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말을 마친 뒤 조금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구승훈에게는 남아서 그녀를 돌봐주는 것은 책임이었고 송유라와 함께 병원에 가서 드레싱을 바꾸는 것은 그가 원해서 가는 거였다.그녀는 원래 누구에게도 책임으로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의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던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을 이용했다.그녀는 구승훈이 강하리와 함께 떠나는 것을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다.송유라와의 신경전에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님 아까는 내가 옆에 없길 바라지 않았어? 근데 왜 지금은 생각을 바꾼 거야?”강하리는 그의 조롱 섞인 표정을 바라보며 입술을 하얗게 될 정도로 깨물었다.“대표님께서 저를 챙겨주는 건 본인의 책임이라고 말했잖아요. 아니에요?”구승훈은 낮게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강 부장 걱정하지 마. 혼자 두지 않을 거니까. 유라 드레싱만 바꾸면 돌아올 거야.”구승훈은 말을 끝낸 뒤 몸을 돌려 떠났다.강하리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결국 그녀가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일까?“아가씨, 괜찮으세요?”도우미가 옆에서 물었다.강하리는 정신을 차린 뒤 대답했다.“괜찮아요.”도우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 안색이 이렇게 안 좋은데.’강하리는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그녀는 이제 이런 상황이 익숙해졌다.그녀는 방으로 돌아온 뒤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꺼냈다. 그런 다음 사직서를 써 내려갔다.구승훈은 이미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고민 끝에 사직서를 보냈다.사직서를 보낸 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몸이 너무 약해져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불로 몸을 더 감쌌지만 또 몸에서 열이 나 불편했다. 몇 번 뒤척이다가 점차 잠에 들었다.그녀는 도우미가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연결음이 두 번 정도 울린 뒤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저 지금...”“강 부장님?”강하리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저쪽에서 안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살짝 나른하면서도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승훈이 유라 씨 데리러 갔어요. 갈 때 너무 급해서 핸드폰을 놓고 갔네요. 강 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강하리는 핸드폰을 쥔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움켜쥐었다.그녀는 바로 연락을 끊은 뒤 계속 핸드폰으로 콜택시를 불렀다.택시를 잡은 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손연지는 비에 흠뻑 젖은 강하리를 발견하더니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너 이런 시기에는 비 맞으면 안 되는 거 몰라?”강하리는 챙백한 얼굴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나도 알아. 화내지 마. 나 지금 너무 아파. 지금 나 환자니까 화내지 말아 주라. 응?”손연지는 그런 강하리의 모습에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를 째려본 뒤 그녀와 함께 검사받으러 갔다.“염증이야. 수액 놔줄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연지는 병실을 마련한 뒤 그녀에 수액을 직접 꽂아주며 물었다.“구승훈은?”강하리는 순간 멈칫하다가 대답했다.“일 때문에 바빠.”“무슨 일인데 너 병원에 데려다주지도 않는 거야? 이게 널 잘 챙겨주는 거니?”강하리의 입꼬리가 조금 굳었다.“우리는 이런 관계야. 나한테 도우미를 구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한 거야. 나도 승훈 씨한테 더 바랄 수 없어.”손연지는 순간 욕설을 내뱉었다.“옆에서 보살펴 달라고는 못 해도 병원에 데려다주는 것도 못 바라니? 너무 바빠서 너 병원에 데려다 줄 시간도 없대? 구승훈은 도대체 어떤 쓰레기야? 정말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강하리도 구승훈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적어도 그녀와 관련된 일은 모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녀는 더 구승훈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를 나눌수록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구승훈은 송유라를 데려다준 뒤 집으로 돌아왔고 그때는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오자 도우미가 바로 그에게 말했다.“구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아가씨 열이 심하게 나셨어요.”구승훈은 신발을 벗으려다가 멈칫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열이 나는 거죠?”그는 말한 뒤 성큼성큼 침실로 걸어가 문을 연 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금 어디 있어요?”“아가씨 병원 가셨어요.”그는 굳은 표정으로 도우미를 바라보았다.“왜 함께 가지 않았어요?”도우미는 조금 난감했다.“아가씨가 혼자 가시겠다고 해서요. 따라가려고 했는데 굳이 혼자 가겠다고 하셔서.”구승훈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따라오지 말란다고 정말 안 따라가요? 지금 아픈 사람인 거 알면서 혼자 가게 내버려두면 어찌합니까?”평소 말투에도 위압감은 있었지만 이렇게 화를 내니 도우미는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구승훈은 도우미를 바라보더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 몸 상태가 조금 특수한 상황입니다. 이제부터 강하리가 어디로 가면 모두 따라가 주세요.”“알겠습니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핸드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제야 그는 저녁 6시쯤 강하리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걸 발견했다.6시쯤이면... 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아마도 그가 송유라를 데리러 간 시간대였다.당시 그의 사무실에는 안현우밖에 없었다.구승훈의 표정이 바로 싸늘해졌고 눈빛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안현우는 강하리에게 지나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강하리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서도 안현우는 여전히 강하리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담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구승훈은 다른 남자가 강하리에게 관심을 갖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친구 중에 강하리에게 관심이 있는 놈들은 꽤 많았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가 말했다시피 강하리가 그와 만나는 동안 다른 남자와 썸을 타거나 하지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손연지는 침대 옆에 서서 천천히 그녀의 붕대를 풀어냈다.상처를 바라보고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아파?”강하리는 통증을 참으며 눈으로 상처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참을 만해.”“참을 만하긴 뭘 참을 만해? 얼굴이 하얗게 질렸구먼.”손연지는 말하면서 신속하게 드레싱을 바꿔 주었다. “이거 이다음에 무조건 흉터 남을 거야. 너 흉터 연고 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예전에 강찬수에게 심하게 구타당해 많은 상처가 있었다. 그때도 수시로 흉터 연고를 발랐다. 지금까지도 흉터 연고를 집에 구비해 두고 있었다.“그 팬은 어떻게 처리됐어?”손연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절차대로 고소했어.”“이 문제는 이렇게 끝내는 거야? 더 조사해야 하지 않아?”강하리는 차갑게 웃었다.“조사하면 뭘 해? 경찰에서 이미 이 문제는 송유라와 상관없다고 결론 내렸어.”그리고 구승훈이 송유라를 아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단지 언급한 것만으로도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더 조사할 수 있을까?“아무리 남모르게 한 일이라도 나쁜 짓은 언젠가 들키게 되어 있어. 송유라가 저지른 일이라면 분명 흔적을 남겼을 거야. 네가 알아보기 불편하면 내가 송유라 팬클럽에 몰래 잠복해서 알아볼까?”강하리는 침대 옆에 올려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구승훈은 다섯 번 정도 전화를 더 한 이후로 더 이상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화가 난 건지 아니면 더 신경 쓰기 귀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강하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입을 열었다.“됐어. 그럴 필요 없어.”“정말 증거가 있다고 해도 구승훈은 송유라를 어떻게 하지 못할 거야. 오히려 조사한 나를 비난할걸. 넌 모르겠지만 구승훈은 이미 이 일을 덮으려고 나한테 돈을 줬어. 그런 사람이 송유라를 의심한 적도 없을까?”만약 정말 송유라를 의심하지 않았다면 구승훈의 성격에 왜 그녀에게 큰돈을 준 걸까? 그러니 사실 그도 그녀처럼 송유라를 의심했을 것이다.하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핸드폰이 무음이어서 보지 못했어요.’구승훈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정말 못 본 거 맞아?”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으면요? 구 대표님은 왜 내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요?”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강 부장, 내가 너한테 말했었지. 이렇게 쓸데없이 화내지 말라고.”“뭐가 쓸데없는 건데요?”강하리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대표님한테는 송유라 눈물만 쓸모 있는 건가 봐요? 송유라만 화낼 수 있고 나는 이런 화조차 낼 자격이 없는 건가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았다.“강 부장 왜 이렇게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거야? 불러줘야 하는 도우미도 불러줬고 너한테 보상도 다 해줬잖아. 지금은 왜 또 이렇게 억울해하는 건데? 내가 널 병원에 데려다주지 않은 것 때문에 이래?”강하리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이 젖어갔다.그녀는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꾹 참으며 이 남자의 시선을 마주쳤다.“맞아요. 당신이 날 병원에 데려다주지 않아서 그래요. 송유라만 관심이 필요하고 난 관심도 필요 없는 줄 알아요? 애초에 임신도 내가 하고 싶어 한 거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날 챙겨 주겠다는 것도 당신이 거절했어요. 구승훈 씨 정말 도우미를 고용하고 나한테 보상을 해주면 내가 억울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감정이란 게 있어요. 돈을 주거나 낯선 도우미를 고용해 주는 걸로 정말 내 마음속에 난 상처를 메꿀 수 있는 게 아니에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뒤에 결국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리고서는 눈물을 닦았다.분명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예전부터 그녀는 잘 울지 않았다. 강찬수에게 피멍이 들 정도로 맞으면서도 울지 않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 때문에는 벌써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구승훈은 고집스러우면서도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마음속에서 또다시 답답함
강하리는 입을 꾹 깨물더니 구승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대표님 마음 놓으세요. 더는 이런 일 때문에 투정 부리지 않을 거예요.”구승훈은 촉촉한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 속으로는 앞으로 강하리가 걸어온 전화는 무조건 받으리라 약속하려 했지만, 지금은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는 머리가 복잡해져 시큰둥하게 웃고는 촉촉하게 젖은 옷을 벗어 던졌다.“승재가 아마 주변에 있을 거야. 걔한테 전화해서 옷 두어 벌 가져다 달라고 해줘.”강하리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구승훈이 남아있을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제 멀쩡했기 때문이다.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는 평소 스타일을 많이 신경 쓰는 편이라 젖은 옷은 절대 안 입으려할 것이다. 아마 구승재가 새옷을 가져다줘야 그를 내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강하리는 곧바로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연 구승재는 주위에 있었고 이내 옷을 가져다주었다. 옷들 중에는 남성 잠옷도 있었다.“사실 잠옷은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데요. 승훈 씨가 여기서 잠을 자진 않을 거니까요.”강하리의 말이 그치자 화장실에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 내 잠옷 좀 가져다줘.”“...”구승재는 강하리 한테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강 부장님, 보세요, 그래도 제가 형을 더 잘 알죠.”강하리는 입술을 깨물며 구승재를 바라봤다. 구승재는 강하리 한테 눈짓을 하며 재촉했다.“빨리요, 강 부장님.”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잠옷을 건넸다.그러자 구승재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강하리는 그 표정을 못 본 척 승재한테 말했다.“밤늦게 불러내서 미안해요.”구승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뭘요, 근데 왜 또 입원하셨어요?”강하리는 그냥 얼버무리며 물음을 피하자 구승재가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강하리 옆에 바싹 들러붙었다.“강 부장, 저희 형이 비바람을 뚫고 찾아와 줬는데 무슨 생각이 들어요?”강하리는 이마를 찌푸리더니 대답했다.“아무런 생각도 없어요.”심
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강 부장님, 농담 아니에요. 전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이렇게 오랜 시간 저희 형 곁을 지키셨는데, 송유라 한테 형을 뺏기고 싶으세요? 제가 만약 강부장 님이라면 꼭 형을 뺏기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강하리는 피죽 웃었다.못 빼기겠으면 또 뭐가 달라질 게 있을가. 감정이란 것은 놓지 않는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또한 강하리는 노력도 해봤다.지난 3년간 강하리는 구승훈의 마음을 얻으려 항상 노력을 해왔었다. 구승훈한테 조금의 마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도 좋았다.하지만 결국 모든 노력은 수포가 돌아갔다.전에도 마음을 얻지 못했는데, 송유라가 나타난 지금 강하리가 성공할 확률은 더욱 희박했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에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어떻게 대꾸하면 좋을지 몰랐다.보고 있던 구승재는 마음이 조급해 났다.“강 부장님이 연락이 안 됐을 때 저희 형이 얼마나 안절부절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오는 길에 도로가 막히니 차를 도로에 버리고는 강 부장님한테 달려왔죠. 이런데도 형이 강 부장님 한테 일말의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강하리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구승훈 성격에 이 늦은 시간에 비를 맞으면서 달려왔을 리는 없다.구승훈이 그저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비 맞으며 왔다는 사실도 강하리는 믿기 어려웠다.하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 구승훈은 그녀가 연락이 닿지 않아 마음이 급해졌을 뿐이라고, 더 나아가 그녀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분노에 휩싸였을 뿐이라고 말이다.구승훈이 찾아왔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는 말이었기에 이 추측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강하리는 더는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더는 자그마한 희망을 품고 더 큰 실망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 둘의 관계는 강하리가 구승재 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구승훈이 진심으로 강하리가 걱정됐다면 온종일 전화 한 통 없었을 리는 없다.분명 그녀가
구승훈의 마음은 여전히 부글부글 타올랐다.강하리의 구승훈이 있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구승훈을 억장이 무너지게 했다.안현우와는 연락하고 구승훈은 필요없다는 듯한 강하리의 태도 말이다.구승훈은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담배를 피웠다.그는 도무지 자신이 왜 강하리 때문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담배를 피우다 구승훈의 마음은 더 부글부글 타올랐다.구승훈은 담배를 꾹 밟아버리고는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병실로 들어가자 작은 체구의 강하리가 누워있었다.강하리의 1미터 60정도의 키에 평균에는 속했다.강하리는 평균의 키 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약했다. 허리도 한줌만 하고 살은 그저 있을 곳에 조금 붙어있을 뿐이였다.유산을 하고 나니 더 약해진 듯 했다.게다가 커다란 병실에 누워있으니 더 한없이 약해 보였다.너무 약해서 툭 치면 부서질 것 같았다.구승훈은 부글부글 대던 마음을 이내 가라앉혔다.“배고파? 먹을 것 좀 보내 달라고 시킬까?”온 하루 아무것도 못 먹은 강하리는 열이 내리고 나니 배가 고파 났다.“조금.”구승훈이 나가 전화통화를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가져왔다.강하리는 죽을 몇 숟가락 먹고는 더 먹을 수가 없었다.옆에 있던 구승훈은 미간을 좁히더니 말했다.“이것밖에 안 먹어?”강하리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더 먹었다가는 토할 것 같았다.구승훈은 침묵하더니 물었다.“내가 걔들 시켜서 달달한 것 좀 사 오라고 할까? 네가 달콤한 거 좋아하는 것을 까먹고 있었네.”강하리는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괜찮아요.”구승훈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강하리가 다시 자리에 눕자, 그도 뒤따라 누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오늘 전화했을 때 누가 받은 거야?”품에 안긴 강하리는 몹시 불편해 빠져나오려 버둥대자,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강하리!”강하리는 벗어나는것을 포기하고 조금 뜸들이다 대답했다.“안현우였어요.”“안현우랑 무슨 얘기를 나눴지?”구승훈은 차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