서 절대 봐주는 법이 없는 배준우였다.고은영은 숨 넘어갈 듯이 흐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아, 나 이대로 퇴사할지도 몰라! 하지만 난 강성을 떠나기 싫어!”“아니,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안지영은 앞뒤 잘라먹은 그녀의 말에 조바심이 났다.“내가… 어젯밤에 대표님을… 추행했어!”안지영은 순간 온몸이 굳었다.공기마저 무거워지고 화장실 안에는 고은영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안지영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도저히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어제 대표님 방에 밤새 있었다고!”고은영이 말했다.다시 정적이 찾아왔다.안지영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그러니까 네가, 대표님이랑 억지로 잠자리를 가졌다는 거야?”이게 사실이라면 커다란 재앙이었다.과거 배준우 한번 꼬셔보겠다고 그의 방에 숨어들었던 여자들은 그 결과가 전부 좋지 못했다.애를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만큼 고요했다. 고은영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었지만 속은 어지러웠다.배준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힐끗 훑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 것 같다라는 식의 대답 내가 싫어하는 거 알 텐데?”고은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확실하지 않은 대답을 가장 싫어하는 배준우였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어제 제가 대표님을 방까지 모신 뒤로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그녀는 아까보다 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고은영에게는 1분이 1년과 같은 고역의 시간이었다.하지만 이걸 이겨내야 했다.만약 배준우에게 거짓말을 들킨다면 그녀만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니라 안지영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겨우 강성에서 자리를 잡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은영의 등 뒤가 축축해질 때쯤 배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어.”고은영은 스르륵 눈을 감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난 건가?“가서 해상그룹 입찰 방안 계획안 좀 가져와 봐.”배준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영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그 뒤로 한달 간 긴 출장이 이어지는 동안 고은영은 최대한 배준우와 단독으로 접촉하는 상황을 피했다.한달 뒤, 긴 출장을 끝낸 그들은 강성으로 돌아왔다.관례대로 고은영에게는 이틀의 휴가가 주어졌다. 이날, 배준우는 긴급회의가 있어 회사로 향했다.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태웅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대표님.”나태웅을 본 배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고 비서는?”“한달 간 출장을 다녀왔으니 당연히 휴가를 줬죠. 고 비서도 연애해야죠.”배준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지만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나태웅은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한편, 동영그룹 직원 기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