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인연, 약혼남의 형과 사랑에 빠지다의 모든 챕터: 챕터 761 - 챕터 770

1604 챕터

제761화 남자를 주다 

권하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케빈 씨는…….” 민시영은 덤덤하게 웃었다. “윤이 씨 무슨 뜻으로 그런 말 하는지 알겠는데 저 이래 봬도 재벌가 아가씨예요. 제 짝이 경호원일 리는 없어요.” 하윤은 일순 침묵했다. 시영이 너무 깨어 있었으니까. 깨어 있다 못해 심지어는 매정하기까지 했다. 이에 하윤은 잠깐의 침묵을 깨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상대가 송민우 씨인가요?” “적어도 지금은요. 저 다른 사람이 저를 어떻게 보든 상관 안 해요. 하지만 남편이 있다면 유언비어 정도는 막을 수 있잖아요.” 시영은 하윤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저희가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면 사람들은 아마 제가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 걸요.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 이렇게 잘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했다고.” 하윤도 따라 웃었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덜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송 대표님은 두 사람 사귀는 거 알아요?” “알죠. 송 대표님의 가방끈이 짧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빨리 결혼하여 손주를 안겨주길 바라거든요.” 시영은 한참 동안 말하다가 하윤을 바라보며 간곡히 부탁했다. “윤이 씨, 혹시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시영은 화장실 밖을 한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저랑 송민우 씨가 사귀게 되면 케빈은 앞으로 제 곁에 두기가 불편해져요. 저도 과거와 엮인 사람을 새로운 삶에 데려오고 싶지 않고요. 그래서 그러는데, 윤이 씨가 케빈을 받아줄 수 있나요?” “네?”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제가요? 그건 안 되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케빈 씨는 사람인데 어떻게 주고받을 수 있나요? 게다가 시영 언니가 데리고 있기 싫다면 자르면 그래도 본인 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케빈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 갑자기 높아진 톤에 하윤은 깜짝 놀랐다. “시영 언니, 왜 그래요?” 시영은 그제야 자기가 흥분했다는 걸 인지하고 다시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이윽고 이내 화제를 전환했다. “
더 보기

제762화 어두움 

이미 예상은 했지만 도준의 축객령에 하윤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손을 들어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마치 천근이나 되는 쇳덩이를 손에 매단 것처럼 손이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눈앞이 희미해졌다. 예전에는 이렇게 말한 적도, 더욱이 내쫓은 적도 없었는데. 심지어는 하윤이 삐져서 가려고 하면 도준은 이내 하윤을 붙잡아 두고 장난치면서 달래곤 했다. 예전에 했던 행동과 비교해 보니 지금의 냉대는 사람을 더 아프게 했다. 도준이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그에게 등만 보이던 여자가 꿈쩍도 하지 않고 떨고만 있자 도준은 결국 담배를 눌러 껐다. “왜? 이제는 버티고 안 가는 거야?” 눈시울과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하윤은 끝내 눈물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비행기 티켓 끊었어요. 내일 해원으로 떠나요.” “아하, 축하해.” 도준은 하윤이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이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말을 보탰다. “조사를 끝내면 다시 돌아 올게요.” 한참이 지났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한 하윤은 눈물을 닦고 다시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내일 저 배웅하러 올 거죠?” “배웅?” 도준은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어이없어 했다. “내 곁에서 도망치려고 자살로 위협까지 하는 사람을 내가 무가 아쉽다고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까지 배웅해야 하지?” “그런 거 아니에요.” 하윤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날 제가 했던 말은 홧김에…….” “그만해.” 도준은 다시 세상 만사 귀찮다는 듯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맞든 아니든 듣고 싶지 않아. 스스로 내릴래? 아니면 내가 밖으로 던져줄까?” 하윤 스스로도 눈치가 있으면 지금 당장 차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야 본인의 체면도 살 거고. 하지만 그날 자기가 내 뱉었던 그 말, 도준과 있는 매일이 숨막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던 말만 생각하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일만 제외하
더 보기

제763화 두 사람의 종점 

어둠 속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흐느끼던 권하윤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자 하윤은 그제야 눈치 챈 듯 고개를 들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준의 얼굴은 어둠과 어우러져 있었지만 하윤의 눈에는 밝게만 느껴졌다. 이에 하윤은 도준의 손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저 다리 아파요. 손목도 아프고요.” 너무 급하게 달린 탓에 하윤은 아직도 숨이 차 있었고 얼굴에 붙어있던 머리카락이 고개를 젖히는 동작에 따라 뒤로 흘러 넘어갔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라인을 따라 뒤로 흘러내렸다가 도준의 손에 감기는 동안, 하윤은 불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좀 일으켜 주면 안 돼요?” 하윤은 일부러 다리의 상처를 드러냈다. 새하얀 다리 위에 뻘건 피가 흐르자 더욱 선명하고 자극적이었지만 도준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뭐 하려는 거야?” 하윤은 흠칫했다. “저는…….” “죽네 사네 하면서 떠나려고 할 때는 언제고 내가 가라고 하니 이제는 대꾸 좀 해달라고? 사람 갖고 노니깐 재밌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밤바람을 따라 하윤의 귀에 냉기만 남기고 갔다. ‘그랬지. 떠나겠다고 한 건 분명 나였는데 놓아주겠다고 하니까 이제 와서 당황해하는 나도 웃겨. 나 참 이기적인 사람인가 봐.’ 하윤은 가족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도준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가운데서 평형을 유지하며 가장 좋은 선택을 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도준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도준이 붙잡을 때는 떠나려 했다가 놓아주려 하니 이제야 매달리는 꼴이라니. ‘내가 이렇게 계속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는데 도준 씨 성격에 어떻게 지금까지 참아온 거지?’ 겨우 냉정을 되찾은 하윤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가벼운 한 마디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진심이 담기지도 않은 사과로 모든 걸 없는 일로 만들려 하다니 참 꿈도 야무지네.’ 도준은 진심도 아니면서 후회하는 척하는 하윤의 태도에 이제는 이골이 났기에
더 보기

제764화 이별 

하윤을 안고 있던 도준은 끝내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하윤은 몸이 굳더니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역시나 차 옆에 도착한 거였다. 그제야 하윤은 도준의 옷깃을 잡으며 고개를 들어 도준을 바라봤다. “말 좀 해 봐요. 네?” 도준은 손을 들어 운전석 쪽 문을 열고 하윤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 운전석이지? 설마 떠나려는 건가?’ 도준이 몸을 일으켜 세울 때 하윤은 도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도준 씨는 안 타요?” 어둠 속에서 하윤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연약한 모습으로 도준을 바라봤다. 마치 도준을 떠나면 그대로 말라 비틀어버릴 것처럼. 도준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참 눈빛만 보면 깜빡 속아 넘어가겠어.’ 하지만 하필이면 그런 눈이 도준을 보며 화를 냈고 도준을 보며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숨막혀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아마 하윤 본인도 그 말을 할 때 본인의 눈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를 거다. ‘죽음으로 협박하며 떠나려 하는 여자가 날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어?’ 이런 사랑을 믿는 건 세상 천지에 바보밖에 없을 거다.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더니 자기 팔에서 떼어냈다. 손바닥에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지던 찰나, 차가운 차키가 하윤의 손에 쥐여졌다. 하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바래다주면 안 돼요?” 도준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하윤을 빤히 바라보더니 손으로 하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혼자 가.” “…….” ‘싫어. 혼자 가기 싫어.’ 혼자 걷는 길이 얼마나 외롭고 어려운지 하윤은 알고 있기에 혼자가 되는 게 누구보다 싫었다. 도준을 불러 세워 남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흐느낌만 흘러나왔다. 그렇게 도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하윤은 끝내 운전대에 엎드려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속에 텅 빈 것 같았다.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애석하게도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은 좀처럼
더 보기

제765화 여정 

권하윤은 주위의 모든 걸 빙 둘러보며 낯선 얼굴들 가운데서 익숙한 그림자를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건 모두 헛수고였다. 끝내 포기한 듯 눈을 감은 하윤은 낮게 중얼거렸다. “가요.” 케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윤의 뒤를 따라 보안 검사 입구로 향하다가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고개를 홱 돌려 한 곳을 뚫어지게응시했다. 그 곳은 인파로 북적거려 사람들이 모였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케빈은 결국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꽉 주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하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케빈이 떠나간 뒤, 인파 속에는 두 남녀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여자는 세상을 깔보는 듯한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가서 배웅해주지 않아?” “하. 그러는 넌 왜 숨어서 보기만 하는데?” 여자의 눈은 순간 반짝였다. “봐도 결국은 헤어져야 할 텐데,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아.” 그 말에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멀리에 있는 실루엣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 비행기가 상공에 날아오르자 하윤은 창문을 통해 점점 멀어지는 경성을 내려다봤다. 점점 멀어져가는 산천의 모습과 함께 그곳에서 만들었던 추억도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남은 건 그저 가슴에서 점점 퍼져가는 고통뿐이었다.  그로부터 약 2시간 뒤, 하윤은 해원에 도착했다. 그곳의 기온은 경성보다 많이 높은 탓에 비행기를 나서자마자 긴 소매가 살에 달라붙은 것처럼 눅눅하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하윤은 사람들 속에서 [이시윤]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 한 명을 발견했다. 그나마 전에 던과 연락한 덕분이었다. 물론 던이 해원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며 직접 마중하러 나오지는 않고 기사에게 그 임무를 내팽개쳤지만. 차에 오른 순간 하윤은 그나마 기사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에 하윤은 줄곧 창밖을 내다봤다. 해원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껏 해원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높은 건물이 우
더 보기

제766화 낱낱이 파헤치다 

권하윤은 케빈의 배려와 보호를 받으며 속으로 케빈과 로건의 다른 점을 비교했다. 로건은 이런 세심한 보호가 필요 없는 민도준의 곁에서 오래 지내서 그런지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케빈은 반대로 늘 주위를 경계하며 그 누구도 하윤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물론 과묵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에도 문이 닫히지 않도록 막고 있다가, 하윤이 안으로 들어가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는 데서 그가 세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윤은 처음으로 이렇게 배려 깊은 경호를 받아 보니 왠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이 던의 방에 들어갔을 때, 던은 커피 한 잔을 들고 느긋하게 창가 옆 의자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라 그런지 눈가에 잔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 나이대에 있어야 할 분위기가 더해졌다. 심지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방에 이렇게 앉아 있으니 유난히 조화로웠다. 던의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라인이 매끄러워 전통적인 중유럽 사람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높은 콧날에 흠잡을 곳 없는 얼굴은 아시아인이 봐도 감탄할만한 미모였다. 하윤이 던의 생김새를 관찰하며 던이 혼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던이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 놓았다. “눈빛이 참 무례하네요.” “어…… 죄송해요?” “뭐, 용서해 줄게요.” “…….” 아직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하윤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던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에 결국은 그의 맞은편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켜며 말을 꺼냈다. “저…….” “제가 조사해 봤는데, 윤이 씨 아버지 이성호 교수님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투신자살이더군요. 게다가 많은 학생들이 성추행 혐의로 이성호 교수님을 고발했고…….” 하윤은 훅 들어오는 던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저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아요.” 그때, 던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
더 보기

제767화 범인을 예측하다 

권하윤은 던의 말이 황당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던이 아까 말했듯, 지금 하윤이 믿든 말든 사실은 바뀌지 않기에 결국은 꾹 눌러 참았야 했다. “그러면 두 번째는요?” “두 번째는 그 학생들이에요.” 던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 서류 안에는 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하윤은 서류를 받아 들더니 그 위에 있는 서로 다른 색깔의 스티커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이건 뭐죠?” “그 사람들이 일에 엮인 정도에 따라 분류했어요. 초록색은 의심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자들, 노란색은 신원이 의심스러운 사람들, 빨간색은 외력의 영향을 받아 이번 사건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 던이 말하는 사이 하윤은 서류를 한 페이지씩 뒤로 넘기다가 마지막 몇 페이지를 펼쳤을 때 물었다. “그럼 보라색은요?” “범인.”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의 손가락은 흠칫 떨리더니 고개를 들어 던을 다시 바라봤다. “제가 처음에 추측해 본 데 의하면 진짜 범인은 이 사람들 중에 있어요. 뭐, 윤이 씨가 볼 때 범인인 것 같은 사람한테 보라색 테이프 붙여도 돼요.” 보라색 테이프가 붙어 있는 사람은 도합 8명이었는데 공씨 집안사람만 5명을 차지했다. 게다가 나머지 3명 가운데 도준을 제외하고 나머지 2명도 하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하윤의 아버지를 제일 먼저 고발했던 오나영. 다른 한 사람은 하윤 아버지의 오랜 친구 엄석규. 하윤의 기억에 두 사람은 모두 하윤의 아버지 일로 엄청난 돈을 번 사람들이다. 오나영은 다른 학생의 학술 논문을 표절해 상대 학생이 교환 학생을 신청하는 데 실패하게 했었다.  그 일로 이성호가 오나영을 학교에서 제명했는데, 오나영은 오히려 자기가 나쁜 짓을 당하고 고발하자 이성호가 복수하려고 자기를 제명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 인터뷰로 오나영은 스타덤에 올라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엄석규는 그보다도 더 심했다. 하윤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이 자기가 목격
더 보기

제768화 보고 싶은 마음 

권하윤은 문을 닫은 뒤에도 여전히 케빈의 말을 생각했다. ‘케빈 씨 말은 내가 뭘 하려는지, 어디를 가려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그 순간 민시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케빈은 자유로울 자격이 없다던 말. ‘보아하니 시영 언니뿐만 아니라 케빈 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네.’ 어느새 조용한 방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 찼고, 하윤은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해서 자료를 펼쳐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보니 눈앞에 자꾸만 익숙한 남자가 아른거렸다. ‘케빈 씨가 갑자기 나타난 게 혹시 도준 씨랑 관련 있나?’ ‘내가 혼자 길을 떠나는 게 걱정돼서 도준 씨가 일부러 케빈 씨를 보낸 건가?’ 이런 가능성만 생각하면 하윤은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를 버리기로 했어도 여전히 내 안전을 위해 모든 걸 준비해 뒀나 보네.’ 먼 거리 때문에 사랑과 증오가 사라지고 그 대신 그리움만 남은 모양이다. 이제 떨어져 있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보고싶은 걸 보면. ‘도준 씨는 뭘 하고 있을까? 설마 벌써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이 시각 하윤의 가슴에 쌓인 감정은 미친듯이 부풀어 올라 출구가 필요했고, 잘 프린트 된 글자는 아무리 애써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생각조차 방해했다. 결국 하윤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도준과 주고받은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고심 끝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가 다시 지우는 바람에 그렇게 많던 글자가 고작 몇 글자로 요약됐다. 그 문자를 보내자 불편한 감정이 어느 정도 사그라 들어 하윤은 다시 자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윽고 리스트를 한 페이지씩 확인하면서 기억에 따라 이름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 시각, 하윤의 마음을 담은 문자메시지는 도준에게 도착했다. [저 해원에 도착했어요. 여기 날씨가 너무 더워서 손목 상처가 간지러워요. 그런데 흉터 질까 봐 긁지도 못해 지금 기분이 안 좋아요.] 문자만 봐도 하윤의 투덜거리는 말투와 잔뜩 찌푸린 표정을 듣고 볼 수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투정 부리며 애교 부리
더 보기

제769화 발판을 마련하다 

권하윤은 선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더니 남자에게 쑥 밀었다. “종서 선배 고마워요. 저녁에도 수고 좀 해 줘요.” 김종서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유, 뭘 이런 걸 다. 내가 후배한테서 선물을 어떻게 받아?” 김종서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어느새 W사 시계를 손목에 차보기까지 하며 소시민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김종서가 이런 사람이 아니라면 하윤은 아마 김종서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김종서도 예전에는 이성호의 학생이었는데, 돈을 너무 밝히는 탓에 음악을 조금 배우는가 싶더니 몇 달도 견지하지 않고 장사한다며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그나마 머리가 좋아 문화예술에 관한 사업을 하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이익을 잘 챙 부를 축적했고, 동창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김종서를 찾아오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물론 이건 하윤의 계획 중 첫 번째 단계일 뿐이지만. “시윤아, 너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 왜 2년 동안 소식이 없었어?” 김종서는 전복 죽을 홀짝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중간한 때라 그런지 하윤은 입맛이 없어 물만 마셨다. “저 계속 경성에 있었어요.” “경성 좋지. 나도 이제 시간 되면 가보려고 하는데. 그곳에 유명한 재벌이 엄청 많다며? 우리 여기 공씨 가문처럼. 성이 뭐였더라? 민 씨였나?” 성만 들었지만 하윤의 가슴은 순간 뜨거워졌다. 하윤과 도준의 일은 경성 명문가에서 떠들썩했지만 일반 사람들의 귀에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더욱이 두 사람은 공개적인 결혼식도 올린 적이 없으니 해원에 있는 평민은 더더욱 두 사람을 연상시킬 리 없다. 하윤은 답답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 “저 오후에 일이 좀 있어서 우리 저녁에 만나요.” 김종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비싼 요리들을 훑어보더니 지갑을 찾는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건 내가 계산할 게. 카드가…….” 하지만 김종서의 꿍꿍이를 바로 파악한 하윤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막아
더 보기

제770화 연기 

김종서가 있을 때는 그나마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김종서가 떠나니 일순 조용해졌다. 특히 종서가 말했던 부자가 도착했다고 하니 모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문 밖으로 향했다. “그 부자라는 사람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콘서트홀을 짓는다는 거지? 우리를 속이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 “설마. 여기 1인당 50만 원씩 하는 곳이야. 부자인 게 틀림없어.” 오나영은 그 말에 다시 한번 쿠션 뚜껑을 열어 거울을 보며 얼굴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창 토론하던 그때, 은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가 웬 여자를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던 사람들은 하윤의 얼굴을 보자 모두 얼어붙었다. 하지만 하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 왔네요.” 이윽고 하윤은 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WM 해운 회사 대표, 던이에요.” 분위기는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특히 이성호를 고발했던 오나영과 채영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윤은 두 사람의 표정을 눈에 넣고는 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때 하윤과 조금 친하게 지내던 선배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윤아,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네요. 제 남친이 콘서트홀을 지어준다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 여기에 다시 오지 않았을 거예요.” 하윤은 애교 섞인 눈빛으로 던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냈다. 그제야 던은 이를 악문 채로 어렵사리 몇 글자 내뱉었다. “자기가 좋으면 됐지 뭐.” 하윤은 입을 막은 채 웃으며 던의 말에 맞장구쳤다. “제가 언제 기분 나빠 한 적 있었나요?” 그때 웬 선배가 하윤의 손에 있는 루비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큰 루비는 처음 보는데.” “네? 이거요?” 하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툭툭 털었다. “전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무거워 죽겠어요.” 오나영을 포함한 몇 명은 하윤을 보는 순간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렇게 남한테 빌붙어서 고상한 척하는 하윤을 보
더 보기
이전
1
...
7576777879
...
161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