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윤서는 장소월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도 기성은에게 물어 안 것이었다. 어젯밤 전연우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백윤서는 시험을 마치고 병원에 왔다가 굳게 닫힌 방문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그때 마침 그곳에 온 서철용과 몸이 부딪혔다. 그 바람에 서철용이 손에 쥐고 있던 검사 차트가 모두 바닥에 흩어지며 떨어져 버렸다.백윤서가 당황하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그 중엔 장소월의 CT도 있었다.서철용이 말했다.“괜찮아요. 다 내가 제대로 잡지 못한 탓이에요.”그가 허리를 굽혀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줍기 시작했다.그때, 종이 하나가 장해진의 발밑에 날아갔다. 그가 주워 살펴보니 자궁 척출 동의서였고 전연우의 사인까지 그려져 있었다. 장해진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움켜쥐었다.“어르신?”장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상대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해지게 만들었다. 서철용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서철용은 강영수에게도 장소월의 상태를 알렸다.“대표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과로 때문에 자궁 수술 자국이 파열된 거예요. 이젠 지혈되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약만 주의해 드시면 돼요. 그리고.... 장소월 씨의 기분도 각별히 신경 써 주세요. 예전 검사 기록에서 심각한 우울증을 알았다는 것을 봤거든요. 오늘 우울증이 극에 달해 자살 시도까지 했어요.”진봉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진봉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고, 서철용은 병실로 돌아갔다.진봉이 강영수에게로 다가갔다.“조사를 마쳤습니다. 어젯밤 소월 아가씨는 강용을 찾으러 도원촌에 갔습니다. 심유 씨의 고질병이 깊어져 병원에서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강영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그들 모자를 내가 너무 얕잡아 봤어. 소월이는 심유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어제 심유는 제운 고등학교에
강영수가 강용을 지하실에 가둔 이유는 단 하나, 그에게 작은 처벌을 안겨주기 위함이었다.저번 장소월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의 셋방 건물 아래에 있던 그의 수하들은 모두 강용이 걸어 나오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싸우는 소리까지 들었다.일은 그의 상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장소월은 학교 부근의 셋방에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제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그곳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강용을 제외하고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강영수는 예전 장소월이 강용과 어떤 사이였든, 지금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병실 밖으로 나갔다가 줄지어 서 있는 정장 차림의 경호원을 본 은경애는 불길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하룻밤 함께 지내보니 저 사모님은 꽤 괜찮은 분인 것 같았다. 심유는 많진 않지만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수고비까지 그녀에게 쥐여주었다.장소월이 은경애의 전화를 받고 있을 때, 강만옥은 장소월의 병실에 찾아와 따뜻한 물을 그녀의 침대 옆에 놓아주고 있었다.“사람을 걱정시키는 데에 뭐가 있단 말이야.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시험은 이미 지나갔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 수능을 잘 보면 되잖아.”“네.”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직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푹 쉬어. 무슨 일 있으면 말해. 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그럼 부탁할게요.”“가족끼리 부탁은 무슨.”확실히 가족이다. 저번 주 장해진과 강만옥은 혼인신고를 했으니 말이다.장해진은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다. 하여 재혼은 떠들썩하게 치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결혼식은 치르지 않았다.장소월은 베개 밑 핸드폰의 진동을 느꼈다.강만옥이 나간 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전화는 이미 꺼져있었다.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은경애였다.은경애는 그녀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겼다.「아가씨, 보살피라고 하셨던 그 사모님은 깨어나셨어요. 하지만... 강영수 도련님 정말 무서운 분이셨군요. 갑자기 온몸에 상처가 난 사람을 끌고 병실에
환자복을 입은 심유의 청초한 얼굴에서 두 갈래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침대를 잡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영수야, 아줌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용이는 아직 철이 없어 아무것도 몰라.”강용이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울부짖었다.“무릎 꿇지 말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참으로 웃기고 어이없는 모자의 모습이다.당시 심유가 그의 가정을 깨뜨렸을 때,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수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 했다. 이별을 선택했다면 멀리 떠날 것이지, 왜 근처에서 맴돌다가 강일주의 눈에 띈단 말인가!이게 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혼자 사생아를 낳아 키운 것 때문이다.강영수가 있는 한, 이 잡종은 영원히 강씨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바로 그때, 강영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보고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조금 전 잔뜩 날이 세워져 있던 모습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전화를 건 사람은 장소월이었다.“지금 어디야?”강영수는 강용을 힐끗 보고는 오싹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병원에 있어.”상대방은 한동안 침묵했다. 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소월의 허약하고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학교 옆 가게 만두가 먹고 싶어. 사다 줄 수 있어? 파는 빼고.”“그래. 알았어. 금방 가져다줄게.”“응. 기다릴게.”강영수는 전화를 끊은 뒤 승리자의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 차가운 눈빛으로 강용을 내려다보았다.“너한테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하나는 서울에서 머물며 네 어머니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거야. 내가 알기로 네 어머니는 얼마 버티지 못해. 다른 하나는 해외에 나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 거야. 하지만 난 매달 네 어머니의 병원비를 보내줄 거고 네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생활비도 책임질 거야.”강용의 눈에 시뻘건 핏줄이 줄기줄기 서렸다. 절대 굴복하지 않을 듯한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길들이지 못하는 야생 동물과도 같았다.“이런 기
“당시 난 목숨을 끊는 것으로도 부모님의 사이를 되돌릴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그 자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장소월은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울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곳, 아무도 닿을 수 없는 위치에 강림해 있는 그에게 장소월과 같은 망가진 가정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두 사람은 그런 점에서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다. 불행해질수록 더더욱 안정된 가정을 갖고 싶었다.“하느님은 공평해. 너에게 재부를 줬으니 다른 것은 빼앗아간 거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과 비교하면 우린 운이 좋은 편이잖아.”장소월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자유와 선택권만 갖는 것으로 충분했다.강영수의 크고 두꺼운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이제... 나한텐 너밖에 없어. 넌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야. 그렇지?”그 말에 장소월은 부담감에 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사실 그의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녀 한 명뿐만은 아니다.장소월은 당시 깊은 지하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강영수를 꺼내 그의 세상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김남주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해도, 그를 구원해준 일은 결코 쉬이 잊혀지는 게 아니다. 때문에 그녀는 강영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강영수에게 있어 김남주는 단지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무나 대체할 수 없다.김남주가 떠나가고 강영수가 다시 어둠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순간, 장소월이 마침 그곳에 나타난 것뿐이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이제 김남주가 돌아왔으니 장소월은 본의 아니게 그들 세상의 제3자, 방해꾼이 되어버렸다.장소월은 강영수의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김남주 역시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세상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장소월은 자신을 빨아들일 듯한 소용돌이가 일렁이는 그의 눈을 바라보
장해진이 화들짝 놀랐다.“걔가 어떻게 알아?”“소월이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더군요.”장해진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강영수가 그녀의 불임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집에 머물게 하는 걸 보니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김남주는? 지금 어디에 있어?”“병원입니다. 잠시 강영수의 사람들이 보호해주고 있어요.”장해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아무도 모르게 김남주를 깔끔하게 처리해. 소월이가 강씨 집안에 시집간다면 너와 나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야. 가봐.”“네, 의부님.”전연우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 문 앞에서 닭 육수로 만든 국수 요리를 들고 온 강만옥과 마주쳤다.“자기야, 얘기 잘 끝났어?”전연우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강만옥은 피식 웃고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장소월은 병원에서 한 주 동안 머물렀다. 그동안 강영수는 소규모로 사람들을 나누어 장소월의 병문안을 오게 했다. 이건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장소월의 뜻이기도 했다.강영수는 줄곧 병실을 서재로 삼고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했다. 항상 그녀의 시선 속에 머물렀고, 화장실에 갈 때까지도 그녀에게 보고했다.정말이지... 이렇게 할 필요까진 없다.장소월은 이제 걸을 수도 있고 퇴원해도 된다. 하지만 강영수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왜 그래? 심심해?”“지금까지 이곳에서 날 지켜줬으니까 이제 그만 김남주 씨한테 가봐.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던 사람이잖아.”강영수는 그녀의 허리에 올렸던 손을 거두었다.“넌 TV를 보고 있어. 난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어.”그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장소월은 그가 왜 이토록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 책을 한 권 펼쳤다.그때 진봉이 들어왔다.“대표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진봉이 장소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따사로운 햇
병원 건물 아래, 무성히 자라난 오동나무 가지에 참새 몇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모두 머리를 날개에 묻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바깥 온도는 강영수가 발산하는 분위기와 똑같이 차가웠다.“난 헤어지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장소월이 팔짱을 끼고 시선을 거두었다.“내 말은 그 뜻이 아니야. 그저 시간을 갖자는 거야. 이번 일은 반드시 분명히 해야 하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정말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생각해야 돼.”“감정이라는 것은 절대 제3자를 용납할 수 없어. 김남주 씨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넌 그 사람을 구하러 가는 걸 선택했어. 난... 네가 아직 김남주 씨와 함께했던 시간을 놓지 못했다는 거 알고 있어.”“나도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야. 너와 똑같아. 상대방의 눈에 자신만 담겨 있기를 바라지.”장소월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먼저 남주 씨한테 가서 물어봐. 대화를 나누면 네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어질 수도 있잖아. 어떻게 되든 우린 처음처럼 지낼 수 있을 거야.”그의 시선은 장소월에게 머무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소월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그녀의 말은 자신과 강영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직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지나간 일을 말끔히 해결하는 것이 좋을 테니 말이다.김남주가 그들 사이에 끼어있으면 매일매일 불편할 것이고 장소월의 입장 또한 곤란해질 것이다.그녀를 좋아하는 동시에 김남주도 놓지 못한다면 바람을 피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진봉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열었다.“소월 아가씨, 그게 아닙니다. 대표님께선 지나간 일에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대표님을 믿으셔야 합니다.”“정말 그래요?”장소월의 그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꿰똟어보일 듯한 맑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전 다 알고 있어요. 설 연휴 급히 해외에 간 것, 깊은 밤에 김남주 씨를 찾아간 것, 이것들이 그분을 놓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
장소월은 장씨 저택에 돌아가지 않고 곧장 셋방으로 향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풀냄새와 흙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베란다 창문이 열려있었다.장소월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베란다에 심어두었던 식물엔 이미 꽃이 피어나 있었다.방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고 하늘색 소파 위엔 그녀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교복이 놓여있었다.장소월이 강용을 떠올리며 교복을 들어 올렸다. 그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돌이켜보면 이곳엔 강용과의 기억이 가득했다. 그는 주방에서 요리를 했고 책상에서 공부를 했고, 피곤할 때면 소파에 누워 할아버지처럼 오후 첫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자곤 했다.눈 깜빡할 사이에 어느덧 한 주가 지났다.그동안 장소월은 핸드폰을 줄곧 꺼놓았다. 또한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외부와 단절된 채 지냈다.그녀는 자신을 이 작은 방 안에 가두고 그림을 그리며 신경을 마비시켰다. 어떤 날엔 밤새 쉬지 않고 그리기도 했다.피곤하면 자고, 배가 고프면 대충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공부에 관한 건 손조차 대지 않았다.유리병을 들어보니 물을 다 마셔 비어있었다. 그녀는 소파를 짚고 일어서며 며칠 감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엔 보기 힘든 꾀죄죄한 모습이었다.뜨거운 물을 끓인 뒤에야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밥상 위엔 절반가량 먹은 우울증 약봉지가 놓여있었다. 대체 언제 이 병이 낫는 걸까...자신을 포기한 걸까? 장소월 그녀 또한 알 수 없었다.쾅쾅쾅.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가 약을 입에 넣지도 못한 채 걸어가 문을 열었다.문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약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장소월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약을 주운 뒤 물감이 가득 묻은 옷에 슥슥 닦고는 물과 함께 삼켰다.전연우가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커튼이 닫혀 있는 데다 조명도 켜지 않아 어두운 방 안은 어지럽기까지 했다. 주방 싱크대엔 설거짓거리도 가득 쌓여있었다.평소 깔끔한 것을 좋아하던 장소월도 이렇게 지저분할 때가 있다니.전연우는
“앞으로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이렇게 찾아오지도 말고.”전연우의 시선이 붓이 꽂혀있는 필통으로 향했다. 안엔 핸드폰이 물에 잠겨 있었다.남자가 일어서 창가로 가 커튼을 열자 햇살이 안으로 들어왔다. 연속 며칠 동안 햇볕을 보지 못했던 장소월은 눈이 부셔 손으로 빛을 막았다.“뭐 하는 거야! 얼른 닫아!”그녀가 벌컥 화를 냈다.“한 시간 줄 테니까 깨끗이 정리하고 날 따라와. 집에 가자.”“전연우, 너 미친 거 아니야? 내가 거길 왜 가? 거기가 내 집이야? 너와 백윤서의 집이잖아. 내 생각이 맞다면 오 아주머니도 네 사람이지? 내가 먹는 우유에 아무도 모르게 약을 넣은 걸 보면 말이야.”그녀는 전연우만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떠올랐다. 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던져버리고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녀는 탁자 앞으로 걸어가 우울증약 몇 알을 삼키고는 새빨개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부탁할게. 다신 오지 마.”“난 널 증오해. 전연우! 증오한다고!”넌 내 모든 것을 망가뜨렸어.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전연우가 어두운 눈동자로 굳게 닫힌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그의 마음속은 한데 엉켜버린 수만 갈래의 실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이불 속에 숨어버렸다. 깊은 미로에라도 갇힌 듯 아무리 걸어도, 어떻게 걸어도 출구에 다다를 수가 없었다.예전엔 울다가 힘들어지면 잠을 청했다. 꿈에서 엄마를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갑을 잃어버리고 사진이 없어진 뒤엔 엄마는 한 번도 그녀의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약 다섯 알을 삼켰다. 지금은 오로지 이런 방법을 사용해야만 고통을 견뎌낼 수 있다.오늘 그녀는 꿈속에서 엄마를 만난 것 같았다. 희미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도 들었다.그녀는 하얀색 치마를 입고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