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처가 대표님과 결혼했어요의 모든 챕터: 챕터 181 - 챕터 190

1009 챕터

제181화

“처음 뵙겠습니다.” 장선생님은 차분하고 행동이 점잖아 보였다. 심유진은 그가 급히 집을 사러 온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집을 둘러보지 않고 그저 심유진을 따라 내내 걸었다. 예의를 갖추면서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심유진은 이분의 신분이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왜 위치도 별로 좋지 않고 크지도 않은 이 집을 사려는 걸까?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겨우 집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 이유가 뭐가 됐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됐다. 집을 다 둘러보고 나서 장선생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음에 드네요. 혹시 지금 계약해도 될까요?” 그는 심유진의 집문서라던지 신분증 같은 것들을 확인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부동산 직원이 재빨리 미리 준비해 뒀던 계약서를 꺼냈다. 심유진은 계약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한 후 신중하게 서명을 했다. 하지만 장선생님은 달랐다. 그는 계약서를 받자마자 가장 뒷페이지를 펼치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욱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 넣었다. 심유진이 말했다. “계약서 검토 안 해보셔도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장욱이 웃으면서 물었다. “있어요?” “어... 없긴 한데요...” 심유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장욱도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심유진 것과 바꾸며 다시 한번 서명했다. 이로써 계약이 성사되었다. 계약서는 두 사람과 부동산 측이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했다. 장욱이 시계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혹시 이다음에 다른 일이 있으실까요?” “아니요. 왜 그러세요?” “그럼 오늘 바로 나머지 수속도 밟는 건 어떨까요?” “그래요.” 심유진도 이참에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수속을 마무리 짓기 전 장욱은 심유진에게 일정한 금액을 먼저 지불해야 했다. 은행으로 가는 길에 장욱은 심유진에게 모든 금액을 이체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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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집을 살 계획이 생긴 다음부터 심유진은 한가할 때마다 인터넷에서 새집 관련 정보를 찾아봤다.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체크해 뒀다가 전화를 걸어 더 자세히 알아봤다. 심연희가 심유진에게 선물을 건네주러 왔다가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 “언니, 집 사려고?” 심연희가 놀라서 물었다. 심유진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응.” “왜?” 심연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대표님이랑 결혼할 거야?” “그게 아니라...” 심유진이 멈칫했다. 심연희한테 자기가 살 집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심연희가 분명 허태준과의 관계를 의심할 것이다. “투자하려고.” “그렇구나.” 심연희는 더는 의심하지 않고 그 말을 믿었다. “근데 정말 경주에는 안 돌아갈 거야?” “응.” 심유진은 더는 심연희와 이 화제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뭐 마실래? 가져다줄게.” “난 물.” 심연희가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언니, 나 저녁 먹고 가도 돼?” 심유진은 부상을 입은 후로 계속 허태준이랑 여형민과 함께 밥을 먹었다. 낮에 집에 있을 때면 허태준이 아줌마에게 부탁해 밥을 차려주곤 했다. 그래서 심연희의 이 부탁이 조금 곤란했다. 선물을 줬으니 밥 한 끼 같이 먹는 게 맞는 행동이겠지만 이건 심유진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유진은 한참 고민하다가 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우리 둘이 나가서 먹자.” 심연희는 생각만큼 기뻐하지 않았다. “어... 나 출근하고 나서부터는 항상 밖에서 먹어서 이젠 다 질렸어. 집밥 먹고 싶어.” “근데 사놓은 재료도 없어. 그리고...” 심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울렸다. 허태준에게서 온 전화였다. 당연히 밥 먹으러 오라고 건 전화일 것이다. “밥 다 됐어. 내려와서 먹어.”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심유진은 심연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연희가 선물을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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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심연희는 심유진 앞을 가로막고 들고 온 종이백을 쳐들었다. “안녕하세요, 이건 선물이에요.” 여형민은 갑자기 튀어 나온 심연희에 깜짝 놀랐지만 종이백을 받고 웃으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식사하러 들어가시죠.” 허태준이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연희는 심유진과 여형민을 제치고 그의 옆에 앉았다. “대표님,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심연희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종이백을 허태준에게 건넸다. “너무 귀중한 선물이네.” 허태준이 종이백을 심연희 쪽으로 밀어놨다. “심연희 씨 남자친구한테 주는 게 낫겠어.” 심연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자친구 없는데요. 그리고 이건 대표님을 생각하면서 고른 거예요. 비싼 것도 아니고요.” 심연희가 머뭇거리며 해명했다. “이 브랜드는 웬만해서는 다 몇백만 원씩 할 텐데요. 아리 라이브에서 일하신다면서요. 월급도 높지 않으실 텐데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여형민이 돌직구를 날렸다. “괜찮아요, 이번달에 수입이 짭짤하거든요.” “아, 아리 라이브에서 1,2위를 한 bj들이 다 심연희 씨가 데리고 있는 애들이죠? 광고도 받고 대형 행사에도 초대받았다면서요.” 여형민의 말에 심연희는 더욱 우쭐해졌다. “맞아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실적을 따내다니 대단한데요.” 여형민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심연희는 저도 모르게 허태준 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에게서도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이 대화에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유진.” 허태준이 뻘쭘하게 옆에 서있던 심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와.” 그 따뜻한 목소리와 다정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심연희는 질투가 나 이를 꽉 깨물었다. 여형민네 집의 식탁은 긴 장방형 모양이었고 양쪽에 의자가 세 개씩 있었다. 허태준은 가장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고 심연희가 그 옆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 두 자리와 맞은쪽의 자리에만 수저가 세팅되어 있었고 밥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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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심유진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함부로 움직일 엄두를 못 냈다. 숨쉬는 법조차 까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여형민과 심연희가 자신의 어색함을 알아차릴까 봐 그녀는 억지로 웃으면서 허태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토닥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뭐 하는 거예요.” “있는데 뭐.” 허태준이 눈썹을 움찔했다. 차가운 시선이 맞은 편에서 밥을 먹고 있던 여형민에게 꽂혔다. 여형민은 고개를 더욱 푹 숙이고 입안의 밥을 채 씹지도 못한 채 다급하게 말했다.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세요.” 하지만 심유진은 그들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심연희가 못 보게 몸을 돌려서 허태준에게 눈빛으로 눈치를 줬다. 허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새우를 젓가락으로 집어 세심하게 까더니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아 해”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새우를 받아먹었다. 그녀의 혀가 허태준의 손가락을 살짝 스쳤다. 짧은 순간이었기에 심유진은 느끼지 못했지만 허태준은 그 짧은 감촉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유진은 부끄러워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지고 있었다. 허태준은 붉어진 그녀의 귀를 보며 너무 귀여워 다가가 살짝 깨물었다. 심유진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허태준이 손대지 못하게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심연희는 이 장면을 보며 손에 쥔 젓가락을 부러뜨릴 정도로 손에 힘을 꽉 줬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 애썼다. “맞다 언니, 곧 설날인데 같이 집에 돌아갈까?” 이 물음에 심유진은 후끈 달아오른 체온이 순식간에 영하로 치닫는 기분이었다. 심유진은 허태준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가족들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고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심연희와 함께 돌아갈 수 없었다. 연말은 일 년 중 가장 바쁠 때였기에 처리해야 할 서류들과 진행해야할 회의가 많았다. 그리고 이때쯤에 결혼을 하거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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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조금 전의 두근거림은 완전히 사라지고 심유진은 아무 말도 없이 밥만 먹었다.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걸 느끼고 여형민은 가벼운 화제로 말을 돌렸다. “크리스마스에 뭐 하실 생각이세요?” “야근이요.” 여형민이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벌써 바쁜 일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요. 아마 설이 지나서야 좀 한가해질 것 같아요.” “아... 그럼 제 크리스마스 파티에는 못 오시겠네요?” 여형민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심유진은 차마 그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만약에 일찍 퇴근하게 되면 들릴게요.” “좋아요! 혹시 오시게 되면 작은 선물 하나 준비해 주실래요? 선물을 교환하는 시간이 있거든요. 재밌을 거예요.” 심유진은 원래도 형식적으로 한 대답이었지만 이 말을 들으니 더욱 가지 말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형민의 친구들은 모두 부자들이니 싼 선물은 차마 들이밀지 못할 것이고 비싼 선물은 자신이 부담하기 힘들었다. 그녀의 이러한 걱정을 알아채기라고 하듯 여형민이 말을 보탰다. “저희만의 규정이 또 있거든요. 선물은 20만 원을 초과하면 안 돼요. 그리고 실용적인 선물이어야 하고 성의가 담겨있어야 해요.” 심유진은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호텔에서 야근이나 열심히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그녀는 인터넷에서 뜨개질 세트를 구매했다. 모자와 목도리 그리고 장갑을 손수 떠볼 생각이었다. 심유진은 대학교를 다니면서 뜨개질을 배웠었다. 그때는 남자친구에게 뜨개질을 해서 선물하는 것이 유행하던 때라 남자들 사이에서는 누구의 여자친구가 뜨개질 솜씨가 더 좋은지 비교하기도 했다. 심유진네 기숙사에는 총 네 명이 있었는데 심유진을 제외하고는 다 남자친구가 있었다. 겨울만 되면 그 세명은 뜨개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심유진만 혼자 무리에 끼지 못하는 느낌이 들진 않을까 싶어서 하은설은 그녀에게도 뜨개질 도구들을 사줬었고 심유진은 그때부터 자신이 뜨개질에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3,4일 걸리는걸 심유진은 이틀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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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여형민의 집에 가기 전에 심유진은 집에 들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준비한 선물을 챙겼다. 허태준과 여형민 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가 도착했을 때 허태준은 이미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허태준은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벽에 기대서 서있다가 심유진이 오는 걸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심유진이 들고 있는 종이백에 꽂혔다. “이게 네가 준비한 선물이야?” “맞아요.”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태준을 보니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선물 교환 안 할 거예요?” “어.” 허태준이 대답을 하며 도어벨을 울렸다. “재미없잖아.” 심유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허태준과 심유진이 동시에 파티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한층 더 달아올랐다.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여형민의 오래된 친구들이었다. 그러니 허태준과도 잘 아는 사이라 ‘허태준의 여자친구’ 란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허태준이 정말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심유진은 여형민과 인사를 나누고 선물만 건네주고는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파티에 참석한 친구들이 너무 열정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며 술을 따라주려 했다. “얜 술 못 마셔.” 누군가 얼음을 넣은 보드카를 심유진에게 건넸으나 허태준이 그 손을 가로막았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흥분한 친구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보통 이쯤 되면 다들 눈치를 보며 멈추는데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허태준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 다들 내일 허태준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톡톡히 놀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제수씨는 못 마시지만 너는 마실 수 있지?” 누군가 용감하게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 허태준의 날카로운 눈빛에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그는 최대한 허태준과 시선을 안 맞추면서 얘기를 계속해나갔다. “아이고, 못 마시는 거면 어쩔 수 없이 제수씨가 대신 마셔야겠네.” 허태준은 이 일을 꼭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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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허태준의 이 한마디 말에 분위기가 더욱 후끈해졌다. “야, 천하의 허태준이 마누라한테 잡혀 사네.” “와, 드디어 허태준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구나.” “제수씨, 최고예요 정말.” “제수씨, 아주 그냥 호되게 혼내주세요.” 심유진이 장단을 맞췄다. “어떻게 혼낼지 잘 생각해 볼게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있는 것이 억지로 맞춰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을 힐끗 쳐다봤다. 미소를 짓는 모습이 아까보다는 많이 편안해 보였다. 실내의 열기 때문인지 조금 홍조를 띠는 흰 피부와 조명이 비친 눈동자가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허태준은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줬다. 갑자기 목이 타는듯한 느낌에 그는 방금 내려놓았던 술을 한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차가운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것 같았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니 다들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오늘 그냥 혼나시기로 하셨나 봐?” “자자자, 오늘 태준이 소원 성취하게 해 주자.” 누군가가 술병을 들고 와 빈 술잔을 채웠다. 심유진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을 핑계로 술을 안마시려고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심유진은 그를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여자친구로서 다른 사람이 술을 먹이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심유진은 휴대폰을 켜서 배달앱을 뒤적거리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음... 이 시간에 몽둥이는 배달이 될까요?” “제수씨,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를 깎아서라도 튼튼한 걸로 준비해 드릴게.” “태준이 혼나는 거 영상으로 좀 남겨주세요.” 다들 한 마디씩 거들며 허태준을 놀렸다. 아내에게 잡혀 산다는 이미지가 자존심 상할 법도 한데 허태준은 전혀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았다. 그는 심유진이 억지로 장단을 맞추는 것일지 몰라도 일단은 그녀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왜, 나 혼내게?” 그가 심유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귀에 닿는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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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심유진은 허태준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독한 술을 한병 다 마셔버리는 걸 지켜봤다. 하지만 허태준은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고 그녀의 허리에 올려놓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다들 술을 한병 더 열려고 하는데 여형민이 다음 코너를 소개했다. “이제 선물을 교환해 볼까요?” 사실 선물교환은 모두가 별로 기대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남정네들끼리 직접 준비한 선물을 교환한다는 건 사실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형민은 어색해하는 친구들의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 두는 걸 매우 즐거워했다. 지금까지는 다들 이 시간을 가장 싫어했을지 몰라도 올해는 달랐다. “그래, 꼭 제수씨 선물로 골라야지.” “웃기지 마, 내가 고를 거야.” 그때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제수씨 선물은 태준 대표님한테 남겨드려야지. 아휴, 이 눈치도 없는 것들아.” 허태준은 그 말에 순간 감동받아 저 친구 회사랑 어떻게 합작할지 계획까지 세울뻔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달랐다. “에이, 선물도 안 들고 왔는데 참여하면 안 되지.” “제수씨가 대표님 선물은 따로 빼놨겠지. 이번에는 양보하라 그래.” “태준아, 우리도 정상적인 선물 좀 받아보자.” 심유진은 자신의 선물이 이렇게까지 환영을 받을 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이 시간까지 파티에 남아있을 줄도 몰랐다. 사실 뜨개질을 열심히 하긴 했어도 명품들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는 초라한 선물일 뿐이었다. 선물교환 코너가 시작되고 여형민이 번호표가 들어있는 검은 상자를 들고 왔다. 모두 상자 안에서 번호표를 뽑고 같은 번호인 사람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모두 표를 뽑고 있는데 선물을 가져오지 않은 허태준은 그냥 조용히 심유진 옆에 앉아있기만 했다. 심유진과 같은 번호를 뽑은 사람이 곧 나타났다. “우와! 나야! 내가 뽑았어!” 그가 번호표에 입을 맞추며 로또 1등 당첨된 사람처럼 기뻐했다. 다들 부러워하면서 선물 교환 코너가 끝이 났다.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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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심유진은 선물이라면서 챙겨준 과일들을 양손 가득 들고 여형민집을 나섰다. 심유진은 허태준의 손에 왠지 익숙한 종이백이 들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어? 이건 제가 가져온 선물 아니에요?” 그녀는 아까 자신의 선물을 가져간 사람이 가장 열정적으로 허태준에게 술을 붓던 사람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까 뽑은 사람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나 주던데.” 허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저 중간 과정을 많이 생략하고 얘기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했다는 사실 말이다. 사실 심유진도 허태준의 지위나 능력이 그중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두 장난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진심으로 축복을 건네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선물을 가졌던 아마 결국 허태준에게 전달해 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물을 모르는 사람에게 줬다면 그냥 잠깐 민망하고 말았을 텐데 허태준이 가졌다면 이건 얘기가 달랐다. “비싼 건 아니에요, 너무 기대하지 마요.” “그래.” 엘리베이터는 금방 19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지만 심유진은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허태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머리 아파.”허태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도 조금 풀린 것 같았다. 항상 차갑던 손도 지금은 후끈후끈했다. 심유진은 술에 취하면 미열이 오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허태준은 종래로 심유진 앞에서 취한 모습을 보인적이 없으니 심유진은 그도 이런 숙취를 겪진 않을까 싶었다. 그녀가 허태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왠지 몸이 뜨거운 것 같아 심유진은 허태준 집에 들어가자마자 구급상자부터 찾았다. 허태준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작고 여린 그 여자가 바삐 돌아다니면서 물도 떠주고 수건으로 얼굴도 닦아주는 모습을 지켜봤다. 위가 아픈 것도 잊어버릴 만큼 순간 만족감이 밀려왔다. 그는 취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몸이 안 좋았다. 야근하느라 저녁을 못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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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심유진이 빈컵을 받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태준의 태양혈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면서 안마해 줬다. 그녀는 팔꿈치로 소파를 짚으며 허태준 쪽으로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허태준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너무 뜨거워 심유진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심유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예뻐서.” 허태준의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심유진이 놀라서 손을 멈췄다. 둘의 눈빛이 마주쳤다. 허태준의 눈빛은 깊고 맑았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천진난만함도 조금 엿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천진난만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이 순간에는 이 단어만큼 그를 잘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것 같았다. “진짜 예뻐.” 허태준이 심유진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얘기했다. 심유진은 순간 허태준이 자신을 놀리려고 그런 건지 아니면 취기에 말이 잘못 나온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고마워요, 태준 씨도 예뻐요.” 그저 할 말이 없어서 예의상 대답해 준 건데 허태준은 이 말을 진지하게 맞받아쳤다. “어디가 예쁜데?” 심유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서대로 칭찬했다. “눈이 크고 눈썹이 짙고 속눈썹도 길어요. 코가 높고 입술은 얇고 피부가 좋고 비율도 좋죠.” 허태준은 이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웃음은 더욱 환해지고 눈빛이 더욱 빛나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나 좋아해?” “당연히 좋아하죠.” 이런 남자를 싫어할 여자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날 떠나려고 해?” 허태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탕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해진 표정이었다. “제가 언제요?” 심유진은 당황했지만 금방 이 상황을 이해했다. 어쩌면 지금 허태준이 말하고 있는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성운 별장에서 고열에 시달릴 때 계속 외우던 그 여자인 것 같았다. 심유진은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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