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았으면, 나는 아마 도준의 말에 감동하고 그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 오는 어느 밤, 도준은 서슴없이 정희에게 생리대를 가져다주러 달려갔다. 반면, 임신 초기 감기로 아파하던 나에게는 아침까지 참으라는 차가운 한마디만 돌아왔었다. 또 주방에 갑자기 나타난 뱀에 놀라 비명을 질렀을 때는 나를 예민하다고 핀잔을 주었으면서, 정희가 집에 작은 나방 몇 마리 보였다고 하자 점심시간까지 포기하고 달려갔다. 정희가 자신의 매력을 자랑할 때마다 도준과 성훈은 그녀를 따라 부잣집 남자와의 맞선 자리에까지 갔다. 그런가 하면 수정이 임신 초기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이 부어오를 때조차, 성훈은 바쁘다는 핑계로 병원에 함께 가지 않았다. 이런 남자들을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다니,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뺨이라도 때리고 싶을 만큼 어리석었다. “소용없어.”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가 무릎 꿇고 빌어도 바뀔 건 없어.” 수정은 발이 아픈 듯 구두를 벗어 손에 든 채, 성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나정희에게 모든 탓을 돌린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져? 결국 나정희에게 기회를 준 것도 너희 자신이었잖아!” 성훈은 식은땀을 닦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수정아, 네 말이 맞아. 난 변도준과 달리 정말 다 인정해, 변명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제발, 이혼만은 하지 말자, 응?” 도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성훈을 쳐다봤고, 나는 그 모습에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서로를 끌어내리는 모습이라니, 정말 끝까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그때, 도준이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치기 시작했다. “아진아, 네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주성훈과 달라! 주성훈은 입만 살았지, 난 행동으로 보여주잖아!” 도준의 얼굴은 금세 부어오르고 흉측하게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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