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힘이 있는 게 더 이상한 거야. 너 어젯밤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지?”강하리는 몰랐지만 차에서부터 출혈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너 잘 챙겨주니?”강하리가 대답했다.“응 잘 챙겨줘. 전문 도우미까지 구해줬어.”“어머.”손연지는 조금 놀랐다.“그래도 완전히 양심이 없는 건 아닌가 보네.”강하리는 웃었다. 비록 계약을 맺은 사이였지만 구승훈은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편에 속했다.그녀가 숨긴 것에 대해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고용해 그녀를 챙겨주었다.“집에서 푹 쉬어. 내가 시간 나면 너 보러 갈게.”“그래.”두 사람은 몇 마디 더 나눴고 전화를 끊기 전에 손연지가 한마디 덧붙였다.“맞다, 우리 고등학교 동창회 때면 너 몸도 거의 회복될 텐데 참석할래?”강하리는 당황했다. 지난번 단톡방에서 동창회가 열린다는 말은 확실히 있었지만 그 당시 그녀는 송유라의 일 때문에 짜증이 나서 무시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날짜를 정했을 줄은 몰랐다.“그러자.”강하리는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잠에 들었다. 도우미가 깨우는 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깼다.“아가씨, 일어나서 뭐 좀 드셔야죠.”강하리는 눈을 뜨며 물었다.“승훈 씨는 돌아왔어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이런 시기에 그녀의 앞에서 송유라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최대한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준 것이었다.게다가 송유라가 다쳤는데 그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첫사랑은 송유라였고 그는 순정파였다.오늘 병원에서 그녀를 집에 데려다준 뒤 바로 송유라와 함께 드레싱을 하러 가지 않은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네, 조금 있다가 나갈게요.”“네.”강하리는 겨우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아랫배와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도우미를 불러 부축해달라고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날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쪽에서 송유라가 계속 그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그는 밤에 다시 돌아왔다.“구 대표님, 돌아오셨어요?”도우미는 구승훈에게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침묵한 뒤 다시 물었다.“좀 어때요? 밥은 먹었어요?”“네, 아가씨께서 조금이라도 드시긴 했습니다.”구승훈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침실 문을 열었다.방안에는 강하리가 손에 영어 원본 책을 들고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그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마침 구승훈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구승훈은 조용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뺏었다.“너 지금 책 읽으면 안 돼. 요즘에는 보지 마.”강하리는 잠시 말이 없더니 대답했다.“알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고 여전히 그에게 무관심과 거리감을 보여줬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더니 잠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온 뒤 그는 서재로 향했다.잠시 뒤 그는 한 서류를 갖고 들어왔다.“읽어 보고 괜찮으면 사인해.”강하리는 서류를 살펴보니 재산 양도 계약서였다. 구승훈 명의 아래에 있는 별장 중에 하나를 그녀의 명의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서류를 들고 있는 강하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적어?”강하리는 고개를 들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충분해요.”충분하다 못해 넘친다.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아이로 몇십억짜리 별장을 바꿔준다는 데 어떻게 감히 적다고 할 수 있을까?구승훈은 감정도 없는 냉혈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거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강하리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웃었다.구승훈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바라보았지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강하리,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마. 보기 힘들어.”그러나 강하리 얼굴에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일찍 자. 난
구승훈이 물었었다.“왜 또 단 음식을 만드는 거야?”그 당시에 그녀는 아직 그에게 기대를 가득 품고 있었다.그래서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항상 기대하며 대답했었다.“내가 단 걸 좋아해요.”하지만 그다음에도 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단 음식이 놓여 있으면 또 물었었다.그 뒤로는 강하리는 단 음식을 하지 않았고 새로운 요리를 배워 전부 구승훈의 입맛에 맞게 밥을 차렸다.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가 물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쳐다보았다.“좋아하면 말해야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아.”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무리 표현한다고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소용이 있었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먹는 것에 집중했다. 구승훈도 더 말하지 않았다. 방금 한 말도 그저 무심코 한 말인 것 같았다.밥을 다 먹고 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네 자리는 임시로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 한 달 정도 휴가처리 해줄 테니까 건강 잘 회복한 뒤에 출근해.”강하리는 침묵하다가 말했다.“회사 그만두고 싶어요.”그녀는 정말로 이런 식으로 계속 지내고 싶지 않았다.지금은 계약 때문에 바로 떠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 남자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게다가 만약 그녀가 구승훈을 떠날 운명이라면 그녀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구승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왜?”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강정을 숨겼다.“이유는 없어요. 단지 계속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구승훈은 의미심장하게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이 너무 겸손하네. 네 능력은 나도 인정하는데.”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전에는 그녀에게 일을 못 하겠으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만두겠다고 하니 또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구승
구승훈의 뒤에 있는 법무팀이 얼마나 강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만약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겠다고 하면 아마도 법무팀에서는 그녀를 뼈까지 잘근잘근 밟아줄 수도 있었다.강하리는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승훈 씨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그녀는 구승훈이 도대체 왜 자기를 옆에 두려고 하는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테이블 앞에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다른 사람이 날 배신하는 걸 내가 가장 싫어한다는 거 강 부장 잊었어?”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연히 잊지 않았다. 구승훈 이 남자가 얼마나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는 다른 사람이 배신하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강제로 그녀를 머물게 했다. 이제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까지 생각하지도 않고 거절했다.이제야 이유를 이해한 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네. 이해했어요.”“강 부장이 이해했다니 다행이야.”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라 와서 더 먹어.”강하리는 입맛이 없었지만 이 남자가 얘기한 모든 것은 거절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테이블에 앉아 억지로 앞에 놓인 수프를 더 먹었다.구승훈은 옆에 앉아서 그녀가 다 먹을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만약 휴가가 짧다고 느껴지면 더 연장해 줄게. 푹 쉬어. 다른 일들은 이후에 다시 얘기하자.”강하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그녀는 어떻게 되든 다 상관없다고 느껴졌다.구승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 팬에 아버지는 내가 처벌받을 수 있게 조치할게.”강하리가 말했다.“알아서 해요.”구승훈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이내 떠날 줄 알았다. 예상외로 그는 전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강하리는 그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출근 안 해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계약서에 사인은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뜨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입술을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승훈 오빠.”구승훈은 입구로 걸어갔다.“여긴 어떻게 왔어?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쩌려고?”목소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워졌다.아무리 많이 들어도 강하리는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졌다.“난 친구 병문안도 오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은 오빠 보러 온 게 아니라 강 부장님 만나러 온 거예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강 부장님, 괜찮아요? 어제 돌아가서 생각해 봤는데 그래도 정식으로 부장님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초대도 없이 불쑥 왔어요. 혹시 기분 나쁜 건 아니죠?”강하리는 비웃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송유라의 가식에 맞장구쳐주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사과할 거면 바로 사과해요. 이렇게 거창한 말로 힘 빼지 말고요.”송유라는 순간 화가 났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는 바로 사과했다.“강 부장님, 미안해요. 내 팬이 철이 없어서 부장님을 다치게 했어요. 내가 이렇게 팬을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부장님이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조금 어두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그것이 경고임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구승훈의 돈을 받았기에 그녀는 이 일로 더 이상 송유라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그래요. 사과받을 테니까. 이제 떠나줄래요?”송유라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강 부장님, 내 팬도 용서해 줄래요?’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송유라가 목적 없이 이렇게 집까지 찾아와 사과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나 목적은 이것이었다.그녀는 송유라를 바라보았다.“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네요. 송유라 씨는 좋은 사람이 되고 오히려 피해자인 제가 이런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게 맞는 건가요?”송유라의 미간도 순간 찌푸려졌다.“강 부장님, 손해 배상은 원하시는 만큼 해드릴게요. 내
안현우는 구승훈이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흥미롭게 구승훈과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승훈아, 너 설마 이 여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송유라는 이미 눈가가 살짝 붉어진 채 불쌍한 표정을 하고서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은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네가 오해한 거야.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그는 이 말을 끝으로 이 주제를 매듭지어버렸다. 그런 다음 송유라를 바라보았다.“팔에 상처는 어때?”송유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화가 난 듯 구승훈을 째려보았다.“날 관심하긴 하는 거예요?”구승훈은 기분이 복잡했다.강하리의 창백한 얼굴이 그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송유라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조금 짜증이 났다.“내가 언제 널 관심하지 않았어?”송유라는 멈칫했다. 구승훈이 이런 말투로 그녀에게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난 오빠가 날 좀 더 걱정해 줬으면 좋겠어요. 다른 뜻은 없어요.”그녀는 평소에 애교가 많은 편이었다. 구승훈도 그런 그녀를 귀여워했다.사실 이런 말은 그녀에게는 평소에 자주 하는 애교 섞인 말일 뿐이었지만 구승훈이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구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송유라를 바라보며 그제야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다쳤으면 집에서 잘 쉬고 있어.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알겠어요. 다시는 이러지 않을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조금 있다가 나하고 드레싱 바꾸러 같이 가면 안 돼요? 드레싱 바꿀 때 나 정말 무섭단 말이에요. 이번에는 나하고 같이 가줘요. 네?”구승훈은 다친 그녀의 팔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송유라의 눈물은 순식간에 미소로 바뀌었다. 안현우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강하리는 안현우의 시선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피했다.그녀는 더 이
송유라의 말은 강하리의 가장 아픈 곳을 콕콕 찔렀다.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아이를 지켰다고 해도 구승훈이 낳을 수 있게 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송유라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지 강하리의 귓가에 속삭였다.“강하리 씨,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은 그저 잠자리 파트너일 뿐이에요. 그런데 임신했다고 정식으로 여자 친구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그녀는 비웃음을 날렸다.“한 번 생각해 봐요. 임신한 게 나라면 승훈 오빠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만약 송유라였다면?'강하리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구승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와 그녀를 지켰을 것이다.강하리는 손을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움켜쥐었고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송유라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송유라 씨 힘내요. 돌아온 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승훈 씨가 아직 당신하고 화해할 마음이 없는 걸 보면 임신하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송유라는 그녀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강하리의 한마디가 송유라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소유라가 돌아온 지도 이미 긴 시간이 지났는데 구승훈은 아직도 그녀와 화해하려는 뜻이 하나도 없었다.지난번 구승훈은 비록 두 사람이 전에 사귀었던 사이였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지만 그 뒤로 인터넷에서 어떠한 소란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심지어 소유라의 팬들은 에비뉴 주얼리 홈페이지에 올라가서 그를 형부라고 불렀는데도 구승훈은 여전히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강하리, 당신 기다려. 당신은 결국 승훈 오빠한테 차일 거니까.”강하리는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기다릴게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입을 열지 않았다.송유라도 이만하면 충분히 그녀를 자극했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서재로 들어갔다.평소 강하리는 구승훈의 서재에 들어갈 때면 항상 노크를 했지만 송유라는 노크도 없이 바로 문
강하리는 말을 마친 뒤 조금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구승훈에게는 남아서 그녀를 돌봐주는 것은 책임이었고 송유라와 함께 병원에 가서 드레싱을 바꾸는 것은 그가 원해서 가는 거였다.그녀는 원래 누구에게도 책임으로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의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던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을 이용했다.그녀는 구승훈이 강하리와 함께 떠나는 것을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다.송유라와의 신경전에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님 아까는 내가 옆에 없길 바라지 않았어? 근데 왜 지금은 생각을 바꾼 거야?”강하리는 그의 조롱 섞인 표정을 바라보며 입술을 하얗게 될 정도로 깨물었다.“대표님께서 저를 챙겨주는 건 본인의 책임이라고 말했잖아요. 아니에요?”구승훈은 낮게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강 부장 걱정하지 마. 혼자 두지 않을 거니까. 유라 드레싱만 바꾸면 돌아올 거야.”구승훈은 말을 끝낸 뒤 몸을 돌려 떠났다.강하리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결국 그녀가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일까?“아가씨, 괜찮으세요?”도우미가 옆에서 물었다.강하리는 정신을 차린 뒤 대답했다.“괜찮아요.”도우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 안색이 이렇게 안 좋은데.’강하리는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그녀는 이제 이런 상황이 익숙해졌다.그녀는 방으로 돌아온 뒤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꺼냈다. 그런 다음 사직서를 써 내려갔다.구승훈은 이미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고민 끝에 사직서를 보냈다.사직서를 보낸 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몸이 너무 약해져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불로 몸을 더 감쌌지만 또 몸에서 열이 나 불편했다. 몇 번 뒤척이다가 점차 잠에 들었다.그녀는 도우미가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