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고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장소월은 전연우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그녀가 한 말을 신경 쓰고 있을까?그녀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까?장소월이 아는 전연우는 절대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다. 잔인한 일을 저지르고도 절대 자신이 한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그는 강용을 이용해 강한 그룹을 손에 넣었다. 그가 벼랑 끝으로 내몰려 그녀의 목숨으로 협박했을 때도 전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결국 강용은 스스로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미안해 한 마디를 남기고 그녀를 밀친 뒤 자결했다.그녀는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남편으로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기라도 해야 했거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훑어보고는 송시아와 함께 그녀의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매정함을 뼛속 깊이 느꼈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전연우는 절대 아무에게도 마음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씻은 뒤 침대에 기대어 앉아 불경을 읽었다.저녁 11시, 장소월은 피곤함이 밀려와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조명을 끈 뒤 잠자리에 들었다.거실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가득 차 있었다.전연우는 장소월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오늘 장소월은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아이...장소월의 아이?전연우는 자신의 아이에 대해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만약 아이가 있다면 자신은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지루하고 의미 없는 결혼의 산물이라니.만약 어느 날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많고 많은 여자 중 아무나 골라 만들면 되는 것이다.결혼, 아이... 이 두 단어를 떠올리니, 전연우의 머릿속에 돌연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만약 그에게도 그녀와 함께 낳은 아이가 있다면... 장소월과...머릿속에서 행복한
수백 번이나 멍청이라고 불렀던 그녀를...대체 언제부터?이런 감정은 회한인가?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고?실은 전연우 자신도 알지 못했다.자신이 장소월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전연우는 그저 자신의 물건이 떠나가게 놔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수많은 밤, 그녀의 방에 들어갔던 건 힘들어 녹초가 되어가는 그녀를 지켜보며 채우는 삐뚤어진 소유욕 때문이었다.전연우는 그저 그녀를 눈에 자신만을 담고 있었던 예전의 장소월로 돌려놓고 싶었을 뿐이었다.무슨 수를 쓰든 그녀를 옆에 두고 싶었다.이게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면...못 할 것도 없지. 사랑 그까짓 거 해보면 된다.그녀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받아들일 것이다.만약 장소월이 그토록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면...아이 또한 안겨줄 수 있다.그들의 아이를.다음 날 아침.해가 갓 떠올랐을 때, 그녀는 아기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희미한 정신으로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몇 분 뒤, 또렷한 아기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장소월은 침대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베개에 누군가 잔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젯밤 밤새 안 잤나?장소월은 호기심에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 들어선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전연우는 아이를 안고 있고, 기성은은 옆에서 그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배고파하는 것 같아요.”장소월은 긴 머리를 움켜잡고 이마를 찌푸린 채 눈을 비비며 어지러운 탁자 위를 살펴보았다. 아기용품이 빼곡히 놓여있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 아이는 어디에서 데려왔어?”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장소월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종아리가 드러난 잠옷 치마를 입고 발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전연우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기성은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이렇게 아이를 데려오면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겠어.”전연우는 담요를 들고 가 그녀의 몸에 둘러주었다.“마음에 안 들어?”“다시 한번 물을게. 이 아이 대체 어디에서 데려왔어?
사정이야 어찌 됐든, 장소월은 아이가 이대로 울고만 있게 놔둘 순 없었다.전연우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데려왔단 말인가. 정말 답이 없는 사람이다.그들은 아이를 가까운 병원에 데려갔다.아이는 곧바로 응급실에 실려 갔고, 기성은은 아기용품 두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응급실 밖, 의사가 검사를 마친 뒤 걸어 나와 말했다.“며칠 동안 연속적으로 고열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반드시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몸이 많이 약해져 치료를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네. 부탁드릴게요.”아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장소월은 처음으로 전연우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단 말인가?기성은은 입원 절차를 밟았고 장소월은 문 앞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아이에겐 보호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리를 뜰 순 없었다.아이의 열은 무려 40도까지 치솟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오늘 밤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두 하늘에 달렸다고 말씀하셨다.그때, 검은색 제복을 입은 경찰이 여자 한 명을 데리고 걸어왔다.장소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쳐다보았다.경찰이 말했다.“CCTV를 찾아보니 이 사람이 아이를 버렸더라고요.”4,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초조해하며 말했다.“아이고, 경찰관님, 전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이 나이에 어떻게 아이를 낳겠어요.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에요. 저도 오늘 쓰레기통에서 발견하고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보육원 문 앞에 놓아두었어요.”장소월이 물었다.“그럼... 이 아이의 가족들을 찾을 수 없는 거예요?”경찰이 대답했다.“CCTV를 찾아보았는데 아이를 버린 사람은 찾지 못했어요. 화춘 거리 몇 군데 CCTV가 고장 나는 바람에 중요한 장면을 찍지 못했어요. 지금으로선 찾기 힘들 것 같아요.”“그래서...”그 말뜻은 너무나도 분명했다.장소월이 뒤돌아 가려고 하자, 전연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수고하셨어요. 저희가 해결할게요.
조금 전의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인시윤은 비로소 깨달았다.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느냐는 쉽게 보아낼 수 있다. 그 사람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가 그 첫 번째 증거다.혼인신고를 했음에도 인시윤은 항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인시윤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살아왔다.그녀는 절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소월아, 왜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이 새언니한테 말해봐.”인시윤이 등장하고 나서야 장소월은 전연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그녀는 조금 전 미처 옷도 갈아입지 못해 잠옷 차림으로 집을 나섰었다. 이제 가을이라 날씨는 꽤 쌀쌀했다.그녀와 인시윤은 서로 날을 세우지도,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저 표면적인 반응일 뿐이다.전연우의 거칠고 두꺼운 피부엔 아직도 옅은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장소월이 얼마나 힘주어 때렸는지 알 수 있었다.장소월은 인시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이건 너희 가족 일이야. 알아서 해결해.”“거기 서!”장소월은 멈춰 서지 않았다.“여보.”인시윤이 장소월을 쫓아가고 있는 전연우를 향해 소리쳤다.그녀의 마음속에서 분노에 휩싸인 질투가 활활 타올랐다. 바람 한 가닥만 불어오면 크나큰 초원 전체를 모조리 불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인시윤은 집에 돌아가 알아보고 나서야 전연우가 보육원에서 아이 한 명을 데려와 장소월에게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장소월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전연우는 이제 일반인들은 쳐다볼 수도 없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때문에 확실히 그에게도 성세 그룹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필요하다. 그녀는 전연우의 아내이니,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그 자격을 가질 수 있다.저 아이는 그저 전연우가 장소월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주워 온 장난감일 뿐이다.지금 인씨 집안 전체가 모레 있을 결혼식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그때 도우미가 방문을 두드렸다.“사모님, 누군가 사모님을 찾아왔습니다.”“그래. 서재에 모셔.”“네. 사모님.”인경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이제 내가 할 말은 너한테 다 했어. 혼자 잘 생각해 봐. 난 바빠서 이만 내려가 봐야 해.”서재에 들어가니 험상궂게 생긴 중년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검은색 천으로 감싼 상자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원하던 물건입니다.”인경아가 걸어가 검은 천을 풀자 유골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유골과 완전한 뼈대 하나가 들어있었다.“확실히 그 사람 맞아요?”“못 믿으시겠다면 저한테 영상도 있으니 보세요. 바다에서 건져내고 며칠 뒤, 화장을 마치고 옮겨온 거예요.”인경아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그럼 그년은요?”“강일주는 심유가 죽은 뒤 유골을 바다에 뿌렸어요. 그리고 스스로 바다에 빠져 목숨을 끊었고요.”인경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유골함에서 시선을 거두고 의자에 앉았다.“임무를 완수했으니 약속했던 돈은 부족하지 않게 보내줄게요. 돌아가요.”남자가 방에서 나간 뒤 인경아는 한참을 멍하니 검은색 유골함을 바라보았다.“당신은 그 여자와 함께 죽고, 같은 곳에 묻히고 싶었겠지. 하지만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일수록 난 절대 당신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그 잡종 또한 마찬가지야. 절대 편히 지내게 하지 않을 거야.”장소월은 전연우에 의해 강제로 로즈 가든에 끌려왔다.돌아오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그 아이 때문에 말이다...장소월은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아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거절하자 전연우는 아이로 그녀를 협박했다. 만약 그녀가 키우지 않는다면 지금 즉시 아픈 아이를 보육원에 돌려보내겠다면서 말이다.느긋하게 걸어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전연우의 뒤에서 장소월이 욕설을 퍼부었다.“난 아이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소중한 한 아이의 생명이야. 넌 충분히 아이를 치료해준 뒤 인씨 집안에 데려가 키워줄 수
“뭐 하는 거야? 내려놔.”“뺨 때린 대가야.”전연우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뜨겁게 키스했다.장소월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씻어. 오늘 씻지도 않았잖아. 몸에서 냄새나.”30초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전연우의 호흡은 이미 거칠어졌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 하고 씻을게.”“싫어!”전연우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입은 싫다고 하지만 몸은 반응하고 있잖아.”그가 장소월의 치마를 들어 올리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복부에서 전해져오는 통증 때문에 장소월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새로 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침대가 격렬한 흔들림에 삐걱거리며 소리 냈다.병원에서 집에 돌아온 건 꽤 이른 시간이었다.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바디워시를 발라주던 중 그의 시선이 장소월의 복부에 멈췄다.가슴속에서 돌연 미묘한 감정이 일렁거렸다.전연우는 그녀를 물에서 꺼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 뒤 그녀를 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두 시간 뒤, 장소월은 시큰거리는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잔 탓인지 전연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장소월은 허리에 올려진 전연우의 손을 내려놓은 뒤 옷을 입고 방에서 나갔다.거실에선 기성은을 포함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주방에선 휴가를 마친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택배기사가 물건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장소월 씨, 주문한 물건 모두 배송했어요. 사인해 주세요.”기성은이 배송 목록을 장소월에게 건넸다.“대표님께서 장소월 씨의 이름으로 산 아기용품들입니다. 부족한 거 없나 살펴보세요.”장소월은 잠시 망설이다가 목록을 받아 살펴보았다. 정말 많은 양이었다.장소월은 단 몇 시간 안에 빠르게 꾸며놓은 아기방을 훑어보고는 말했다.“됐어요. 일단 이만하면 충분해요. 수고하셨어요.”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아가씨, 식사하세요.”도우미가 갈비탕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전연우는 장소월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병원에 갔을 거라 예상했다. 경호원이 항상 따라다니고 있으니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하여 그는 일을 처리하러 회사에 출근했다.대표 사무실에 들어가니 오랜만에 보는 송시아가 그의 자리에 앉아있었다.“이제 조금도 숨길 생각 없나 봐요? 책상 위에 장소월 사진을 버젓이 올려놓은 걸 보면.”송시아는 원래의 길었던 머리를 싹둑 자르고 짧은 단발인 모습이었다.여자에겐 자고로 두 가지의 어려운 결정이 있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랜 시간 동안 길러온 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다.전연우는 송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듯 태연하게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3분 시간을 줄게. 네 결정을 말해봐.”송시아가 서랍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의 얼굴이 자욱한 연기 속에 파묻혔다.사라진 며칠 동안 송시아는 확연히 야위었다. 얼굴엔 두껍게 파운데이션을 발랐지만 그 초췌함은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내 손으로 당신을 그 자리까지 올렸어요. 전연우 씨, 이게 내 수고에 대한 대가예요?”“인시윤과 결혼하고, 그것도 모자라 장소월과 살림을 차리고...”송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장소월은 정말 끔찍이도 생각하네요.”그녀를 위해서라면 전연우는 하지 못할 일이 없다.송시아는 장소월이 죽은 뒤 전연우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 그가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우스운지 모른다.전연우가 차갑게 말했다.“1분 남았어.”송시아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피운 뒤 자리에서 일어서 그에게로 걸어갔다. 이어 주객 전도된 모습으로 뻔뻔하게 그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남색은 그녀가 좋아하는 색깔이 아니다.“하나가 더 늘어도, 줄어도 상관없어요. 인시윤은 내가 신경 쓸만한 위인이 못되 거든요.”“난 당신과 비슷해요. 충분히 깊은 인내심을 갖고 있죠. 난 당신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모두 가질 거예요.”“당신은 장씨 집안에서 20년이나
“네. 선생님.”장소월은 시뻘게진 몸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저려왔다.간호사가 침대에 내려놓기 바쁘게 아이가 잠에서 깨어 눈을 감고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너무 많이 힘을 준 탓에 머리에 꽂았던 링거 관을 따라 혈액이 역류했다.간호사가 장소월에게 말했다.“보호자분, 아이가 배고파서 우는 것 같아요. 모유 컵이 있으시다면 어서 모유를 받아 아이에게 먹이세요.”장소월은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죄송해요. 전 이 아이의 엄마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유는 있어요.”“아이가 몸이 약해 되도록 모유를 먹여야 해요. 도저히 방법이 없다면 우유라도 따뜻하게 데워오세요.”“네.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장소월이 다급히 우유병에 우유를 담아왔다.“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간호사가 우유병 온도를 체크하고는 말했다.“네. 이제 먹이시면 돼요.”장소월은 옆으로 내려온 잔머리를 정리하고 우유병을 아이의 입가에 가져갔다.아이는 곧바로 울음을 그쳤다.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처음 하시는 일 같은데 정말 잘하셨어요. 전에 어느 정도 배우셨나 봐요.”“보호자분, 앞으로... 분명 좋은 엄마가 되실 거예요.”순간 우유병을 쥔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간호사가 의료용품을 준비하러 병실을 나서자 장소월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가엾은 이 아이를 보고 있으니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장소월은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순간 아이의 포도알 같은 큰 눈과 눈이 마주쳤다. 장소월은 아이가 또 울음을 터뜨릴까 봐 당황했지만, 아이는 우유를 마시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은 입을 움직여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 바람에 입에 넣었던 우유를 모두 토해내 옷을 적셨다. 장소월은 곧바로 우유병을 잡고 휴지로 아이를 닦아주었다.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가, 착하지. 밥 먹어야 쑥쑥 크는 거야.”“아.”아이가 장소월의 말을 알아
소민아는 임신했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신이랑이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몸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소민아가 잠들었을 때, 신이랑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그는 방에서 나와 발코니로 향했다.신이랑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선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전화를 받았다.성세 그룹 대표 사무실은 여전히 환하게 조명이 켜져 있었다.신이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기성은이 날카로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소현아 씨는 무사히 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민아 씨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민아 씨는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만 없다면요.”기성은이 이렇게나 빨리 그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신이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소민아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다만 그의 자격지심과 나약함 때문에 타이밍을 놓치고 만 것이다.“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민아 씨 일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이제 두 사람 아무런 관계도 아니잖아요.”기성은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아기는 잘 자라고 있나요?”신이랑이 대답했다.“나랑 민아 씨 아이예요.”오랜 침묵 끝에야 기성은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그 일은 사람을 보내 조사를 마친 뒤 내일 알려줄게요.”“네.”모두 소민아를 위한 일이다. 그녀가 소현아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여 그는 신이랑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주가은이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왜 아직도 안 자요? 방금 누구랑 통화했길래 얼굴이 그렇게 안 좋은 거예요?”“아직 처리할 일이 좀 있어요. 먼저 자요.”주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바로 눕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들뜬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곧 옆방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그녀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아직도 소민아가 그렇게 좋아요?
30분 뒤, 강용은 집으로 돌아왔다.와구와구 음식을 먹고 있는 소현아 옆, 장소월의 얼굴엔 바깥 상황에 대한 걱정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어때? 그 사람 아직도 우리를 찾고 있어?”강용은 소현아를 흘끗 쳐다보고는 천천히 장소월에게 다가가 말했다. “걱정돼?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다 준비해뒀어. 전연우한테 다시 잡혀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난 이제 그 사람이랑 아무 상관도 없어. 잡혀간다고 해도 무섭지 않아. 다만 별이가 따라다니면서 고생할까 봐 걱정돼. 전에 봤을 때도 많이 마른 것 같았거든.”“나쁜 자식. 널 다시 데려오려고 어린아이까지 끌어들이다니.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처럼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것보다는 그놈과 함께 있는 게 나을 거야.”“절대 그 아이 때문에 마음 약해지지 마. 전연우의 계략에 빠지면 안 돼.”“걱정하지 마. 다시는 같은 실수 반복하지 않을 거야.”강용은 장소월의 결연한 눈동자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아이 때문에 물러설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소현아가 옆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가왔다. “소월아, 우리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해? 전에 살던 큰 집이 그리워. 여긴 하나도 안 좋아. 뭔가 이상해.”“이틀만 더 참아. 이틀 후에 강용이 우리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야. 지금 우리는 나쁜 사람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들에게 잡히면 안 돼, 알았지?”“정말? 나 어릴 때 이 게임 제일 좋아했었어. 민아가 항상 날 못 찾겠다고 울어서 결국 내가 먼저 나와서 잡혀줬었지. 이건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지금 숨을 곳을 찾을게. 소월아, 너희도 빨리 나 따라와.”강용과 장소월은 소현아를 따라 침실로 숨어들었다. 소현아는 옷장에 숨고 싶어 했지만 장소월이 막았다.“여긴 들어가지 말자. 옷장이 너무 높아. 배 속에 아이도 있는데 조심해야지.”“안 돼, 우리 모두 방 안에 있으면 너무 위험해. 나쁜 사람이 와서 방문을 열면 한꺼번에 다 잡히잖아. 안
“네가 예전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고 싶어 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제 그만해! 또다시 소월 씨 주변 사람들을 해치면, 소월 씨한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난 분명히 말했으니까, 일이 잘못돼도 나 찾지 마!” “뚜뚜...” 서철용은 화가 치밀어 올라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 주변 사람들을 해친다고? 그가 손을 쓰지 않아도, 이미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친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전연우는 그저 그의 아내만을 원할 뿐이다. “리샬!” “보스! 무슨 일이십니까?” “세 사람을 잘 감시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해.” 그 말을 들은 리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연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지시한 일은 120%의 정신력으로 처리해야 했다. “보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임무 반드시 완벽하게 완수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도련님께서 계속 사모님을 찾으며 울고 계십니다. 도저히 달랠 수가 없습니다.” 전연우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데려와.” 리샬이 엉엉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앞에 데려왔다.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만약 별이가 우리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네 마음이 약해질까?’ 전연우는 감히 자신 앞에서 울지 못하고 훌쩍거리기만 하는 별이를 보니 마음이 조금 녹아내렸다.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소월이는 분명 마음 아파할 거야.” 별이는 전연우의 어깨에 얌전히 기대앉아 있다가 그가 장소월을 언급하자 입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엄마는... 곧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 별이는 그의 따스한 품속에서 잠이 들었고, 전연우는 직접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 장소월과 소현아, 강용 세 사람은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냈다. 별장 주인이 친절하게 그들을 대접했지만, 불안한
리샬은 조용히 물러나 방문을 닫았다. 이곳의 부동산은 대부분 전연우의 소유였다.모두 예전 세계 경제 위기 때 그가 매입한 것들이었다. 전연우는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는 장소월의 말을 기억하고 전국 각지에 집을 마련해 놓았다. 그녀가 가겠다고만 하면, 수시로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그들의 아이와 함께, 설사 그들뿐이라 해도... 전연우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의 계획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연우는 적잖게 술을 마셨고, 점점 더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소월아,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피할 생각이야.”장소월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감금되어 있었고, 전연우와 송시아는 다정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서 화를 돋우고 있었다.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채 다른 여자들과 끈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소월은 아픈 심장을 움켜쥐고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났다. 너무나도 괴로운 감정은 한참이 지나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전연우, 지금 네 부와 권력이라면 그 어떤 여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잖아. 네가 남의 감정을 어떻게 농락하든,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왜 아직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거야...’ 장소월은 휴대폰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 번호를 눌렀다. 서철용은 한창 아이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배은란은 얼마 전에 그녀와 눈매가 닮은 딸을 출산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아이를 내려놓고 방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연우가 깨어났다는 거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서철용은 허탈한 얼굴로 문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나 감시당하고 있어요. 미안해요. 그놈이... 기어이 소월 씨 찾아냈네요.” “참 뻔뻔하시네요. 그 사람과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전해주세요.” “제가 언젠간 강제로 끌려가는 날이 온다면, 그건 분명 시체일 거라고.” “이제 저한텐 아무것도 없어요. 때문에 협박
“나도 갈 거야. 나도 그 나쁜 놈한테 잡혀가기 싫어. 소월이랑 강용이 어디를 가든, 현아도 함께 따라갈 거야.”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겉으로는 즐겁고 편안한 모습이었지만, 장소월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찍혀버렸으니, 분명 헤쳐나가기 힘든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어쩌면...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죽을 때까지 전연우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연우가 놓아주지 않는 이상, 장소월은 떠날 방법이 없다. 그녀는 정말이지 서울이라는 감옥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이곳을 떠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강용이 대답했다. “있어. 이미 연락했어. 오늘은 일단 여기서 쉬자. 내일 친구가 헬리콥터 보내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여기에 친구가 있다고?” 강용은 바닥에 앉아 다리 한쪽을 세우고 손을 머리 뒤에 받힌 채 산야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2년 전에 그 무리에게 쫓겨 이곳까지 흘러오게 됐는데, 그러다 조난당한 사람을 만났어. 큰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어서 내가 구해줬어. 나중에 그 사람도 나한테 많은 도움을 줬어. 그렇게 우정을 쌓아갔지.” “어젯밤 내가 물어봤는데, 늦어도 내일은 도착한다고 하더라고. 빠르면 오늘 밤에 도착할 수도 있어.” 장소월은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있다니. 결국 우리가 너한테 민폐를 끼쳤네.” “강용,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네가 잘못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 줄기 빛이 얼굴에 쏟아지자 그는 손바닥으로 빛을 가렸다.“이미 이런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어. 정처 없이,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가는 거지 뭐.”“이게 네가 원했던 자유로운 삶 아니야?” 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자유로움 뒤에는 늘 외로움이 동반하는 법이다.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어야 하는 게 세상 이치
결코 그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강용, 그만해.” “대체 누가 우리 위치 폭로한 거지? 바보야, 혹시 누구한테 메시지 보냈어?” 강용의 추궁에 소현아는 즉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민아가 물어봤을 때도 아무 말 안 했단 말이야.” “소월이 말대로 핸드폰 유심칩도 이미 버렸어.” “아빠 엄마 전화번호는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적어놨어.” 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누군지 알 것 같아.”“서철용일 거야. 그 사람 말고는 내가 있는 곳 아는 사람 없어. 신분증도 모두 그 사람 도움으로 만든 거잖아. 진작에 예상했어야 했어. 서철용은 전연우의 사람이야. 그 사람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전연우는 나 찾지 못했을 거야.” “전에 네가 말했던 그 의사 말하는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네가 말했지, 전연우 외에 또 다른 무리가 너 쫓았었다고. 나 이제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아.” 정리가 거의 끝나가자 그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무리가 강지훈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용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못마땅한 듯 삐딱한 태도로 소현아에게 말했다. “야, 바보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소현아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강용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강용. 내가 시킨 거 아니야. 소월이 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너인데,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너 괴롭히게 할 리가 없잖아!” “내가 시킨 거 아니야. 강지훈은 정말 나쁜 놈이야... 전에 쇠사슬로 사람을 때리는 거 봤는데, 배 속에 있는 창자까지 다 드러나고 바닥엔 피가 흥건했어. 그것 때문에 며칠 동안 악몽 꾸고, 무서워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강용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푹 널브러지고는 소현아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대단해!”“대단해! 정말 대단해! 소현아, 내가 어쩌다 널 만났을까. 우리 강씨 가문이
전연우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리샬이 태블릿을 들고 전연우의 병실 침대로 다가와 말했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그 지역에 들어가신 후 신호가 사라졌습니다.”전연우는 눈을 감고 침대에 기대앉았다.“오늘은 그만하면 됐어. 나가봐.”“알겠습니다.”그가 가까이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그녀는 더 깊숙이 몸을 숨길 것이다. 그녀가 시내로 발을 디딘 순간, 즉시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소월아, 7일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시간이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와 함께 떠나야 할 거야.’강지훈은 전연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원에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본 순간, 서늘했던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강지훈은 흥미로운 듯 의자에 앉았고, 뒤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이렇게 엉망인 모습은 처음 보네요. 어때요? 버림받은 기분이?”“아, 참. 그 여자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소용없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 여자 당신과 함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요. 설사 돌아간다 해도,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여자를 옆에 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많은 돈을 생판 남에게 물려줄 리는 없을 테고.”“당신한테 어울리는 여자 소개해 줄까요? 당신한테 아기를 낳아줄 여자 말이에요.”강지훈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바보 하나랑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워?”강지훈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밖에 있던 간호사가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고 제지하러 들어가려 했지만, 문밖의 경호원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들의 허리에 찬 총을 본 그녀는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강지훈은 다시 반격했다. “내 여자는 내 아이를 둘이나 가졌어요. 전연우 씨... 당신 여자는 어때요?”전연우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강지훈을 쏘아보고
“알겠습니다.”이미 정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위장할 필요가 없으니, 전연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곁으로 데려왔다. 별이는 얼굴 분장을 지웠지만, 분홍색 드레스는 여전히 입고 있었다.“네가 여자아이였다면, 엄마가 떠나는 게 더 어려웠을까?”별이는 순수한 눈빛으로 전연우를 빤히 바라보며 옹알이를 했다.“엄... 엄마...”전연우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말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이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전연우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강용은 주변 길에 꽤 익숙했던지라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무인 구역에 도착했다. 액셀을 끝까지 밟고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강용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소현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토할 것 같은 충동을 참았다.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힘들면 나한테 기대서 좀 자.”“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흐어엉... 소월아, 나 강지훈한테 잡혀가기 싫어.”장소월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우리 이제 안전해.”강지훈에게 이 지역의 경찰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기와 탄약을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곳에는 강지훈만의 인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소현아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즉시 도시 전체를 포위하여 그녀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봉쇄 직전, 강용이 모는 차가 딱 30초, 간발의 차이로 그곳을 빠져나왔던 것이다.강지훈은 소현아가 묵었던 호텔을 찾아갔다. 스위트룸 안, 침대에 던져진 임부복 드레스와 머리맡에 놓인 소현아의 사진이 보였다. “멍청한 년, 그깟 사람 하나 못 잡고, 뭐 하는
소현아는 규영과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제 이름은 김소단이에요.”규영은 즉시 소현아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미경아, 빨리 주인님 모셔와. 현아 아가씨 찾았어.”소현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아아아... 나쁜 사람. 빨리 이거 놔요.”“살려주세요! 임신부를 납치하려고 해요!”“미경아, 빨리 와... 아가씨, 더는 도망가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단 말이에요. 주인님은 아가씨를 잊지 않으셨어요.”“난 당신 몰라요. 놔줘요!”아무리 용을 써도 규영을 뿌리칠 수 없자, 소현아는 그녀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규영은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현아 아가씨...”소현아는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재빨리 도망쳤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침 강용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조심해. 뛰지 마.”“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소현아는 체형이 약간 통통한 데다 평소에 운동도 부족했던지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소현아가 다급히 말했다.“큰일 났어... 소월아, 강지훈이 나 찾으러 왔어. 방금 쇼핑몰에서 규영이랑 마주쳤어.”“흐흑... 소월아, 강지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현아는 너희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전연우 하나로도 모자라 이제 강지훈까지 나타나다니. 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다행히 전연우는 강용이 풀어놓은 수면제를 먹고 기절한 상태라 당분간은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강지훈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연우보다 상대하기 훨씬 어려운 인물이었다. 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용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해?”강용이 말했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