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걱정하지 마. 연우 씨는 절대 오빠를 해치지 못해. 이젠... 내 오빠이자 연우 씨의 형님이기도 하잖아.”인시윤의 확신에 찬 말투에 장소월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안전하게 강영수와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장소월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인시윤은 떠나기 전 약속대로 아래층 약국에서 약을 받아왔다. 장소월은 곧바로 그 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전연우와 한패인 이 더러운 병원에서 준 약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장소월은 강영수를 보러 위층으로 향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많이 호전되었다.그녀는 침대 옆에 앉아 면봉에 물을 적셔 그의 입술에 발라주고는 죽은 사람과도 같이 생기 하나 없는 강영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장소월이 사소한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다.“오늘 대사님께서 경서 하나를 주셨어. 넌 부처님의 은총을 받는 관상을 갖고 있어서 머지않아 몸을 회복할 거라고 하셨어.”“넌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있었어. 이제 더는 자지 마. 응?”“영수야, 몇 개월만 더 지나면 서울에도 눈이 내릴 거야...”“학교 조각상 뒷면에 새겨진 글자 봤어. 내 이름이더라고.”장소월이 약간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나 요즘 지난 4년 동안 나한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얘기했어. 너 듣고 있는 거야? 나 정말 네가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어. 예전의 그 강영수를 보고 싶단 말이야.”“김남주와의 일은 더는 문제 삼지 않을게. 그러니까 얼른 깨어나, 응?”장소월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초췌한 얼굴에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이 피부에 닿은 순간, 강영수의 몸이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았다.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은 빠르게 눈물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었다.경호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가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대표님께서 이미 로즈 가든에 도착해 저희더러 아가씨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알겠어요.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장소월이 창밖을 내다보
전연우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병원에서 하루 종일 잤잖아. 아직도 잠이 부족해?”“내가 돌아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돌아올 생각이었어?”장소월은 그가 왜 화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말투는 마치 부모님이 집에 늦게 들어온 아이를 나무라는 듯했다.전연우와 장소월의 나이 차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여덟 살이다. 어렸을 때부터 전연우는 늘 장소월을 통제했다. 학교를 마친 뒤 한 시간만 늦게 들어와도 왜 늦었는지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당시 장소월은 그를 좋아했고 그에게 고백도 했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건 차가운 거절이었다.그는 늘 우리 둘은 남매일 뿐이라고 말했다.장소월의 옆에 이성이 나타날 때면, 전연우는 늘 그들의 접근을 막아버렸다.한번은 장소월이 상처를 입고 다른 방식으로 그를 잊어야겠다는 생각에 남자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귄 지 3일째 되던 날, 전연우는 어디에서 소식을 들었는지 바로 남자를 전학시켜 버리고 그녀와 헤어지게 만들었다.장소월 또한 이 모든 일은 그의 간섭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장소월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전연우, 넌 이제 장씨 집안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호자 같은 태도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지 마.”그녀는 그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곧바로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녀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전연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요즘 청연사에 가서 뭐 했어?”“절에 가서 뭘 하겠어? 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이 간섭하는 거 아니야?”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몇 번을 시도했음에도 벗어나지 못해 한숨을 내쉬었다.“부처님 앞에서 하루빨리 네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날 놓아주게 해달라고 빌었어.”“이 경서는 어디에서 온 거야?”“주지 스님이 주셨어.”장소월은 그에 대한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나 진짜 피곤해. 궁금한 거 있으면 한 번에 다 물으면 안 돼?”아무도 감히 그에게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하늘 아래 장소월 단 한 사람뿐이다.
거실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고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장소월은 전연우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그녀가 한 말을 신경 쓰고 있을까?그녀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까?장소월이 아는 전연우는 절대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다. 잔인한 일을 저지르고도 절대 자신이 한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그는 강용을 이용해 강한 그룹을 손에 넣었다. 그가 벼랑 끝으로 내몰려 그녀의 목숨으로 협박했을 때도 전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결국 강용은 스스로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미안해 한 마디를 남기고 그녀를 밀친 뒤 자결했다.그녀는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남편으로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기라도 해야 했거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훑어보고는 송시아와 함께 그녀의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매정함을 뼛속 깊이 느꼈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전연우는 절대 아무에게도 마음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씻은 뒤 침대에 기대어 앉아 불경을 읽었다.저녁 11시, 장소월은 피곤함이 밀려와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조명을 끈 뒤 잠자리에 들었다.거실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가득 차 있었다.전연우는 장소월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오늘 장소월은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아이...장소월의 아이?전연우는 자신의 아이에 대해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만약 아이가 있다면 자신은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지루하고 의미 없는 결혼의 산물이라니.만약 어느 날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많고 많은 여자 중 아무나 골라 만들면 되는 것이다.결혼, 아이... 이 두 단어를 떠올리니, 전연우의 머릿속에 돌연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만약 그에게도 그녀와 함께 낳은 아이가 있다면... 장소월과...머릿속에서 행복한
수백 번이나 멍청이라고 불렀던 그녀를...대체 언제부터?이런 감정은 회한인가?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고?실은 전연우 자신도 알지 못했다.자신이 장소월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전연우는 그저 자신의 물건이 떠나가게 놔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수많은 밤, 그녀의 방에 들어갔던 건 힘들어 녹초가 되어가는 그녀를 지켜보며 채우는 삐뚤어진 소유욕 때문이었다.전연우는 그저 그녀를 눈에 자신만을 담고 있었던 예전의 장소월로 돌려놓고 싶었을 뿐이었다.무슨 수를 쓰든 그녀를 옆에 두고 싶었다.이게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면...못 할 것도 없지. 사랑 그까짓 거 해보면 된다.그녀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받아들일 것이다.만약 장소월이 그토록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면...아이 또한 안겨줄 수 있다.그들의 아이를.다음 날 아침.해가 갓 떠올랐을 때, 그녀는 아기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희미한 정신으로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몇 분 뒤, 또렷한 아기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장소월은 침대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베개에 누군가 잔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젯밤 밤새 안 잤나?장소월은 호기심에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 들어선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전연우는 아이를 안고 있고, 기성은은 옆에서 그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배고파하는 것 같아요.”장소월은 긴 머리를 움켜잡고 이마를 찌푸린 채 눈을 비비며 어지러운 탁자 위를 살펴보았다. 아기용품이 빼곡히 놓여있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 아이는 어디에서 데려왔어?”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장소월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종아리가 드러난 잠옷 치마를 입고 발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전연우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기성은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이렇게 아이를 데려오면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겠어.”전연우는 담요를 들고 가 그녀의 몸에 둘러주었다.“마음에 안 들어?”“다시 한번 물을게. 이 아이 대체 어디에서 데려왔어?
사정이야 어찌 됐든, 장소월은 아이가 이대로 울고만 있게 놔둘 순 없었다.전연우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데려왔단 말인가. 정말 답이 없는 사람이다.그들은 아이를 가까운 병원에 데려갔다.아이는 곧바로 응급실에 실려 갔고, 기성은은 아기용품 두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응급실 밖, 의사가 검사를 마친 뒤 걸어 나와 말했다.“며칠 동안 연속적으로 고열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반드시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몸이 많이 약해져 치료를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네. 부탁드릴게요.”아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장소월은 처음으로 전연우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단 말인가?기성은은 입원 절차를 밟았고 장소월은 문 앞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아이에겐 보호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리를 뜰 순 없었다.아이의 열은 무려 40도까지 치솟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오늘 밤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두 하늘에 달렸다고 말씀하셨다.그때, 검은색 제복을 입은 경찰이 여자 한 명을 데리고 걸어왔다.장소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쳐다보았다.경찰이 말했다.“CCTV를 찾아보니 이 사람이 아이를 버렸더라고요.”4,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초조해하며 말했다.“아이고, 경찰관님, 전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이 나이에 어떻게 아이를 낳겠어요.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에요. 저도 오늘 쓰레기통에서 발견하고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보육원 문 앞에 놓아두었어요.”장소월이 물었다.“그럼... 이 아이의 가족들을 찾을 수 없는 거예요?”경찰이 대답했다.“CCTV를 찾아보았는데 아이를 버린 사람은 찾지 못했어요. 화춘 거리 몇 군데 CCTV가 고장 나는 바람에 중요한 장면을 찍지 못했어요. 지금으로선 찾기 힘들 것 같아요.”“그래서...”그 말뜻은 너무나도 분명했다.장소월이 뒤돌아 가려고 하자, 전연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수고하셨어요. 저희가 해결할게요.
조금 전의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인시윤은 비로소 깨달았다.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느냐는 쉽게 보아낼 수 있다. 그 사람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가 그 첫 번째 증거다.혼인신고를 했음에도 인시윤은 항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인시윤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살아왔다.그녀는 절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소월아, 왜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이 새언니한테 말해봐.”인시윤이 등장하고 나서야 장소월은 전연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그녀는 조금 전 미처 옷도 갈아입지 못해 잠옷 차림으로 집을 나섰었다. 이제 가을이라 날씨는 꽤 쌀쌀했다.그녀와 인시윤은 서로 날을 세우지도,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저 표면적인 반응일 뿐이다.전연우의 거칠고 두꺼운 피부엔 아직도 옅은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장소월이 얼마나 힘주어 때렸는지 알 수 있었다.장소월은 인시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이건 너희 가족 일이야. 알아서 해결해.”“거기 서!”장소월은 멈춰 서지 않았다.“여보.”인시윤이 장소월을 쫓아가고 있는 전연우를 향해 소리쳤다.그녀의 마음속에서 분노에 휩싸인 질투가 활활 타올랐다. 바람 한 가닥만 불어오면 크나큰 초원 전체를 모조리 불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인시윤은 집에 돌아가 알아보고 나서야 전연우가 보육원에서 아이 한 명을 데려와 장소월에게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장소월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이제 일반인들은 쳐다볼 수도 없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때문에 확실히 그에게도 성세 그룹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필요하다. 그녀는 전연우의 아내이니,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그 자격을 가질 수 있다.저 아이는 그저 전연우가 장소월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주워 온 장난감일 뿐이다.지금 인씨 집안 전체가 모레 있을 결혼식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그때 도우미가 방문을 두드렸다.“사모님, 누군가 사모님을 찾아왔습니다.”“그래. 서재에 모셔.”“네. 사모님.”인경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이제 내가 할 말은 너한테 다 했어. 혼자 잘 생각해 봐. 난 바빠서 이만 내려가 봐야 해.”서재에 들어가니 험상궂게 생긴 중년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검은색 천으로 감싼 상자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원하던 물건입니다.”인경아가 걸어가 검은 천을 풀자 유골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유골과 완전한 뼈대 하나가 들어있었다.“확실히 그 사람 맞아요?”“못 믿으시겠다면 저한테 영상도 있으니 보세요. 바다에서 건져내고 며칠 뒤, 화장을 마치고 옮겨온 거예요.”인경아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그럼 그년은요?”“강일주는 심유가 죽은 뒤 유골을 바다에 뿌렸어요. 그리고 스스로 바다에 빠져 목숨을 끊었고요.”인경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유골함에서 시선을 거두고 의자에 앉았다.“임무를 완수했으니 약속했던 돈은 부족하지 않게 보내줄게요. 돌아가요.”남자가 방에서 나간 뒤 인경아는 한참을 멍하니 검은색 유골함을 바라보았다.“당신은 그 여자와 함께 죽고, 같은 곳에 묻히고 싶었겠지. 하지만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일수록 난 절대 당신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그 잡종 또한 마찬가지야. 절대 편히 지내게 하지 않을 거야.”장소월은 전연우에 의해 강제로 로즈 가든에 끌려왔다.돌아오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그 아이 때문에 말이다...장소월은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아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거절하자 전연우는 아이로 그녀를 협박했다. 만약 그녀가 키우지 않는다면 지금 즉시 아픈 아이를 보육원에 돌려보내겠다면서 말이다.느긋하게 걸어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전연우의 뒤에서 장소월이 욕설을 퍼부었다.“난 아이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소중한 한 아이의 생명이야. 넌 충분히 아이를 치료해준 뒤 인씨 집안에 데려가 키워줄 수
“뭐 하는 거야? 내려놔.”“뺨 때린 대가야.”전연우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뜨겁게 키스했다.장소월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씻어. 오늘 씻지도 않았잖아. 몸에서 냄새나.”30초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전연우의 호흡은 이미 거칠어졌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 하고 씻을게.”“싫어!”전연우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입은 싫다고 하지만 몸은 반응하고 있잖아.”그가 장소월의 치마를 들어 올리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복부에서 전해져오는 통증 때문에 장소월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새로 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침대가 격렬한 흔들림에 삐걱거리며 소리 냈다.병원에서 집에 돌아온 건 꽤 이른 시간이었다.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바디워시를 발라주던 중 그의 시선이 장소월의 복부에 멈췄다.가슴속에서 돌연 미묘한 감정이 일렁거렸다.전연우는 그녀를 물에서 꺼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 뒤 그녀를 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두 시간 뒤, 장소월은 시큰거리는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잔 탓인지 전연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장소월은 허리에 올려진 전연우의 손을 내려놓은 뒤 옷을 입고 방에서 나갔다.거실에선 기성은을 포함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주방에선 휴가를 마친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택배기사가 물건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장소월 씨, 주문한 물건 모두 배송했어요. 사인해 주세요.”기성은이 배송 목록을 장소월에게 건넸다.“대표님께서 장소월 씨의 이름으로 산 아기용품들입니다. 부족한 거 없나 살펴보세요.”장소월은 잠시 망설이다가 목록을 받아 살펴보았다. 정말 많은 양이었다.장소월은 단 몇 시간 안에 빠르게 꾸며놓은 아기방을 훑어보고는 말했다.“됐어요. 일단 이만하면 충분해요. 수고하셨어요.”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아가씨, 식사하세요.”도우미가 갈비탕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
밤늦도록 격렬하게 몸을 섞은 후, 송시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품에 안겨 침대에 내려놓아졌다. 몸에는 얇은 담요 한 장만 덮여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지쳐버린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텅 빈 반산 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송시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잠들어있는 것처럼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잘생기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쓸어내렸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마저 희미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송시아는 자연스럽게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관계를 맺은 뒤에도 송시아는 지금처럼 그의 잠든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전연우는 너무나도 예민했기에 아무리 피곤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바로 깨어났다. 때문에 지금처럼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연우는 출중한 능력 외에도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많은 여자를 홀리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지금의 그이든, 50대 중년의 전연우이든, 그는 늘 성숙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지배자의 풍모와 아우라를 지녔고, 그와 같은 사람은 서울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송시아는 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박 두 번의 삶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그에게 쏟았다. 그와 함께 다시 일어섰고, 그가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그 누가 전연우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서울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국회의원들마저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 전연우가 가진 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송시아는 방 안에 어지럽게 흩어진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
“의사 선생님... 선생님...” 송시아는 가득 흥분한 채 의사를 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달려와 전연우를 진찰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환자분 상처는 아주 잘 아물고 있습니다. 아까 정말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반응이 있었다면, 신경이 스스로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곧, 혹은 예정보다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송시아는 환희가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좋은 소식이었다. 송시아는 전연우의 침대에 앉아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조금 묻히고는 그의 옷을 걷고 이미 아문 상처에 발랐다. “연우 씨, 이 팔찌 장소월이 준 거 맞지? 서철용이 당신에게 한 말 전부 다 들은 거야?” “당신도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나서 장소월을 보고 싶겠지?” “당신들은 날 너무 얕잡아 봤어.” “당신의 흉터... 없어지지 않도록 몸에 남겨둬야겠어. 이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평생 잊지 못하게 말이야.” 송시아가 그에게 쓰는 연고는 최고급이라 시중에서 개당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다. 흉터 제거뿐 아니라 상처 회복도 빠르게 해준다. 그녀는 휴지를 꺼내 연고를 닦아냈다. 그때 송시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송 대표님, 그 팔찌는 비슷한 디자인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닷가 쪽에서 파는 팔찌는 거의 다 흡사한 유형이거든요. 완전히 똑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마지막 3초를 남기고 연결되었다. 송시아가 말했다. “전연우는 곧 깨어날 거예요. 이직 준비는 다 됐어요? 이랑 씨 마음만 굳건하다면, 내가 꼭 민아와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게 할게요. 마음이 변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신씨 집안은 나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니까.” 신이랑이 물었다. “성세 그룹 주식은 왜 팔았어요? 뭘 하려는 거죠?” 송시아는 한쪽 팔을 가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전 나중에 갈 거예요. 거긴 아주 안전한 곳이에요.” 도우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사모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군병원 아래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운전기사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흰색 장갑을 끼고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배은란은 딸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민용 씨, 나 혼자 가는 거 무서워. 같이 가자, 응?” 서철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이 끝나면 금방 너한테 갈게. 네가 가는 곳은 내 스승님과 사모님의 댁이야. 그분들은 평생을 의학에 헌신하셨고, 자녀가 없어서 날 친아들처럼 여기셨어. 너에게도 잘해주실 테니까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그분들은 분명 너 좋아하실 거야.” 배은란은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거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차에 올라탔다. “그럼 꼭 빨리 나한테 와야 해.” “그래.” 점차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서철용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배은란, 이건 내가 너한테 진 빚이야.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땐 진짜 서민용이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게. 완전한... 서민용을 너에게 돌려줄게!’ 그날 밤, 서민용은 분명히 죽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 서철용이 그를 지옥에서 구출해 냈다. 다만, 그의 상황은 아직도 좋지 않다. 여전히 스승님의 병원에 누워 연명 치료만 받고 있을 뿐이다. 전연우 외에, 지금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바로 서민용이다...배은란이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면, 서철용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배은란은 정신과 약을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기억도 천천히 회복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반산 별장. 송시아는 바로 그 소식을 들었다. “쯧,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서 형수를 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