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영은 배준우가 화내고 있다는 말에 자신이 또 뭘 잘못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녀는 서둘러 하던 일을 멈췄다.앞을 보니 나태웅은 이미 회의실로 몸을 돌려 있었고, 고은영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대표님이 왜 화가 나신 거예요?”나태웅은 걸음을 멈추고 고은영을 쳐다봤다.“정말 몰라서 물어?”나태웅의 심각한 얼굴에 고은영도 입술이 떨렸다.상황을 보니, 배준우가 단단히 화난듯했다.고은영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나태웅을 따라갔다.회의실 문이 열리자, 안의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바닥엔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고, 정유비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걸 줍고 있었다.배준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살기 가득한 눈빛에 고은영은 심장이 떨렸다."대, 대표님.”화가 많이 난 모습이었다. 또 뭐가 뜻대로 되지 않는 건지.나태웅은 고개를 돌려 고은영은 보며 말했다.“대표님 쪽으로 가!”“네!”고은영은 재빨리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배준우 곁으로 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왜 화나셨어요?”심장이 떨리다 못해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도대체 성질이 왜 이 모양인지,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고 있으니!배준우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 그의 모습에 고은영은 더욱 긴장됐다.이때 나태웅이 서류를 줍고 있는 정유비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유비 씨는 나가있어.”“네, 알겠습니다.”정유비는 온몸을 떨며 고은영을 쳐다보았다. 바닥에서 주운 서류를 고은영의 손에 쥐여주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서둘러 회의실을 뛰쳐나갔다.고은영이 회의실에 들어선 순간 배준우의 살기도 조금 사그라들었다.나태웅이 배준우에게 물었다.“회의 시작할까요?”“그래.”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도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배준우의 뒷자리에 앉았다.이전에 서류를 정리할 때는 자주 실수를 저질렀지만 지금 분위기를 봐서는 절대 오차가 생겨서는 안 되는 상황이니 아주 꼼꼼히 정리했다.그
정유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뻔뻔하게 말했다.그녀는 배준우에게 고은영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 했다.고작 고은영 대신 회의에 들어갔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나태웅은 차갑게 그녀를 흘겨보았다.“정말 그것 때문이야?”날카로운 질문이다!순간 정유비는 멈칫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의 진짜 목적은 배준우의 비서 일을 완전히 자기 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은영이 없었을 때는 분명히 배준우도 그녀의 업무능력에 만족했는데 이번에는 대체 왜....?그녀는 고은영의 업무능력이 별로라고 생각했기에 배준우는 왜 그녀를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정유비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나태웅은 코웃음을 쳤다.“난 유비 씨가 연화 씨보다는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나 실장님!”나태웅의 말에 정유비는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태웅을 쳐다보고 있었다.나태웅이 이어서 말했다.“만약 다음에도 이런 상황이 있으면 그땐 더 이상 동영그룹에 있을 수 없을 거야. 알겠지?”나태웅의 말투에는 한기가 감돌았다.이미 불만이 가득했던 정유비는 나태웅의 말에 더욱 심장이 떨렸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마음으로는 납득이 안갔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하는 수 밖에 없었다.그녀는 고은영의 존재를 과소평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은영과 배준우의 사이가 어쩌면 단순히 계약 관계만은 아닌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가봐.”나태웅은 정유비가 멍청하다 생각했다.정유비는 김연화에 비해 성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경쟁자였던 김연화가 해고 된 후부터 계속해서 배준우의 옆에 있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배준우가 전에 말했듯 남자 비서를 두는 게 더 나을듯싶다. 여비서가 남자 비서보다 더 섬세하다고 생각해서 여비서를 뽑았는데, 그 섬세함이 너무 과도했다.배준우가 피곤하다고 느낄 정도의 섬세함이었다.정유비는 창백한 얼굴로 나태웅의 사무실에서 나왔다.그녀는
고은영은 배준우의 차가운 말투에 억울한듯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그녀가 말한 건 다 사실인데!그의 개인 휴게실은 고은영 외에 다른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니 억울할 수 밖에 없었다.전에는 괜찮았는데 이제 와서 문제가 되다니.생각할수록 억울했다.배준우의 말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내가 보기에 넌 그러고도 남을 애야.”고은영이 억울해하는 모습에 배준우는 코웃음을 쳤다.하지마 고은영은 감히 뭐라고 반박할 용기가 없었다.배준우가 더 화낼까 두려웠다.가뜩이나 화나 있는 데다 거기에 또 반박하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뻔한 일이다.배준우는 여전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네 신분을 똑바로 기억해!”자신의 신분을 기억하라고?뭔가를 암시하는 말인 것 같았다.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생겨났다.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눈시울을 붉히며 배준우를 쳐다보았다.“제가 대표님 계약 아내라는 걸 절대 잊지 않을게요!”배준우는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대화를 끝내려 할 때, 고은영이 이런 말을 하자배준우는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뭐라고?”“저도 알아요. 저는 대표님한테 돈을 받고 아내 행세를 해야 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걸. 대표님 일이 다 끝나면 바로 이혼해야 한다는 걸.”“............”“항상 기억하고 있다고요. 제가 모욕감을 느끼도록 저한테 계속 안 알려주셔도 돼요.”그냥 돈을 받고 일하는 것 뿐인데, 이런 모욕감까지 느끼고 싶지 않았다.배준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갑자기 강경하게 말하는 고은영의 태도에 배준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젠 진짜로 말대꾸를 하네!예전엔 감히 그럴 엄두도 못 냈는데 이젠 많이 용감해졌다.이젠 자기 할말은 다하네!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배준우가 물었다.“왜? 나한테 좀 혼나니까 억울해?”배준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화가 난 아내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리고 분위기 속에 약간의 설렘도 섞
그렇기에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그녀가 숨이 찰 정도로 울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커다란 품속이 그녀를 감쌌다.고은영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빼려고 애썼다. 그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만히 있어.”그의 부드럽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가 그녀를 온전히 감싸고 있었다.익숙하면서도 낯선 그의 향기에 고은영은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쉬었다.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고의 손등에 떨어졌다.그는 여태껏 사람의 눈물에도 온기가 있다는 걸 몰랐다. 지금 그의 손등에 떨어진 그녀의 눈물에 처음으로 그걸 깨달았다.그리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을 느꼈다.그가 탄식하며 말했다.“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이렇게 울어.”배준우의 말에 고은영의 억울함이 밀려왔다.‘꼭 출세하고, 꼭 잘 살아.“할머니가 하셨던 이 말 때문에 열심히 살았는데.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그렇게 살았는데!그녀는 사람은 돈만 많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래서 강성에 자기 집 하나 장만하기 위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몇 년간 그렇게 살아온 걸 생각하니 고은영은 억울함이 밀려왔다.“흑흑… ”배준우의 위로에 고은영의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북받쳤다.배준우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그녀의 이런 약한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래, 그만 울어, 응?”이때 나태웅은 서류를 가지러 배준우 사무실로 찾아왔지만, 배준우를 찾지 못해 급해하고 있었다.그러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휴게실 문을 열었는데, 고은영을 감싸 안고 있는 배준우의 모습을 보았다.그가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고은영을 달래고 있는 모습에 나태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는 다시 조용히 휴게실 문을 닫았다.“후!”나태웅은 자신의 가슴팍을 탁탁 치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배준우는 여자가 우는 걸 혐오하는데, 지금 울고 있는 여자를 달래고 있을 리가 없다고, 해고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나태웅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지만 문을 다시 열 용기가 없었다.한편 휴
나태웅은 이런 배준우의 태도가 놀라웠다.그도 방금 자신이 본 그 장면이 분명 자신의 착각이라고, 배준우는 절대 누구를 위로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은영은 억울한 듯한 목소리도 말했다.“대표님..““애교부리면 20만원이야.”“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고은영은 멍해졌다.이러다간 이번 달 월급을 다 벌금으로 날릴 판이었다.배준우는 억울하지만, 감히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코웃음 쳤다.“앞으로 또 울거야?”“안 울게요!”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운 대가가 이렇게 큰데 감히 어떻게 또 울겠는가.나태웅은 점점 부드러워지는 배준우의 말투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도대체 벌금을 시키는 건지 아니면 연인 사이에 서로 티격태격하는 건지?“지금 바로 일하러 갈게요.”배준우가 아무 말 없자 고은영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계속 얘기하다간 월급을 다 날릴까 봐 무서웠다.사무실에는 나태웅과 배준우 두 사람만 남았다.“진짜로 벌금시킬거야?”“그것 때문에 울면 네가 달랠 거야?”나태웅은 말문이 막혔다.“......”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근데 그걸로 겁줬잖아?”이젠 그녀가 우는 걸 두려워하다니. 단순히 계약된 사이가 아니라 생각했다.나태웅은 배준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주 오랫동안, 나태웅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배준우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왜?”“너 진짜 고은영 좋아하는 거야?”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방금 고은영에 대한 배준우의 남다른 태도를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네가 보기엔 어떤데?”배준우가 되물었다.그는 나태웅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애매모호함에 그를 잘 알고 있던 나태웅도 지금은 그가 도대체 어떤 생각인지 알지 못했다.나태웅이 다시 물었다.“그럼, 그날 밤 남성사건 여자는 계속 찾을 거야?”그는 일부러 그날 밤 얘기를 꺼냈다.배준우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찾았
배준우는 잠시 멈칫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태웅을 쳐다보았다.나태웅이 이어서 말했다.“안지영 아니면 고은영이야.”두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만약 정말로 안지영의 짓이라면, 그녀 자신 아니면 고은영이 뭔가를 숨기기 위해 한 짓이 틀림없었다.나태웅의 말을 들으며 배준우도 이 점에 대해 생각했다.순간 배준우의 눈에 한기가 스쳤다.“안지영을 집중적으로 조사해!”배준우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지영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라고 말은 했지만, 그는 사실 안지영이 아니길 바랐다.만약 정말 두 사람 중에 범인이 있다면, 배준우는 오히려 고은영이길 바랐다.나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지금, 이 시각 안지영과 고은영은 나태웅이 자신들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근무 시간에 몰래 만났다.안지영은 지금 출근하지 않는다.그녀는 사직한 후 한 달간 휴가 시간을 가졌다.“아저씨가 어떻게 허락하셨어?”고은영이 의아한 듯 물었다.안진섭은 그동안 안지영이 회사를 그만두는 걸 견결히 반대해 왔다.그런데, 이번엔 대체 왜 허락하셨는지! 안지영이 대답했다.“허락 안 해 주면 나 죽는다고 협박했어.”“설마, 아니지...?”고은영은 안지영의 말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안지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협박하는 건 조보은 같은 사람이나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안지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에이, 나도 어쩔 수 없잖아.”“그럼 나 실장님이 너한테 3일 시간을 주겠다고 한 건? 너...?”“당연히 안 만났지. 사직한 마당에 내가 왜 만나!”안지영은 당당히 말은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사직했다고 그녀가 한 짓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으니 말이다.만약 나태웅이 결정적 증거를 손에 쥐게 되면, 사직했든 안 했든 잘못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단지 회사에 있으면 숨이 막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을 친 거다.고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나 실장님이 더 의심하지 않을까?”
두 사람은 또 한참을 의논했다. 안지영은 이미 고은영에게 병원을 찾아주었고 마침 의사는 안지영의 친구였다.지금 그녀의 신분은 동영그룹의 안주인이자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다. 그러니 뭘 하든 신중해야 한다.만약 외부에 알려지면 그녀 본인은 물론 배준우에게도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고은영은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지영아, 너 진짜 너무 최고야.”안지영의 모든 준비에 고은영은 고맙기 그지 없었다.그런데 안지영은 오히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아니면 누가 너 챙겨줄 것 같애?”이건 사실이였다.비록 고은영도 엄마가 있지만 그 엄마라는 작자는 차라리 없는 쪽이 훨씬 낫다.두 사람은 오래도록 수다를 떨었고, 배준우의 연락을 받은 뒤에야 고은영은 안지영과 헤어졌다.안지영은 고은영에게 내일 점심 병원에 가야하니 핑계를 미리 준비하라고 했다.두 사람이 카페를 나서는 순간, 옆 테이블의 여자가 푹 눌러 쓴 모자를 벗었다.이미월은 창백한 얼굴로 고은영과 안지영의 대화를 되뇌였고 그녀의 눈가에는 한기가 스쳤다.‘고은영 이 천박한 년...... 대체 어떻게 조사했던 거지? 감히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준우와 결혼하다니? 정말 겁도 없구나?’고은영은 다급히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배준우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쳤다.“대표님~”아마 방금 안지영과의 대화로 인해 배준우를 보는 순간 고은영은 괜히 마음이 켕겼다.배준우는 싸늘하게 그녀를 노려보더니 시선을 점점 아래로 향했다.결국 그의 시선은 그녀의 아랫배에서 멈췄다.그 예리한 눈빛은 당장이라도 고은영을 베어버릴 것 같았다. 고은영은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그녀는 다급히 아랫배를 감싸며 말했다.“대, 대표님!”배준우가 싸늘하게 웃었다.“어디 다녀왔어?”고은영이 말했다.“화장실이요!”그녀는 감히 안지영을 만났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역시 나태웅의 말처럼 두 여자는 수시로 만남을 가졌다.배준우는 어쩌면 이 두 여인에게 나쁜 속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
두 사람이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그때, 갑자기 고은영의 휴대폰이 울렸다.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지만 고은영에게는 일종의 구원이었기에 바로 휴대폰으로 화제를 돌렸다.“저, 전화 좀 받을게요.”배준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은영은 부리나케 휴대폰을 들고 사무실에서 나왔다.배준우는 고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겁도 없네......’비록 나태웅에게 빠른 시일 내에 안지영을 조사하라고 시켰지만, 사실 배준우는 이미 대략 정황을 확신하고 있었다.고은영은 다급히 사무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은영 씨.”전화기 저편에서 육명호의 촉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에 고은영은 깜짝 놀랐다. 비록 뭐가 두려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혹시 그날 밤 북성에서 육명호와 스킨십이 아닌 스킨십을 했을 때, 배준우가 화를 내서일까?하여 육명호만 떠올려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비록 두 회사의 협력은 실패했지만 한 때는 고객이었으니 고은영은 깍듯이 인사했다.“육 대표님, 안녕하세요.”“나 지금 동영그룹 입구야. 내려올래, 아니면 내가 올라갈까?”육시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분명히 고은영의 의견을 묻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은 억압도 들어있었다.고은영이 말했다.“둘 다 싫은데요?”육명호 때문에 직원 수칙도 외웠는데 또 회사로 찾아왔다고?어떤 의미로 왔든 모두 그녀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낼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내려가 육명호를 만나는 것도 고은영은 두려웠다.배준우는 아주 무서운 상사다. 직원 수칙에는 분명 여직원은 사적으로 고객을 만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게다가 그녀는 마케팅 부문이 아니라 육명호와 만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또, 마케팅 부문의 직원이라도 반드시 회사의 허가를 받아야 고객과 만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고은영이 육명호와 만나려면 반드시 배준우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배준우에게 육명호와의 만남을 허락받는다? 차라리 지옥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안 돼.
전화를 끊은 진윤이 고은영을 보면서 물었다.“지금은 좀 속이 풀렸어?”“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한 거예요?”“응.”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은 약간 감동하긴 했지만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고은영의 곁에 무조건적인 자기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도움을 거절할 것이었지만 이번 일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지금 해외에서 난리가 났어. 이 시점에 나태현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도 좋지.”량천옥도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량천옥이 나태현과 싸우고 있는 건 고은지 때문이었다.그러니 지금 진윤이나 배준우가 나태현의 시선을 자꾸만 국내로 돌리게 해서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건 량천옥에게 좋은 일이다.“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진윤이 고은영에게 얘기해 주었다.고은영은 진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나태현은 해외에 있고, 나태웅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나태범이 움직일 것이다. 나태범 세대가 싸운다면 젊은 세대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고은영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씨 가문보다 더욱 위태로운 건 우리 언니니까요.”희주가 죽었다.그걸 떠올리면 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갈라내고 싶었다.진윤은 고은영 눈에 비친 슬픔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희주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눈으로 본 것도 거짓일 수 있는데, 귀로 들은 것은 오죽하겠냐는 말이었다.진윤은 제삼자로서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딱 짚어 말할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그 소식이 가짜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고희주를 불쌍하게 여겼다. 조씨 가문 사람들은 희주가 조영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
‘아까 왜 돈이 없다는 얘기를 해서는...’진윤은 고은영의 손을 잡고 쇼핑을 계속했다.점심쯤이 되자 진윤은 지친 고은영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했다.테이블 앞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보면서 고은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요?”“안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진윤이 대답했다.진윤은 진정훈이 왜 그때 그렇게 심하게 날뛰었는지 이해가 갔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먼저 조사한 사람이다.그래서 고은영의 아픔을 알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온 세상의 좋은 것들을 고은영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그러니 고은영의 몫이 진유경에게로 넘어간 걸 알고 미쳐버린 것이다.지금의 진윤도 마찬가지였다.“이거 먹어.”진윤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썰어서 고은영의 그릇에 담아주었다.“고마워요, 오빠도 얼른 먹어요.”“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우리 아내가 또 요리를 잘하거든.”“그런데 지금 임신한 거 아니에요? 저까지 가면 민폐죠.”“그래도 요즘 매일 요리하고 있어.”“네?”고은영이 깜짝 놀랐다.“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은영은 임신했을 때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원하는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하긴.게다가 임산부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잘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윤설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쁜 건 아니었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럼 최대한 덜 힘들게 옆에서 보살펴줘요.”진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그건 나태현이 건 전화였다.“나태현이야.”“계약 해지 때문에 전화한 거겠죠?”고은영이 물었다.아까 차에서 진윤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나씨 가문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배준우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니 나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진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 지금
진호영이 사람들 앞에서 진유경, 김영희와 싸울 줄은 전혀 몰랐다.진유경과 김영희는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었다.그 시각.진윤은 고은영을 데리고 쇼핑하러 다니고 있었다.김영희와 진유경은 진정훈과 진윤이 장례식 준비도 돕지 않고 서로 재산을 빼앗느라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 진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중이었다.진성택이 진유경에게 남겨준 물건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진윤이 지금 고은영에게 쓰는 돈이 더욱 많을 것이다.“오빠,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에요?”명품을 너무 많이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기다란 영수증 위의 숫자를 본 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배준우와 결혼한 후 돈이 모자랐던 적은 없지만 돈을 이렇게 많이 쓴 적도 거의 없었다.진윤은 경호원을 데리고 왔다. 네 명의 경호원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부는 란완 리조트로 배송시켰다.“괜찮아. 많이 사. 우리 아내 것도 골라줘야지.”진윤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오빠는 정말 좋은 남자 같아요.”자세히 생각해보니 배준우는 직접 무언가를 사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란완 리조트로 가져오게 했던 것 같다.그리고 고은영은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니 직접 사는 편이 많았다.하지만 진윤은 쇼핑하면서도 자기 아내를 생각한다.진윤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배준우도 좋은 남자야. 그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거야.”“그 사람이 전에 얼마나 나빴는지 몰라서 그래요.”진윤이 배준우를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자 고은영이 입을 비죽거리면서 대답했다.배준우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좋은 남자라는 말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그때의 배준우는 정말... 악랄한...고은영은 그때 유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고은영은 또 나태웅을 떠올렸다.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태웅과 배준우가 같이 고은영을 위협했으니까 말이다.고은영은 나태웅이 안지영을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