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은 그녀를 잊지 못해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100 챕터

제21화 임신 4주, 태아 상태 정상

김주혁은 31년 동안 살아오면서 아이에 관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단지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말랑말랑한 아기가 품에 안겨있는 모습이거나 장난꾸러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만 연상될 뿐이다.자신의 아이가 그 언젠가 작은 핏덩이가 되어 싸구려 휴지에 싸인 채 쓰레기통에 버려질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무덤에 함께 버려질 줄이야.안서희는 권진아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저 멀리 걸어갔다.권진아가 머리를 돌려 그를 힐긋 바라보자 안서희가 손등을 톡톡 치면서 더는 보지 말라고 곁눈질했다.김주혁은 그녀와 알고 지낸 지 3년이 넘었지만 이토록 냉정하고 단호한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다.안서희는 늘 얌전하고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다. 학교 다닐 때 매번 전교 1등을 차지한 공부 천재였고 선배님들 앞에서 순순히 말을 잘 듣는 편이지만 뼛속에는 지기 싫어하는 아집을 갖고 있다.아쉽게도 김주혁은 온화하고 다정한 그녀의 겉모습만 봐왔을 뿐 이토록 단호하게 무언가를 결정하는 모습은 처음 겪었다.안서희가 방금 했던 말은 김주혁도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그녀는 모든 걸 꼼꼼하게 고려했다. 아이의 심신 건강과 두 사람 각자의 인생, 심지어 몇 년 뒤에 있을 재산 상속까지 철저하게 고려했다.애초에 이 아이의 거취를 고려할 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그녀는 줄곧 이해득실을 따지며 심사숙고해왔다.김주혁은 애써 회상해보았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일을 계기로 이런 결심을 내린 걸까?안유진이 한사코 그들과 함께 리조트로 놀러 가겠다고 했을 때?아니면 오늘 아침 김주혁이 그녀를 찾아가 이혼을 언급했을 때?안서희는 심지어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김주혁에게 알릴 생각조차 안 했다.오늘 종업원이 마침 그녀의 지갑을 줍지 않았다면, 또 그가 마침 지갑을 열고 안에 담긴 임신 진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 자신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김주혁과 안서희는 종래로 서로의 물건을 뒤지는 습관이 없다. 각자의 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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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그 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안유진은 그가 이토록 쌀쌀맞게 나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듯싶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지금은 일단 김주혁에게 화해를 구해야 하니 자세를 낮춰야 하는 수밖에 없다.나중에 좀 더 지내다 보면 주도권을 앗아올 수 있다.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김주혁으로 반드시 되돌려놓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안유진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목소리가 좀 다운됐네? 서희 씨는 찾았어?”“응...”“그럼 서희 씨가 아이 앞세우면서 협박한 거야? 아니면 이혼을 빌미로 재산을 노렸어? 걱정 마 주혁아. 이혼 소송은 내 전문이야. 이번 일은 나한테 맡겨. 걔 무일푼으로 나앉게 해줄게.”“안유진!”순간 김주혁이 나지막이 외쳤다.“서희 네가 말한 그런 사람 아니야! 그 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김주혁마저도 원하지 않았다...그의 대답을 들은 안유진은 놀랍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근데 뭐가 걱정이야? 너무 잘 됐잖아.”안유진은 활짝 웃으며 말투도 홀가분해졌다.“안 닥터도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라고 해. 괜히 또 애 데리고 와서 아빠 찾아준다고 난리 피우면 안 되잖아. 지금은 법률상 그 아이가 네 재산을 분할 받을 수 있지만 별문제는 아니야. 미리 유서를 작성해서 전 재산을 우리 애한테 주겠다고 하면 돼...”김주혁은 저도 몰래 야유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안서희는 안유진이 상속법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진작 귀신같이 예측했었다.전화기 너머로 안유진이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주혁아, 실은 나... 너랑 상의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뭔데? 말해.”“우리가 직접 서희 씨를 만나서 의논할 수도 있어. 배 속의 아이를 지우고 더는 너에게 집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일정한 금액의 돈을 건네는 거야. 서희 씨 집 한 채 장만하고 싶다고 했잖아. 계약금 우리가 대신 내주면 서희 씨 소원도 이루고 우리도 평생 후환을 제거하는 거야.”“...”“근데 이거 계약서처럼 확실하게 써놔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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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이거 태우고 싶어

안유진은 그가 오늘 왜 이토록 이상한 건지 드디어 알아챘다.그녀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네가 사랑한 사람은 나잖아. 아니야?”“...”“우린 나중에 결혼할 사이야. 그 아이가 있으면 우리 행복한 삶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아이 갖고 싶은 게 소원이면 그건 너무 쉽지!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테고 너랑 같은 김씨 성을 따를 거잖아.”“...”“너도 너무 깊게 생각할 거 없어. 서희 씨 고작 임신 4주라며. 그건 아예 아이라고 할 수도 없지. 한 수정란, 세포, 아니 심지어 그냥 핏물일 뿐이야...”“됐어, 그만해.”김주혁의 머릿속에 핏물로 물든 종이 뭉치가 떠올랐다. 빨갛게 물든 종이가 그의 심장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그래서 대체 언제 올 거냐고? 이따가 함께 저녁 먹어.”“나 좀 혼자 있고 싶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산부인과에서 의료폐기물 처리센터까지 고작 200미터 남짓한 거리이다.수년간 의사로 지내오며 발이 닳게 다녔던 곳이라 평소에는 2분 안에 왕복으로 달려올 거리인데 오늘은 무려 2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것도 권진아의 부축을 받으면서 말이다.간헐적 복통이 발작할 때면 너무 아파 식은땀이 마구 맺히고 하는 수 없이 멈춰 서서 숨을 깊게 몰아쉬어야 했다.권진아는 그 모습이 너무 속상해 고개를 돌리고 몰래 눈물을 훔쳤다.“진아야.”권진아는 얼른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물었다.“응? 왜 그래?”“라이터 있어?”“나 담배 안 피워서 당연히 없지. 라이터는 갑자기 왜?”“이거 태우고 싶어.”안서희는 손에 쥔 종이 뭉치를 쳐다봤다.“의료폐기물은 대부분 분쇄, 매립으로 처리되는데 이것까지 그 악취 나는 물건들이랑 함께 묻혀두고 싶지는 않아서.”권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바로 가서 빌려올게.”“누구한테 빌리게?”“물어봐야지. 여기서 잠깐만 쉬고 있어.”안서희가 그녀를 붙잡았다.“병원은 금연이라 경비원들도 없을 거야.”권진아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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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삼 년, 천 일이란 시간은 결국 거짓이 아니었음을

시간이 지나면? 대체 얼마나 지나야 하는 걸까?한 시간? 하루? 한 달? 그것도 아니면 일 년일까?안서희는 이 남자가 과연 얼마 만에 고통에서 벗어날지 가늠이 안 됐다. 그가 무려 20여 년 동안 기다렸던 애인이 돌아왔으니 꿈에도 그리던 그 여인과 극적으로 다시 행복에 빠져들 테고 또한 아이에 관한 일은 금세 잊히겠지.일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일이 네 가지가 있다면 신혼 첫날밤, 대학 입시 통보를 받은 날, 오랜 가뭄 끝의 단비, 그리고 타향에서 옛 지인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대학 입시 통보를 받은 것’과 ‘타향’ 이 두 소재를 제외하면 김주혁은 무려 두 가지 일을 이루고도 절반을 더 이룬 셈이다.사업이 승승장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으니 아마 요즘이 그의 삶에서 가장 기쁜 나날일 지도 모른다.한편 그 아기라면...아니 어쩌면 고작 수정란이겠지,. 이건 그가 31년 동안 살아온 인생에서 아주 희미하고 작은 유감으로 남을 것이다.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있으니 나중에 둘만의 아이가 생길 테고 두 명, 세 명 낳아서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듯싶다.슬하에 귀여운 자녀를 두고 사랑하는 아내가 옆에서 지켜주는 더없이 아름다운 나날을 보낼 듯싶다...권진아는 그녀를 호텔에 데려가지 않고 본인 집으로 향했다.권진아의 부모님은 일찌감치 딸아이에게 집을 마련해줬는데 평수가 너무 크진 않아도 H시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매우 고급스러운 단지였다.눈부신 아침 햇살이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올 때 그녀는 한창 창가 옆에 앉아서 바깥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일 년 중 가장 완연한 늦봄이라 아파트 단지에 수목이 푸르싱싱하게 자라서 생기가 차 넘쳤다.이때 교복 차림의 한 남자아이가 집 아래에 서서 돌멩이를 줍더니 위에 힘껏 내던졌다. 그 돌멩이는 결국 여자아이의 방 안에 있는 창문 유리에 부딪히고 말았다.여자아이는 재빨리 집 밖으로 내려가 배시시 웃으며 남자아이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남자아이는 교복 지퍼를 열고 안에서 따끈따끈한 찐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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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아이 지운 거 후회해?

안서희도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됐다.26살은 완전히 성숙한 나이라 어른답게 이별을 대처할 수가 있다.권진아는 그해 한창 충동적인 나이 17살이었던지라 죽었다 다시 깨어난 경험이었을 것이다.안서희가 물었다.“넌 그때 어떻게 버텨냈어?”이에 권진아가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버티긴 뭘 버텨. 그냥 그렇게 지나온 거지. 이 세상이 너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 시간이 약이란 말, 틀린 것 하나 없더라.”안서희도 머리를 끄덕였다.결국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줄 것이다.그녀는 힘든 시간이 두려운 건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이 순간들이 좀 더 빨리 지나갔으면, 좀 더 많이 단축됐으면 하는 마음일 뿐이다.이때 권진아가 갑자기 야릇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눈을 깜빡였다.“이별을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거라는데. 내가 몇 명 소개해줘?”안서희가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내가 지금 그럴 기분이야?”그녀는 단순히 이별만 겪은 게 아니었다. 안서희는 살며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어제 수술한 뒤로 너무 아파서 밤새 잠을 설쳤고 지금도 은은하게 배가 조여오는 느낌이다.권진아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서희야, 이 아이 지운 거 후회해?”안서희는 입술을 날름거리다가 머리를 흔들었다.이에 권진하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어제 네가 한 말 들었을 때 이미 알겠더라고. 넌 이 아이의 거취에 대해 일찌감치 결정을 내린 거였잖아.”“맞아.”“네 선택 존중해.”권진아가 말을 이었다.“그 선택이 잘못됐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어.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알아?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거야.”그녀가 문득 철학적으로 변해버렸다. 안서희의 결혼 생활에서 영감을 받은 건지 요즘 따라 권진아는 SNS에 슬프고 감수성이 풍부한 문구와 이미지를 빈번하게 올리고 있다.안서희가 따분할 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게시물을 보게 되면 몇몇 사람들이 이런 댓글을 남기곤 했다.[실연당했어?][실연은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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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그와 안유진의 커플 프사

안서희가 카톡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정말 프사가 바뀌어버렸다.원래 프사는 맑고 예쁜 구름 한쪽이었는데 지금은 귀여운 남자아이 캐릭터로 되어 있었다. 그 아이는 오른쪽을 향해 입술을 쪽 내밀었다.그렇다면 안유진의 프사는 왼쪽을 향해 뽀뽀하는 여자아이 캐릭터겠지.김주혁의 평상시 스타일과 전혀 안 어울리는 프사, 또한 커플 프사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내용... 어쩐지 권진아가 벌컥 화내더라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끼익하는 문소리와 함께 권진아가 베란다 문을 열고 거실로 돌아왔다.안서희는 휴대폰을 옷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권진아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그 모습에 안서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뭘 찾는 거야?”“네 핸드폰 어디 있어? 왜 안 보이지?”“창가 옆에 뒀다가 떨어질까 봐 그냥 옷 주머니에 넣어뒀어. 그건 갑자기 왜?”권진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어깨를 다잡고 환하게 웃었다.“아니야, 아무것도. 나도 똑같은 생각이었거든. 여기가 16층이라 만에 하나 떨어지면 산산조각 날 걸.”안서희가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즘 휴대폰 적당히 봐. 눈 나빠질라.”“응.”안서희가 고분고분 대답했다.“방금 누구한테 전화한 거야?”“음, 그게... 너 모르는 사람. 그 자식 악담 중독이라 살짝 혼냈더니 얌전해지더라고.”권진아의 말을 들은 안서희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역시 우리 진아 최고.”권진아는 턱을 치키고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휴대폰을 못 보게 하니 안서희는 얌전히 TV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다만 평일 대낮이라 그런지 볼만한 방송이 없어서 리모컨을 들고 이리저리 채널만 돌리며 좀처럼 정착하지 못했다.평상시에 출근할 땐 바삐 돌아쳐서 발이 땅에 닿지도 않을 지경이지만 몸은 피로해도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 막 출근한 것 같은데 고개를 들어 보면 벌써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갔다.그러던 중 갑자기 한가해지고 충족한 시간이 생기자 안서희는 오히려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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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권진아는 얼떨결에 그 남자에게 끌려서 소파 쪽으로 가더니 앞에 내민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한편 그 남자는 마침 권진아의 자리, 바로 안서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편 매너를 지키며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이에 안서희도 썩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말소리가 적당히 들리는 딱 그 정도의 거리였다.노래가 시작되고 쓸쓸한 이별 장면의 뮤비가 재생됐다.한때 이별의 잔잔한 미련을 담은 노래, 아직도 여전히 노래방 애창곡으로 꼽히는 그 유명한 노래였다.안서희는 눈에 띄게 어여쁜 외모는 아니지만 참하고 단아한 모습이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고 우아하면서도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권진아는 그녀를 보면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지고 온화해지는 기분이라고 했었다.“자, 시작해요...”안서희는 마이크를 잡고 리듬을 타는 그 남자와 함께 천천히 노래를 불렀다.“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오늘도 난 너의 흔적 안에 살았죠...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도,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의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네가 있어 그래...”남자 가수의 노래라 음역이 낮은 덕인지 안서희의 목소리와 유난히 잘 어울리고 듣는 이에게 매우 편안하고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이때 옆에서 누군가가 권진아의 팔을 툭툭 쳤다.“진아 뭐야? 네 친구 노래 엄청 잘하잖아. 못 부르긴?”권진아도 한창 수박을 한 입 깨물다가 그녀의 노랫소리를 듣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나도 몰랐어. 서희 노래방 온 적이 없어서 나도 지금 처음 듣거든.”“야 뻥 치지 마. 다들 20대 중반인데 노래방이 처음이라고?”“진짜라니까. 널 속여서 뭐해? 우리 서희는 그 귀하다는 의느님이야. 의대 다니랴, 병원 출근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쳐요. 어디 너처럼 종일 빈둥거리는 줄 알아?”상대가 살짝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장담하는데 서희 씨 무조건 와봤어. 단지 너랑 안 온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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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8년 전 연애편지

안서희는 머쓱한 듯 웃으며 티슈를 건네받았다.“고마워요.”“가사 참 좋죠?”“네, 그러네요.”“이래서 옛날 노래가 좋은가 봐요. 늘 마음속 깊이 담아뒀던 그 감정을 끌어내주고 저도 몰래 눈물이 흐르죠.”안서희는 순간 마음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 고유준은 지금 그녀가 울음을 터트린 걸 난처해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수습해주고 있었다.실례를 범한 건 옛날 노래의 짙은 호소력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만나서 반가워요, 고유준이에요. 저랑 진아는 집안 대대로 친하게 지내왔어요.”“아 네. 저는 안서희예요.”“얘기 많이 들었어요. 센트럴 병원의 최연소 산부인과 전문의이자 H시 의료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분이시죠.”안서희는 그의 말을 듣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유준 씨도 의사에요?”고유준이 대답했다.“네. 다만 저는 해외에서 의대 나왔고 올해 막 귀국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동종업계였네요.”“그러게요. 그럼 우리 편하게 말 놓을까? 노래 너무 잘 들었어.”고유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허례허식이 아니라 진짜 잘 불렀어. 네 목소리가 이 노래랑 완전 찰떡궁합인 것 같아.”“그래? 고마워. 아마도... 감정 몰입이 돼버렸나 봐.”이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툭 걸쳤다. 화들짝 놀란 안서희가 고개를 돌리자 권진아가 한창 뒤에 서 있었다.그녀는 원래 가운데 자리에 앉아 수박을 먹고 있었는데 언제 이리로 달려온 걸까?권진아도 안서희의 눈빛을 마주하고 배시시 웃었다.“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이에 고유준이 대답했다.“노래 가사랑 일적인 얘기 중이었어.”“서로 꽤 잘 통하나 봐. 유준이 너 말수 적은 거로 아는데 오늘은 좀 한다?”안서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말뜻을 이해 못할 리가 없다.그녀는 권진아의 손등을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눈치를 줬다.“함부로 나오지 말자.”이에 권진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내가 뭘?”“그 입 다물고 있어 제발 좀.”권진아는 입술을 삐죽거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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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짝사랑

고유준이 어깨를 들먹였다.“아쉽게도 귀국할 때 짐을 잃어버려서 가져오지 못했어.”권진아가 다급하게 물었다.“그럼 그 연애편지에 뭐라고 적혀있었는지 기억나?”“오래전인데 기억 날 리가 있겠어?”안서희가 말했다.“그리고 연애편지니까 당연히 고백하는 내용이겠지. 아니면 좋은 시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유준아, 네가 직접 말해봐.”가십거리가 노래보다 훨씬 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권진아는 사람들을 일고여덟 명 정도 불러왔다. 과일을 먹던 사람, 술을 마시던 사람, 노래를 부르던 사람까지 전부 몰려들었다.사람들에게 물 샐틈 없이 둘러싸인 안서희는 마치 동물원의 동물이 된 것만 같았다.고유준이 덤덤하게 말했다.“그 연애편지 똑똑히 기억나. 첫마디가 바로...”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계속 말했다.“남대문이 열렸는데.”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고유준이 또 말했다.“커 보여였어.”쨍그랑.누가 걷어찼는지 테이블 위의 과일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유리그릇이 산산조각이 났고 과일도 여기저기 널브러졌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권진아가 안서희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더니 마치 자식을 다 키운 어머니처럼 뿌듯해했다.“안서희, 너 대박인데?”고유준이 한마디 보충했다.“글재주가 있더라고. 라임도 맞췄던 것 같고.”안서희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목까지 다 빨개졌다.“아니, 그게 아니라.”안서희가 다급하게 설명했다.“내가 쓴 게 아니라 내 룸메이트가 쓴 거야. 그때 걔가 어떤 사람을 좋아했었는데 그게 너인 줄 몰랐어. 그냥 나한테 가리키니까 연애편지를 네 폴더 안에 넣었던 거야. 근데... 그때 주변에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넣은 거 어떻게 알았어?”고유준의 두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하늘의 뜻인가 봐.”허무맹랑한 해명에 룸 안의 분위기가 다시 설렘으로 변했다.안서희는 지금까지 이런 상황을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남학생들이 고백한 적은 있었지만 다 학교를 다닐 때라 거의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를 좋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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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날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

안서희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이쪽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얼버무리다가 그냥 웃어 보였다.“아니야, 괜찮아.”“그래서 넌?”“내가 뭐?”“어떤 스타일 좋아해?”말문이 막힌 안서희 대신 권진아가 대신 대답했다.“다정하고 매너 있고 또 집안 조건이 괜찮아야 해. 자기가 하는 일이 있고 얼굴도 잘생기면 더 좋고.”권진아가 얘기한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은 김주혁이었다.그 얘기를 들은 고유준이 덤덤하게 웃었다.“잘생긴 거 말고 다른 건 내가 다 만족하는 것 같은데? 물론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권진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삐죽거렸다.“너도 잘생기긴 했어. 조금 다른 잘생김이야.”고유준이 그녀의 뜻을 알아챘다.“서희 씨... 좋아하는 사람 있어?”그때 뒤에서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가볍게 말했다.“이미 헤어졌어.”안서희가 권진아를 쳐다보자 권진아는 바로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내가 말한 거 아니야. 진짜로.”그러고는 한 남자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입 좀 다물라고 하니까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사과해!”남자는 고개를 움켜쥐고 깨갱 했다.“미안, 미안.”고유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급할 거 없어. 헤어지는 것도 과정이 필요하니까. 일단 자신부터 챙기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 만나든 해야지.”안서희는 고유준이 참 정서가 안정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진짜로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칠팔 년 동안 짝사랑만 하고 전혀 티를 내지 않은 건 물론이고 매너도 있고 다정한 사람이라면 멘탈이 엄청 강한 사람일 것이다.안서희는 또 저도 모르게 김주혁이 떠올랐다.평소 다정하고 젠틀했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 순간 거칠고 사납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면서 거의 통제 불능이 돼버렸다.함께한 후에는 행복한 모습을 바로 자랑하기도 했다. 마치 어제 병원 문 앞에서 부들부들 떨던 사람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안 닥터.”안서희는 꿈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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