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는 돌잡이 물품들과 음식들을 한가득 준비해 차려놓았다. 장소월은 별이에게 한복을 입히고 보송한 방울이 두 개 달린 귀여운 모자도 씌워주었다.도우미가 말했다.“사모님, 대표님에게 전화할까요?”장소월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이대로 진행하면 돼요. 준비하느라 힘드셨죠?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은 아주머니만 남으시면 돼요.”도우미들이 모두 물러가자 장소월은 별이를 카펫에 앉혔다. 아이는 눈앞에 가득 차려진 물건들을 보면서도 전혀 관심도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뒤돌아 장소월에게 기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엄... 엄마...”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옆에 있던 은경애가 웃으며 말했다.“어머, 별이는 정말 아가씨를 좋아하나 봐요.”장소월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아 별이의 코끝을 살살 건드렸다.“별아, 그렇게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별이는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며 아 하고 소리쳤다.장소월은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내려앉았다.그녀는 자신이 줄곧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다.하여 그녀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자신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밥 먹죠.”장소월의 행동에 은경애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아이를 이토록 냉정하게 대한단 말인가.그래. 어쩌면 친자식이 아니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세상 어떤 엄마가 자신의 자식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는가.하지만 비록 이 아이를 낳진 않았지만, 장소월이 아이에게 어떻게 했는지 그녀는 모두 똑똑히 알고 있다.늘 아이에게 지극정성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냈다.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돌연 소현아가 도착했다.문 앞 경호원들은 소현아를 한바탕 수색하고 난 뒤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여보냈다.“소월아... 경호원들 왜 저러는 거야? 왜 갑자기 내 몸수색해?”장소월이 대답했다.“미안해. 너한테 실례를 범한 건 아니지?”소현아가
그때 기성은이 대표 사무실로 들어왔다.“대표님, 소아린 씨가 대표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낼까요.”소아린은 현재 전연우의 스캔들 상대였다.전연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니.”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전화로 지시 사항을 전달받은 프런트 직원이 성세 그룹 앞에서 선글라스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 소아린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소아린 씨,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대표님께선 지금 회사에 안 계신답니다.”소아린이 요염한 빨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없대요? 알겠어요. 그럼 잠시 후에 다시 오죠.”말을 마친 그녀는 풀이 죽어 회사를 나가 차에 올라탔다. 매니저가 조급히 물었다.“어떻게 됐어? 소식 있어?”소아린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회사에 없었어요.”“이건 네 마지막 기회야. 이번 일은 그 사람을 제외하곤 널 도울 수 있는 사람 없어. 아린아, 너 이번엔 너무 경솔했어.”“언니, 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해결할게요.”“이제 보아하니 다른 방법은 없겠네. 내가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으니까 그 사람 소식을 좀 알아볼게. 그땐 꼭 기회를 잡아야 해. 다신 날 실망시키지 마.”“네.”소아린에게 촬영 스케줄이 있어 차는 서울을 떠나 해성으로 향했다. 차가 출발한 지 30분 뒤, 돌연 검은색 승용차 몇 대가 소아린의 벤을 겹겹이 에워쌌다. 이어 한 무리의 건달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다짜고짜 차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소아린은 당황함에 어쩔 줄을 몰라 소리만 질러댔다.운전기사는 이미 사람들에게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고, 뒷좌석에 앉아있던 소아린은 그들에게 끌려 강제로 그들의 차에 올라탔다.“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그들에게 저항하던 도중 소아린이 입고 있던 하늘색 원피스가 찢겨 나갔다. 무언가 코를 감싸자 강력한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더럽고 지저분한 휑한 감옥 안이었다. 자
강지훈은 어이없는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 같았다.“기억해. 넌 이제부터 나 강지훈의 사람이야.”남자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뒤에서 떨고 있는 여자는 전혀 관여치 않고서 말이다.이어 소아린은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감금 생활을 했다. 매일 가만히 갇혀있다가 밤이면 남자의 극악무도한 짓밟음을 견뎌내야 했다.매니저는 상대의 신분을 알아내고는 소아린의 납치 사건을 더는 파헤치지 않았다. 강지훈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그녀가 조사해낸 내용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강지훈의 인맥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고 넓었다. 서울에서 한 가닥 하는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조차 그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연락을 받고 사람을 데리러 간 매니저는 너무 놀라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만신창이가 되어 사람 몰골조차 사라져버린 소아린을 데리고 매니저는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전연우가 없으니 장소월은 오랜만에 평안한 나날을 보냈다.소현아는 더더욱 자주 별장에 드나들었다.심지어 어떤 날은 별장에서 장소월과 함께 자기도 했다.그녀의 다리에 누워 지루한 드라마를 보고 있던 소현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우리 내일 밖에 나가보지 않을래? 계속 이렇게 별장에만 박혀있다간 우울증 올 거야.”“며칠 동안 너랑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까 살쪘어. 전에 가져온 옷들 다 못 입게 됐다니까.”소현아는 확실히 최근 며칠간 적잖게 살이 쪘다. 하지만 늘 예전처럼 통통하고 귀여웠다.“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같이 나가자. 간 김에 별이한테 옷도 몇 벌 사주고.”장소월은 이런 궁전에 갇힌 공주 생활을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다만 지금은 다르다. 옆에 그녀에게 진심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그리고 현아, 별이가 그녀와 함께 있다...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떠나시기 전 절대 별장을 나서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현아 씨에게 입을 옷이 없으면 밖에서 가져다주실 겁니다. 작은 도련님 옷은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옆에 있던 소현아, 그리고 도우미들까지도 이 집 안주인이 전연우와 통화하는 자세가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 깜짝 놀랐다.소현아는 순간 장소월에게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전연우는 장소월을 이곳에 가둬놓고 다른 여자와 쇼핑하며 옷을 사주고 있다.소현아는 씩씩거리며 장소월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갔다.“퉷, 나쁜 자식.”욕설을 퍼붓고 난 뒤, 소현아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심상치 않은 상황에 은경애는 다른 도우미들을 모두 물렸다.소현아는 측은한 눈동자로 장소월을 바라보며 말했다.“소월아... 나 왠지 네가 너무 가엾고 마음 아파. 너 여기에 있고 싶지 않은 거지?”장소월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지어졌다.“이제 적응됐어. 괜찮아.”“하지만... 지금 네 미소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아.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면서도 항상 우울해 보였어.”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소월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미안해. 너랑 나가자고 하는 게 아니었어.”장소월은 울지 않았다. 도리어 소현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울먹거리며 장소월을 끌어안았다.“소월아... 이곳에 있는 게 싫으면서 왜 떠나지 않는 거야!”“서울에서 사는 게 행복하지 않으면 먼 곳으로 가도 돼.”“난 네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연락 두절이 되는 걸 원하지 않지만, 네가 매일매일 행복하길 바라.”소현아는 이미 일찌감치 눈치챘었다.장소월은 이곳에서 늘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정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소현아가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면 영혼 없는 인형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난 괜찮아, 현아야. 나 잘 지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장소월은 담담히 웃으며 소현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경호원이 되돌아와 장소월에게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나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반드시 저희들의 시야 안에 계셔야 합니다.”소현아가 말했다.“범죄자를 감시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장소월보다 그녀가 더욱 분노했다.“됐어요.”“녹차 설기 만들어줄까?
전연우는 집에 돌아와 복도를 지나가다가 화실 조명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화실 문을 빼꼼 여니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몸에 얇은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장소월은 문 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왔음을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집중했다.검은색 정장이 장소월의 어깨에 걸쳐졌다. 그녀가 붓을 멈추자, 전연우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쉬고 있어?”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낯설기도, 익숙하기도 했다.장소월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잠에서 깼는데 뭘 할지 몰라서 작업 마무리하려고 왔어.”전연우는 그녀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친 뒤 자욱이 안개가 덮인 수림 속, 빗방울이 아직 나뭇잎에 걸려있는 모습이 몽롱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전연우는 그림을 잘 몰랐음에도 장소월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뭘 그린 거야?”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옥수림이야. 선배님이 만든 새로운 게임인데 배경 작업을 3일 안에 해야 해.”그림의 이름을 들은 순간, 전연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공기 중에 풍겨나갔다. 외투엔 알코올 냄새를 제외하고 향수 냄새도 깃들어 있었다.장소월은 몸에 덮여 있는 정장을 벗어 그에게 돌려주었다.“씻고 쉬어. 별이는 아기방에 있으니까 깨우지 말고.”전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돌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장소월은 몸의 중심을 잃고 붓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는 거야!”옆방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떠올린 그녀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허공에서 잡힌 팔목을 보니 이미 시뻘겋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고통에 눈썹을 찌푸렸다.전연우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잔해 보였지만, 폭풍전야처럼 옅게 일렁이고 있었다.그가 말하지 않으면, 장소월은 그가 대체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전연우가 물었다.“내가 없었던 며칠 동안, 보고 싶지 않았어? 응?”장소월은 그에게 여전히 냉랭했다.“너도 알고 있잖아.”무슨 대답이든 장소월은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전연우는 아니었다.“상관없어. 소월이가 이 오빠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장소월은 그가 다른 여자와 그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 그의 손길에 강력한 거부감이 들었다. 이제 그의 체취만 맡아도 역겨워 위가 욱신거렸다.전연우는 애써 참다가 결국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장소월이 도망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뭘 도망가?”전연우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가슴에 가져갔다.“단추 풀어줘. 씻고 싶어.”그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그녀는 불편함이 몰려왔다.“그런 건 너 스스로 해. 난 자야겠어.”쉽게 그녀를 놓아줄 전연우가 아니었다.“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해?”그렇다. 그녀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장소월은 명령이라도 받은 듯 그에게 복종하며 그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검은색 셔츠를 벗으니 향수 냄새가 더욱 농후하게 풍겨 나왔다.옷을 모두 벗은 뒤 전연우는 강제로 그녀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뜨거운 물줄기 아래, 전연우의 나체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이번엔... 우리 여기에서 해볼까?”장소월이 고개를 들었다.“미쳤어!”화실 안 욕실과 소현아가 자고 있는 방은 벽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다. 작은 소리일지라도 분명 똑똑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할게.”욕실 안, 장소월은 그에게 시달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바깥에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함께 뒹굴었는데도, 한 명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단 말인가?욕실부터 두 사람의 침실까지, 그 사이 복도에도 장소월의 몸에서 벗겨져 나온 잠옷이 널브러졌다.방 안, 장소월은 푹신한 침대에 끼어 들어가 한 번 또 한 번 반복되는 그의 맹렬한 충격을 견뎌냈다.하늘이 밝아져 와서야 끝이 났다.시간 맞춰 올라와 장소월을 부르려던 도우미는 바닥에 놓여있는 원피스 잠옷을 보자마자 한동안 입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겼다
장소월과 전연우?소현아는 장소월이 그와 이런 관계가 되어있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 한 침대에서 자게 된 거지?소현아는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이곳에 머물렀던 며칠 동안 소현아는 도우미들이 말하는 사모님이 강영수의 부인을 말하는 줄로 알았다.그게 전연우의 부인을 뜻하는 것일 줄이야...안 돼. 그녀는 너무나 혼란스러워 호흡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럼 그 아이는?그 아이도 강영수의 아이가 아니란 말인가?장소월과 너무 닮아있어 착각했었다...그렇다면 장소월이 상간녀라는 이야기가 아닌가?은경애는 이상해 보이는 소현아를 보고는 물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소현아는 힘껏 자신의 얼굴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렸다.“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소월이는... 절대 전연우와 그런 관계일 리가 없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야.”하지만 그녀는 장소월에게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 은경애에게 물었다.“아주머니, 소월이와 그 나쁜 놈 대체 무슨 관계예요? 소월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줄곧 강영수 아니었나요? 지금 왜 그 나쁜 놈이랑 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은경애는 우물쭈물 망설였다.“그... 그건... 아가씨, 어떤 일은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소월 아가씨를 위해서도 그게 맞습니다. 대표님 앞에선 절대 그 사람에 관한 어떤 것도 입에 올려선 안 됩니다. 소월 아가씨는 이미 오랫동안 견뎌내고 계십니다. 더는 자극하지 마세요.”“아가씨와 대표님께서 방에서 나오시면 절대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말씀하지도 마세요.”소현아는 화가 나 발까지 동동 굴렀다.“왜 그래야 하는데요! 그 나쁜 놈 분명 인시윤과 결혼했으면서 왜 또 소월이를 건드리는 거예요!”소현아는 전연우가 강제로 장소월을 이곳에 묶어두는 이유가 강영수와 함께 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그때,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밖 도우미가 인사했다.“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대표님,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사모님은...”
강씨 집안, 인씨 집안 모두 일찌감치 그의 손안에 들어왔다.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장소월은 소현아까지 이 지옥의 소용돌이에 끌어들이기 싫어 강영수의 죽음을 알려주지 않았다.그녀뿐만 아니라 외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전연우는 이미 서울 하늘을 한 손으로도 가릴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 있었다.더는 아무도 그의 걸림돌이 될 수 없다.“현아야... 잠깐 나가줄 수 있어? 나 너무 피곤해서 조금 더 자고 싶어.”소현아는 기진맥진한 그녀의 모습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그래. 푹 쉬어. 방해하지 않을게.”소현아는 방을 나서 눈물을 닦으며 소월이를 반드시 이 감옥에서 탈출시킬 거라 굳게 다짐했다.성세 그룹.전연우가 주관하는 회의가 끝난 뒤, 기성은이 서류 봉투를 들고 와 책상 앞에 놓아주었다.“이건 소아린 씨의 병원 치료 기록입니다. 소아린 씨가 강지훈에게 납치당한 시간은 저희 회사에 왔던 날짜와 일치합니다.”“여기... 부상 부위가 찍혀있는 사진입니다. 하체 두 곳이 심하게 찢겨 앞으로 스스로 일상생활을 하기도 힘들다고 합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기성은이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소아린 씨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현재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몰래 정신병원에 보냈다고 합니다.”전연우는 사진을 살펴본 뒤 책상에 던져놓았다.“소아린에 관한 어떤 기사도 매체에 알려지면 안 돼. 그리고 모든 치료 비용은 성세 그룹에서 부담할 거야.”기성은은 못마땅한 감정을 표했다.“대표님, 강지훈이 대표님에게 보이는 적의는 명확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냥 이렇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조사에 따르면 대표님과 조금의 스캔들이 있었던 여자분들 모두 강지훈에게 천하 일성 지하실로 끌려갔다고 합니다.”전연우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라이터를 켜 사진을 모두 불태워버렸다.“그 더러운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군.”“송시아는?”기성은이 말했다.“송 비서는 최근 줄곤 강지훈의 곁에 붙어있습니다. 저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