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강용은 방으로 돌아와 채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안에선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애써 참아내고 있는 듯했다.강용은 문을 열려고 뻗은 손을 결국 내려놓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고 복도 끝자락에 걸어가 불을 붙였다.끝도 없이 펼쳐진 칠흑 같은 깜깜함 속에서 강용의 눈동자엔 더욱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하늘에서 빛나는 몇 안 되는 별을 올려다보았다....다음 날, 태양이 떠오르고 날이 밝았다.따뜻한 햇볕이 방에 내리쬐었다...장소월은 일찍 일어나 베란다에 있는 식물에 물을 주었다. 거리에선 몇 명의 상인들이 수레를 끌고 부지런히 지나가고 있었다. 또 누군가의 집에서 만든 음식 냄새도 바람을 타고 풍겨왔다.이곳의 사람들은 평범하고 고단해 보였지만 그녀는 그들이 살고 있는 평안하고 인간미 넘치는 삶이 부러웠다.오늘 그녀는 집을 쓸고 닦으며 깨끗이 청소했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심심할 때, 그녀는 항상 집안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그녀는 전연우는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3일 후 그는 틀림없이 그녀를 데리러 올 것이다.그녀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하지만 이제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졌다.그녀는 계속 월세를 낼 생각이었다. 설사 줄곧 살지 않는다고 해도 만에 하나 또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면 이곳에 머무를 수 있으니 말이다.점심 12시까지 기다렸는데도 강용은 오지 않았다.예전 그는 항상 아무리 늦어도 열한 시 반엔 도착했었다.장소월도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홧김에 대명산의 스키장으로 향했다.다음 날 새벽 5시쯤, 산꼭대기에 올라가 설산의 일출을 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풍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버스로 한 시간가량 달리자 산에 도착했다. 그녀는 표를 산 뒤 사람들과 함께 케이블카를 탔다. 20분이 지나니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이곳의 기온은 너무 차가워 장소월로 하여금
호텔 뒤편으로 몇 분 걸어가니 스키장에 도착했다. 장소월은 보드 장비를 착용하고 조심스레 뒤뚱뒤뚱 움직였다.“... 걱정하지 말고 대담하게 이동해요. 리듬을 잘 장악하고요. 넘어지면 제가 일으켜 줄게요.”거의 처음으로 이런 액티비티를 접한 장소월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보호장치를 입고 있다고 해도 만에 하나 부딪힌다면 분명 아플 것이다.한편으론 그녀는 눈앞의 사람들처럼 시원하게 맨 밑까지 내려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도저히 발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코치가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어떻게 보드를 통제해야 하는지 가르쳐줬다.“넘어지면 얼마나 아플지를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럼 영원히 배울 수 없어요.”“네.”장소월은 이를 악물고 30분이 넘게 연습했음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반면 함께 배웠던 8살짜리 남자아이는 빠른 속도로 배워냈다.그 외 애굣덩어리 아가씨가 한 명 있었는데 연습하며 수차례 미끄러 넘어져 결국엔 코치에게 벌컥 화를 냈다. 남자친구와 함께 왔지만 그는 혼자 스키를 타러 가버렸다고 한다.“아빠, 저 누나 진짜 멍청해요! 아직도 못해요.”남자아이가 천진한 얼굴로 장소월을 가리키며 깔깔 웃어댔다.아버지는 얼른 아이의 입을 막고는 호통을 쳤다.“그런 말 하면 안 돼. 빨리 이모한테 사과해!”이모?장소월은 화살이라도 맞은 듯 가슴이 시큰거렸다.올해 18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모라니.저 부자 두 명은 똑같이 예의를 모른다.장소월은 예쁜 얼굴을 살짝 드러내고 미소를 지었다.“꼬마야, 사람을 욕하면 입술이 뭉개지고 승냥이한테 뜯겨간다는 거 아빠가 안 알려줬어?”남자아이는 그 말을 정말 믿었는지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아무리 타일러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코치님, 우리 저쪽으로 가서 해요.”“그래요.”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고작 꼬마보다도 못하다는 걸 말이다.가장 아래는 경사가 작은 초급자의 구역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급자 구역에서 즐기고 있었다.남자들은 보통 예쁜 여자를 대할 때 인내심이
전연우의 주위에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것에 대해 장소월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전연우는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밖에서 방탕한 습관을 고칠 수 없었다.장소월은 스키 코치의 연락처를 추가했지만 그저 형식적이었다. 아마 다시는 이 스키장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스키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았다.이곳은 설산 정상이고, 영하 십여 도의 날씨라서 장소월이 두껍게 입었지만 여전히 추웠다.전연우가 그 여자에게 다가갔고, 장소월은 떠날 준비를 했다. 그녀는 고글과 복면 안대를 쓰고 자신을 꽁꽁 싸맸다.그녀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전연우는 그녀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장소월이 아무것도 못 본 척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았다.갑자기,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비켜, 비켜!”장소월이 고개를 들자, 누군가 산비탈에서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멈출 수 없었고, 장소월과 부딪치려 할 때, 한 그림자가 갑자기 나타나 장소월의 허리를 잡고 옆으로 옮겨, 장소월은 위기를 모면했다.장소월은 눈동자가 움츠러들고, 빠르게 내려오던 사람을 보았다. 서 있던 사람이 지금은 굴러내려 가고 있었다.장소월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을 구한 사람을 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고마워요!”“전연우!”나청하가 재빨리 달려와 전연우를 잡아당기고 말했다.“자기야. 왜 낯선 여자를 구하려고 목숨을 던져? 봐봐, 안 다쳤어?”전연우는 나청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깊은 눈으로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이제 오빠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확신에 찬 그의 눈빛을 보니 장소월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담담하게 웃었다.“그럴 리가? 그저 오빠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나청하는 장소월에 대한 적개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느새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소월이였구나. 학교에서 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난 너보다 한 학년 위야. 내 이름은 나청하고 지금은 연기 반에 있어.”나청하는 손을 내밀었고, 장소월도 서서 악수를 했다.“안녕하세요
나청하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웃으며 말했다.“그래, 학생은 연애보단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그녀의 목소리에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그녀도 전연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주스를 보고 빨대를 들고 저었다.“정학당했어요. 마침 이 기회에 나와 놀고 있는데 마침 만난 거죠.”“두 사람은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나청하는 행복한 표정으로 전연우의 팔을 껴안고 다정하게 그의 몸에 기대었다.“거의 1년 정도? 맞지? 자기야?”나청하는 몸을 돌려 전연우를 보았다. 전연우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더니, 그가 눈을 떴을 때, 눈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고, 물잔을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답을 하지 않았다.누구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장소월은 나청하의 얼굴을 보고 낯이 익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청하의 미간이 자신과 닮은 것 같았다.장소월은 눈앞의 설경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오빠한테 이렇게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는 줄 몰랐네요. 언니가 말하지 않았다면 오빠는 계속 저한테 비밀로 했을 거예요.”나청하는 좀 부끄러웠다.전연우는 깊은 눈으로 장소월을 보더니 말했다.“미리 안 알려줬다고 오빠를 탓하는 거야?”“그럴 리가! 오빠 나이도 적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나도 당연히 기쁘지!”“그래?”“당연한 거 아니야?”장소월은 그의 눈빛에 온몸이 불편했고, 휴대폰을 들어 답장하는 시늉을 했다. 디저트가 막 올라오자 장소월이 입을 열었다.“진짜 죄송한데 전 다른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는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언니.”장소월의 호칭에 나청하는 싱글벙글하여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벌써 간다고? 내가 배웅해줄게.”“괜찮아요. 제 친구가 이미 저 데리러 왔어요. 오빠... 재밌게 잘 놀아.”“그럼 엘리베이터까지만 배웅할게.”“네.”장소
그녀의 출신은 별로 좋지 않았다. 1년 전, 아버지가 도박에 빠져 카지노에 사채를 빌렸다.아버지는 빚을 갚지 못해 딸을 돈을 갚는 도구로 삼아 천하일성 지하회소에 팔아 술 시중을 들게 했다.그녀는 술은 대접하지만 몸은 팔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손님이 미쳐 그녀를 룸으로 끌고 가서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그녀는 도망치는 과정에 전연우를 만났다.전연우는 나청하를 도왔고, 그녀의 처지를 알게 된 후, 그녀를 학교에 보내주었다. 당시 나청하는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다. 만약 전연우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없었을 것이고, 맘 편히 학교도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장소월은 방에서 짐을 싸고 호텔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체크아웃하려는데 프런트 직원이, 어젯밤 눈이 와서, 지금 산꼭대기에 눈사태가 일어나 유일한 도로가 막혔다고 알려주었다.케이블카도 정전되고, 점점 범위가 커지고 있어 이미 여러 곳에서 정전이 발생했다.지금 호텔은 비상전력을 쓰고 있지만, 8시간밖에 유지할 수 없었다.올 수 있는 구급대원들이 모두 출동하여 구조 작업을 펼치고 있었고, 케이블카에 갇힌 사람들도 있었다.오늘은 정말 운수가 없는 날이다.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난 이후로 불운한 일이 속출했다.도로가 언제 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옷을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그녀가 호텔 방으로 돌아가 막 문을 여는데, 갑자기 문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안으로 끌어당기더니 등으로 힘차게 문을 닫았다. 장소월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그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장소월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지금 다른 사람도 없으니 남매의 정을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여자친구 놔두고 왜 여기 왔어? 화내면 어떡해?”방금 전연우가 장소월을 살짝 만지기만 했을 뿐인데, 나청하의 눈에는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장소월은 그녀의 연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전연우는 어떻게 그녀가 여기 묵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장소월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하지만, 저는 아는 남성분이 없어요. 그분이 착각하셨나 보네요.”“바로 오늘 손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계셨던 그 남성분이세요.”장소월은 단호하게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 죄송하지만 이건 도로 가져가세요.”웨이터는 장소월의 단호한 모습에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장소월은 문을 닫고 방해하지 말라는 버튼을 눌렀다.12층에 있는 바 전망대.“나와서 눈 구경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라고 데려왔는데 왜 돈을 뜯긴 구린 얼굴을 하고 있어?”서철용은 옆에 있는 여자를 껴안고, 주전자에 있는 차를 마주 앉은 사람에게 따라주었다.서철용은 잔을 들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향기가 은은하고 맛은 진했다.입을 오므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같이 온 여자는 어디 갔어? 싸웠어?”바로 이때, 웨이터가 다가왔다.“안녕하세요, 손님.”전연우는 차갑게 말했다.“뭐죠?”웨이터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남자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그의 몸에는 사람을 두렵게 하는 기운이 감돌았다.“그분께 주라고 하신 디저트를 갖다 드렸더니, 손님과 모르는 사이라고 하시네요.”가뜩이나 어둡던 남자의 얼굴은 서리가 내린 것 같았다.서철용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두고 가세요. 이따가 저희가 직접 갖다 주죠.”“네, 알겠습니다.”웨이터는 카트를 밀고 왔다. 차를 마시던 테이블에는 디저트로 가득했고, 남은 것은 한쪽에 놓았다.전연우의 호의를 거절한 여자는 장소월이 처음이었다.서철용은 조롱하듯 말했다.“꽤 똑똑한데?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잖아. 장해진이 죽기 전까지만 버틸 줄 알았는데, 왜 지금은 그 여자한테 마음이 약해진 거야? 작작 해. 네가 한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장소월한테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고!”전연우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네 일이나 신경 써!”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로 짜증스럽게 걸어 나갔다.장소월은 확실히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을 두려워했다. 똑같은 일
두피의 통증이 가시기도 전에 장소월은 심하게 소파에 내동댕이쳐졌다.그녀는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전연우에 의해 눌리고 말았다.“오빠를 보고 왜 도망가? 아직도 도망가고 싶어?”전연우는 웃고 있었다. 마치 목숨을 앗아가는 악마의 웃음과도 같았다.“뭐 하는 짓이야?”장소월은 소파 구석에 움츠러든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전연우는 흰색 케이스의 아주 예쁜 케이크 하나를 집어 들고, 그녀 옆에 앉아 포장을 뜯었다.“너 케이크 좋아하잖아? 오빠가 직접 먹여줄까?”전연우는 숟가락을 들고 그녀의 입가에 건네주었다.장소월은 눈을 붉히며 말했다.“이번엔 또 무슨 약을 탄 거야?”장소월은 전연우의 반응을 살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장소월은 손을 들어 케이크를 내팽개쳤다.“죽을까 봐 못 먹겠어! 꺼지라고!”장소월은 전연우를 밀어냈고,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그녀가 막 일어나려는데 전연우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졸랐다. 단단하고 뜨거운 몸이 장소월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몸부림쳤다.“전연우, 이거 놔!”“죽을까 봐 무서워? 전에는 안 무서웠나? 아직 나쁜 마음을 먹기 전이니까 순순히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전연우가 손을 내밀자 장소월은 무의식적으로 공포에 질려 피했다.전연우는 목 주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고, 그곳은 이미 빨갛게 부어올랐다.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라 장소월은 심장을 조이며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머리카락에서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지만, 마음은 한없이 차가웠다.병 주고 약 주는 것은 전연우의 특기였다.아직도 장소월을 예전의 그 어린 소녀로 생각하는 것일까?한 시간 후.남자가 또 케이크를 먹여주자 장소월은 혐오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못 먹겠어.”앞으로 그녀는 케이크를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이다.그녀의 순종에 전연우는 확실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장소월은 이미 5개의 케이크를 먹었다. 한계를 뛰어넘는 양이라 속이 울렁거리고 토하고 싶어졌다.전연우는 그제야 손을 놓았고, 장
전연우는 장소월의 말을 못 들은 듯 슬리퍼를 신은 채 화장대 앞에 그대로 앉아 눈을 감더니 명령했다.“머리 좀 말려봐.”장소월은 멈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전연우는 짜증스러운 듯 눈을 뜨고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내 말 못 들었어?”익숙한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강력했다.전생에 전연우는 항상 옷을 사서 장소월에게 억지로 입혔다. 그녀가 꾸물대면 전연우는 인내심을 잃은 후, 늘 이런 말투였다.장소월은 전연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고분고분 그의 말을 들으면, 장소월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이 같은 방에 있으니 장소월은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휴대폰에 신호까지 없으니 만약 진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장소월은 터벅터벅 다가가 헤어드라이기를 찾아 화장대 앞 콘센트에 꽂고 따뜻한 바람을 켰다.전연우의 머리카락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이마 앞쪽의 잔머리는 눈을 가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얕은 숨을 쉬며 이미 잠든 듯했다.부드러운 손길로 30분도 안 되어 말렸다.“다... 말렸어.”장소월은 헤어드라이기를 접고, 전연우는 일어나 당연하다는 듯이 침대에 누웠다.“불 꺼!”“...”장소월은 소파에 누워 이불을 움켜쥐고 불쌍하게 말했다.“나는... 불 끄고 못 자.”전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결국 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불을 껐고, 벽 구석에 있는 작은 불만 남겼다.그녀는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새벽 4시 반.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이미 한 시간 동안 씻었다. 대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장소월은 물을 맞으며, 온몸이 점점 가려워 났고, 목의 구석구석에도 혈흔이 잡혔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팅팅 부어올라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똑똑!”욕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언제까지 씻을 거야? 대체 안에서 뭐 해?”장소월은 흐느끼며 말했다.“다 너 때문이야! 분명 날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