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형은 잠시 침묵했다.“해외 파견은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아요.”“그럼 제가 개인 사정으로 출국 신청을 하는 건요?”진태형은 나지막이 말했다.“신청은 할 수 있지만 승인 떨어지는 게 무척 어렵고 기간도 오래 걸릴 거예요.”강하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어요.”강하리가 전화를 끊자 구승훈이 상쾌한 기운을 풍기며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구승훈은 파자마 한 벌을 몸에 걸친 뒤 강하리에게 다가와 포옹했다.“안 피곤해?”강하리가 낮게 물었다.“구승훈 씨, 우리 아기 괜찮겠지?”구승훈은 한참을 꽉 껴안고 있다가 대답했다.“응.”강하리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자면서도 깊게 찡그린 그녀의 미간을 보자 구승훈은 마음이 아파 그녀를 다시 품에 꼭 껴안았다.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다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그 후로 강하리는 계속 바쁘게 지냈지만 그녀는 구승훈이 동네에 많은 사람들을 심어놓았다는 걸 알았다.안팎으로 남녀불문하고 그가 데려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먹을 것과 입는 것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고 나문빈마저 들어오려면 여러 번의 확인을 거쳐야 했다.그래서 나문빈은 들어올 때마다 투덜거렸다.“그쪽 집에 오는 게 유엔 본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네요.”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최근 B시에 에너지 회사 입찰이 있는데 잘 준비해 봐요.”나문빈은 혀를 찼다.“알겠어요.”온라인 회의를 속속들이 마치고 드물게 여유시간이 생기자 그녀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발코니 쪽으로 의자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집안은 따뜻했다.계약서를 들고 무심하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낯선 번호였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번호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정양철 씨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 왔고 강하리는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안녕하세요.”전화기
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애초에 널 자기 회사로 데려간 게 네 어머니를 해치려고 그랬다는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정양철은 우리 엄마와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왜 그렇게까지 했냐는 거야...”강하리는 말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구승훈의 손을 꽉 잡았다.“송동혁은? 구승훈 씨, 송동혁 어디 있어?”송동혁이 애초에 엄마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혹시... 정양철?강하리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랐다.줄곧 엄마와 정양철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송동혁을 만나기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혹시 엄마가 오래전에 정양철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정말 그런 거라면 모든 게 말이 된다.정양철이 엄마를 쫓고 있었는데 송동혁이 구해줬다.그래서 그는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찾지 않았던 게 아닐까?그런데 나중에 엄마와 닮은 자신이 정주현과 일하는 걸 얼떨결에 보게 되어 곧장 연성으로 온 게 아닐까?강하리는 문득 팔다리가 저리는 느낌이 들었다.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던 그녀는 계약서를 들고 있던 손마저 떨렸다.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정말 그런 걸까 봐.그렇다면 정서원을 그렇게 만든 게 결국 자신이니까.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송동혁은 아직 구치소에 있어, 왜 그래?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강하리의 입술이 살짝 하얗게 변했다.“그 사람 만나고 싶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알았어, 내가 준비할게. 근데 지금은 네 몸이 안 좋아서 안 될 것 같아. 애 낳고 가는 건 어때?”강하리는 임신 7개월 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이 상태로 외출하는 건 정말 위험했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기다리자.”한편, 전화를 끊은 연미숙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서류 더미로 향했다.처음에는 믿지 않
강하리가 헛웃음을 지었다.“둬도 난 쓸데없는데.”구승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그래, 나랑 아이가 누려야지.”“아이만이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근데 나 이미 많이 먹었는데.”강하리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창피한 것도 몰라?”구승훈의 눈엔 온통 웃음기가 가득했다.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구승훈은 조심스럽게 운전했다.앞뒤, 좌우, 사방에 경호원들의 차가 가득했고 원래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오늘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병원 측에서는 구승훈이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전용 통로를 통해 들어선 그는 곧바로 의사 진료실로 들어갔다.몇 가지 검사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벌써 정오가 가까워졌다.석미란이 진료실에서 나오자 구승훈이 한 여자를 품에 안고 병원 제일 안쪽 진료실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몸매와 분위기가 확실히 강하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다만... 강하리의 걷는 모습을 보던 그녀는 다소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잠시 멈칫하다가 황급히 그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몇 발짝 내딛기 전에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여긴 통행금지입니다.”여러 명의 경호원이 석미란 앞에 서서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석미란은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내가 누구인지 알아? 여긴 심씨 가문 병원이고 난 심씨 가문 사람이야!”하지만 경호원은 움직이지 않았고 석미란은 더욱 화가 났다.“당신들 눈이 먼 거야 아님 귀가 안 들려?”경호원이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석미란은 이를 악물고 두 경호원을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밖으로 나오자 구승훈이 이미 강하리를 차에 태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의 눈빛이 번뜩이다가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에야 그녀는 진료실로 향했고 의사는 당연히 그가 심씨 가문 셋째 사모님이라는 걸 알았다.그녀가 묻자 도저히 어쩔 수 없었지만 여전히 답은 전과 같았다, 생리 불순.석미란은 그
문연진은 한동안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심문석 생일 잔치에서 했던 말로 연미숙이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인내심이 많은 여자인 줄 몰랐고 지금까지 그녀는 강하리를 찾아가지도 않았다.게다가 강하리가 갑자기 외교부 일을 그만두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평소 강하리가 얼마나 책임감 있게 일을 처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제 박근형의 일을 맡았으니 더 열심히 할 텐데 하필 이때 일을 그만두다니.부서 사람들을 통해 알아봤지만 이유를 알지 못했다.한창 짜증이 나 있던 찰나 석미란의 전화가 걸려 왔다.“문연진 씨, 흥미로운 일이 있는데요.”문연진은 웃으며 조롱하는 어투로 말했다.똑같이 심씨 가문 사람이지만 첫째네와 너무도 다르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사모님께서는 저를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석미란이 웃었다.“당연하죠.”문연진은 짜증스러운 기색이 가득했지만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사모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석미란도 빙 돌려 얘기하지 않았다.“강하리 임신한 거 아직 모르죠”문연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뭐라고요?”“강하리가 임신했다고요.”“진짜요?”“물론이죠, 나 지금 한미병원 산부인과에 있어요.”문연진의 표정이 극도로 일그러지며 너무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옆으로 내리쳤다.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문원진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또 왜 성질을 부려!”문연진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할아버지, 강하리가 진짜 임신했대요. 그년이 진짜 승훈 오빠 애를 임신했다고요!”문원진의 표정도 굳어졌다.“누가 그래?”“심씨 가문 셋째 사모님이 방금 전화해서 알려줬어요. 내가 전에 임신했다고 했을 때 다 안 믿었잖아요. 이제 어떡해요, 애가 곧 나오게 생겼는데!”문원진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잖아.”“안 급할 수가 있어요? 승훈 오빠는 지금까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데 강하리가
여러 대의 구급차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심준호는 어두운 얼굴로 응급실 문 앞에 서 있었다.허둥지둥 연성으로 달려온 구승재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준호 형, 우리 형이랑 강하리 씨...”“강하리 씨는 출혈 때문에 응급조치 중이고 아이는 조산해서 2킬로도 안 돼. 상황이 안 좋아. 네 형은 쇳조각이 튀어 심장 뒤쪽을 찔러서... 방금 위독하다는 통보를 받았어.”건장한 체격의 구승재도 다리가 풀리며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심준호가 황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심준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일단 진정해. 작정하고 해친 거면 괜찮은지 알아보러 오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병원에는 사람도 많아서 어떤 눈과 귀가 있는지 몰라.”구승재는 몸을 추스르고 일어섰지만 마음 한구석은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셋 중 누구 하나라도 잘못되면 남은 둘은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 거다.응급실 문이 거듭 열리며 혈액 주머니가 드나들었다.이날 밤 구승훈은 총 세 번의 위급하다는 통보를 받았고 난리 속에 하룻밤이 지나고 손연지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녀가 왔을 때는 이미 울어서 눈이 충혈된 상태였다.“하리는요, 아기는요?”노민우는 서둘러 그녀를 옆으로 끌어당겼다.“일단 진정해. 구승재, 천천히 얘기해 봐.”“강하리 씨는 괜찮은데 아이 상태가 안 좋아요.”손연지는 순식간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아이는 이제 겨우 7개월이에요, 7개월이면 생존 확률이 10%밖에 안 돼요!”그녀의 말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고통으로 물들어갔다.노민우는 서둘러 휴지를 건네며 물었다.“승훈이는 어딨어?”구승재 역시 붉어진 눈으로 답했다.“형은 방금 위기 넘겼어.”노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VIP 병실 문이 열렸다.“환자 깨어났어요.”구승재는 멈칫했다.하룻밤 사이에 세 번이나 위독 통보를 받았던 사람이 이렇게 빨리 깨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의사도 충격에 휩싸였다.구승훈의 얼굴은 핏기
노민우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다.“승훈아, 우리 형이 이런 미숙아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연구소를 차렸어. 거기로 보내도 돼. 일반 병원보다 기술도 훨씬 좋고 연구소니까 비밀 보장도 문제없어.”구승재의 눈이 번쩍 뜨였다.“정말?”노민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구승재는 황급히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은 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말했다.“노진우 불러, 나머지는 다 나가!”구승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나가서 노진우를 불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노진우가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병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문이 닫히자 구승재는 고통에 가득 찬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형,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강하리 씨가 알면 버티지 못할 거야!”구승훈은 얼굴이 창백해졌다.“안 그러면 아이를 지킬 수 없어.”“그래도 이건 강하리 씨한테 너무 불공평하잖아!”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냥 내가 미안한 짓 한 걸로 하자.” 손연지는 구승훈의 병실에서 나와 곧장 강하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강하리는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얼굴에는 핏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는 침대 옆에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그렇게 조심했는데 왜 무사히 낳을 수 없었던 걸까!이 아기는 하리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인데!손연지는 강하리의 침대 곁에 한참을 앉아있었고 병실 문 앞에 서 있던 노민우는 가슴이 아팠다.강하리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녀와 구승훈 사이의 일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그 두 사람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서로 사랑하는 둘이 함께 하겠다는데 그 대가가 왜 이렇게 큰 걸까.그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손연지 옆으로 걸어갔다.“손연지, 울지 마. 이제 다 괜찮다잖아.”“괜찮다니 무슨 소리야, 하리가 어떻게 됐는지 못 봤어?”“천천히 나아지겠지.” 노민우가 옆에서 위로했지만 손연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아이가 괜찮으면 모를까, 정말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구도 잘 지낼
강하리는 잠에서 깨어나니 붉어진 눈으로 침대 앞에 앉아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손연지를 발견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지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아기는? 구승훈 씨는?”이제 막 멈췄던 손연지의 눈물이 또다시 방울방울 떨어졌고 강하리는 손발이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아기한테 문제가 생긴 거야, 아님 구승훈 씨가 잘못된 거야?”손연지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하리야, 아이... 아이...”차마 조산해서 죽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생사가 오가는 일에 익숙한 의사인데 그런 말 하나 못 하다니.강하리는 예고 없이 눈물이 툭 터져버렸고 그녀는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연지, 농담하지 마. 아까도 분명히 내 배를 걷어차고 있었어.”손연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흐느꼈다.강하리의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린 채 곧바로 소리 없는 눈물이 연이어 떨어졌다.손연지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충격을 받으며 강하리의 손을 움켜잡았다.“하리야, 울고 싶으면 울어, 소리 내서 울어, 참지 말고. 이제 막 애 낳았는데 참으면 안 돼. 차라리 소리 내 울면서 다 털어내 버려.”하지만 강하리는 단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고 옆에서 지켜보던 손연지는 마음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하리야, 이러지 마, 이러지 마! 내가 이렇게 빌게. 차라리 소리 내 울어, 제발!”병실 문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을 한 구승훈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손연지는 다시 한번 눈물샘이 터지며 고개를 숙여 강하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내가 가서 먹을 것 좀 가져올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구승재는 구승훈을 침대까지 데려다준 뒤 몸을 돌려 나갔다.강하리는 슬픈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 씨, 우리 아이 ...”구승훈의 눈가가 젖어가며 강하리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해.”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그러니까... 아이가 정말 사라진 거야?”구승훈의 눈에 감출 수 없는 슬픔이
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내가 갈게.”강하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구승재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다가 강하리에게 다가갔다.“강하리 씨, 이번 일 우리 형이 반드시 제대로 처리할 거예요. 우리 형 믿어줘요.”하지만 강하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구승훈의 두 눈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가며 손을 뻗어 부드럽게 강하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하리야, 나 믿어...”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하리가 그의 손을 홱 피했고 멈칫한 구승훈은 굳어버린 손을 거두었다.“푹 쉬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병실로 나온 구승훈은 등이 피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구승재가 급히 의사를 불러 꿰매고 붕대를 감아보려 했지만 구승훈은 거절했다.“송유라한테 가.”“형, 상처는!”구승훈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하리의 고통에 비하면 이깟 상처가 뭐겠어.”순간 구승재의 가슴에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중환자실에서 송유라는 폭발에 얼굴이 다 망가진 채 구승훈을 보자 목에서 쇳소리를 냈다. 한참 후 그녀가 힘겹게 소리쳤다.“승훈 오빠...”구승훈은 차갑고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가 시켰어?”송유라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하하하, 강하리 죽었지? 그 아이도 죽었지?”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누가 널 여기로 보냈어!”“그냥 왔어. 너도 강하리도 미워서. 왜, 오면 안 돼?”“송유라!”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말하면 살려줄 수는 있어.”“웃겨! 너희는 난 살려줄 생각 없잖아. 마침 강하리와 그 아이랑 같이 죽었으니 나도 쓸쓸하지 않겠어. 좋아, 아주 좋아!”구승훈의 두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송유라, 난 널 쉽게 죽여줄 생각 없어.”구승훈은 휠체어를 밀며 밖으로 나갔다.“송유라 여기서 내보내. 밖에는 송유라가 멀쩡하고 그냥 살짝 다쳤다고만 해.”구승재는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
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가늘어졌다.바의 어둡고 밝은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깊게 가라앉았다.“최하영 씨에게 전화해서, 연성시에 있는 형수님을 잘 돌봐주라고 해. 필요하면 안현우에게 직접 손을 써도 돼.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구승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임희주 씨는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은 비웃음을 띠며 눈을 내리깔았다.“임희주는 아직 시험하고 있어. 하지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여초연이 임희주에게 그렇게 긴 시간을 주진 않을 거니까.”구승재는 잠시 형을 바라보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왜?”구승훈이 시선을 돌렸다.구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방금 형수님이 이혼 서류를 서산 퍼스트 빌리지로 보냈어.”구승훈은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가에는 쓴웃음이 맴돌았다.“정말 빠르네.”그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폭탄을 보내지 않은 걸 보면 봐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구승재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입을 다시 다물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의 정원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구승훈은 이곳에 리시안셔스를 가득 심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이 정원에서 강하리와 함께 늙어갈 거라 믿었다.하지만 텅 빈 지금의 주택은 그의 마음처럼 공허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약속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도 그 위에 놓여 있었다.구승훈은 반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자기야, 나 이혼하고 싶지 않아. 괜찮을까?”그러나 텅 빈 주택에는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다음 날, 드물게 햇살이 쨍쨍했다.강하리는 붉은색 긴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화장을 했다.가정 법원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도로 건너편에서 구승훈은 묵묵히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휴대폰은 계속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준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는 여전히 활기 넘쳤지만 구승훈이 앉아 있는 바 카운터 앞에는 텅 빈 술잔이 열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천아름은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식을 취소한 건 분명 구 대표님이면서 강하리보다 더 힘들어 보이네요.”구승훈은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서 술잔을 집어 들고 따라 마시며 말했다.“남자들에게 여자는 그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인가 봐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 구승훈에게 내밀었다.“결혼식 날, 우리 하리 사진이에요.”구승훈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메이크업실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강하리는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옆에는 천아름과 손연지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사진 속 강하리는 이후에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두 번 숨을 내쉬었다.“그날, 하리는...”천아름은 휴대폰 화면을 끄며 말했다.“그날 하리는 구 대표님을 찾으러 갔어요.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죠.”구승훈은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몸을 기울였다.천아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이유라고 물어봅시다. 구 대표님이 여태 사랑했던 여자는 강하리뿐이었잖아요. 분명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구승훈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깊게 빨아들인 후에야 대답했다.“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갑자기 재미없어져서, 결혼하기 싫어졌어요.”천아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어요. 지금이 재밌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하리 같은 여자는 아이가 있어도 구혼자가 줄을 설 걸요? 구 대표님, 후회하지나 말아요.”그녀는 의자에 걸쳐 둔 헬멧을 들고 구승훈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섰다.때마침 구승재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헬멧을 안은 채 나오는 천아름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