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재는 귀찮은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옥상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리고 예원이는 여기서 반년 동안만 부원장으로 있을 거니까 역임할 사람 미리 준비시켜두세요.”“그럼 대표님 뜻은...”이런 데엔 누구보다 빠삭한 원장인걸 알지만서도 여승재는 굳이 자신이 생각해둔 사람을 알려주었다.“피라드에서 온 일 잘하는 사람, 그리고 국민건강보험 공단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사람. 누군지 말 안 해도 아시죠?”여승재의 말에 병원장은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당연하죠, 원 선생은 안 그래도 의료계에서 다 탐내는 인재인데 사람들까지 부릴 줄 아니 부원장으로 제격이죠.”“네.”말을 마친 여승재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비서더러 병원에 남아서 민예원을 지켜보라고 하고 자신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병원장은 그런 여승재를 배웅하며 외람돼는 질문을 했다.“대표님이 직접 원 선생을 국민건강보험 협상 프로젝트에 참여시키시고 부원장으로까지 추천하는 걸 보면 두 분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어떤 사이이신지 물어도 될까요?”“제 동생이에요.”전혀 예상 못 했던 대답에 병원장이 깜짝 놀라자 여승재는 그런 그를 한번 보고는 뒤 돌아 병원을 빠져나왔다.차에 타기 전 여승재는 아까 소리가 났던 옥상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부원장도 아는 걸 왜 너만 몰라...”그렇게 롤스로이스가 병원을 떠나가는 와중에도 원서윤과 방이연은 미친 사람처럼 뛰어놀고 있었다.술을 거나하게 마신 둘은 팔과 다리를 대자 모양으로 뻗은 채 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세기 시작했다.그때 원서윤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방이연에게 물었다.“가족들 보고 싶지?”“응, 보고 싶지.”대답이 빠른 건 둘째치고 기대에 차 보이기까지 하는 방이연에 원서윤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받치며 물었다.“가족들이 너 잃어버린 건데 안 미워? 미워야 정상이잖아.”“잃어버린 거 아니야. 누나, 누가 그러는데 이런 건 그냥 잠시만 떨어져
“진짜 사랑해요, 원 비서님!”“그래도 대표님이 원 비서님은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에요.”“진짜 저더러 고르라고 하면 저는 당연히 여 대표님이랑 원 비서님이죠! 두 분 다 유능하셔서 완전 잘 어울려요.”“민예원 같은 바보랑은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우리 원 비서님이 백 배, 천 배 더 잘났죠.”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던 팀원들이 정원준의 연락을 받고 자리를 뜨자 입꼬리를 올려 웃은 원서윤은 어쩔 수 없이 단톡방에서 해명을 하기로 했다.그런데 핸드폰을 든 채로 뒤로 도니 무기력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민예원이 여승재에게 기대는 게 보였다.민예원은 입술을 깨물더니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실 제가 선생님 졸라서 해결한 거긴 하지만 직원들이 언니한테 감사 인사 하는 거 이해해요, 나한테 언니는 언제나 친구 같은 존재이고 또 어제 나랑 우리 아기도 구해줬잖아요.”“제대로 해명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애초에 잘못한 것도 없었기에 원서윤은 담담히 대꾸하며 여승재의 옆으로 지나갔다.그러다가 어제 일이 떠오른 원서윤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여승재를 향해 말했다.“룸 안에 있던 의자가 이상했어요, 알아보세요.”뒤에 있었던 일은 민예원의 연기가 맞았지만 의자에서 미끄러진 것 그녀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민예원이 자신과 여승재의 아이를 두고 그런 장난을 칠 리가 없다는 건 원서윤도 잘 알고 있었다.“원서윤 씨, 예원이는 원서윤 씨와는 달라요. 일할 때 빼고는 거리를 둬요.”원서윤을 잡지는 않았지만 할 말은 다 하는 여승재에 그나마 기분이 좋아진 민예원이 그의 팔에 기대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선생님, 괜찮아요, 언니가 저랑 아기 살려주기까지 했잖아요. 그동안의 일은 오해니까 언니 놀라게 그러지 마요.”“내가 약속한 대로 너랑 아기는 꼭 지킬 거야.”민예원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여승재에 토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원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오후쯤 되자 시청 주요 인사 중 한 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서윤 씨, 이번 정상회담에
“죄송하지만 아가씨의 개인 정보가 명단에 없습니다, 그래서...”이런 전국적인 정상회담은 그 직원들도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거친다.그래서 직원은 원서윤의 체면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이 일을 해결할 방안을 웃으며 제시했다.“소개해주신 분에게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 연락해보시는 건 어떠세요?”아주 친절한 말투였지만 그 말인즉 이렇게 어설픈 초대장으로는 절대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때 뒤에서 기다리던 부잣집 사모님들이 갑자기 소리를 높이며 원서윤을 밀어냈다.“좀 비켜줄래요? 우리 다 시간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당신이랑 우리들은 달라서 시간이 금이라고요.”거칠게 밀어대는 여자들 때문에 원서윤의 하이힐이 하필 계단 틈 사이에 껴버려 중심을 못 잡은 원서윤이 그대로 바닥에 넘어질 뻔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뭐야, 꽃뱀 주제에 초대장 위조로 안 되니까 이젠 가짜 쇼까지 하는 거야? 왜 혼자 넘어지고 난리래?”“아!”이 날카로운 비명소리는 원서윤이 아니라 민예원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다.차에서 내리던 민예원은 여승재의 팔짱을 끼고 화려하게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했는데 여승재가 빛의 속도로 앞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허공만 잡게 된 것이다.차에서 내리자마자 넘어질 뻔한 원서윤을 보고 달려간 걸 보면 다른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 “원서윤 씨, 어린애도 아니고 뭘 자꾸 넘어져요. 걸을 줄도 몰라요?”여승재가 넘어질 뻔한 원서윤을 받쳐 들자 원서윤은 민트향이 진하게 퍼지는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저 향수는 원서윤이 대학 동아리 활동을 할 때 직접 만든 향수였는데 그때 동아리 부장이 그런 말을 했었다.“후배님들, 내가 신기한 거 하나 알려줄까? 향수 만들 때 정성을 다해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대.”그때 원서윤의 소원은 여승재도 어릴 때처럼 저를 사랑해주는 것이기에 그 마음을 담아 향수를 만들었지만 바로 여승재에 의해 차가운 바다에 던져졌다.
너도나도 고고한 척 원서윤을 두고 수군거렸지만 원서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민예원을 보고 웃으며 대꾸했다.“사모님, 아직 임신하신 지 3개월도 채 안 됐는데 벌써부터 태동이 있다면 유산이나 다른 질병을 의심해보셔야 해요. 아이랑 사모님 다 건강했으면 좋겠어요.”진심으로 되는 축복을 남기고 뒤 돌아가던 원서윤이 갑자기 다시 돌아와 말했다.“아, 사모님, 산모 수첩에 혼인신고서 복사본이 없던데, 까먹으신 거예요?”“나는...”그 말에 민예원이 대꾸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고만 있다 원서윤을 두고 수군대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민예원을 보며 말했다.“설마 둘 다 첩인 거야? 그래도 저건 임신이라도 했으니 좀 더 나은가.”“임신한 게 더 젊긴 한데 얼굴과 몸매만 보면 처음이 낫지.”사모님들의 말에 남들 앞에서 치부가 까발려진 듯한 수치심이 밀려온 민예원이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눈물을 흘렸다.“선생님...”“됐어, 울지 마. 애한테 안 좋아.”제 와이프가 울자 마음이 아픈 건지 여승재는 민예원을 껴안고 원서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원서윤 씨, 그런 얕은수 쓰지 마요. 예원이는 아직 어려서 원서윤 씨 상대가 안 돼요.”“그럼 대표님이 사모님한테 저랑 거리를 좀 두라고 전해주세요, 안 그러면 저도 어쩔 수가 없거든요.”여승재에게 남은 건 증오뿐이었고 그 옛날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은 이미 먼지투성이가 돼버린 지 오래였기에 원서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뒤돌아 자리를 뜨려 했다.“원서윤 씨, 거기 서요.”하지만 원서윤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그걸 보는 여승재는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인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여승재가 사랑하는 건 민예원이고 그녀를 위해서 원서윤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또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기까지 했었다.그러면서도 원서윤이 저를 대하는 태도에 이렇게 화를 내는 게 원서윤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5년 전, 화재가 있었던 그 밤, 둘 사이에 남았던 감정은 전부 재가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던 원서윤은 사람들 틈에 끼지 않고 사거리 방향으로 걸어갔는데 로비 앞에 멈췄던 차가 다시 원서윤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싶어서 별 신경을 안 쓰던 원서윤도 1, 2분 정도 계속 따라오는 차에 일부러 걸음을 멈추어봤다.그러자 차도 바로 멈추었고 원서윤이 다시 걸으니 차가 출발하는 것이었다.반사 필름으로 선팅돼 있는 차창 때문에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에도 원서윤의 평온했던 심장이 세차게 뛰어댔다.그때 차창이 내려졌고 여전히 신사다운 겉모습을 하고 있는 유지훈이 높은 사람답게 뒷좌석에 기대앉아 원서윤을 향해 웃고 있었다.그렇게 보기만 해도 역겨운 그 얼굴이 예고도 없이 원서윤 앞에 나타나 버린 것이다.“서윤아,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네가 왜 여깄어? 왜 또 너야?!”유지훈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원서윤이 뒤에 있는 나무도 보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 탓에 등이 나무에 부딪혀버렸다.그 때문에 전해진 통증과 유지훈을 보니 떠오르는 기억에 원서윤은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그때 유지훈이 차에서 내리더니 원서윤을 부축하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언뜻 보면 다정해 보이는 둘이었지만 원서윤은 유지훈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하지만 그럴수록 유지훈은 원서윤을 꽉 껴안으며 그녀의 귀에 자신의 구레나룻을 붙이고 오랫동안 사랑한 부부 사이를 연출했다.유지훈의 미소는 어둠을 밝혀줄 태양처럼 찬란하고 뜨거우며 화사하기까지 했지만 원서윤에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온 힘을 다해 도망쳤던 지옥이 다시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서윤아, 화나서 도망간 것까진 이해해.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그렇다고 아들 그렇게 버려두고 집에 안 들어온 건 네가 잘못한 거야.”여승재와 함께 피라드에서 전 세계 탑10 미성에 선정된 만큼 유지훈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지만 원서윤에게만은 끔찍한 기억이었기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통증으로 두려움을 무마시키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유지
그 냄새에 원서윤은 가슴이 막혀와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그때 한쪽에서 민예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가 어떻게 여길 들어왔어요?”민예원 뒤로는 그녀 대신 가방을 들고 서 있는 여승재가 보였다.곧 강연을 하기 위해서인지 조금 더 짙은 색 정장으로 갈아입고 셔츠 소매가 보이게 길이를 조절한 여승재는 정말 누가 봐도 반할 것 같은 외모와 피지컬의 소유자였다.그때 유지훈이 앞으로 나서며 여승재와 악수를 했다.“여 대표님, 훌륭한 분이라고 성함만 들어봤지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네요.”“아닙니다, 유지훈 씨이야 말로 IT업계의 일인자 아닙니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각 업계의 일인자들의 만남이라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격식 있어 보였지만 사실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그 모습에 여승재의 팔짱을 낀 채 촉촉한 눈망울을 두어 번 깜빡이던 민예원도 유지훈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안녕하세요, 저는...”“여기는 제 아내, 원서윤입니다. 두 분은 이미 아는 사이시죠?”유지훈은 백조처럼 차려입은 민예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웃으며 말하자 민예원은 금세 울상을 지어 보였다.하지만 더 이상의 잡음은 만들고 싶지 않았던 원서윤이 유지훈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그만해, 나랑 여승재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면서 왜 이래, 다들 곤란해지잖아.”“응? 여보랑 여 대표님은 남매 아니었어? 그것 말고도 내가 모르는 다른 사이가 더 있어?”결국 모든 걸 까발리려는 듯 말하는 유지훈에 민예원은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려댔다.“언니, 우리 선생님이랑 진작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그런데 왜 나한테 안 말해줬어요? 설마... 나한테 뭐 숨길 게 있어서 그런 거예요?”“아가씨, 입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면 내가 여 대표님 대신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좀 도와줄까요?”서른여섯의 나이로 이미 사회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유지훈이 풍기는 카리스마와 아우라는 갓 학교를 졸업한 민예원같이 순진한 사람이 감
여승재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강연을 못 하게 되자 그를 보러온 많은 투자자들이 유감을 표했지만 덕분에 유지훈의 등장이 큰 화젯거리가 될 수 있었다.“소크 테크놀로지는 피라드에서 시작한 회사입니다. 지금의 소크 테크놀로지가 있기까지 늘 저를 믿고 지지해주셨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저랑 결혼한 지 올해로 3년이 되는 아내가 있는데요, 오늘날의 소크 테크놀로지가 있을 수 있었던 건 다 제 아내 덕분인 것 같습니다.”나스닥 IPO에 상장하기 전 소크 테크놀로지의 기업 가치는 70조였는데 그런 기업이 상장에까지 성공한다면 그건 IT업계에 새 시대를 불러오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제 아내가 고향을 너무 그리워해서 경항시에 돌아오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남편으로서 아내의 뜻에 따라주고 싶어서 소크 테크놀로지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유지훈의 강연이 끝나자 회의실에는 큰 파장이 일었다.해외에서 상장할 기회를 저버리고 오직 아내를 위해 소크 테크놀로지의 본부까지 이전하며 국내에서 새로 시작하겠다는 유지훈의 사랑꾼 면모는 기삿거리로 삼기 딱 좋은 소재였다.많은 사람들이 실명까지 공개하며 도대체 누가 유지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내인지 궁금해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건 그들을 향한 비판이었다.소크 테크놀로지에게 있어 지금은 아주 중요한 시기인데 사랑 때문에 그 좋은 기회를 저버리는 유지훈과 이기적이게 남편의 사업도 신경 쓰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버린 원서윤 둘 다 어리석다고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있었다.정상회담이 끝나자 유지훈은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원서윤을 감싸며 그곳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이미 퇴근한 기사에 유지훈이 직접 운전을 하게 되자 원서윤은 뒷좌석에 타려 했지만 이미 조수석 문을 열어놓은 유지훈이 입을 열었다.“서윤아, 넌 왜 자꾸 내 기분을 나쁘게 해?”“유지훈, 너 나스닥 상장 포기하고 소크 테크놀로지 국내로 이전한 거 나 때문이 아니잖아, 난 그냥 네 핑계일 뿐이지?”차 옆
친인척 하나 없는 피라드의 매정한 거리에서 원서윤은 정말 죽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려던 그때, 원서윤 앞에 신사다운 남자 하나가 나타나서 웃으며 말했다.“죽고 싶어요? 며칠만 더 살아주면 안 돼요? 버리려고 했던 목숨 나 좀 빌려줘요, 나한테 당신이 너무 필요해요.”그 남자의 말에 홀려 원서윤은 또 다른 지옥으로 제 몸을 내던졌다.“아!”“아아아!”원서윤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비싸 보이는 거, 아니 던질 수 있는 건 모조리 집어던지고 깨부쉈다.그렇게 원서윤은 산발이 된 채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두려운 것도 아니었고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그렇다고 절망적이지도 않았다.그저 원서윤은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이 너무 추워서,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추워서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또 다른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 같아 숨이 막혀왔다.그때 원서윤의 핸드폰이 울렸고 여승재에게서 온 친구신청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원서윤, 왜 나 차단해?]여승재가 다른 번호로 보낸 친구신청임을 알기에 원서윤은 무시했지만 여승재는 포기하지 않고 1, 2분 건너 한 번씩 친구신청을 보내왔다.[다시 추가해.][별장 안 갖고 싶어?][왜 전화도 안 받는 거야?][원서윤, 보고 싶어.][우리 계속 보던 데서 기다릴게.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할 말이 있어.]“원 선생님? 원 선생님!”“원 선생님이 자해를 하시다가 과다출혈로 쓰러진 것 같아, 얼른 병원으로 모셔!”원서윤이 시끄럽다고 컴플레인을 넣었던 사람들도 피를 흘리며 실려 나가는 그녀를 보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그 와중에 원서윤의 핸드폰은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밟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이튿날 아침, 커튼을 뚫고 얼굴에 비치는 눈 부신 햇살에 원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곧바로 들려오는 유지훈의 목소리에 원서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서윤아, 이젠 이런 식으로 나 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