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훈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수정의 손을 꽉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가자.” 아이를 낳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사산의 고통을 겪었지만, 자연 분만이었기에 그나마 몸이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정은 낙태 수술을 받았고,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으면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내 동생을 돌보고 지켜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도준이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냥은 못 가!” “아이를 잃은 게 화재 때문일 수 있어도, 정희가 자살을 시도한 건 너와 관련이 있잖아!” “너랑 서수정은 반드시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아야 해!” 성훈 역시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의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맞아, 이대로는 못 가. 정희는 항상 착하고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왔어. 네가 질투심 때문에 정희를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그러면서 성훈은 손에 수갑을 들고 위협하듯 내밀었다. 그들의 말이 터무니없어서 나는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택배 상자에 우리 이름이나 연락처라도 적혀 있었어?” 성훈은 당황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정희 집 주변에 CCTV라도 있겠지?” “그 상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건네주거나 문 앞에 두고 갔을 거 아니야?” 나는 냉소를 멈추지 않고 덧붙였다. “너희 둘은 며칠 동안 정희 곁을 지키면서도 전혀 알지 못한 걸, 유산 후 입원해 있던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그들의 얼굴에 할 말 잃은 표정이 서렸다. 그때, 응급실에서 정희가 침대에 실려 나왔다. “정희야!” 도준은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갔고, 성훈도 뒤따랐다. 정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도준 오빠랑 성훈 오빠... 제가 또 괜히 걱정을 끼쳐 드렸네요...” 하지만 성훈은 조급하게 물었다
“아니, 난...” 도준은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불길 속에서 수정에게 업혀 나오던 때가 떠올랐다. 숨이 턱턱 막혀 목구멍과 폐가 칼에 베이는 것 같았고, 배 속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흘러내리는 피가 나를 산산조각내는 것 같았다. 그때 얼마나 무력했던가? 얼마나 사랑하는 남편이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랐던가? 의식이 흐려지면서도, 그저 도준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 주길 간절히 원했다. 마치 기적처럼 그가 나를 안아주고 “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 있어”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죽을 듯한 고통 속에서 홀로 사산의 아픔을 견디고, 그 후에도 혼자 외롭게 의식을 잃었다. 도준은 내 옆에 단 한 번도 있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것들을 그에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준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나를 실망시키며 내 삶을 갉아먹을 뿐이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운전석에 앉아있던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이 남자 때문에 제 아이가 죽었어요. 지금도 저를 괴롭히고 있으니 빨리 출발해 주세요.” “뭐야, 그런 거였어?”기사는 이미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도준에게 쏘아보며 침을 퉤 뱉었다. “남자 망신 다 시키고 있네!”그리고 힘껏 엑셀을 밟아 택시를 출발시켰다. 도준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택시 문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그대로 땅에 쓰러져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더 이상 내 일이 아니었다. 도준을 떨쳐내고, 나는 수정과 함께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새 옷과 화장품을 사고, 호화로운 호텔에 들러 푹 쉬고 따뜻
지금의 도준은 마치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비참하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연애할 때부터 결혼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렇게 불안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꾸짖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모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잘못을 깨달았다고 해서 무조건 용서해줘야 하는 건 아니야.”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변도준. 우리는 정말로 끝났어.” “아진 누나, 제발! 우린 이제 진실을 알아냈어!” 성훈이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 아파트 배전실에서 접지를 끊고 방화 장치를 설치한 사람은 정희였어! 정희는 일부러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고층 빌딩 옥상에 가서 자작극을 벌인 거야. 우리 둘 다 자기를 구하러 오게 하려고 했던 거라고!” “목적은 우리 둘이 위급한 순간에 누구를 선택할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거였어!” “그리고 그 택배 상자에 들어있던 쪽지들도 전부 정희가 직접 만든 거였어. 서아진, 네 말이 맞았어. 정희는 악독한 여자였는데, 우리는 멍청하게도 정희가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믿은 거야. 완전히 속았어!” 성훈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얼굴로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가 정말 잘못했어. 큰 잘못을 했어. 너희 둘에게 상처를 줬고, 아이까지 잃었어.” “그런데 정말로 정희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그저 친구로 지냈을 뿐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애초에 너희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야.” “아진 누나, 수정아,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줄 수 없어?” 성훈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를 간절히 바라봤다. 지금껏 그가 나를 ‘누나’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야 그 단어를 꺼내다니,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 순간, 수정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이 찍힌 자극적인 사진을 꺼내 보이며 냉소했다. “이게 네가 말하는 그냥 친구라는 거야? 친구끼리 옷 벗고 서로 몸을 더듬고 그래?”
예전 같았으면, 나는 아마 도준의 말에 감동하고 그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 오는 어느 밤, 도준은 서슴없이 정희에게 생리대를 가져다주러 달려갔다. 반면, 임신 초기 감기로 아파하던 나에게는 아침까지 참으라는 차가운 한마디만 돌아왔었다. 또 주방에 갑자기 나타난 뱀에 놀라 비명을 질렀을 때는 나를 예민하다고 핀잔을 주었으면서, 정희가 집에 작은 나방 몇 마리 보였다고 하자 점심시간까지 포기하고 달려갔다. 정희가 자신의 매력을 자랑할 때마다 도준과 성훈은 그녀를 따라 부잣집 남자와의 맞선 자리에까지 갔다. 그런가 하면 수정이 임신 초기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이 부어오를 때조차, 성훈은 바쁘다는 핑계로 병원에 함께 가지 않았다. 이런 남자들을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다니,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뺨이라도 때리고 싶을 만큼 어리석었다. “소용없어.”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가 무릎 꿇고 빌어도 바뀔 건 없어.” 수정은 발이 아픈 듯 구두를 벗어 손에 든 채, 성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나정희에게 모든 탓을 돌린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져? 결국 나정희에게 기회를 준 것도 너희 자신이었잖아!” 성훈은 식은땀을 닦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수정아, 네 말이 맞아. 난 변도준과 달리 정말 다 인정해, 변명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제발, 이혼만은 하지 말자, 응?” 도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성훈을 쳐다봤고, 나는 그 모습에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서로를 끌어내리는 모습이라니, 정말 끝까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그때, 도준이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치기 시작했다. “아진아, 네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주성훈과 달라! 주성훈은 입만 살았지, 난 행동으로 보여주잖아!” 도준의 얼굴은 금세 부어오르고 흉측하게 변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며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다. 간간이 주시하는 그들의 시선에는 우리가 언제라도 도망갈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두 남자를 다시 볼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단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었다. “좋아, 이렇게 하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 당장 각자 뛰어서 꽃 한 다발씩 사 와. 차도 타지 말고, 택시도 부르지 말고, 무조건 뛰어야 해. 누가 먼저 오느냐에 따라 우리가 용서를 고려할지도 모르지.” 나는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체크하며 말했고, 수정도 눈치채고 곧바로 맞장구쳤다. “맞아! 그렇게 하자!” “알겠어, 수정아!” “아진아, 걱정하지 마. 나는 소방관이라 체력 훈련을 매일 하니까 쟤보단 빠를 거야!” 두 사람은 마치 마지막 기회를 잡기라도 한 듯 얼굴에 희망이 어린 채 서둘러 달려나갔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자, 나는 수정과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빨리 좀 가주세요! 변태 두 명이 쫓아오고 있어요!” 도준과 성훈이 우리가 사라진 걸 깨달았을 때는 한참 뒤였다. 그들의 전화는 당연히 연결되지 않았고, 우리는 이미 새 번호로 바꾸었고 떠날 준비까지 완벽히 마친 상태였다. 이제부터는 우리만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차례였다. 다음 날, 뉴스는 빠르게 보도되었다. 정희는 악의적인 방화와 허위 신고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도준과 성훈 역시 병원에서 벌인 소란 장면이 누군가에 의해 촬영되어 인터넷에 퍼지면서 파문이 일었다. 결국, 둘은 공직에서 해임된 것은 물론, 6개월간 구류 처분까지 받았다. 그들의 고향에 있는 부모들조차도 그들과 연을 끊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자초한 결과였다. 그리고 나는 수정과 함께 새로운 도시에서 작은 꽃집을 열었다. 매일 향긋한 꽃내음에 둘러싸여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일상이
결혼식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랑 동생이 모두 임신했다. 내가 출산을 열흘 앞둔 어느 날, 아파트에 갑작스럽게 화재가 발생했다. 집안은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차 올랐고, 나는 숨이 막혀 금세 진통이 시작되었다. 두 다리를 타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정신은 몇 번이나 아찔하게 흐려졌다.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답변뿐이었다. [서아진, 지금 출동 중인데 내가 네 전화에 일일이 답해야 하냐?] [정희가 지금 정체 모를 범인에게 옥상에 묶여 있는 상황이야!] [그러니 헛된 전화 좀 그만 걸고 가만히 있어!] 남편은 내 말을 끊어버리듯 전화를 툭 끊었다. 다시 걸어보았지만, 이미 전원은 꺼져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날 구해준 건 다름 아닌 동생, 수정이었다. 수정은 연기를 뚫고 달려와 나를 등에 업은 채 아래층으로 데려갔지만, 그 또한 무리한 탓에 유산의 징후가 나타났다. 아파트 경비원은 이번 화재가 방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배전실의 접지가 일부러 잘려 있었다는 것이다. 수정은 다급히 자신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비난뿐이었다. [너희 자매는 왜 이렇게 매사에 유난을 떠는 거야?] [정희를 유괴한 범인을 아직 잡지 못했으니, 제발 전화 좀 그만 걸어!] [나랑 변도준은 처음부터 너희 자매랑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역시나 전화는 냉정하게 끊어졌다. 결국, 나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를 잃었고, 수정 또한 소중한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 그 후,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깊은 고통 속에서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 지금 내 몸은 여전히 쇠약하고,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찾고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기운이 빠져갔다. 드디어 다섯 번째 시도 만에 변도준이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또 뭐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
한때 나는 결혼 후 매일이 행복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도준은 정희의 고소공포증을 기억하면서도, 내 임신 중 천식과 건강 문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 숨 막히는 연기 속에서 나는 호흡이 곤란해 핸드폰을 몇 번이나 떨어뜨렸고, 격렬한 진통으로 인해 옅은 노란색 드레스가 붉게 물들어갔다. 그런데 도준은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거의 의식을 잃어갈 무렵에야 겨우 전화를 받았다. “여보, 나... 배가 너무 아파... 제발 구해줘...” 내 목소리는 힘이 빠져 간신히 들릴 정도였고, 단어 하나하나를 제대로 내뱉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전화 너머로 들려온 건 정희의 울음소리였다. [너무 위험해요, 도준 오빠. 제발 나 구하러 오지 마요!] 순간, 내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불길은 이미 아파트 전체로 번져 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도준은 망설임 없이 나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프다 아프다, 매번 아프다고만 하냐. 다른 사람들도 아이를 가졌어도 너처럼 유난 떨진 않아!] [네가 금수저로 자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건데!] [난 지금 당장 구조하러 가야 해. 더 이상 전화하지 마!] 도준은 나의 고통이나 다급함을 전혀 모르는 듯,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갈수록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 다시 외쳤다. “안 돼! 피, 피가 흐르고 있어...” [아악! 도준 오빠, 저 너무 무서워요!] 그러나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건 정희의 비명 소리였다. 그러자 도준은 참지 못하고 인내심을 잃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피가 나면 곧 아이가 태어난다는 거 아니야? 이런 것도 내가 다 알려줘야 해?] [왜 매번 내가 출동할 때마다 귀찮게 전화를 거는 거야!] [정희가 지금 옥상에 묶여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네가 혼자 병원에 전화해서 의사를 부르면 되잖아. 내가 의사야?] 도준은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우리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문에 나와 수정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자라야 했고, 수정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난 수정이가 손가락 하나 다치는 것조차 가슴이 아플 정도로 그녀를 소중히 아끼며 보살펴왔다. 그런데도 나는 눈이 멀어 그토록 귀한 수정에게 주성훈이라는 사람을 소개해주고, 결혼까지 시켜버렸으니...우리는 진심을 다해 사랑을 주고, 고된 임신의 시간을 버텼다. 하지만 그 결과가 두 남자의 비열한 장난감이 되는 운명이라니, 마음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허...” 수정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훌쩍이며 울음을 쏟아냈다. 눈가를 훔친 그녀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고, 화면 속에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 속에서 도준은 상의를 벗고 강한 허리에 로프를 묶고 있었고, 그의 품에는 정희가 안겨 있었다. 정희가 도준의 보호 속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장면,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급하게 달려오는 경찰 제복의 주성훈까지...모든 것이 한 편의 영화처럼 담겨 있었다. 정희는 마치 기사들이 지켜주는 공주같아 보였고, 그 모습은 방금 전 정희가 올린 SNS 게시물 속에서 한층 더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정희는 게시물에 이런 도발적인 문구까지 남겨두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방관 오빠와 경찰 오빠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댓글 창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선택은 필요 없어! 나는 둘 다 가질 거니까!] [이 세 사람, 그냥 결혼시켜 주세요! 이미 영화 한 편이네요.] [진짜 베드 엔딩이 예상되는 멘트다.] 난 쓴웃음이 나면서 가슴 속 깊이 아픔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아프게 찔렀던 건, 사진 속 정희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 펜던트가 바로 도준과 주성훈의 결혼 반지와 같은 디자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결혼식 때 네 사람의 반지가 똑같아서 우정의 증표인 줄로만 알았어.” “근데 알고 보니, 그 반지가 남성용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