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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침묵 사이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30 챕터

제1화 왜 아무 말도 안 해?

강인아는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고,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인아는 천천히 음식을 집어 들고 주방으로 걸어가 다시 데웠다.12시 50분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인아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유희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장을 한쪽 팔에 걸치고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채 천천히 다가왔다. 인아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해 둔 해장국을 내밀었지만, 희도는 단번에 쳐내버렸다. 국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희도는 인아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의 입술이 강제로 인아의 입술을 탐하였고, 술 냄새와 함께 낯선 여자의 향수 냄새가 그녀를 감쌌다. 인아는 두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희도는 더욱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고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침실에서 희도는 인아를 침대 위로 던지듯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인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묵묵히 그 모든 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벽 한쪽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는 것이 그저 유일한 선택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더 이상 사랑도 애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희도의 욕망뿐이었다. 희도는 인아의 얼굴을 억지로 돌려 그녀를 깊게 바라보며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가 알았던 진실은 인아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모순된 감정의 분출처럼 들렸다.인아는 대답 대신 희도의 손을 살며시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고양이처럼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부볐다. 그것이 인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희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의 감정은 폭발 직전인 듯 보였다.그는 인아의 손목을 더욱 세게 쥐고,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로 고정시킨 채 다시 입술을 덮쳤다....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방 안을 비출 때, 인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옆은 텅 비어 있었고, 욕실에서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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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애마저 벙어리로 태어나면 어쩔 거니?

인아는 그 소리를 듣고 몸이 살짝 떨렸다. 희도가 화가 난 듯 보여, 그녀는 서둘러 수화를 이어갔다.“죽이 입맛에 안 맞아요?”희도는 셔츠 깃을 잡아당기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 얼른 먹어.”그러나 희도가 음식을 먹지 않자, 인아는 수화를 멈추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희도의 차가운 눈빛이 그녀를 따라다녔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인아가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가 출발하자, 도로 옆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창밖의 나무들은 마치 달아나는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인아는 그런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어린 시절, 인아는 유씨 가문에 입양되었다. 당시 유정석은 인아를 친손녀처럼 아껴주었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늘 인아를 걱정했다. 3년 전, 유정석은 자신의 마지막 소원으로 희도에게 인아와 결혼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인아를 책임지지 않으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했다. 그때 희도에게는 이미 연서라는 연인이 있었다. 하지만 유정석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던 희도는 결국 마지못해 인아와 결혼을 결심했다.그러나 결혼 후에도 희도는 인아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녀에게 특별히 차갑게 대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따뜻한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는 점차 침묵이 자리 잡았고, 그들은 가장 익숙한 낯선 사람으로 변해갔다.오늘 유씨 가문은 희도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의 백일잔치로 온종일 북적였다. 인아는 희도의 뒤를 따라 번잡한 앞마당을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에서는 장희정이 외손자를 안고 활짝 웃으며 아이와 놀고 있었다. 그러나 인아를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인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장희정은 냉담하게 외면하며 계속 딸과 대화를 나눴다.“외손자가 외삼촌을 닮는다고 하더니, 정말 그러네. 이 녀석 희도가 어렸을 때랑 똑같이 생겼어.”유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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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여기서 뭐해?

희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분하게 말했다.“희연아, 물건은 여기 두고 우린 이만 가야겠어.”희연은 순간 당황한 듯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빠, 왜 이렇게 서둘러? 아직 안 온 사람도 많고, 식사라도 하고 가야지.”“아니야, 회사에 일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해.”희도는 인아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냉정했고, 그 모습에 희연은 화가 치밀었다. 희연은 희도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예전에는 인아를 감싸는 모습이 이해가 됐지만, 결혼 후 희도는 그녀를 괴롭히지도, 그렇다고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 집을 떠난 이후 그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아이를 지웠을 때조차 희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연서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그렇다고 인아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희도는 여전히 인아를 보호하는 듯 보였고, 이혼을 하려는 의지도 전혀 없었다. 그 모순된 태도가 희연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차에 오른 희도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연기가 차 안에 서서히 퍼졌다. 인아는 그의 옆에서 조용히 앉아 담배가 다 탈 때까지 기다렸다. 담배 연기가 옅어질 무렵, 희도는 인아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인아는 여전히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애완동물처럼 보였다. 희도는 그 모습을 보고 속이 더 답답해졌다. 인아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걸까? 왜 여전히 이렇게 순종적인 걸까?“아까 희연이 한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희도는 담담하게 물었다. 인아는 수화로 대답했다.“무슨 말이요?”희도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아이를 가지는 것 말이야.” 희도는 인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입가를 당기며 겨우 다시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그 미소는 차갑게 굳어갔다.인아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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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래도 화가 나지 않는 거야?

연서는 옆에 서 있던 인아를 힐끗 바라보다가, 인아의 목덜미에 남아 있는 희미한 키스 마크를 발견했다. 연서는 속으로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여기 오지 않으면, 널 어떻게 찾겠어?” 희도는 인아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일해.” 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서를 지나쳐 카페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이곳은 인아가 간신히 찾은 일자리였다. 많은 곳에서 그녀를 거절했지만, 이 카페만이 인아를 받아주었다. 인아가 사라지자, 연서는 희도의 팔짱을 끼며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화났어?” 희도는 차에 타서 이야기하자며 차갑게 반응했다. 그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연서가 자신의 팔을 끼고 있어도 떼어내지 않았다. 차에 타기 전, 연서는 가방에서 작은 소독제를 꺼내 들었다. 조수석에 몇 번 뿌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소독 좀 해야지.” 그 자리는 방금 인아가 앉았던 자리였다. 연서는 그 자리가 불길하게 느껴져 내심 불쾌했지만, 겉으로는 그저 장난처럼 보였다. 희도는 연서의 행동을 무심히 바라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연서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뒤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인아는 차가운 눈빛을 감추며 속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희도가 연서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들의 모든 관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인아에게 매번 상처를 남겼다. 사랑받는 사람은 언제나 당당할 수 있다. 희도는 연서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무례한 행동을 해도 그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아내를 모욕하는 순간조차도.소독이 끝난 연서는 만족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희도의 손을 다시 잡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됐어. 이제 화 풀어, 응? 앞으로는 이혼 얘기 안 할게.” 희도는 연서를 무척 아꼈지만, 그녀가 이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표정은 굳어졌다. 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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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참 바보 같아

누군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기대 있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살짝 풍기며 공기를 감쌌다. 인아는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이 카페의 사장, 문서영이었다. 서영은 178cm의 큰 키에 짧은 머리, 검은 티셔츠와 캐주얼 바지를 입고 있어, 말을 하지 않으면 종종 남자로 오해받곤 했다. 그녀의 차림새는 언제나 간결하면서도 당당했고, 그런 모습이 그녀를 더욱 특별하게 보이게 했다. 인아가 처음 이 카페에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서영은 장난스럽게 인아의 볼을 꼬집었고, 인아는 당황해서 크게 놀랐었다. 그때 인아는 서영이 남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서영이 미소를 지으며 ‘나는 여자야’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놀라움에 웃음이 터졌다.인아는 걸레를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수화로 말했다. “이제 익숙해졌어요.” 서영은 인아의 수화하는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힐끗 살펴보았다. 서영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익숙해졌다’라는 말이 서영에게는 너무 많은 슬픔과 억울함을 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서영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인아에게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 인아 씨가 좋아하는 크림 밀크티야. 오늘은 모두에게 한 잔씩 돌렸어.” 인아는 감사의 수화를 보내고 크림 밀크티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크림이 입가에 묻자, 서영은 손가락으로 그 크림을 닦아주며 또다시 인아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참 바보 같아.” 서영의 말 속에는 약간의 아련함과 애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말은 마치 무언가 더 깊은 의미를 암시하는 듯했다. 인아의 볼은 약간 통통하고, 눈은 크고 속눈썹은 길었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로 사람을 응시할 때면 마치 작은 강아지처럼 순진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서영에게는 안쓰럽고 동시에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서영은 자주 인아의 볼을 꼬집곤 했다. 처음엔 인아가 조금 어색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익숙해졌다. 익숙함이란, 때로는 무서운 것이기도 했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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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얘는 누구예요?

서영은 인아의 헬멧을 벗겨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인아가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커피는 기적처럼 멀쩡했다. “이 사람들 정말 미쳤나 봐. 이렇게 큰 회사에 커피머신 하나도 없다니, 믿을 수가 없네.” 서영은 투덜거리면서도, 인아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인아 씨, 여기서 잠깐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서영은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남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고, 찬 공기는 곧 겨울이 올 것임을 알리는 듯했다.인아는 빗방울이 퍼붓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처음 유정석과 함께 유씨 가문에 들어갔던 날에도 비가 이렇게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 겁에 질린 인아는 유정석의 뒤에 꼭 붙어 숨어 있었고, 아홉 살의 희도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때 희도는 유정석에게 이렇게 물었다. “얘는 누구예요?” 유정석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네 신부야. 마음에 들어?” 그때 아홉 살의 희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원숭이 같은 애는 신부로 안 삼아요.” 그 시절의 인아는 말랐고,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해서 정말로 원숭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 희도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좀 더 먹어. 그렇게 말라서 어떻게 내 신부가 되겠어?” 그 말이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린 인아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인아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니, 출근하기 싫어지네. 나 먼저 갈게.” 연서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회사 문을 나서고 있었다. 비에 젖은 인아를 발견한 그녀는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도 인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강인아?”연서의 말이 통화 너머로 희도에게도 들리는 듯했다. 연서는 인아를 한 번 훑어본 뒤,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희도 찾으러 온 거예요?”인아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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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저는 계속 일할 거예요

회사 로비에서 희도는 연서의 부어오른 발목을 걱정스럽게 살펴보았다. 연서의 발목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고, 연서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희도를 외면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희도가 묻자, 연서는 화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보안 요원이 다가와 희도에게 CCTV 영상을 담은 태블릿을 건넸다. “대표님, CCTV 영상입니다.” 희도는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인아가 일하는 곳과 문서영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서영의 또 다른 정체도 알고 있었다. 희도는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연서에게 말했다. “병원에 데려다줄게.”그러나 연서는 희도의 무덤덤한 반응에 화가 치밀어, 더욱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 안 갈 거야! 차라리 다리가 부러져버렸으면 좋겠네. 내연녀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낫잖아!” 희도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연서의 짜증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그만하고 병원 가자.” 연서는 단호하게 외쳤다. “안 간다니까!” 희도는 연서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연서를 조용히 안아 들어 밖으로 나갔다....인아는 서영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 있었다. 빗줄기가 인아의 얼굴을 차갑게 때렸고, 서영의 따뜻한 등 뒤에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감쌌다. 비는 차갑고 매서웠지만, 서영의 등은 그와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인아는 서영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23년 동안 유정석과 희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인아를 위해 나선 적이 없었다. 서영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진정한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서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을 감싼 인아의 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빗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그녀의 등에 닿는 순간, 서영도 인아의 슬픔을 이해하는 듯했다. 인아는 서영의 등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오랜만에 마음 놓고 흘릴 수 있는 눈물이었다.서영은 카페로 돌아가지 않고, 인아를 그녀가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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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혼해요

인아는 입술을 꼭 다문 채로 오랫동안 희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그의 옷자락을 천천히 놓아주고, 거실의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탁자 아래 서랍을 열었다. 희도는 뒤따라가 인아가 서랍에서 꺼낸 이혼 서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서류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희도는 그 서랍을 열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그 서류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희도는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인아는 희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응시하며 수화로 말했다. “이혼해요.” 희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나랑 장난치는 거야?”그러나 인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흔들어 수화를 이어갔다. “장난이 아니에요. 이혼 서류는 오래전부터 주려고 했어요.”사실, 인아는 이혼 서류를 오래전부터 건네주고 싶었지만, 늘 용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속 무언가가 달라졌다. 혹시 친구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고열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졌기 때문일까? 서류를 꺼내 들었을 때, 인아는 오히려 마음의 짐이 덜어진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가슴 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드디어 뽑힌 듯했다. 희도는 인아를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확인하듯 묻기 시작했다. “문서영 때문이야? 그래서 나랑 이혼하겠다는 거야?”인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수화로 답했다. “아니에요. 서영 씨 때문이 아니에요. 내가 이혼하고 싶어서예요.”인아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고, 그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희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소파에 털썩 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대신 빈손으로 나가. 그동안 너한테 쓴 돈 다 갚으면 이혼해줄게.”인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희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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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사과해

큐브는 A시에서 유명한 부자들의 천국이자 사적인 클럽이었다. 이곳에 모여든 남자들은 모두 A시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인아는 생애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소박한 옷차림은 화려한 조명 아래 빛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어울리지 않았다. VIP룸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중 서영도 있었다. 서영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리며, 방 안의 남자들보다도 더 여유롭고 태평한 모습이었다. “오빠, 지금 나더러 유 대표님께 사과하라는 거야?” 서영은 그렇게 말하며, 유 대표, 즉 희도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연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희도는 아무런 표정 없이 소파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이 그의 상반신만 비추고 있어,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 신비로움과 차가운 위압감을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문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조용히 중재하려 했다. “연서 씨에게 사과하면 모든 일이 끝날 거잖아.” 서영은 그 말에 비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내가 왜 저 여자한테 사과해야 해? 저 여자가 뭔데?” “문서영, 제발 그만 좀 해.” 연서가 희도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영은 겁 없이 연서에게 대놓고 도발을 걸고 있었다. “장난? 아니, 난 진심이야. 저 여자가 꼴 보기 싫어서 때린 건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서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려다 발목 통증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나와 희도는 원래 사귀고 있었어!” 서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연서를 흘겨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강인아는 10년 넘게 유희도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 넌 어디 있었지?” “그건 다르잖아! 강인아는 고아일 뿐이잖아. 유씨 가문이 불쌍해서 키워준 거지.” 쾅-연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도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술잔은 너무 세게 내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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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오늘 정말 끝장을 볼 생각이야?

쾅- 술병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며 서영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술과 섞여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벌어졌고, 방 안에 있던 그 누구도 서영이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서영아!” 서준은 깜짝 놀라 서영을 부축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서영은 사과를 하느니 차라리 술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고집스러운 성격을 보였다. ‘얘는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걸까?' 서영은 서준의 품에 기대면서도 희도를 향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됐죠? 아직도 화가 안 풀렸으면 더 해보시죠.”그러면서 다시 술병을 집어 들려 했지만, 서준이 서둘러 그녀의 손을 막았다. 서준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고, 그는 붉어진 눈으로 희도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희도야, 우리는 30년을 함께 지내온 사이야. 오늘 정말 끝장을 볼 생각이야?”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인아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혼란 그 자체였다. 인아는 서둘러 서영에게 다가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죄책감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의 눈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다. 서영도 인아를 보며 힘겹게 물었다. “인아 씨, 여기 왜 온 거야?” 희도 역시 짜증스러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불렀어?” 구석에 있던 용국이 머뭇거리며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제가 불렀어요.” 인아는 희도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연서를 슬쩍 쳐다보았다. 연서는 희도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고, 그 손에는 두려움과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려는 미묘한 감정이 엿보였다. 희도는 인아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며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방 안은 일순간 긴장감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인아는 조용히 연서 앞에 멈춰 섰다. 연서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인아를 응시하며, 자신감을 보여주듯 턱을 치켜들었다. 잠시의 침묵 후, 인아는 연서에게 고개를 숙이고 수화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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