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병원에서 하루 종일 잤잖아. 아직도 잠이 부족해?”“내가 돌아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돌아올 생각이었어?”장소월은 그가 왜 화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말투는 마치 부모님이 집에 늦게 들어온 아이를 나무라는 듯했다.전연우와 장소월의 나이 차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여덟 살이다. 어렸을 때부터 전연우는 늘 장소월을 통제했다. 학교를 마친 뒤 한 시간만 늦게 들어와도 왜 늦었는지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당시 장소월은 그를 좋아했고 그에게 고백도 했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건 차가운 거절이었다.그는 늘 우리 둘은 남매일 뿐이라고 말했다.장소월의 옆에 이성이 나타날 때면, 전연우는 늘 그들의 접근을 막아버렸다.한번은 장소월이 상처를 입고 다른 방식으로 그를 잊어야겠다는 생각에 남자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귄 지 3일째 되던 날, 전연우는 어디에서 소식을 들었는지 바로 남자를 전학시켜 버리고 그녀와 헤어지게 만들었다.장소월 또한 이 모든 일은 그의 간섭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장소월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전연우, 넌 이제 장씨 집안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호자 같은 태도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지 마.”그녀는 그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곧바로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녀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전연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요즘 청연사에 가서 뭐 했어?”“절에 가서 뭘 하겠어? 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이 간섭하는 거 아니야?”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몇 번을 시도했음에도 벗어나지 못해 한숨을 내쉬었다.“부처님 앞에서 하루빨리 네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날 놓아주게 해달라고 빌었어.”“이 경서는 어디에서 온 거야?”“주지 스님이 주셨어.”장소월은 그에 대한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나 진짜 피곤해. 궁금한 거 있으면 한 번에 다 물으면 안 돼?”아무도 감히 그에게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하늘 아래 장소월 단 한 사람뿐이다.
거실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고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장소월은 전연우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그녀가 한 말을 신경 쓰고 있을까?그녀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까?장소월이 아는 전연우는 절대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다. 잔인한 일을 저지르고도 절대 자신이 한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그는 강용을 이용해 강한 그룹을 손에 넣었다. 그가 벼랑 끝으로 내몰려 그녀의 목숨으로 협박했을 때도 전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결국 강용은 스스로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미안해 한 마디를 남기고 그녀를 밀친 뒤 자결했다.그녀는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남편으로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기라도 해야 했거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훑어보고는 송시아와 함께 그녀의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매정함을 뼛속 깊이 느꼈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전연우는 절대 아무에게도 마음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씻은 뒤 침대에 기대어 앉아 불경을 읽었다.저녁 11시, 장소월은 피곤함이 밀려와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조명을 끈 뒤 잠자리에 들었다.거실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가득 차 있었다.전연우는 장소월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오늘 장소월은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아이...장소월의 아이?전연우는 자신의 아이에 대해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만약 아이가 있다면 자신은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지루하고 의미 없는 결혼의 산물이라니.만약 어느 날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많고 많은 여자 중 아무나 골라 만들면 되는 것이다.결혼, 아이... 이 두 단어를 떠올리니, 전연우의 머릿속에 돌연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만약 그에게도 그녀와 함께 낳은 아이가 있다면... 장소월과...머릿속에서 행복한
수백 번이나 멍청이라고 불렀던 그녀를...대체 언제부터?이런 감정은 회한인가?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고?실은 전연우 자신도 알지 못했다.자신이 장소월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전연우는 그저 자신의 물건이 떠나가게 놔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수많은 밤, 그녀의 방에 들어갔던 건 힘들어 녹초가 되어가는 그녀를 지켜보며 채우는 삐뚤어진 소유욕 때문이었다.전연우는 그저 그녀를 눈에 자신만을 담고 있었던 예전의 장소월로 돌려놓고 싶었을 뿐이었다.무슨 수를 쓰든 그녀를 옆에 두고 싶었다.이게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면...못 할 것도 없지. 사랑 그까짓 거 해보면 된다.그녀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받아들일 것이다.만약 장소월이 그토록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면...아이 또한 안겨줄 수 있다.그들의 아이를.다음 날 아침.해가 갓 떠올랐을 때, 그녀는 아기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희미한 정신으로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몇 분 뒤, 또렷한 아기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장소월은 침대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베개에 누군가 잔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젯밤 밤새 안 잤나?장소월은 호기심에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 들어선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전연우는 아이를 안고 있고, 기성은은 옆에서 그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배고파하는 것 같아요.”장소월은 긴 머리를 움켜잡고 이마를 찌푸린 채 눈을 비비며 어지러운 탁자 위를 살펴보았다. 아기용품이 빼곡히 놓여있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 아이는 어디에서 데려왔어?”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장소월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종아리가 드러난 잠옷 치마를 입고 발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전연우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기성은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이렇게 아이를 데려오면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겠어.”전연우는 담요를 들고 가 그녀의 몸에 둘러주었다.“마음에 안 들어?”“다시 한번 물을게. 이 아이 대체 어디에서 데려왔어?
사정이야 어찌 됐든, 장소월은 아이가 이대로 울고만 있게 놔둘 순 없었다.전연우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데려왔단 말인가. 정말 답이 없는 사람이다.그들은 아이를 가까운 병원에 데려갔다.아이는 곧바로 응급실에 실려 갔고, 기성은은 아기용품 두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응급실 밖, 의사가 검사를 마친 뒤 걸어 나와 말했다.“며칠 동안 연속적으로 고열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반드시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몸이 많이 약해져 치료를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네. 부탁드릴게요.”아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장소월은 처음으로 전연우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단 말인가?기성은은 입원 절차를 밟았고 장소월은 문 앞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아이에겐 보호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리를 뜰 순 없었다.아이의 열은 무려 40도까지 치솟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오늘 밤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두 하늘에 달렸다고 말씀하셨다.그때, 검은색 제복을 입은 경찰이 여자 한 명을 데리고 걸어왔다.장소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쳐다보았다.경찰이 말했다.“CCTV를 찾아보니 이 사람이 아이를 버렸더라고요.”4,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초조해하며 말했다.“아이고, 경찰관님, 전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이 나이에 어떻게 아이를 낳겠어요.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에요. 저도 오늘 쓰레기통에서 발견하고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보육원 문 앞에 놓아두었어요.”장소월이 물었다.“그럼... 이 아이의 가족들을 찾을 수 없는 거예요?”경찰이 대답했다.“CCTV를 찾아보았는데 아이를 버린 사람은 찾지 못했어요. 화춘 거리 몇 군데 CCTV가 고장 나는 바람에 중요한 장면을 찍지 못했어요. 지금으로선 찾기 힘들 것 같아요.”“그래서...”그 말뜻은 너무나도 분명했다.장소월이 뒤돌아 가려고 하자, 전연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수고하셨어요. 저희가 해결할게요.
조금 전의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인시윤은 비로소 깨달았다.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느냐는 쉽게 보아낼 수 있다. 그 사람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가 그 첫 번째 증거다.혼인신고를 했음에도 인시윤은 항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인시윤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살아왔다.그녀는 절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소월아, 왜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이 새언니한테 말해봐.”인시윤이 등장하고 나서야 장소월은 전연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그녀는 조금 전 미처 옷도 갈아입지 못해 잠옷 차림으로 집을 나섰었다. 이제 가을이라 날씨는 꽤 쌀쌀했다.그녀와 인시윤은 서로 날을 세우지도,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저 표면적인 반응일 뿐이다.전연우의 거칠고 두꺼운 피부엔 아직도 옅은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장소월이 얼마나 힘주어 때렸는지 알 수 있었다.장소월은 인시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이건 너희 가족 일이야. 알아서 해결해.”“거기 서!”장소월은 멈춰 서지 않았다.“여보.”인시윤이 장소월을 쫓아가고 있는 전연우를 향해 소리쳤다.그녀의 마음속에서 분노에 휩싸인 질투가 활활 타올랐다. 바람 한 가닥만 불어오면 크나큰 초원 전체를 모조리 불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인시윤은 집에 돌아가 알아보고 나서야 전연우가 보육원에서 아이 한 명을 데려와 장소월에게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장소월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이제 일반인들은 쳐다볼 수도 없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때문에 확실히 그에게도 성세 그룹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필요하다. 그녀는 전연우의 아내이니,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그 자격을 가질 수 있다.저 아이는 그저 전연우가 장소월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주워 온 장난감일 뿐이다.지금 인씨 집안 전체가 모레 있을 결혼식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그때 도우미가 방문을 두드렸다.“사모님, 누군가 사모님을 찾아왔습니다.”“그래. 서재에 모셔.”“네. 사모님.”인경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이제 내가 할 말은 너한테 다 했어. 혼자 잘 생각해 봐. 난 바빠서 이만 내려가 봐야 해.”서재에 들어가니 험상궂게 생긴 중년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검은색 천으로 감싼 상자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원하던 물건입니다.”인경아가 걸어가 검은 천을 풀자 유골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유골과 완전한 뼈대 하나가 들어있었다.“확실히 그 사람 맞아요?”“못 믿으시겠다면 저한테 영상도 있으니 보세요. 바다에서 건져내고 며칠 뒤, 화장을 마치고 옮겨온 거예요.”인경아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그럼 그년은요?”“강일주는 심유가 죽은 뒤 유골을 바다에 뿌렸어요. 그리고 스스로 바다에 빠져 목숨을 끊었고요.”인경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유골함에서 시선을 거두고 의자에 앉았다.“임무를 완수했으니 약속했던 돈은 부족하지 않게 보내줄게요. 돌아가요.”남자가 방에서 나간 뒤 인경아는 한참을 멍하니 검은색 유골함을 바라보았다.“당신은 그 여자와 함께 죽고, 같은 곳에 묻히고 싶었겠지. 하지만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일수록 난 절대 당신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그 잡종 또한 마찬가지야. 절대 편히 지내게 하지 않을 거야.”장소월은 전연우에 의해 강제로 로즈 가든에 끌려왔다.돌아오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그 아이 때문에 말이다...장소월은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아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거절하자 전연우는 아이로 그녀를 협박했다. 만약 그녀가 키우지 않는다면 지금 즉시 아픈 아이를 보육원에 돌려보내겠다면서 말이다.느긋하게 걸어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전연우의 뒤에서 장소월이 욕설을 퍼부었다.“난 아이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소중한 한 아이의 생명이야. 넌 충분히 아이를 치료해준 뒤 인씨 집안에 데려가 키워줄 수
“뭐 하는 거야? 내려놔.”“뺨 때린 대가야.”전연우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뜨겁게 키스했다.장소월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씻어. 오늘 씻지도 않았잖아. 몸에서 냄새나.”30초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전연우의 호흡은 이미 거칠어졌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 하고 씻을게.”“싫어!”전연우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입은 싫다고 하지만 몸은 반응하고 있잖아.”그가 장소월의 치마를 들어 올리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복부에서 전해져오는 통증 때문에 장소월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새로 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침대가 격렬한 흔들림에 삐걱거리며 소리 냈다.병원에서 집에 돌아온 건 꽤 이른 시간이었다.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바디워시를 발라주던 중 그의 시선이 장소월의 복부에 멈췄다.가슴속에서 돌연 미묘한 감정이 일렁거렸다.전연우는 그녀를 물에서 꺼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 뒤 그녀를 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두 시간 뒤, 장소월은 시큰거리는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잔 탓인지 전연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장소월은 허리에 올려진 전연우의 손을 내려놓은 뒤 옷을 입고 방에서 나갔다.거실에선 기성은을 포함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주방에선 휴가를 마친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택배기사가 물건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장소월 씨, 주문한 물건 모두 배송했어요. 사인해 주세요.”기성은이 배송 목록을 장소월에게 건넸다.“대표님께서 장소월 씨의 이름으로 산 아기용품들입니다. 부족한 거 없나 살펴보세요.”장소월은 잠시 망설이다가 목록을 받아 살펴보았다. 정말 많은 양이었다.장소월은 단 몇 시간 안에 빠르게 꾸며놓은 아기방을 훑어보고는 말했다.“됐어요. 일단 이만하면 충분해요. 수고하셨어요.”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아가씨, 식사하세요.”도우미가 갈비탕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전연우는 장소월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병원에 갔을 거라 예상했다. 경호원이 항상 따라다니고 있으니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하여 그는 일을 처리하러 회사에 출근했다.대표 사무실에 들어가니 오랜만에 보는 송시아가 그의 자리에 앉아있었다.“이제 조금도 숨길 생각 없나 봐요? 책상 위에 장소월 사진을 버젓이 올려놓은 걸 보면.”송시아는 원래의 길었던 머리를 싹둑 자르고 짧은 단발인 모습이었다.여자에겐 자고로 두 가지의 어려운 결정이 있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랜 시간 동안 길러온 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다.전연우는 송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듯 태연하게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3분 시간을 줄게. 네 결정을 말해봐.”송시아가 서랍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의 얼굴이 자욱한 연기 속에 파묻혔다.사라진 며칠 동안 송시아는 확연히 야위었다. 얼굴엔 두껍게 파운데이션을 발랐지만 그 초췌함은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내 손으로 당신을 그 자리까지 올렸어요. 전연우 씨, 이게 내 수고에 대한 대가예요?”“인시윤과 결혼하고, 그것도 모자라 장소월과 살림을 차리고...”송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장소월은 정말 끔찍이도 생각하네요.”그녀를 위해서라면 전연우는 하지 못할 일이 없다.송시아는 장소월이 죽은 뒤 전연우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 그가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우스운지 모른다.전연우가 차갑게 말했다.“1분 남았어.”송시아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피운 뒤 자리에서 일어서 그에게로 걸어갔다. 이어 주객 전도된 모습으로 뻔뻔하게 그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남색은 그녀가 좋아하는 색깔이 아니다.“하나가 더 늘어도, 줄어도 상관없어요. 인시윤은 내가 신경 쓸만한 위인이 못되 거든요.”“난 당신과 비슷해요. 충분히 깊은 인내심을 갖고 있죠. 난 당신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모두 가질 거예요.”“당신은 장씨 집안에서 20년이나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