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30 챕터

제21화

“이제 들어가셔도 돼요.” 직원 뒤에는 양옆으로 나뉘어 열리는 커튼이 있었고,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커튼 사이로 어둠이 깔린 통로가 보였다. 간간이 비명이 들려오자, 조수민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소정은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정은은 그런 수민을 거의 끌어당기듯이 데려갔고, 수민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우리 그냥 가지 말까?” “안 돼! 여기까지 왔잖아!” 왔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가 한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었다.수민은 무섭다고 하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용감한 척하며 정은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갑자기 한 공포 인형이 튀어나오자 수민은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아아아! 정은아, 살려줘!” 그때, 강도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방금 누군가 정은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그 익숙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겸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한편, 서연희는 도겸이 잠시 멍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도겸의 팔을 꼭 끼고 말했다. “오빠, 나 무서워요. 오빠가 나 지켜줄 거죠, 그렇죠?” 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 앞은 너무 어두워, 간간이 깜빡이는 붉은 불빛만 보였다. 연희는 도겸의 팔을 꽉 붙잡고, 두려움에 몸을 더욱더 도겸 쪽으로 기울였고, 스스로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 얼굴의 반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묻은 여자 귀신 분장을 한 실물 NPC가 나타나자, 연희는 소리를 지르며 더욱더 도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흑흑. 너무 무서워, 오빠, 귀신 나갔어요?”연희는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도겸의 가슴에 묻었다. 도겸은 대충 연희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응, 없어졌어.”조잡한 분장과 더러운 여자 귀신 복장은 도겸에게는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은이라면 이렇게 무서워하지
더 보기

제22화

곧 이 작은 공간에 소정은 혼자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경보가 울린 후 조명이 이전보다 밝아졌고, 두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가자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두 번째 구역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은 그쪽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는데, 아마 출구 쪽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막힌 것 같았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정은은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정은을 벽 쪽으로 밀쳤고, 누군가는 정은의 발을 밟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은은 울퉁불퉁한 벽에 몸이 밀착된 채, 가슴이 압박되어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느낀 정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강도겸은 이 처참한 모습의 정은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정은이었다. 방금 들린 정은아라는 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은이 귀신의 집을 탐험할 기분이었다는 사실에, 이별 후에도 꽤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오빠?” 연희는 도겸의 팔을 흔들며 긴장한 눈빛으로 정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은은 눈을 내리깔며, 이 두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 군중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군중 속에서, 동굴 안의 조명이 희미하게 깜빡이던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잠시 후, 공중에 매달린 나무 칼이 흔들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나무 칼이 떨어지는 바로 그 아래에는 다름 아닌 정은이 있었다.“조심해!” 도겸은 본능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연희를 밀어내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재빨리 정은을 안전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쾅! 나무 칼이 땅에 떨어지면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그제야 그 칼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만 나무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을 뿐
더 보기

제23화

마침 그때, 출구 쪽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출구에서 질서 있게 대기하신 후 나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이 생기자, 현장의 혼란도 금방 진정되었다. 소정은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도겸도 팔을 빼내고 정은을 따라갔다. 그 모습에 연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겸 오빠, 저도 같이 가요.” 검표소에서 조수민은 이미 밖에 나와 있었다. 내부에서 경로 문제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뻔했다는 말을 듣고, 정은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걱정이 되어 하마터면 뛰어 들어갈 뻔했다. 다행히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정은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수민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 “다치지 않았지? 방금 경보 소리를 듣고 너무 놀랐어.” “나 여기 멀쩡히 있으니까, 이제 가자, 집에 가자.” 하루 종일 놀다 보니 정말 피곤했다. 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우리, 어? 저거 도겸 아니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겸이 연희와 함께 뒤따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놀러 나와서 이런 재수 없는 걸 마주치다니.” 그러자 정은은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그냥 우연히 만난 거니까, 가자.” 돌아가는 길에, 수민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는지 핸들을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정은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집에 안 가?” “결정했어, 지금은 안 갈래. 남자가 뭐 별거야? 80억의 절반이 남자고 널린게 남자야. 오늘 내가 널 새로운 세상에 데려다줄게.”정은은 의문스러웠다....밤 8시, 밤생활이 이제 막 시작할 때였다. 정은은 마치 인형처럼 수민에게 이끌려 시끄러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가 섞인 공기, 불빛은 빨갛고 초록색으로 번갈아 가며 반짝이고, 주변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캐주얼한 옷차림의 정은은 이곳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더 보기

제24화

강도겸은 서연희와 함께 양식당에서 촛불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도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연희는 도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겸은 속으로 화를 억누르며 대답하지 않았다. 도겸은 그저 핸드폰으로 빠르게 타자하며 답장을 보냈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현빈은 채팅창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다소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엔 진짜로 정은 씨랑 끝난 거네?] 도겸은 어이없다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현빈은 그저 무심하게 보낸 문자에 불과했다.[응, 왜? 불만 있어?] 현빈은 웃으며 항복을 의미하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말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불만을 가지겠어?]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럼 다른 사람이 정은에게 관심을 가져도 신경 안 쓰는 거지?]이때, 고동건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뭐야, 너 혹시 정은 씨 좋아해?]현빈은 조금 진지하게 응답하면서 이모티콘을 보냈다. [응, 응. (이모티콘)] 그러자 전선우가 웃으며 반응했다. [하하하!]동건도 덧붙였다. [너 진짜 대단하네.] 그러나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겸도 이모티콘에 신경 쓰지 않고 타자하며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한번 해봐.] 목적을 달성한 현빈은 핸드폰을 치웠다. 그러나 도겸이 나중에 후회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자기야, 오늘 생일을 이렇게 즐겁게 보내줘서 고마워요.” 저녁 9시, 도겸은 연희를 기숙사 앞에 데려다주었다. 연희는 도겸의 손을 잡고 아쉬운 듯이 말했다. “오빠랑 곧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해요.” 연희는 웃으며 작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도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입을 삐죽거렸다. “오빠는 왜 이렇게 평온해요? 하나도 아쉽지 않아요?” 연희는 맑고 깨끗한 눈으로 달콤하게 웃으며, 더욱 애교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더 보기

제25화

현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방금 막 따온 부르고뉴 와인이야, 한잔할래?” 현빈은 잔에 반을 따라 강도겸에게 건넸다. 도겸은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괜찮네.” 도겸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아까 정은이도 여기 있다더니, 왜 안 보이지?”현빈은 와인잔을 흔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정은 씨 보러 일부러 온 건 아니지?” 도겸은 약간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 그냥 술이나 마시려고 들른 것뿐이야. 우연히 마주치면 물어볼 수도 있지, 그게 뭐라고.”현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그냥 술 한잔하러 온 것 같은데, 아마 지금쯤 돌아갔을걸?” 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한결 풀어진 듯했다. ‘역시 정은은 이런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구나.’그러자 도겸도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먼저 가볼게. 오늘 술값은 내 앞으로 해둬.” 현빈은 도겸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이 약간 깊어졌다. 그러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친구야.”...조수민과 소정은은 개인실에서 한 시간도 채 머물지 않았지만, 수민은 술 반병을 마시고는 정신을 잃고 잠들어버렸다. 정은도 술을 마셔 운전할 수 없었기에, 결국 대리운전을 불러 수민을 아파트에 데려다주고, 본인은 택시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렸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는 골목 입구에 정은을 내려주었다. 정은은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그칠지 모를 비를 맞으면서라도 집에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은아!” 뒤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가 정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뒤돌아보니 조재석이 우산을 들고 빗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비 맞으면서 갈 생각이었어?” 오늘 재석은 셔츠 대신 조금 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평소보다
더 보기

제26화

공부하는 일상은 지루하고 단조로웠지만, 소정은은 의외로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오늘도 하루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은은 어깨를 주무르며 일찍 쉬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 오미선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오미선 교수는 먼저 정은에게 공부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자 정은은 간단히 진도를 보고드렸다. 오미선 교수는 더 이상 세부적으로 묻지 않았는데 정은을 무척이나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은은 미소를 띤 채, 오미선 교수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집에 한 번 들러.]그러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으면 정은이 거절할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다음 날, 정은은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데 30분을 보냈다. 물론, 옆집의 조재석을 위해 한 끼 더 준비했다. 어젯밤 잠들 때까지도 옆집에서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재석은 아마 실험실에서 밤을 새웠을 것이다.이윽고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방금 막 돌아온 사람 같아 보였다. 비 내리던 밤 이후로 벌써 2주가 지났지만, 아마 실험실에서 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인지, 항상 깔끔했던 재석의 소매는 구겨져 있었고, 미간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은은 지난번에 들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재석이 실험실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정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젯밤부터 약한 불에 천천히 끓여서 아침까지 준비했어요. 밤새신 분들은 속이 좋지 않을 테니, 따뜻한 죽을 먹으면 속이 좀 나아질 거예요.” 재석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이번 며칠간은 불규칙한 식사 때문인지 속이 약간 아팠다. 그래서 정은이 가져온 죽이 지금 재석의 상황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고마워.” “그날 밤 집에 데려다주신 건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정은은 미소 지었다. 그러자 재석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 “우린 이웃사촌이잖아. 그저
더 보기

제27화

“네가 기억력이 좋잖아.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시리즈 중에 유전자 테스트에 대해 다루는 책이 있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정은은 무언가를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에 대한 인상은 깊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오미선 교수가 말한 그 책은 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막 뒤적여 본 책이었다. 그래서 정은은 곧장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려 훑어보다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교수님, 혹시 찾으시는 게 이 책인가요?” 오미선 교수는 표지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맞아, 바로 이 책이야! 넌 시력도 좋구나. 한참을 뒤졌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걸 못 봤네.”“성준아, 이 책에다가 이 논문 자료들까지 참고하면 충분할 거야. 일단 가져가고, 나중에 내가 다른 것도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성준은 손을 뻗어 책을 받았다. 요즘 대학원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중, 필요한 자료가 부족하였는데 오미선 교수에게 원본 자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침 일찍 찾아온 것이었다. 이윽고 오미선 교수는 그제야 두 사람을 소개할 생각이 나셨다. “정은이도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이야. 그리고 곧 다시 내 제자가 될 예정이지.” 성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오미선 교수에게 물었다.“교수님의 대학원생으로 지원하는 겁니까?”그러자 오미선 교수가 곧바로 웃으며 정은에게 말했다. “얘는 하성준이라고 해. 올해 석사 2년 차고, 박사과정을 준비 중이야. 마침 너도 요즘 복습 중이니, 둘이 함께 공부해도 좋겠네.” 그 말을 들은 정은이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소정은이라고 합니다.” 정은도 오미선 교수의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성준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정은과 카톡 아이디를 교환했다. “아, 정말 좋네. 도서관도 같이 갈 수 있고, 전문적인 문제도 서로 논의할 수 있겠어.”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성준은 수업이 있어서 먼저 떠났다. 정은은 테이
더 보기

제28화

비록 아침 7시에 맞춰 알람을 설정해 두었지만, 연희가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늦을까 봐 허둥지둥 뛰어왔다. “몇 층 가?” 정은은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2층이요.” 침착한 정은과 달리, 헐레벌떡 뛰느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연희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연희와 정은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순간, 연희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정은의 손에 들린 대학원 시험 준비 자료를 보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정은 언니, 혹시 도서관에 복습하러 온 거예요? 설마 대학원 시험 준비하려는 건 아니죠?” 정은은 말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그러자 연희가 계속 중얼거리며 말했다.“대학생들도 대학원 입학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은데, 졸업한 지 몇 년 된 언니가 정말 합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자 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혹시 그 떨어지는 사람중에 너도 포함인건 아니지?” 연희는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화를 참지 못할 뻔했다. 연희는 올해 3학년이다. 취업 생각은 없었기에 막 대학원 입학 준비를 시작한 상태였다. 또한, 어차피 1년 더 남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같은 기숙사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계획을 세웠지만, 연희는 대학 몇 년 동안 공부를 대충 해왔고, 시험에 합격하면 좋고, 안 되면 강도겸이 뒷받침해 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정은의 말은 연희를 찔리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다 언니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나한텐 시험에 합격하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도겸 오빠가 말했거든요.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내 앞에 가져다줄 거라고요.” 그러자 정은은 더 이상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자신감 있길 바랄게.” 말을 마친 정은은 이미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린 하성준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연희의 룸메이트는 정은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
더 보기

제29화

연희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연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도겸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 별장이 매우 크고, 넓고, 밝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연희가 이렇게 직접 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식 인테리어 스타일로, 회색과 갈색, 흑백이 주요 색상으로 사용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느낌이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또한, 대학교 2학년 때 예술 감상을 선택 과목으로 들었던 연희는 벽에 걸린 그림이 치바이석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주변에 놓인 물건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이었고,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쓰레기통에도 명품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거실을 지나면 정성스럽게 가꾼 실내 정원이 나타났고, 그 옆에는 별도로 마련된 미디어룸과 헬스장이 있었으며, 구석에는 골프채 세트도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별장 단지에는 골프장도 함께 있다고 들었다. 연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도겸을 만나기 전까지 연희가 본 것 중 가장 사치스러운 물건은 동급생이 메고 다니던 에르메스 버킨백 켈리백 악어가죽 25였다. 그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한정판으로, 중고 시장에서도 5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5억 원이면 연희의 고향에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이 별장 안에는 고급스러운 H 로고가 도처에 있었다. 열쇠고리, 카드게임, 라이터까지. 만약 연희가 도겸의 곁에 계속 머물고, 도겸과 결혼해 도겸의 아이를 낳는다면, 자신이 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큰 별장, 명품 가방, 운전사가 따라붙고, 집안일은 집사들이 해주는 그런 삶.그러나 도겸은 연희의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죽은 매우 걸쭉하게 끓여졌지만, 도겸은 한 입만 먹고는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도겸의 모습에 연희는 눈을 깜빡이며 의아해했다. “왜 안 먹어요? 맛없어요?”그러자 도겸이 대답했다. “방금 퇴근하면서 이미 먹었어. 지금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으
더 보기

제30화

“응?” 강도겸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오빠, 제 지문을 여기 잠금장치에 등록해 줄 수 있어요?” 서연희는 대문에 있는 잠금장치를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리고는 마치 비 쫄딱 맞은 강아지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 여기서 몇 번이나 오빠를 기다렸잖아요. 보세요, 손이며 다리에 이렇게 모기한테 물린 자국이 몇 개나 돼요.”“오빠, 다음에도 이렇게 물린 채로 기다리게 할 거예요?” 그러자 도겸이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지.” “야호!” 연희는 기뻐하며 뛰어올랐다. “사실, 일부러 그런 거예요. 제 지문을 등록해서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오빠를 찾아오고 싶었어요.” 그러자 도겸이 웃으며 말했다. “어쩜, 아직도 어린아이 같네.” 이윽고 도겸은 연희의 지문을 잠금장치에 등록해 주었다. 오늘 연희가 특별히 준비해 온 죽과 연희의 손과 다리에 난 모기 자국을 생각하며, 도겸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이건 내 가족카드야. 월 한도는 2000만 원이니까, 좋아하는 거 사.” 연희는 당황해하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아니에요, 저, 제가 어떻게 오빠 돈을 써요?” “여자가 남자 돈을 쓰는 건 당연한 거야.” “정말요?” “받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럼, 알겠어요.” 연희는 환하게 웃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다시 죽 가져올게요!” 도겸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연희가 끓인 죽은 도겸이 원하는 맛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번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한편, 하루 종일 공부를 한 소정은은 도서관 밖에서 하성준과 헤어졌다. 성준은 대학원 입시 때 1차, 2차 모두 1등을 차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대학원 입시에 대한 노하우가 많았고, 중요한 부분을 정은에게 표시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정은은 원래 성준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었지만, 성준이 갑작스러운 룸메이트의 전화로 다음 날 계속 공부하기로 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더 보기
이전
123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