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구승훈이 그날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쪽에서 송유라가 계속 그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그는 밤에 다시 돌아왔다.“구 대표님, 돌아오셨어요?”도우미는 구승훈에게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침묵한 뒤 다시 물었다.“좀 어때요? 밥은 먹었어요?”“네, 아가씨께서 조금이라도 드시긴 했습니다.”구승훈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침실 문을 열었다.방안에는 강하리가 손에 영어 원본 책을 들고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그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마침 구승훈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구승훈은 조용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뺏었다.“너 지금 책 읽으면 안 돼. 요즘에는 보지 마.”강하리는 잠시 말이 없더니 대답했다.“알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고 여전히 그에게 무관심과 거리감을 보여줬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더니 잠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온 뒤 그는 서재로 향했다.잠시 뒤 그는 한 서류를 갖고 들어왔다.“읽어 보고 괜찮으면 사인해.”강하리는 서류를 살펴보니 재산 양도 계약서였다. 구승훈 명의 아래에 있는 별장 중에 하나를 그녀의 명의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서류를 들고 있는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적어?”강하리는 고개를 들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충분해요.”충분하다 못해 넘친다.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아이로 몇십억짜리 별장을 바꿔준다는 데 어떻게 감히 적다고 할 수 있을까?구승훈은 감정도 없는 냉혈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거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강하리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웃었다.구승훈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바라보았지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강하리,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마. 보기 힘들어.”그러나 강하리 얼굴에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일찍 자. 난
구승훈이 물었었다.“왜 또 단 음식을 만드는 거야?”그 당시에 그녀는 아직 그에게 기대를 가득 품고 있었다.그래서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항상 기대하며 대답했었다.“내가 단 걸 좋아해요.”하지만 그다음에도 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단 음식이 놓여 있으면 또 물었었다.그 뒤로는 강하리는 단 음식을 하지 않았고 새로운 요리를 배워 전부 구승훈의 입맛에 맞게 밥을 차렸다.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가 물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쳐다보았다.“좋아하면 말해야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아.”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무리 표현한다고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소용이 있었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먹는 것에 집중했다. 구승훈도 더 말하지 않았다. 방금 한 말도 그저 무심코 한 말인 것 같았다.밥을 다 먹고 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네 자리는 임시로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 한 달 정도 휴가처리 해줄 테니까 건강 잘 회복한 뒤에 출근해.”강하리는 침묵하다가 말했다.“회사 그만두고 싶어요.”그녀는 정말로 이런 식으로 계속 지내고 싶지 않았다.지금은 계약 때문에 바로 떠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 남자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게다가 만약 그녀가 구승훈을 떠날 운명이라면 그녀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구승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왜?”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강정을 숨겼다.“이유는 없어요. 단지 계속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구승훈은 의미심장하게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이 너무 겸손하네. 네 능력은 나도 인정하는데.”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전에는 그녀에게 일을 못 하겠으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만두겠다고 하니 또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구승
구승훈의 뒤에 있는 법무팀이 얼마나 강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만약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겠다고 하면 아마도 법무팀에서는 그녀를 뼈까지 잘근잘근 밟아줄 수도 있었다.강하리는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승훈 씨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그녀는 구승훈이 도대체 왜 자기를 옆에 두려고 하는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테이블 앞에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다른 사람이 날 배신하는 걸 내가 가장 싫어한다는 거 강 부장 잊었어?”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연히 잊지 않았다. 구승훈 이 남자가 얼마나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는 다른 사람이 배신하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강제로 그녀를 머물게 했다. 이제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까지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했다.이제야 이유를 이해한 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네. 이해했어요.”“강 부장이 이해했다니 다행이야.”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라 와서 더 먹어.”강하리는 입맛이 없었지만 이 남자가 얘기한 모든 것은 거절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테이블에 앉아 억지로 앞에 놓인 수프를 더 먹었다.구승훈은 옆에 앉아서 그녀가 다 먹을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만약 휴가가 짧다고 느껴지면 더 연장해 줄게. 푹 쉬어. 다른 일들은 이후에 다시 얘기하자.”강하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그녀는 어떻게 되든 다 상관없다고 느껴졌다.구승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 팬에 아버지는 내가 처벌받을 수 있게 조치할게.”강하리가 말했다.“알아서 해요.”구승훈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이내 떠날 줄 알았다. 예상외로 그는 전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강하리는 그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출근 안 해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계약서에 사인은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뜨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입술을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승훈 오빠.”구승훈은 입구로 걸어갔다.“여긴 어떻게 왔어?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쩌려고?”목소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워졌다.아무리 많이 들어도 강하리는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졌다.“난 친구 병문안도 오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은 오빠 보러 온 게 아니라 강 부장님 만나러 온 거예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강 부장님, 괜찮아요? 어제 돌아가서 생각해 봤는데 그래도 정식으로 부장님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초대도 없이 불쑥 왔어요. 혹시 기분 나쁜 건 아니죠?”강하리는 비웃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송유라의 가식에 맞장구쳐주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사과할 거면 바로 사과해요. 이렇게 거창한 말로 힘 빼지 말고요.”송유라는 순간 화가 났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는 바로 사과했다.“강 부장님, 미안해요. 내 팬이 철이 없어서 부장님을 다치게 했어요. 내가 이렇게 팬을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부장님이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조금 어두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그것이 경고임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구승훈의 돈을 받았기에 그녀는 이 일로 더 이상 송유라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그래요. 사과받을 테니까. 이제 떠나줄래요?”송유라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강 부장님, 내 팬도 용서해 줄래요?’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송유라가 목적 없이 이렇게 집까지 찾아와 사과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나 목적은 이것이었다.그녀는 송유라를 바라보았다.“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네요. 송유라 씨는 좋은 사람이 되고 오히려 피해자인 제가 이런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게 맞는 건가요?”송유라의 미간도 순간 찌푸려졌다.“강 부장님, 손해 배상은 원하시는 만큼 해드릴게요. 내
안현우는 구승훈이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흥미롭게 구승훈과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승훈아, 너 설마 이 여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송유라는 이미 눈가가 살짝 붉어진 채 불쌍한 표정을 하고서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은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네가 오해한 거야.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그는 이 말을 끝으로 이 주제를 매듭지어버렸다. 그런 다음 송유라를 바라보았다.“팔에 상처는 어때?”송유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화가 난 듯 구승훈을 째려보았다.“날 관심하긴 하는 거예요?”구승훈은 기분이 복잡했다.강하리의 창백한 얼굴이 그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송유라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조금 짜증이 났다.“내가 언제 널 관심하지 않았어?”송유라는 멈칫했다. 구승훈이 이런 말투로 그녀에게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난 오빠가 날 좀 더 걱정해 줬으면 좋겠어요. 다른 뜻은 없어요.”그녀는 평소에 애교가 많은 편이었다. 구승훈도 그런 그녀를 귀여워했다.사실 이런 말은 그녀에게는 평소에 자주 하는 애교 섞인 말일 뿐이었지만 구승훈이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구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송유라를 바라보며 그제야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다쳤으면 집에서 잘 쉬고 있어.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알겠어요. 다시는 이러지 않을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조금 있다가 나하고 드레싱 바꾸러 같이 가면 안 돼요? 드레싱 바꿀 때 나 정말 무섭단 말이에요. 이번에는 나하고 같이 가줘요. 네?”구승훈은 다친 그녀의 팔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송유라의 눈물은 순식간에 미소로 바뀌었다. 안현우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강하리는 안현우의 시선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피했다.그녀는 더 이
송유라의 말은 강하리의 가장 아픈 곳을 콕콕 찔렀다.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아이를 지켰다고 해도 구승훈이 낳을 수 있게 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송유라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지 강하리의 귓가에 속삭였다.“강하리 씨,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은 그저 잠자리 파트너일 뿐이에요. 그런데 임신했다고 정식으로 여자 친구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그녀는 비웃음을 날렸다.“한 번 생각해 봐요. 임신한 게 나라면 승훈 오빠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만약 송유라였다면?'강하리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구승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와 그녀를 지켰을 것이다.강하리는 손을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움켜쥐었고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송유라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송유라 씨 힘내요. 돌아온 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승훈 씨가 아직 당신하고 화해할 마음이 없는 걸 보면 임신하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송유라는 그녀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강하리의 한마디가 송유라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소유라가 돌아온 지도 이미 긴 시간이 지났는데 구승훈은 아직도 그녀와 화해하려는 뜻이 하나도 없었다.지난번 구승훈은 비록 두 사람이 전에 사귀었던 사이였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지만 그 뒤로 인터넷에서 어떠한 소란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심지어 소유라의 팬들은 에비뉴 주얼리 홈페이지에 올라가서 그를 형부라고 불렀는데도 구승훈은 여전히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강하리, 당신 기다려. 당신은 결국 승훈 오빠한테 차일 거니까.”강하리는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기다릴게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입을 열지 않았다.송유라도 이만하면 충분히 그녀를 자극했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서재로 들어갔다.평소 강하리는 구승훈의 서재에 들어갈 때면 항상 노크를 했지만 송유라는 노크도 없이 바로 문
강하리는 말을 마친 뒤 조금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구승훈에게는 남아서 그녀를 돌봐주는 것은 책임이었고 송유라와 함께 병원에 가서 드레싱을 바꾸는 것은 그가 원해서 가는 거였다.그녀는 원래 누구에게도 책임으로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의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던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을 이용했다.그녀는 구승훈이 강하리와 함께 떠나는 것을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다.송유라와의 신경전에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님 아까는 내가 옆에 없길 바라지 않았어? 근데 왜 지금은 생각을 바꾼 거야?”강하리는 그의 조롱 섞인 표정을 바라보며 입술을 하얗게 될 정도로 깨물었다.“대표님께서 저를 챙겨주는 건 본인의 책임이라고 말했잖아요. 아니에요?”구승훈은 낮게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강 부장 걱정하지 마. 혼자 두지 않을 거니까. 유라 드레싱만 바꾸면 돌아올 거야.”구승훈은 말을 끝낸 뒤 몸을 돌려 떠났다.강하리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결국 그녀가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일까?“아가씨, 괜찮으세요?”도우미가 옆에서 물었다.강하리는 정신을 차린 뒤 대답했다.“괜찮아요.”도우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 안색이 이렇게 안 좋은데.’강하리는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그녀는 이제 이런 상황이 익숙해졌다.그녀는 방으로 돌아온 뒤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꺼냈다. 그런 다음 사직서를 써 내려갔다.구승훈은 이미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고민 끝에 사직서를 보냈다.사직서를 보낸 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몸이 너무 약해져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불로 몸을 더 감쌌지만 또 몸에서 열이 나 불편했다. 몇 번 뒤척이다가 점차 잠에 들었다.그녀는 도우미가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연결음이 두 번 정도 울린 뒤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저 지금...”“강 부장님?”강하리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저쪽에서 안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살짝 나른하면서도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승훈이 유라 씨 데리러 갔어요. 갈 때 너무 급해서 핸드폰을 놓고 갔네요. 강 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강하리는 핸드폰을 쥔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움켜쥐었다.그녀는 바로 연락을 끊은 뒤 계속 핸드폰으로 콜택시를 불렀다.택시를 잡은 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손연지는 비에 흠뻑 젖은 강하리를 발견하더니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너 이런 시기에는 비 맞으면 안 되는 거 몰라?”강하리는 챙백한 얼굴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나도 알아. 화내지 마. 나 지금 너무 아파. 지금 나 환자니까 화내지 말아 주라. 응?”손연지는 그런 강하리의 모습에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를 째려본 뒤 그녀와 함께 검사받으러 갔다.“염증이야. 수액 놔줄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연지는 병실을 마련한 뒤 그녀에 수액을 직접 꽂아주며 물었다.“구승훈은?”강하리는 순간 멈칫하다가 대답했다.“일 때문에 바빠.”“무슨 일인데 너 병원에 데려다주지도 않는 거야? 이게 널 잘 챙겨주는 거니?”강하리의 입꼬리가 조금 굳었다.“우리는 이런 관계야. 나한테 도우미를 구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한 거야. 나도 승훈 씨한테 더 바랄 수 없어.”손연지는 순간 욕설을 내뱉었다.“옆에서 보살펴 달라고는 못 해도 병원에 데려다주는 것도 못 바라니? 너무 바빠서 너 병원에 데려다 줄 시간도 없대? 구승훈은 도대체 어떤 쓰레기야? 정말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강하리도 구승훈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적어도 그녀와 관련된 일은 모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녀는 더 구승훈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를 나눌수록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몸은 탈진한 듯 힘이 빠졌다.그저 질렸을 뿐이라니.강하리는 웃으며 눈가의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강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임명우가 그녀의 등 뒤에서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요.”강하리는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대리운전을 불러 차를 맡긴 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고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그러나 강하리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하이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차가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졌다.강하리는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애초에 도박을 건 것은 자신이 아닌가?이제 패배를 인정할 때였다.하지만 가슴 한편이 텅 빈 듯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폐 깊숙이 스며드는 통증이 뼛속까지 얼어붙었다.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자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물은 투명한 이슬로 변했다.한편, 구승훈은 핸들을 부술 듯이 꽉 쥐고 천천히 움직였다.검은색 마이바흐는 그렇게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강하리의 뒤를 따라갔다.한참 뒤, 그는 결국 휴대폰을 들어 ‘강하리’라는 이름 위에서 머뭇거리다 이내 다른 번호를 눌렀다.“구승훈 씨, 전화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손연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화가 난 듯 소리쳤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서 홀로 걷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제가 잘못했어요.”“미안했다고 하면 다예요?”손연지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결혼하기 싫었으면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하리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사람들이 어떻게 수군거리는지 알기나 해요?”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꾸짖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한참을 쏟아내던 손연지가 한숨을 내쉬고 조용해진 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 데리러 와줘요.”손연지는 곧장 강하리에게 달려갔
강하리가 떠난 후,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구승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창가에 서 있었고 손에 든 은은한 불꽃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었다.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다 봤어요?”임명우가 빙긋 웃으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참 우연이네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임 대표님의 취미가 남의 사생활 엿듣기였나?”임명우는 옆으로 다가와 낮게 웃으며 아래층 불빛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저는 단지 강 대표님과 구 대표님 사이의 일에 관심이 많을 뿐인데요.”그는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아, 맞다. 구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강 대표님께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항상 구 대표님만 바라보았고 저는 다가갈 틈조차 없었죠. 한때는 포기했어요. 강 대표님이 저를 싫어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기회를 주시다니,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그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스며 있었다.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어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임명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이듯 말했다.“설마 구 대표님, 정말로 강 대표님을 포기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는 혹시나 연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저는 당당하게 강 대표님에게 다가가도 되겠네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날렵한 팔이 순식간에 움직였고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난 손가락이 임명우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쾅!순간,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임명우의 머리가 강화 유리에 부딪혔다.유리는 거미줄처럼 촘촘한 금이 번지며 위태롭게 흔들렸고 구승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의 임명우를 바라보았다.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깊은 눈동자에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무슨 수작을 부리든 상관없어. 하지만 강하리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넌 살아 있는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임명우는
강하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임 대표님, 사회적 거리 두기, 모르세요?”임명우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아무 반응도 없네요?”“장난에 굳이 반응할 필요가 있나요?”강하리는 무심하게 답했고 임명우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구승훈은 어떻게 생각할까요?”강하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이미 끝난 관계에 미련을 두는 게 아니었다.그가 그녀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떠난 그 순간부터, 모든 건 끝났으니까.“혹시 나중에 찾아와서 주먹이라도 날릴까요?”임명우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강하리는 조용히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임 대표님, 계속 장난칠 생각이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임명우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가벼운 농담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태도를 바꿔 다음 회의 내용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레스토랑 저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계속 신경에 거슬렸고 손에 쥔 젓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죄송하지만, 술 좀 주세요.”강하리는 갑자기 임명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임명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음을 지었다.“어이구, 강 대표님이 술 마시고 싶었나 봐요?”강하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임명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종업원을 불렀다.곧 레드 와인 한 병이 테이블에 놓였고 강하리는 잔을 들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셨다.그러나 와인 한 잔은 금세 다 비워졌고 술이 들어가자 강하리의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멀리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고 눈앞의 세상은 희미하게 번져갔다.구승훈은 자주 강하리를 냉정하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구승훈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 있을까?구승훈은 지금도 저쪽에
임명우가 강하리와 약속한 장소는 펠리스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순간,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잠깐만요! 구승훈 씨, 빨리요!”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바로 그때, 임희주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강하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강 대표님, 우연이네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가볍게 웃었다.“결혼 증명서 받기 전까지는 저, 아직 구 대표님 아내예요.”짧은 한마디에 임희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이내 구승훈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강하리의 굳은 표정과 달리 구승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은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로 가득 찼다.임희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가볍게 웃었다.“구 대표님, 아내분께 인사 안 하세요?”강하리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단 네 글자. 그 짧은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 상처 난 마음을 다시 한번 깊숙이 베어냈다.강하리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결혼식도 제멋대로 취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이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1층에서 68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분 남짓이었지만 강하리에게는 두 시간처럼 길고도 고통스러웠다.마침내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강하리는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임명우는 미소를 머금고 구승훈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강하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우리도 나가요.”임희주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구승훈의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고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짧게 입을 열었다.“가요.”임희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정말 병
구승훈은 여전히 아파트 건물 아래에 서 있었다.연성시의 겨울은 눈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잔뜩 움츠린 채 목을 움직이며 대답했다.“알았어. 최대한 빨리 간다고 전해줘.”짧게 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준봉은 끊긴 휴대폰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강하리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건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한참 뒤, 강하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봉을 바라보았다.“부탁드려요. 주식 양도는 이미 공증을 마쳤고 그가 줬던 옷과 장신구도 모두 정리해서 보냈어요. 구씨 가문 할아버지가 주신 재산도 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연정이 양육권은 제가 가질 겁니다.”마치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강하리는 짧게 말을 끝맺고 방을 나섰다.준봉은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을 나선 강하리는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서 주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구승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듯했다.또한, 연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았다.강하리가 결혼 증명서를 바꾸자고 했을 때, 적어도 잠시라도 망설일 줄 알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했다. 이성적인 태도 뒤에 감춰진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강하리는 시들어버린 정원을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결국 포기할 수 없었다.이렇게 오랜 시간 노력하며 그녀가 원했던 건 단지 구성훈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단순한 바람조차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이뤄지지 않는 꿈이 되어 버렸다.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차고 쪽에서 연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심준호는 연정이를 안고 땅에 떨어진 참
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차를 몰고 나온 순간부터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까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그저 추웠다.차 안의 에어컨을 최대로 올렸지만 차가운 공기는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창밖에는 녹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통화 중’ 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포기했다.그에게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었든, 결국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그동안 자신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강하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뒤따라오던 심준호와 손연지도 급히 차를 세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맨발로 차에서 내리는 강하리였다.운전하려고 하이힐을 벗어 던진 듯했지만 차가운 눈밭 위에서도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시들어 버린 꽃잎처럼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을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이제 그녀도 포기했다.그토록 오랫동안 얽매였던 남자를,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너무 지쳤고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녀를 떠난 건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남는 건 결국 상처뿐이었다.심준호는 다급히 코트를 벗어 강하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걱정하지 마. 삼촌이 너를 위해 꼭 복수해 줄게.”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강하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삼촌, 너무 힘들어.”심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삼촌이 있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저 심준호의 품에 기대어 쓰러질 듯 몸을 맡겼다.“하리야!”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들
구승훈은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재는 초조한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형, 왜 옷을 안 갈아입었어?”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꽃이 다 시들었네. 그렇지?”구승재의 가슴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형, 오늘...”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구승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나직이 말했다.“오늘 내가 어떻다는 건데?”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드러난 눈빛에는 깊은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구승재는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형! 결혼 안 할 거야?”그 순간, 구승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결혼해서 뭐 해?”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언제 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리와 아이를 다치게 할지 모르는데.”구승재는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형이 얼마나 힘들게 다시 강하리 씨를 만났는데, 형...”구승훈은 뻑뻑해진 눈가를 문질렀고 한참 후에야 마침내 짧게 입을 열었다.“내가 미안하지.”그 한마디에 구승재는 그동안 참고 있던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형, 그러지 마. 제발...”곁에서 지켜보던 노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일단 검사부터 해 봐. 그 후에 이야기하자.”그는 캐리어를 내려놓고 가방에서 검사 장비를 꺼내며 말했다.“준봉 씨랑 노진우 씨는 어때? 이쪽으로 데려와서 검사받게 해.”구승훈은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병원으로 보냈어.”두 사람은 구승훈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그 순간, 구승훈은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오늘 아침, 방 안에 남겨진 피 묻은 흔적과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준봉을 발견했을 때, 구승훈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어제 곁에 있었던 사람이 강하리와 연정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활기로 가득했던 바 안에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하리야, 괜찮아?”손연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방금 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손연지는 그녀의 얼굴빛이 좋지 않자 조용히 일어나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몸이 안 좋아?”강하리는 물컵을 받았지만 입을 대지 않고 바닥에 깨진 술잔을 내려다보았다.한참 뒤, 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잠깐 전화 좀 해도 될까?”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강하리는 휴대폰을 들고 방을 나와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몇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여전히 느긋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경음악은 시끄러웠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벌써 파티 끝났어?”강하리는 아마도 과거의 경험 때문에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었다.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었다.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이야. 그냥... 너무 늦지 말라고.”“걱정 마. 늦지 않을게.”구승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했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다시 심씨 가문에 전화를 걸어 연정이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더 이상 파티에 있을 기분은 아니었다.그녀의 분위기가 달라진 걸 눈치챈 친구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정리했다.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에 가까웠다.집 안은 여전히 분주했고 거실에는 장식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대문에도 큼직한 축하 문구가 붙어 있었다.하얀 눈밭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문구가 묘하게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즐거운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차츰 차분해졌다.백아영이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와 말했다.“빨리 씻고 쉬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향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휴대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자기야,
구승훈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감히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그는 축 처진 채 소파에 기대어 손에 든 술잔을 느릿하게 굴렸다.그때,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구승재는 그녀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가 구승훈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구승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자 그의 서늘한 시선에 겁먹은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설마, 이제 와서 몸 깨끗이 지키겠다는 거야?”구승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기며 대꾸했다.“집에서 아내가 엄하게 관리하거든.”그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구석에 앉아 있던 안현우가 구승훈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그녀는 눈치 빠르게 술잔을 들고 다시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그러더니 휘청거리며 일부러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그의 옷 위로 쏟았다.순간 얼어붙은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구 대표님, 죄송해요. 정말 실수였어요.”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짧게 내뱉었다.“꺼져.”그 말 한마디에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안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현우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도발적인 시선으로 맞섰다.“화장실 가서 닦아.”그러나 구승훈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옆에 놓인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다들 즐겁게 놀아.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그가 나가려 하자 구승재는 안현우를 매섭게 흘겨보더니 이내 형을 따라갔다.“형, 화내지 마. 그런 놈들 때문에 기분 망칠 필요 없어. 오늘은 형이랑 형수님의 좋은 날이잖아. 즐겁게 보내야지.”그 말에 걸음을 멈춘 구승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식 떠는 꼴 좀 봐. 마치 여자 안 만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강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