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또 한 번의 거절: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제21화

병실에 들어서자 안경을 쓴 채 침대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엄마, 오늘은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개나 소나 찾아오지 않으면 더 빨리 나았을 텐데 말이야.”주현정이 신문을 넘기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배지유는 뻘쭘한 얼굴로 침대 옆에 앉았다.“엄마, 사실 그때 ‘야밤의 대본 리딩’은 오해였어요.”당시 손보미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감독이 흑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밤늦게 방까지 찾아갔다. 모든 건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본인을 희생한 대가로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다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에 걸어 나오는 순간 마침 집에 묵고 있던 주현정의 눈에 띄게 되었다.결국 주현정은 손보미라면 치를 떨었다.“그럼 이것도 오해겠네?”주현정이 대뜸 신문을 던져 버렸다.기사에는 배건후가 ‘야밤의 미팅’을 진행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을뿐더러 누군가 청호상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찍힌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흑백 실루엣도 얼핏 보였는데 모든 상황이 당사자가 배건후와 손보미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게다가 곧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고 했다.배지유는 코를 쓱 만지며 미소를 쥐어 짜냈다.“언론사들이 내용을 조작했겠죠.”“이 사진을 누가 제보했는지 알아?”주현정은 젊었을 때 JS 픽처스의 대표였다. 나중에 딸을 낳고 건강 악화 이슈로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권을 인계한 지 얼마 안 되었다.배건후는 출신 자체가 달랐고, 비록 몰래 결혼한 것 때문에 가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본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감히 폭로하지 못했다.언론이 손보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사진을 제공한 사람이 배건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측근이라는 것이다.이처럼 든든한 존재가 방패막이 되어주니 매체들도 믿는 구석이 있고 대거 홍보했다.사실 주현정은 아들이 도아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며느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라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네 큰아버지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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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사실 도아린이 대역을 하든 말든 LH 스튜디오가 송민혁의 담당 컨설턴트임은 변함이 없었다.도아린은 더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박물관을 예약해서 관람하기로 했다.그녀가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줄이 길게 이어졌다.이때, 문나연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수선이 필요한 고객 옷 때문에 그녀의 의견을 물었는데 곧바로 답장을 보내며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조금씩 이동했다.마침내 그늘진 곳에 도착하자 누군가의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이런 우연이 있나? 너도 구경하러 온 거야? 일이 있어서 좀 늦었는데 맨 뒷줄은 해가 너무 쨍쨍해서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도아린이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색 점프슈트를 입은 손보미가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공들인 메이크업과 커다란 선글라스, 그리고 목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더해 부티가 줄줄 흘렀다.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기 마련인지 몰라도 매번 두 사람이 마주칠 때면 옷이 항상 같은 색 계열이었다.비록 도아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액세서리가 하나도 없었지만 분위기든 몸매든 상대방을 압도했다.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뒤에서 줄 서는 사람도 생각해야지.”마침 줄이 이동하자 손보미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섰다.“어쨌거나 얼굴이 알려진 사람인데 괜히 악성 루머나 생성하지 마.”도아린이 쌀쌀맞게 말하더니 팔꿈치로 손보미를 밖으로 밀어냈다.그러나 장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뒤로 비집고 들어갔다.“그날 밤 너랑 건후 씨를 방해해서 미안해. 두 사람의 사이를 훼방 놓을 생각은 없었어. 단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건후 씨가 그렇게 늦은 밤에도 찾아올 줄 몰랐지.”도아린은 그녀의 변명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일을 저질러 놓고 욕은 듣기 싫다는 건가? 우습군.”만약 손보미가 계속해서 이 화제를 이어간다면 스스로 먹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이내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아냥거리는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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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도아린!”이때, 싸늘한 호통 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배건후는 손보미의 곁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휴지를 건네주었다. 이내 날카로우면서도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미쳤어?”손보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제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승률이 대폭 상승한 셈이다.도아린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태연하게 말했다.“입이 더러운 것 같아서 이참에 청소해주려고.”“건후 씨...”손보미는 울먹이며 다가가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새치기할 생각은 없었어. 단지 낯익은 사람을 발견해서 인사하고픈 마음에... 육민재를 언급했더니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지, 아니면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을 텐데.”배건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육민재를 의식하고 있다니.“사과해.”배건후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강압적인 모습으로 말했다.그녀의 설명 따위 생략하고 섣불리 결론을 내린 게 벌써 몇 번째인가? 하지만 가시 돋친 말에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비록 심장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도아린의 얼굴은 태연자약했고 심지어 건방지기까지 했다.“내가 왜요?”그녀를 골탕 먹이지 못해 안달이 난 내연녀에게 사과하라니?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했다.배건후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술을 한일자로 꾹 닫았다. 게다가 싸늘한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이내 살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두 눈은 마치 대학살을 앞둔 적진에 뛰어든 용사를 연상케 했다.도아린이 배건후의 등 뒤로 다가갔다. 지금처럼 길길이 날뛰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단지 내연녀 때문에 화가 난 줄 알았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백만 번 물어도 내 대답은 똑같아요.”기분이 잡친 나머지 도아린은 박물관을 관람할 마음이 싹 사라져 뒤돌아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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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정비사는 짜증이 담긴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누구신데요?”“다시 한번 물을게요. 방금 한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육하경이 몸을 틀어 도아린을 지켜줄 기세로 앞을 가로막았다.“당연히 전문가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정비사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말하며 손에 든 스패너를 만지작거렸다.꽤 낯익은 옆모습에 도아린도 상대방을 알아보았다. 지난번에 도둑으로 오해했다가 알고 보니 착한 사람이었던 그 남자 아닌가?“날 믿습니까?”육하경이 뒤돌아보며 묻자 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뭐 하는 거죠? 당신 어느 공업사인데? 감히 우리 가게에서 손님을 빼앗으려고 하다니!”정비사가 말을 이어가면서 다른 직원을 부르려고 했다.육하경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무덤덤하게 받아쳤다.“지금 당장 소비자고발원에 연락해서 그쪽이 제시한 견적서를 증거로 제출할 거예요. 만약 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고소해서 폐업시킬 테니까 각오해요.”정비사의 안색이 돌변했다.“만약 본분에 벗어나지 않게 영업한다면 아까는 없었던 일로 해줄게요.”정비사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도아린을 힐긋 쳐다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문제가 조금 있긴 한데...”육하경은 도아린의 손에서 견적서를 건네받더니 말투는 물론 눈빛마저 한층 누그러졌다.“내 차가 저기 있거든요? 밖에 더우니까 차 안에서 기다려요. 여긴 나한테 맡기고.”“고마워요.”도아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우선 도장 여부를 정하고 나서 육하경은 정비사가 언급했던 문제점을 하나씩 체크했다. 사실 도아린의 차에 큰 문제는 없었고, 주행거리가 짧아 정비할 시기가 아직 안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한 탓에 타이어 공기압이 약간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곧이어 차는 정비소를 유유히 벗어났다.“여기.”육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얼음물이 나타났다.“고마워요.”“제가 더 고맙죠.”도아린은 차에서 땀을 식히는 대신 밖에서 기다렸다. 어쨌거나 그녀의 차를 봐주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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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배지유는 번호를 힐긋 쳐다보고 입을 삐죽거렸다. 이는 육하경이 예전에 사용하던 연락처로서 오래전에 이미 정지되었다.육하경이 귀국하고 나서 여러 인맥을 통해 친구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얼굴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오빠가 연락해주면 안 돼요? 하나뿐인 여동생 좀 도와 달란 말이에요.”배지유가 곁으로 다가와 팔을 잡고 흔들자 자칫 담배를 떨어뜨릴 뻔한 탓에 배건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너보다 5살이나 많아. 안 돼.”“오빠도 도아린보다 5살 연상이잖아요!”배지유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바람에 배건후는 분노가 폭발했고, 관자놀이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이내 그녀를 뿌리치고 살벌한 목소리로 다른 번호를 읊었다.육하경이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걱정된 마음에 배지유는 서재에 있는 유선전화로 전화를 걸었고, 통화는 금세 연결되었다.“여보세요?”육하경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경 오빠, 귀국했다면서 왜 연락도 없었어요?”배지유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톤은 여전하지만 눈에 띄게 소원해진 말투가 울려 퍼졌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일이 좀 많았어. 건후가 대신 연락해달래?”“아니요, 제가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 참! 오빠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주고 싶은데 괜찮아요?”“안 그래도 나중에 시간 나면 건후랑 밥 한 끼 하려고 했거든. 너도 같이 와.”“그건 엄연히 다르죠. 오빠들끼리 잡은 약속에 전 꼽사리로 끼는 셈이잖아요. 이제 귀국했으니까 친구들이나 동창들 만나러 다닐 텐데 제가 같이 가줄게요. 혹시라도 술을 마시게 된다면 대신 운전해서 집에 데려다줄 수도 있고.”사실 진짜 목적은 육하경의 여자 친구라는 신분으로 지인들 앞에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낼 심산이었다.육하경이 재차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그녀는 일부러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결국 육하경은 두 손 두 발 들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미안하지만 최근에 공들이는 사람이 있어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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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네, 금방 갈게요.”도아린이 말하며 운전대를 틀었다.육하경은 뒤로 물러섰고,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U턴하고 나서도 그녀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육하경을 발견하자 도아린은 차창을 내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알겠어요, 육하경 씨!”육하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한편, 배지유는 육하경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하경 오빠한테 대체 누구를 소개해 준 거예요?”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배건후는 머리가 지끈거려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왜 나한테 히스테리야!”“오빠 말고 다른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동안 건후 오빠는 어머님이 소개한 여자는 단 한 번도 만나 적이 없었잖아요. 아니면 성대호가 주선했는지 물어봐 줘요. 상대방이 누군지! 나보다 더 예쁜지도!”배건후는 이마에 얹은 팔을 내리며 버럭 화를 냈다.“계속해서 떠들 거면 내 집에서 나가!”배지유는 입을 꾹 닫고 자리에 앉았다. 비록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차마 표출할 수는 없었다.이때, 손보미의 문자가 도착했다. 박물관 입구에서 도아린을 만나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 배건후가 기분이 안 좋은 것도 도아린 때문에 열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오빠, 혹시 도아린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배건후가 그녀를 흘겨보았다.“뭐라고?”“새언니 말이에요! 새언니가 오빠 심기 건드렸죠?”배지유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되물었다.“어른 일에 참견하지 마.”이내 배건후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으로 향했다.보라색 비취 팔찌는 첫 결혼기념일에 도아린이 사달라고 했던 선물인데 당시 어머니 생신 연에 딱 한 번 착용했었다.단지 팔찌를 아끼는 마음에 일부러 안 하는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에게 줬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급속도로 어두워지는 오빠의 표정을 보자 배지유는 서둘러 손목을 가렸다.“나 먼저 가볼게요. 친구랑 밥 먹기로 해서.”배건후가 의자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려는 찰나 손보미의 문자가 도착했다.[건후 씨, 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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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휴대폰이 배터리가 없어서 대신 배건후 대표님께 연락해주실 수 있나요? 도아린이 병문안 왔다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간호사는 예의 바르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걸었다. 이내 통화를 마치고 그녀에게 말했다.“대표님께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네요.”젠장.아침에 이혼을 승낙하자마자 오후에 바로 체면 불고할 줄이야.물론 주현정에게 곧바로 연락할 수도 있었지만 유민정한테서 몸이 안 좋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굳이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도아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결국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 상대방이 매몰차게 구는 이상 그녀도 굳이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병실.배건후는 어머니를 위해 과일을 깎아주고 있었다. 이때, 문득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휴대폰을 확인해보자 다름 아닌 진료 안내 문자였고, 비뇨기과라는 글자가 뜨는 순간 자칫 과도를 테이블에 떨어뜨릴 뻔했다.“아린이 문자야?”주현정이 물었다.“아니요.”배건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우정윤은 자기가 산 과일이 문제라도 있는 줄 알고 서둘러 다가갔다. 배건후가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이자 이내 안색이 돌변하며 병실을 나섰다.“혹시 아린이랑 싸웠니?”주현정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지난번에 만났을 때부터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밤에는 여자를 부드럽게 다뤄야 해. 너무 거치면 다들 싫어한다고.”“내가 그랬다고 하던가요?”배건후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주현정이 그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아무 일도 없는데 아린이가 널 다치게 할 수는 없잖아.”배건후의 팔에 난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고, 눈에 띄지 않는 흰색 흉터만 남아 있었다. 그는 소매를 내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도아린이 한 게 아니에요.”퍽!주현정이 대뜸 배건후를 향해 베개를 던졌다.“이 썩을 놈아, 감히 아린이 몰래 바람이라도 피우는 거야?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아들을 낳았을까? 이참에 내일 구청 가서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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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황당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자 우정윤이 설명을 보탰다.“대표님이 피곤하면 위가 안 좋으신데 그럴 때마다 신경이 예민해지거든요.”도아린은 할 말을 잃었다. 시차 적응과 위가 아픈 게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냐는 말이다.설마 배건후가 오늘 아침 느닷없이 화부터 낸 이유에 대해 변명이라도 하는 건가?물론 내연녀 때문이든 컨디션 난조이든 그녀에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미 이혼하기로 한 이상 번복하는 건 절대로 용납 불가했으니까.이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고, 옆에 병간호하는 가족들을 위한 휴게실이 있다. 얼핏 보기에 특급 호텔과 별반 다를 바 없고 맞은편이 바로 병실이다.“그동안 협상을 이어가면서 워낙 긴박한 하루하루를 보냈는지라 대표님께서 제대로 쉬지 못하셨어요. 어젯밤만 해도 비행기 타기 전까지 미팅을 진행했죠. 대표님뿐만 아니라 저도 밤새워 일했더니 어깨가 뻐근하네요.”우정윤은 말을 이어가면서 목 근육을 풀었다.이렇게 대놓고 암시하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그녀는 주현정을 보러 왔지, 빌어먹을 배건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찾아온 건 아니었다.“병원에 정형외과도 있잖아요. 실력은 걱정 안 하셔도 되니까 의사 선생님께 진료 한 번 받아봐요.”“사모님도 알다시피 대표님은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서...”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배건후밖에 보이지 않던 그 시절, 도아린은 항상 밥을 차리고 그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그동안 갈고 닦은 마사지 솜씨를 한껏 뽐냈었다.배건후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뭐든지 배웠다. 섬섬옥수가 기름에 데어 만신창이가 되든 마사지해서 뼈마디가 쑤시든 안중에도 없었다.정작 쓰레기 같은 놈이 일말의 고마움도 모르고 되레 자신을 유혹하려고 몸을 더듬거린다고 착각까지 했었다.나중에는 마사지를 관두었고, 배건후도 집을 비우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한다는 자체가 그녀를 모욕하는 셈이지 않은가?“실장님, 저는 어머님을 뵈러 왔어요.”“네,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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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도아린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물론 병실에 못 들어가게 해서 발끈한 나머지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벌인 짓이긴 했다.그나마 대신 진료를 예약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우정윤이 데리러 오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도아린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그래서 언제 이혼하러 갈 거예요?”배건후는 긴 다리를 쭉 뻗어 도아린의 발목에 살짝 걸쳤고, 잘생긴 얼굴에 싸늘함이 감돌았다.“그것도 아니면 네 입맛에는 역부족이라고 했나?”도아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살림밖에 모르던 여자가 대신 진료를 예약할 정도로 굶주렸어?”결국 다리에 걸려 소파에 넘어졌는데 벌떡 일어나서 그를 바라보았다.“바다처럼 넓은 아량을 가진 분이 고작 오해로 인한 해프닝 때문에 말다툼을 시전하는 건 아니겠죠?”배건후는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를 빤히 쳐다보았다.“오해를 풀어야 이혼 합의서를 작성하든 말든 하지.”지금 손보미에게 사과를 안 했다고 일부러 트집 잡는 건가?‘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도아린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싱긋 웃었다.“차라리 내가 불감증 혹은 건강 때문에 3년 동안 한약을 마셨는데도 애 하나 낳지 못했다고 하지 그래요?”배건후는 두 팔로 그녀를 품에 가두고 소파 등받이를 짚더니 허리를 숙여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불감증이라는 사람이 코스플레이 옷 입고 내 옆에 앉아 있었어?”도아린은 주먹이라도 한 방 날리고 싶었다.배건후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살랑살랑 흔들었다.“심지어 대신 진료까지 예약해주고?”그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 모든 일이 자신의 외로움과 욕구 불만을 표출하는 증거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저기요, 그쪽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배건후도 물러서지 않고 휴대폰 화면을 터치했다.“내 분신의 건강이 사뭇 궁금한 것 같은데 본인이 과연 이 거대한 물건을 감당할 수 있는지부터 검사해 보는 게 어때?”도아린이 주먹을 불끈 쥐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이 부분은 우선 건너뛰고 구청부터 갈까요?”배건후는 한참 동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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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도아린은 괘씸해서 그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하지만 날짜를 정하기 위해서는 일단 참아야만 했다.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랜만에 마사지하는 거라 감을 좀 찾아야 해요.”남자의 미간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질세라 말을 보탰다.“이혼은 병 치료와 같은 맥락이라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죠. 만약 큰 병이 아니라면 치료하기도 쉬울 테니까. 구청도 VIP 서비스가 있지 않을까요? 건후 씨 인맥으로 충분히 방문 요청이 가능하리라 믿는데 일하는 시간도 확보하고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출장비에 관해서는 반반 부담하면 되잖아요.”옆에서 조잘거리는 여자 때문에 배건후의 짜증 지수가 점점 상승했고, 이내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한 마디만 더 지껄여 봐.”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도아린은 배건후를 힘껏 밀쳤다.“아침에 소원 이뤄준다고 본인이 직접 얘기했잖아요. 이제 와서 번복하기 있어요? 다 큰 성인이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요?!”순한 양이 다시 고슴도치로 변하자 배건후의 표정이 오히려 누그러졌다.이내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나랑 선을 긋기 급급하면서 모건 그룹의 리소스로 도정국을 살리려는 거야? 실속은 본인이 다 차리고, 대체 누가 유치한 건데?”도아린이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지금은 배건후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미래가 컴컴한 결혼 생활을 고수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소원을 이뤄준다는 둥 하는 말은 단지 거짓말에 불과했다.지금이 아니고서야 나중에 손보미의 배가 점점 커지고 배씨 집안에서 쫓겨나는 날에는 도정국이 그녀와 도지현을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따라서 반드시 사전에 준비를 마쳐야만 했다.도아린의 표정이 돌변했다.“건후 씨가 모건 그룹의 CEO로 임명받은 이후로 회사가 승승장구하던데 비록 이혼이라는 큰 문제에 직면할 테지만 건후 씨라면 손쉽게 처리할 거로 믿어요. 하지만 정성스럽게 가꾼 연약한 꽃이 거센 폭풍우를 견뎌낼지는 미지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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