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은 그녀를 잊지 못해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100 챕터

제1화 완전히 다른 사람

“서희야, 서희야...”그의 낮고 부드러운 중저음이 귓가에 맴돌았다.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안서희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의 김주혁과 침대 밖에서의 김주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평소 김주혁은 다정하고 매너도 있었지만 밤마다 부부 관계를 할 때면 안서희는 그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해 힘에 부칠 정도였다.겨우 버티다가 끝났을 때 안서희는 온몸이 쑤셨고 팔도 들지 못했다.김주혁이 그녀의 팔을 갑자기 덥석 잡았다. 지쳐버린 안서희는 눈을 뜰 힘도 없어 부탁하면서 애교를 부렸다.“그만 해요. 내일 우리 출근해야 하잖아요.”요즘 승급 준비에 안서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보고서를 다 작성했을 때 이미 새벽이 되었지만 또다시 김주혁에게 끌려 잠자리를 가졌다. 안서희는 너무도 힘들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김주혁이 가볍게 웃었다.“뭔 생각 하는 거야?”안서희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다.“그럼...”김주혁은 가늘고 긴 커다란 손으로 안서희의 어깨를 잡고는 욱신거리는 곳을 마사지해주었다.힘이 셌고 또 마침 아픈 곳만 꾹꾹 눌러 시원한 느낌이 순식간에 온몸에 퍼졌다. 안서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시원해?”김주혁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변치 않은 다정함에 안서희의 두 볼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산부인과 의사인 그녀는 사실 이쪽 지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론은 빠삭했지만 실전은 서툴기 그지없었다. 진짜 관계를 할 때면 그녀 자신이 봐도 심하게 모를 정도였다.다행히 김주혁은 참 젠틀한 사람이었다. 평소 다른 신혼부부들처럼 깨가 쏟아지진 않아도 그래도 서로 존경하며 사이좋게 지냈다.사실 안서희도 보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맞선을 통해 알게 된 사이라 연애는 건너뛰고 바로 결혼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꽤 잘 지내는 정도였다.“지금 움직여 봐. 어때? 좀 나았어?”안서희는 다시 어깨를 움직였다. 마사지 덕에 확실히 많이 가벼워졌다.“고마워요. 많이 나았어요.”
더 보기

제2화 여자의 촉

조수 임수경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선생님, 산모님 남편분이랑 아는 사이였어요?”안서희는 눈앞의 익숙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 경악과 놀라움, 그리고 불안이 섞여 있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여자에 대한 걱정이 가장 많았다.지금 충분히 억제하고 있는데도 두려움과 다급함은 숨기지 못했다.“당신이 저 환자...”안서희가 수술실 안을 힐끗거렸다.“남편이에요?”임수경이 한발 먼저 말했다.“네. 아까 수술 동의서에 사인한 가족이 바로 이분이에요.”안서희는 온몸이 으스스해졌고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았다.“그래요...”김주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서희야, 나중에 내가 다 설명할게.”안서희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의사라면 의사답게 행동해야 하기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수술 아주 성공적으로 잘됐고 산모와 아기 모두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근데 아직 유산기가 있으니까 며칠 병원에 입원해서 주사 맞아야 해요. 입원해서 아무 문제 없다면 주말에 퇴원해도 됩니다.”김주혁도 그제야 시름을 놓은 듯했다.“알았어.”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이어 말했다.“고생했어, 서희야.”“아니에요. 저분이 누구 아내든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살려냈을 거예요.”안서희는 사무실로 들어와 찬물 한잔을 들이마셨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이 겨우 진정되었다.그러다가 십여 분 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희야, 나야.”안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김주혁의 낯빛이 아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붉어 있었고 미간 사이의 걱정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조금 전 수술실 밖에서 너무 놀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김주혁의 흰 셔츠에 핏자국이 묻어있었고 옷도 잔뜩 구겨져 있었으며 옷소매가 다 젖어 있었다.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여자를 안고 병원에 오다가 양수가 묻었거나 아니면 조금 전 병실에서 그 여자가 흘린 눈물이거나.안서희는 의자로 돌아가 덤덤하게 물었다.“가서 봤어요?”
더 보기

제3화 잘 아는 사이

의외냐고?사실 그리 의외는 아니었다.안서희와 김주혁은 자연스럽게 만나 연애해서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3년이나 함께 살았기에 김주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김주혁은 그래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대표처럼 상대를 숨 막히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말도 다정하게 했고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처리하는 점잖고 듬직한 남자였다.그런 김주혁을 이성을 잃게 만든 여자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안서희는 헤어졌던 연인이 서로 울며불며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하며 마음의 준비까지 다 마쳤지만 현실은 늘 생각과 많이 달랐다.그녀가 본가로 들어갔을 때 집에 임신부 한 명이 있었다.그런데 임산부는 안서희의 시어머니인 백금희와 나란히 앉아있었고 김주혁은 홀로 싱글 소파에 앉아있었다. 안서희를 본 김주혁은 평소처럼 빠르게 일어나 외투와 가방을 받았다.“내가 걸어줄게.”시어머니도 아주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서희 왔어? 얼른 와서 앉아.”“어머님.”안서희는 시어머니에게 인사한 후 옆에 앉은 임산부를 보며 물었다.“이분은...”그러자 백금희가 웃으며 말했다.“소개할게. 얘는 유진이라고 옆집 안승호 씨네 딸이야. 얼마 전까지 남편이랑 해외에서 살다가 최근에 귀국했어. 유진아, 쟤는 주혁이 와이프야. 방금 얘기했었지?”임산부는 배를 만지면서 천천히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안유진입니다.”안서희가 놀라며 대답했다.“안녕하세요.”“우리 다 안 씨네요?”백금희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그러게. 주혁이 안 씨랑 인연이 있나 봐.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가장 친한 친구랑 와이프가 안 씨인 걸 보면.”안유진이 말했다.“그러게요. 이모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어요. 내 수술도 안 선생님이 해주셨어요.”백금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정말?”“네.”안유진이 안서희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아직 선생님한테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그때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랑 아이 지금 이렇
더 보기

제4화 가장 친한 친구

안서희는 지갑에 넣은 검사서를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준비 안 했어?”김주혁이 가볍게 웃었다.“됐어. 우리 안 선생님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시간 내서 밥 한 끼 해준 것만 해도 엄청 좋은 선물이지, 뭐.”“주혁 씨, 다음 주에 휴가 냈는데 우리 나가서 며칠 놀다 와요.”김주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요즘 보고서 쓰느라 바쁘지 않아? 그럴 시간 있어?”“시간 조절할 수 있어요.”김주혁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이참에 다녀오자.”“그래요.”안서희가 되물었다.“주혁 씨 일에 지장 주는 건 아니죠?”“다음 주에 가잖아. 이번 주에 일 다 미리 처리하면 돼.”“그럼 다행이고요.”김주혁이 말했다.“내일은 낮에 출근해? 아니면 당직이야?”“다른 사람이랑 바꿔서 내일 휴식이에요.”김주혁이 또 말했다.“내일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나랑 같이 가자.”3년 동안 김주혁의 아내로 살면서 안서희는 그의 친구들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굳이 만나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이번에 생일 선물을 주겠다던 약속을 갑자기 어긴 바람에 이 부탁은 들어주기로 했다.“알았어요.”...1박 2일 동안 뜬 눈으로 보낸 안서희는 그날 밤에 아주 푹 잤다. 깨어났을 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의사 특성상 환자가 위급할 때 언제든지 병원에 나가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주혁과 한 침대에서 자긴 하지만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백금희가 말했다.“서희 깼어? 주혁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안서희가 재빨리 나가보니 익숙한 하얀 카이엔이 세워져 있었다. 다가가서 조수석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는데 눈앞의 상황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안에 있던 사람도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안 선생님?”“안유진 씨?”안유진은 오늘 특별히 치장까지 했다. 배가 나오긴 했지만 빨간 원피스에 검은 머리를 풀어
더 보기

제5화 그냥 사모님이라고 불러요

김주혁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주행하여 달려오는 스쿠터를 본 순간 다급하게 핸들을 꺾으면서 급브레이크를 밟고 길가에 멈춰 섰다.다행히 스쿠터와 부딪치지 않고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안서희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다 하얗게 질렸다.“운전할 때는 딴 데 정신 팔지 말아요.”“알았어.”김주혁도 놀라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휴대전화를 안유진에게 돌려주었다.“스스로 해제해.”그런데 안유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나 지금 메이크업 수정하잖아. 휴대전화 쥘 손이 없어.”“나 운전해야 하는데...”“지금 안 하잖아.”안서희는 한숨을 내쉬고는 김주혁에게 말했다.“그럼 휴대전화 나 주고 비번 말해요. 내가 해제할게요.”“알았어.”김주혁은 휴대전화를 안서희에게 건넸다.“비번은 ryx2...”“주혁아, 뭐 하는 거야?”안유진이 갑자기 화를 내더니 거울을 옆에 던지고는 안서희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확 빼앗은 후 김주혁에게 던졌다.“내 비번 남한테 얘기해선 안 돼.”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김주혁과 안서희와 달리 안유진은 난감한 기색이라곤 없었고 심지어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안유진은 뒷좌석의 안서희를 돌아보며 웃었다.“미안해요, 선생님. 임신해서 호르몬 변화 때문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요. 선생님은 이해하죠?”“네...”안유진이 말했다.“현대 사회라 휴대전화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많잖아요. 난 그저 내 사생활을 지켰을 뿐이지, 선생님한테 화를 낸 게 아니에요.”안서희가 웃으며 말했다.“변호사는 역시 다르네요.”그러자 안유진이 대답했다.“직업병이에요.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선생님.”“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그냥 사모님이라고 불러요. 여긴 병원도 아니고 유진 씨 주치의도 아니에요. 그때 그냥 임시로 수술해줬을 뿐이에요.”하지만 안유진은 완곡하게 거절했다.“수술해줬으면 당연히 선생님이죠. 주치의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리고 어제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이라 불러서 적응했는데 호칭 갑자기 바꾸는 것도 이상하고요
더 보기

제6화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을까?

“그 사람 와이프입니다.”앞에 있던 두 남자가 놀란 두 눈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당신이...”“안서희입니다.”넋이 나간 두 사람을 보며 안서희가 웃으면서 물었다.“오늘 동창 모임이라고 들었는데 가족을 데려오면 안 되나요?”“아, 그건 아닌데...”“그럼 들어갈게요.”안서희는 가방을 들고 칵테일 바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모임에 온 사람이 정말 많았다. 동창들 속에서도 주목을 받은 김주혁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인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안서희는 그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아무 자리나 잡고 앉았다.칵테일 바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김주혁은 더운지 양복 외투를 벗어서 팔에 걸었다. 그런데 누군가 양복을 받으면서 말했다.“내가 들어줄게.”김주혁은 그녀의 손을 피해 버렸다.“괜찮아. 내가 들고 있으면 돼.”안유진이 가볍게 웃었다.“오늘 네가 취해서 쓰러지기 전까지는 애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양복 나 주고 애들이랑 편하게 마셔.”김주혁은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안유진은 양복을 받고 옆에 내려놓는 게 아니라 계속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김주혁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고개를 숙이라고 했다.김주혁은 고분고분 상체를 숙이고 그녀의 키에 맞게 귀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안유진이 뭐라 속삭였는지 김주혁의 두 눈이 반짝이면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둘이 무슨 귓속말 했어?”활발한 성격의 안유진이 바로 말했다.“미리 얘기하는데 오늘 내가 주혁이 옆에 있을 거니까 적당히들 해. 술 너무 많이 주지 마. 알았어?”“아이고, 유진이 너 주혁이 걱정하는구나?”그러자 안유진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걱정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김주혁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유진이 결혼했어. 임신한 거 안 보여?”친구들은 김주혁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김주혁이 한마디 한 후 더는 농담을 건네지 않았다. 김주혁의 옆에 있던 남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더 보기

제7화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주혁이 지금 좀 취했다는 건 안서희는 알고 있었다.술 대신 물을 담았던 작은 병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는데 아무래도 물을 다 마신 듯했다. 몇몇 친구들이 김주혁을 둘러싸고 자꾸 술을 권했다.안유진은 임신한 상태라 술에 취한 남자들을 말릴 수가 없었다. 옆에서 한참 동안 소리를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결국 강제로 몇 잔을 마신 바람에 김주혁은 비틀거리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 모습에 안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한데 주혁 씨한테 가봐야겠어요.”최민재는 더는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가봐요.”안서희는 재빨리 다가가 금방 따른 김주혁의 술잔을 가로챘다.“어머, 저 여자는 누구야?”안서희는 다른 걸 신경 쓸 새도 없이 김주혁의 팔을 잡고 물었다.“주혁 씨, 괜찮아요?”김주혁은 한참 동안 그녀를 빤히 보고서야 누군지 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두 사람의 목소리가 하도 낮아서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 안서희가 종업원인 줄 알고 다가와 잡아당기려 했다.“당신이 뭔데 우리 주혁이 옆에 와? 팔자 좀 바꾸겠다고 못 하는 짓이 없네...”김주혁은 남자의 손을 밀어내더니 안서희를 뒤쪽으로 당기면서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건드리지 마.”“주혁아, 저런 여자를 왜 감싸고 돌아? 딱 봐도 너한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거잖아. 저런 여자 나 많이 봤어...”“우리 와이프야.”남자는 갑자기 술이 다 깨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김주혁의 뒤에 있는 안서희와 안색이 창백해진 안유진을 번갈아 보면서 의아해하며 물었다.“저 여자가 와이프면 유진이는?”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안유진에게 쏠렸다.안유진은 아직도 김주혁의 양복 외투를 들고 있었는데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고 눈시울도 붉어졌다.“내가 말했잖아. 그냥 친구라고.”얼굴의 웃음이 어찌나 부자연스러운지 누가 봐도 억지로 짜낸 미소였다.바보가 아닌 이상 안유진의 표정을 보면 다른 복잡한
더 보기

제8화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

안유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되받아쳤다.“나랑 주혁이 20년 넘은 친구라는 거 알 사람은 다 알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몰아가야겠어요? 그럼 앞으로 그냥 동성 친구만 만나야겠네요. 이성이면 오해하니까.”안서희가 바로 대답했다.“이성 친구가 당연히 있을 순 있죠. 근데 남녀유별이라는 말 몰라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결혼했잖아요. 조심할 건 조심해야죠.”안유진이 코웃음을 쳤다.“의학을 배운 선생님이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까지 따질 줄은 몰랐네요. 지난주에 날 수술해줄 때 수술실에 남자 의사도 들어왔었어요. 그때 내가 싫다고 했었는데 선생님이 뭐라 했죠? 의사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어요.”“그 남자 의사는 마취과 의사였어요.”“그런데요? 난 여자고 그분은 남자잖아요. 게다가 산부인과 수술인데 이럴 때는 남녀유별 따지지 않나요? 앞뒤가 너무 안 맞는 거 아니에요?”안서희는 힘 빠진 모습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안유진 씨,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비교해선 안 되죠. 그때 유진 씨 출혈이 심했고 또 한밤중이라 당직을 선 마취과 의사가 남자 의사밖에 없었어요. 만약 그때 수술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잃을 수도 있었다고요. 아이 목숨이 중요한가요, 남자 여자를 따지는 게 중요한가요?”안유진은 팔짱을 낀 채 불만을 드러냈다.“아무튼 선생님은 의사니까 의사가 뭐라 하면 그런 거겠죠. 그때 내 아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누가 알겠어요?”안유진이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자 안서희도 드디어 분노가 끓어올랐다.“유진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다른 뜻은 없고 그때 선생님이 갑자기 병원으로 불려와서 수술을 한 거면 왜 여자 마취 선생님은 안 되냐는 거예요.”“당신...”“남자 마취 선생님도 내 수술실에 들어오는데 주혁이 바지 주머니에서 키 꺼내는 게 뭔 큰일이라고 그래요?”“그만들 해!”김주혁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한참 후에야 똑바로 섰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안서희에게 건네고는 다정
더 보기

제9화 이혼할래?

안서희를 믿어서인지, 아니면 켕기는 게 없어서 당당한 건지 김주혁은 휴대전화 잠금 비밀번호를 설정하지 않았다.안서희가 그의 휴대전화를 뒤질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설정하지 않았나?사실 안서희는 김주혁의 휴대전화를 뒤져보는 버릇이 없었다. 하나는 그동안 김주혁이 완벽한 남편이라서 뒤져볼 필요가 없었고 다른 하나는 안서희도 프라이버시를 존중했다.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성인이라면 자신만의 비밀이 있기에 지켜줘야 했다.그런데 휴대전화가 계속 진동한 바람에 안서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여 결국 휴대전화를 들고 답장했다.[안서희예요. 주혁 씨 지금 샤워 중이라 휴대전화 나한테 있어요. 씻고 나오면 답장하라고 할게요.]이 답장을 보내자 휴대전화가 바로 조용해졌다.김주혁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안서희는 이미 잠이 든 듯했다. 안 좋은 꿈을 꿨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깰까 살금살금 걸어가 베개 위의 휴대전화를 챙겼다. 한참 동안 뒤져보다가 다시 조용히 베란다로 향했다.안서희는 베란다를 등지고 누워있었는데 그가 나간 후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예민해서 누군가 가까이 오면 바로 깼다. 조금 전 김주혁이 베개 위의 휴대전화를 챙길 때 벌써 잠에서 깼다.베란다 쪽에서 옅은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김주혁은 능숙하게 담배를 피웠다. 아무래도 예전에 꽤 많이 피운 것 같았다.3년 동안 그는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어서 집에 재떨이도 없었다. 그런데 안유진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짧은 며칠 사이에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벌써 세 번이나 봤다.곧이어 베란다 쪽에서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방금 샤워하느라 인제 봤어.”“...”“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서희는 너한테 위세를 부리는 게 아니야.”“...”“아니야. 서희는 그런 사람 아니야. 사실 괜찮은 여자야. 평소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나쁜 마음은 없다고.”“...”“알았어. 믿을게. 믿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산모가 울면 아이한테 안 좋아.”“...”“알았
더 보기

제10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권진아가 화들짝 놀랐다.“뭐?”“4주래. 검사한 지 얼마 안 됐어.”“...”안서희는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이번 생일에 생일 선물로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 사람한테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닐 수도 있겠어.”권진아가 마음 아파하며 그녀를 위로했다.“좋은... 소식일 수도 있지. 안유진도 임신했잖아. 주혁 씨가 아무리 안유진을 좋아한다고 해도 남의 자식을 키우려고 하겠어? 주혁 씨 그동안 너한테 잘해줬잖아. 어쩌면 진작 그 여자한테 마음이 식었고 너랑 행복하게 살길 원할 수도 있어. 그냥 이번에 안유진이 갑자기 돌아와서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도 이해는 돼. 안유진이 떠나면 두 사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권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0년 넘게 짝사랑한 감정은 그냥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 밑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 그건 김주혁만 알고 있었다.권진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애를 봐서라도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만약 그래도 안유진을 선택한다면 나랑 같이 가서 애를 지우자.”이튿날, 안서희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다. 김주혁이 집에 없어 홀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의사의 아침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회진을 돌고 산모의 상태에 따라 지시를 내려야 했다. 안서희는 임수경에게 몇몇 산모의 특수 상황과 요구를 얘기한 후에야 사무실로 들어와 물을 마실 여유가 생겼다.문을 열자마자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김주혁인 걸 확인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김주혁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서희야, 병원 갔어?”“회진도 다 마쳤어요.”“미안. 아침에 일찍 와서 병원에 데려다주려 했는데 사정이 생겨서 못 갔어.”안서희는 가볍게 웃으면서 일부러 물었다.“사정이요?”“...”“회사 일인가요?”“응...”김주혁이 다급하게 말머리를 돌렸다.“오늘 다섯 시에 퇴근하지? 데리러 갈게. 같이 집에 가자.”본가에서
더 보기
이전
123456
...
10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