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강 부장님, 농담 아니에요. 전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이렇게 오랜 시간 저희 형 곁을 지키셨는데, 송유라 한테 형을 뺏기고 싶으세요? 제가 만약 강부장 님이라면 꼭 형을 뺏기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강하리는 피죽 웃었다.못 빼기겠으면 또 뭐가 달라질 게 있을가. 감정이란 것은 놓지 않는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또한 강하리는 노력도 해봤다.지난 3년간 강하리는 구승훈의 마음을 얻으려 항상 노력을 해왔었다. 구승훈한테 조금의 마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도 좋았다.하지만 결국 모든 노력은 수포가 돌아갔다.전에도 마음을 얻지 못했는데, 송유라가 나타난 지금 강하리가 성공할 확률은 더욱 희박했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에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어떻게 대꾸하면 좋을지 몰랐다.보고 있던 구승재는 마음이 조급해 났다.“강 부장님이 연락이 안 됐을 때 저희 형이 얼마나 안절부절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오는 길에 도로가 막히니 차를 도로에 버리고는 강 부장님한테 달려왔죠. 이런데도 형이 강 부장님 한테 일말의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강하리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구승훈 성격에 이 늦은 시간에 비를 맞으면서 달려왔을 리는 없다.구승훈이 그저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비 맞으며 왔다는 사실도 강하리는 믿기 어려웠다.하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 구승훈은 그녀가 연락이 닿지 않아 마음이 급해졌을 뿐이라고, 더 나아가 그녀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분노에 휩싸였을 뿐이라고 말이다.구승훈이 찾아왔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는 말이었기에 이 추측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강하리는 더는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더는 자그마한 희망을 품고 더 큰 실망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 둘의 관계는 강하리가 구승재 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구승훈이 진심으로 강하리가 걱정됐다면 온종일 전화 한 통 없었을 리는 없다.분명 그녀가
구승훈의 마음은 여전히 부글부글 타올랐다.강하리의 구승훈이 있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구승훈을 억장이 무너지게 했다.안현우와는 연락하고 구승훈은 필요없다는 듯한 강하리의 태도 말이다.구승훈은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담배를 피웠다.그는 도무지 자신이 왜 강하리 때문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담배를 피우다 구승훈의 마음은 더 부글부글 타올랐다.구승훈은 담배를 꾹 밟아버리고는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병실로 들어가자 작은 체구의 강하리가 누워있었다.강하리의 1미터 60정도의 키에 평균에는 속했다.강하리는 평균의 키 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약했다. 허리도 한줌만 하고 살은 그저 있을 곳에 조금 붙어있을 뿐이였다.유산을 하고 나니 더 약해진 듯 했다.게다가 커다란 병실에 누워있으니 더 한없이 약해 보였다.너무 약해서 툭 치면 부서질 것 같았다.구승훈은 부글부글 대던 마음을 이내 가라앉혔다.“배고파? 먹을 것 좀 보내 달라고 시킬까?”온 하루 아무것도 못 먹은 강하리는 열이 내리고 나니 배가 고파 났다.“조금.”구승훈이 나가 전화통화를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가져왔다.강하리는 죽을 몇 숟가락 먹고는 더 먹을 수가 없었다.옆에 있던 구승훈은 미간을 좁히더니 말했다.“이것밖에 안 먹어?”강하리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더 먹었다가는 토할 것 같았다.구승훈은 침묵하더니 물었다.“내가 걔들 시켜서 달달한 것 좀 사 오라고 할까? 네가 달콤한 거 좋아하는 것을 까먹고 있었네.”강하리는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괜찮아요.”구승훈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강하리가 다시 자리에 눕자, 그도 뒤따라 누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오늘 전화했을 때 누가 받은 거야?”품에 안긴 강하리는 몹시 불편해 빠져나오려 버둥대자,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강하리!”강하리는 벗어나는것을 포기하고 조금 뜸들이다 대답했다.“안현우였어요.”“안현우랑 무슨 얘기를 나눴지?”구승훈은 차
강하리는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맞아요. 고민 끝에 퇴사하기로 했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의 표정을 보지도 않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구승훈의 표정이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더 깊게 설명하지 않았다.세수하고 나오자마자, 구승훈은 이미 옷을 입고 있었다."오늘 회사 변호사가 너를 찾아 계약 해지에 관해 얘기할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구승훈은 차분한 얼굴로 홀연히 떠났다.강하리는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결국 뱉어내지 못했다.손연지가 회진할 때 강하리한테 물었다. "어젯밤에 승훈 씨가 왔어?"강하리는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그래도 양심은 있나 봐. 그렇지만 네 남자 정말 만만찮은 놈이야. 방금 승훈 씨를 마주쳤는데, 그 아우라하며 얼굴색 하며. 그런 사람한테 감히 그런 말을 한 나도 참 대단해."강하리는 입을 비쭉거렸다."뭔 내 남자야. 그런 말 좀 하지 마."손연지는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이 틀려? 승훈 씨 네 남자 맞잖아."손연지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강하리를 쳐다봤다."어젯밤에 집에 돌아가서 골똘히 생각해 봤는데, 송유라한테 최고의 복수는 구승훈을 영원히 네 곁에 두는 거야. 좋기에는 네가 구승훈 한테 시집가서 너희 둘이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서 송유라를 분노케 하는 거야!"강하리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네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 내가 송유라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왜 송유라를 이길 수 없어? 걔보다 더 예쁘지, 스타일도 더 세련됐지. 얼굴 되지 능력 되지 하는데 왜 걔를 못 이겨?"강하리는 못 참고 웃음을 뿜어내고는 이내 슬픔이 눈에 가득 찼다. "사랑은 이런 도리를 따지지 않아."손연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손연지도 사랑이 이런 도리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 화를 쉽게 삭히기 힘들었다.순간 뭔가가 생각난 손연지는 폰을 뒤적뒤적 거리더니 강하리한테 내밀었다"봐봐. 내가 이미 송유라의 팬클럽에
강하리는 서둘러 회사 홈페이지를 열어 보았다.운영은 정상화됐지만 사이트 밑부분에는 여전히 송유라의 팬들이 형부를 부르고 있다."형부, 언제 우리 언니랑 결혼해요?”"형부, 너무 스윗해요.”"형부, 저 두 사람 깨 볶는 모습 구경하러 왔어요.”"매형, 빨리 저희 언니와의 열애 사실 인정해 주시죠.”"형부...”형부로 도배되어 있는 댓글들을 본 강하리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회사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인원들이 있었지만, 이 댓글들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구승훈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대표님의 마음이 어찌 넓었으면 상대 팬들도 다 옹호해 주는 건지.’강하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폰을 한쪽으로 던졌다.막 누우려고 하는데 누군가 병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들어오세요."방문이 열리자, 강하리는 그대로 얼어버렸다.회사의 수석 변호사였다.구승훈은 과연 말한 대로 한다.그 남자는 단정한 양복 차림으로 엘리트 티를 내며 강하리 앞에 섰다."강 부장님, 이 시간에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강남은 쓴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수석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여기 해약 협의서가 있으니 한번 보시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면 바로 서명하시면 됩니다.”강하리는 그 계약을 받아들고 곧바로 위약금에 눈을 돌렸다.100억원.강하리의 관자놀이는 펄떡펄떡 뛰고 있다.구승훈이 그녀를 순순히 떠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하지만 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해약서를 꺼내 들 줄은 몰랐다."강 변호사님, 법을 공부하신 입장에서 이 계약서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강 부장님, 이 계약은 강 부장님께서 체결하신 근로계약에 따른 것입니다.”말하면서 강 변호사는 또 근로계약서를 하나 꺼냈다."강 부장님, 4번, 6번, 3번, 보세요.”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강 변호사가 말한 그 항목이 번듯이 적혀 있다.「용역 계약 기간 중 을이 사직서를 제출한 경우 갑은 을에게 향후 계약 기간 동안 갑이 예상한
"대표님, 계약 해지 건에 관해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강 부장, 합의서를 보지 못했어?”강하리는 입꼬리가 굳어났다."봤어요...”“봤는데 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정상적인 퇴사를 하고 싶어요. 필요하시다면 후임을 찾아준 뒤 퇴사할 수도 있어요...”구승훈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 없었다. 강하리는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도 구승훈이 불쾌해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강 부장, 우리 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야. 애초에 그 근로계약서에 사인했으면 순순히 지켜줘야지.”강하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표님, 회의실에서 분명히 제 퇴사에 동의하셨잖아요.”구승훈은 순간 당시 회의실에서 강하리가 안현우의 러브콜을 받은 일이 생각났다.구승훈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회의실은 무섭게 조용했다.회의실에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구승훈은 탁 하고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탁자 위에 던졌다.회사의 임원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거렸다.이어 맨 앞에 앉은 남자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 부장, 내가 퇴사에 동의한 건 맞지만, 네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내가 알려줄까?”강하리는 순간 난감해졌다.강하리가 당시 그 2억 원 때문에 다시 구승훈을 찾았을 때, 그가 한 모든 말을 강하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강하리는 이런 난처함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아뇨, 기억나요.”"기억이 났으면 강 부장은 몸조리 잘하고 얌전히 출근해.”강하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제가 어떻게 해야 그만둘 수 있는 거예요?”구승훈이 눈을 번쩍 뜨더니 말했다."강 부장, 여기는 모텔이 아니야. 백억을 내놓든지, 건강을 회복해서 출근하든지, 아니면 강 부장이 법정에서 나를 마주하고 싶으면 소원대로 해줄 수도 있어.”구승훈은 멈칫하더니 계속하여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백억원은 이미 내가 강 부장의 지난 3년 동안의 고생을 생각해서 싸게 쳐준 거니까
강하리는 멈칫했다."그 사건, 계속 다른 사람 못 찾았어요?”임정원은 피식 웃었다.“하리 씨가 허락해서 안 찾고 있었는데요. 설마 번복하고 싶은 거예요?”강하리는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난번에 임정원이 도움이 필요한 자료가 있다고 할 때, 강하리가 거절한 이후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임정원이 분명 다른 사람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임정원이 계속 강하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후에 번역할 게 있으면 메일로 바로 보내줘요. 제가 최대한 일에 방해 안 가게 빨리해서 보낼게요.”"그래요, 그렇게 하죠. 이번 일은 뭐예요?”"계약 해지에 관한 문서인데 메일로 보내드릴까요?”"아뇨, 점심인데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임정원의 말이 제안에 강하리도 거절하기 힘들었다."좋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임정원와 약속한 레스토랑은 병원 근처에 있었다.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임정원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얼굴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임정원이 물었다.강하리는 살짝 웃었다."요즘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임정원은 강하리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그럭저럭 조용하고 온화했다.식사를 마치자, 강하리는 그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잠시 후 임정원은 심란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 씨,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계약을 했어요?”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해결하긴 힘들겠죠?”임정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인정하기 싫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원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강하리는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한 듯했다.어쨌든, 이건 SH그룹의 법무팀이 내놓은 협의이고 만약 허점을 찾을 수 있다면 구승훈이 이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지는 않았을 거다."정말 구 대표님 곁을 떠날 생각이에요?" 임정원이 또 물었다.사실 이 말을 꺼내면 두 사람 모두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강하리는 이 남자가 무슨 꿍꿍이인지 도통 알길이 없었다. 그러나 구승훈이 화가 났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한테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침대 옆에 섰다."무슨 일이예요. 그냥 말하세요”구승훈은 눈을 번쩍 뜨고는 강하리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강하리는 원래 힘이 없던 터라 끌어당기는 힘에 못 이겨 구승훈의 품속에 쏙 들어갔다. 구승훈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홱 돌아서서 강하리를 창턱에 대었다."누구를 만나러 나갔어?"구승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강하리는 등뒤가 창턱에 배겨서 너무 아팠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하리의 몸부림에 구승훈은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구승훈이 힘을 더 보태자, 강하리는 등에 무딘 칼이 닿은 것처럼 더욱 아파왔다."어느 남자를 만나러 나갔었냐고!”"아파요! 승훈 씨!""아프게 해서 미안해.”구승훈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하리를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강하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입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승훈 씨, 이게 무슨 미친 짓이에요! ”"내가 미쳤다고? 역시 강 부장이 좋고 나쁨을 모르네.”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 다른 사람하고 밥 먹을 자유도 없는 거예요?”그녀와 임정원의 관계는 누가 봐도 결백했다. 그래서 구승훈이 임정원을 질투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오히려 구승훈과 송유라는 누가 봐도 결백하지 않는 걸 알지만, 그는 보란듯이 계속 송유라을 데리고 와서 강하리 앞에서 자랑을 했다.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강하리를 놓아줬다.강하리는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옆에서 그녀가 기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녀가 마침내 기침을 멈추자 비로소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이런 몸 상태에서도 나가서 같이 밥이나 먹겠다니, 임 변호사가 너한테 그 정도로 중요해? 너는 지금 네가 어떤 신분인지 몰라?”방금 기침으로 강하리의 눈가가 붉어 났다.그녀는 약간 붉어진 눈을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강하리가 뭔 대단한 짓을 한 것도 아니다.강하리는 그저 임정원과 간단히 식사한 것이 전부다.갑자기 강하리는 오늘 밥을 먹고 일어났을 때 그녀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자, 임정원이 자신을 부축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그게 오늘 임정원과의 유일한 스킨십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고작 그 스킨쉽만으로 강하리와 임정원 사이를 의심한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강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구승훈을 바라봤다. "대표님 혹시 저한테 사람을 붙여 저를 감시했어요?”구승훈은 냉정하게 웃더니 말했다. "강 부장, 걱정하지 마. 나 아직 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하지만 오늘부터 너한테 사람을 붙이는 게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나몰래 바람피워도 모르겠어!”강하리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강하리는 구승훈을 무섭게 노려봤다."도대체 무슨 뜻이에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슬쩍 쳐다보고는 폰을 꺼내 그녀 앞에 내동댕이쳤다."강 부장, 네가 직접 봐.”강하리가 내동댕이쳐진 폰을 집어 들고 채팅 기록을 누르자 사진 한 장이 보였다.임정원의 부축을 받는 장면이 매우 교묘하게 찍혀있었다.마치 강하리가 일부러 임정원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말이다.강하리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도대체 누가 보낸 사진인지 보려고 더보기를 누르자 안현우가 바로 그 범인이었다. 게다가 구승훈의 친구 놈들의 채팅그룹에 보내져 있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계속 밑으로 내려봤다. 이어 안현우가 보낸 톡이 보였다.「강 부장님 정말 예상 밖이네, 승훈이 몰래 밖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니. 승훈아, 이런 나쁜 년도 좋다는 거야? 언제 임신하면 네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강하리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 그래서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이거 다 오해예요. 못 믿겠으면 레스토랑 CCTV를 가서 확인해 보세요. 임 변호사와 저는 정말 평범한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아이에 대해서는......”강하리는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이 예고 없이 뚝뚝 떨어졌다."대표님 아이가 아니라고 의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