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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서하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18 16:19:27
전화가 끊기자 임준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재수 없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나를 공포에 빠트렸다.

생일 전날, 나는 미친 듯이 하던 업무를 마감했다.

엄마가 전화해 집에 경사가 났다며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생일에 외할머니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외할머니가 남겨준 불상을 집에 흘리고 나온 게 생각났다.

집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언니, 그리고 신이한과 마주쳤다.

“라희야. 내일 우리 생일인데 같이 참석할 거지?”

“이한 씨와 나의 약혼식도 그날로 잡을 거니까 꼭 참석해.”

언니는 신이한의 품에 안긴 채 눈부시게 웃었다.

나는 그제야 엄마가 말한 경사가 언니의 약혼식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라희야. 넌 내가 행복한게 거슬려?”

언니가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요청하는 게 아니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요. 얼마나 행복한지 지켜볼게요.”

언니의 기분을 잡치게 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목숨을 잃게 될 줄은 몰랐다.

집을 샅샅이 뒤져봐도 불상이 보이지 않자 나는 너무 급한 나머지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안 좋은 일이 몰래 일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라희야, 이거 찾아?”

언니가 내 목숨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말했다.

“지하실에 버렸을걸? 집에 둬도 자리만 차지하니까.”

나는 고민할 새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열어보니 안이 너무 어두웠다.

뒤에 서 있던 언니가 뭔지 모를 물건을 안으로 던져넣더니 나를 안으로 밀쳤다.

“내 약혼식에 참가하겠다고? 꿈 깨.”

“나는 평생 너랑 같이 생일 파티할 생각 없어.”

“여기서 기다려.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보여줄 테니까.”

언니가 자지러지게 웃더니 지하실 문을 잠갔다. 내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에 외할머니가 준 불상이 있다고 했던 게 떠올라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보일 듯 말 듯 한 불빛으로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뭔가에 걸려 넘어졌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나는 까마득한 어둠에 갇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정신이 흐릿해지는데 지하실 문이 다시 열렸다.

엄마였다.

‘엄마, 살려줘.’

엄마를 부르고 싶었지만 말이 나가지 않았다.

엄마는 지하실 문 앞에 선 채 안을 힐끔 들여다보더니 손에 든 물건을 놓고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써 버텼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는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에 맞은편에 서 있던 사람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 왜 사람이 있어. 깜짝 놀랐네.”

“근데 생긴 게 꽤 괜찮은데? 오빠가 구해줄게. 걱정하지 마...”

술 냄새가 코를 찔렀고 옷이 찢겨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내 몸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그 사람은 아직도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뭐야. 죽었어?”

“에이. 뭐 했다고 벌써 죽어. 재수 없게.”

당황한 남자들이 내 시체를 포댓자루에 담았다. 너무 어두워서 그런지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고 두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나의 머릿속에 콕 박혔다.

포댓자루가 작아 시체가 잘 담기지 않자 남자들은 발로 힘껏 걷어차며 억지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 앞으로 도망갔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으로 사나웠다.

다시 몸을 돌리자 언니의 약혼식이었다.

파티장은 으리으리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맛있는 음식과 술이 보였다.

가족들이 멋지게 차려입고 하객들이 건넨 축복을 받았다. 그러다 가끔 내 생각이 나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곳은 내가 죽기 전에 봤던 허름한 집과는 천지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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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상상해 봤다. 내가 죽은 걸 알았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어떨지 말이다.[일말의 슬픔이라도 느낄까?]하지만 엄마는 꽤 덤덤하게 전화를 끊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임준수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달려왔다.“엄마, 전화를 받았는데 라희 죽었대요.”“거짓말이야.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겠지.”엄마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이렇게 말했다.[도대체 얼마나 후진 딸이기에 죽었다는데도 안 믿는 거야.]“정말이에요. 정말 죽었대요.”오빠가 엄마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던 일을 멈추게 했다.엄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손을 파르르 떨었다. 나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이 준비를 마치고 문 앞까지 걸어 나오는데 더 당황한 표정의 언니를 마주쳤다.“먼저 지하실로 내려가서 물건 좀 챙기고 올게요.”엄마가 허둥지둥하는 언니의 손을 잡았다.“거기는 뭐 하러 가?”언니는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밖으로 끌려 나갔다.이틀 전 지하실로 내려와 내 상태를 확인하려던 언니가 망가진 자물쇠를 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세 사람이 경찰서에 도착했지만 아빠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엄마는 경찰서로 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 나를 죽도록 미워하던 임준수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엄마, 설마 정말 라희겠어요?”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시체 검안실.안은 지독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엄마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헛구역질하며 앞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엄마가 하얀 천을 거둬내고 그 사체가 나임을 확인하더니 경찰에게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했다.한 법의관이 나는 강간을 당해 아래가 찢어진 채로 두려움에 떨다가 숨이 멎었다고 말해줬다.엄마는 벽을 짚어야만 겨우 제대로 설 수 있었다.“엄마, 라희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알아요?”언니가 코를 움켜쥐고는 겁에 질린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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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나 너무 무서워.”언니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오빠 품에 기댔다.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를 지하실에 가두고 괴롭힘을 당하다 죽어가게 만든 사람이 바로 언니였기 때문이다.엄마는 그런 언니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경찰서를 나와서야 언니는 마음껏 숨 쉴 수 있었다.집에 돌아온 엄마는 여기저기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불상 어디 갔어?”엄마가 끊임없이 캐묻자 언니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진작에 지하실로 버렸다고 말했다.엄마는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표정은 덤덤해 보였지만 행동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지하실은 정말 너무 어두웠다. 평소에 켜두던 불도 망가진 것 같았다.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불상은 구석에 두 동강으로 잘린 채 내가 죽은 곳에서 단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버려져 있었다.나는 잘린 불상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 외할머니가 특별히 구해온 물건이었고 외할머니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라 내겐 보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불상 덕분에 지금까지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은 불상도 깨지고 사람도 죽었다.엄마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불상을 주워 들더니 언니의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엄마, 왜 갑자기 서연이를 때리고 그래요?”오빠가 언니를 품속으로 보호했다.“이거 너희 외할머니가 라희에게 선물한 거야. 그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서연이 너밖에 없어.”엄마는 오빠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언니는 엄마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단번에 알아챘다.언니는 왼쪽 볼을 움켜쥐더니 눈물을 흘렸다.“어두운 거 무서워하는 거 알아?”“알아요. 그런데 정말 죽으라고 한 적은 없어요.”언니가 울면서 오빠를 밀쳐내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엄마가 뒷걸음질 치더니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으며 스스로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다들 내가 어두운 걸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를 관심해 준 사람은 없었다. 이미 다 죽은 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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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 바이, 가족   제9화

    [엄마는 나를 미워해.]엄마는 사진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나는 너 미워한 적 없어.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어.”“그냥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야.”나는 가슴을 움켜쥔 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고통을 덜려 했다.나를 미워하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엄마는 오빠에게 모든 램프를 빠짐없이 다 옮기라고 하더니 사진을 조심스럽게 메고 온 가방에 넣었다.[엄마, 지금 이러는 거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난 이제 그 램프들 필요 없어. 아무리 비춰도 내 마음까지는 비치지 못하거든. 난 여전히 무섭더라.]...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언니의 서재를 치워버리고 램프를 모두 안으로 옮겼다.“아빠, 엄마 좀 봐봐요. 도대체 왜 저러는 거예요?”“죽은 사람의 물건을 들이는 게 얼마나 불길한 일인데요.”언니가 문 앞에 선 채 아빠의 팔을 꼭 잡았다.“이미 죽은 사람의 물건을 남겨서는 뭐 해?”“집에 두면 재수 없다고.”잔뜩 화가 난 아빠가 램프를 들어 바닥에 던지려 했다.“그대로 내려놔요. 건드리기만 해봐요.”엄마가 갑자기 흥분하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오빠가 얼른 엄마를 부축했다.엄마는 아빠 손에서 램프를 앗아오더니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 램프가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라희 유골을 전에 살던 시골에 묻을 건데 같이 갈 거예요?”“죽어서라도 편안하게 해줘야죠.”엄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앞에 선 사람들을 훑어봤다.“가야죠. 당연히 가야죠.”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었다. 언니도 엄마의 매서운 눈빛에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죽은 사람을 기념해서는 뭐 한다고.”아빠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하긴. 죽었는데 기념해서는 뭐 해요.]엄마는 이 일에 꽂힌 것 같았다. 나를 꼭 외할머니 곁에 묻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그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햇살도 온화했다.나는 우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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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 바이, 가족   제10화

    엄마라는 단어에 들어가는 대가가 너무 큰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야기가 끝나자 엄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제야 내가 왜 어둠을 무서워하는지, 병원에서 왜 같은 말만 반복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게 치료는커녕 머리 검은 짐승이라고 욕하기까지 했다.홍영자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었다.“라희가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했지? 근데 너희랑 십몇 년을 지내면서 고생한 사람이 누구야?”“라희가 누굴 해치긴 했어?”엄마는 울면서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 말 외에는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엄마는 나에게 미안했고 할머니에게 더 미안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뒤늦은 사과는 받기 싫었다.집에 돌아온 엄마는 크게 앓았다. 종일 우울한 표정으로 내 사진만 붙들고 있었다.언니의 생활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신이한은 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 언니에게 왜 나를 지하실로 밀어 넣었는지 물었다.“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사람은 이미 죽고 없는데 왜 이제 와서 지랄이냐고요.”“나는 그 애가 너무 미워요. 돌아오지 말아야 했어요.”신이한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었다.“설마 그때 인성이 파탄 났다고 소문낸 것도 다 가짜야?”언니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걔 원래 그런 애예요. 7살에 몹쓸 짓을 당해도 싸요.”“그냥 더러운 애라고 생각해요.”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악독하기 그지없었다.신이한이 눈을 감았다가 뜨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정말 너무 소름 끼친다. 나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잖아. 넌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언니가 매달리자 신이한이 힘껏 얼굴을 후려갈겼다. 파혼은 물론이고 언니에게 선물했던 집까지 회수하겠다고 말했다.언니는 모두가 받들던 공주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울며불며 집으로 돌아간 언니는 엄마를 찾아가 억울함을 쏟아냈다.“엄마, 이한 씨가 나 때린 것도 모자라 파혼하겠대요.”“라희가 죽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언젠가 다시 무릎 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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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 바이, 가족   제11화

    이에 옆방에서 자고 있던 오빠와 언니가 잠에서 깼다.“오빠, 라희는 골칫덩어리예요.”“엄마가 뭐에 홀린 것 같아요. 아빠 말이 맞아요.”언니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오빠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입을 꾹 다물고 반대하지는 않았다.이게 바로 내 가족이다. 나를 낳고 버린 사람들이니 죽어서도 충분히 나를 무덤에서 다시 꺼낼 수 있었다.엄마도 더는 난리를 피우지 않고 조용해졌다. 엄마는 내 방으로 걸어가 모든 불을 다 켰다. 켜고 보니 확실히 예쁘긴 했다.그렇게 한참 구경하던 엄마가 모든 불을 다 껐다. 확실히 너무 어두웠다.“라희야. 어둠이 이렇게 무서운 거였구나.”“그날 내가 조금만 더 안으로 걸어갔다면 네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엄마가 많이 미운 거지?”“우리가 속죄했으면 좋겠지?”...동이 트자 아빠는 다급하게 시골로 내려가려 했다. 하루도 더 버티기 싫은 것 같았다.엄마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침을 준비햇다.“너무 쪽팔리는 일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는 말자고요.”“밥 먹고 우리 네 식구가 다 같이 가는 건 어때요?”언니가 테이블에 놓인 아침을 집어 들더니 말했다.“엄마, 드디어 생각이 바뀐 거예요?”오빠는 엄마에게 무덤을 옮기는 건 일도 아니니 상심하지 말라고 말했다.굳어있던 아빠의 얼굴도 펴진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어딘가 자꾸 불안했다. 어제 엄마가 속죄하겠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어떻게 속죄하겠다는 거지?][엄마, 이런다고 내가 용서할 것 같아요? 천만에요.][엄마, 들려요?]하지만 내 말에 대답하는 건 문이 닫히는 소리와 차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엄마는 이번에 조수석에 올라탔고 오빠가 운전대를 잡았다. 시골로 내려가는 내내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오빠는 딱딱한 분위기를 살짝 바꾸려고 감미로운 음악을 틀었다. 그러자 언니가 음악에 맞춰 흥얼대기 시작했다.“마음 아픈 적은 있어?”산길을 달리던 차가 커브와 가까워지자 엄마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목소리가 높지는 않았지만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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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 바이, 가족   제11화

    이에 옆방에서 자고 있던 오빠와 언니가 잠에서 깼다.“오빠, 라희는 골칫덩어리예요.”“엄마가 뭐에 홀린 것 같아요. 아빠 말이 맞아요.”언니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오빠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입을 꾹 다물고 반대하지는 않았다.이게 바로 내 가족이다. 나를 낳고 버린 사람들이니 죽어서도 충분히 나를 무덤에서 다시 꺼낼 수 있었다.엄마도 더는 난리를 피우지 않고 조용해졌다. 엄마는 내 방으로 걸어가 모든 불을 다 켰다. 켜고 보니 확실히 예쁘긴 했다.그렇게 한참 구경하던 엄마가 모든 불을 다 껐다. 확실히 너무 어두웠다.“라희야. 어둠이 이렇게 무서운 거였구나.”“그날 내가 조금만 더 안으로 걸어갔다면 네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엄마가 많이 미운 거지?”“우리가 속죄했으면 좋겠지?”...동이 트자 아빠는 다급하게 시골로 내려가려 했다. 하루도 더 버티기 싫은 것 같았다.엄마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침을 준비햇다.“너무 쪽팔리는 일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는 말자고요.”“밥 먹고 우리 네 식구가 다 같이 가는 건 어때요?”언니가 테이블에 놓인 아침을 집어 들더니 말했다.“엄마, 드디어 생각이 바뀐 거예요?”오빠는 엄마에게 무덤을 옮기는 건 일도 아니니 상심하지 말라고 말했다.굳어있던 아빠의 얼굴도 펴진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어딘가 자꾸 불안했다. 어제 엄마가 속죄하겠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어떻게 속죄하겠다는 거지?][엄마, 이런다고 내가 용서할 것 같아요? 천만에요.][엄마, 들려요?]하지만 내 말에 대답하는 건 문이 닫히는 소리와 차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엄마는 이번에 조수석에 올라탔고 오빠가 운전대를 잡았다. 시골로 내려가는 내내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오빠는 딱딱한 분위기를 살짝 바꾸려고 감미로운 음악을 틀었다. 그러자 언니가 음악에 맞춰 흥얼대기 시작했다.“마음 아픈 적은 있어?”산길을 달리던 차가 커브와 가까워지자 엄마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목소리가 높지는 않았지만 음

  • 하이, 바이, 가족   제10화

    엄마라는 단어에 들어가는 대가가 너무 큰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야기가 끝나자 엄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제야 내가 왜 어둠을 무서워하는지, 병원에서 왜 같은 말만 반복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게 치료는커녕 머리 검은 짐승이라고 욕하기까지 했다.홍영자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었다.“라희가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했지? 근데 너희랑 십몇 년을 지내면서 고생한 사람이 누구야?”“라희가 누굴 해치긴 했어?”엄마는 울면서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 말 외에는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엄마는 나에게 미안했고 할머니에게 더 미안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뒤늦은 사과는 받기 싫었다.집에 돌아온 엄마는 크게 앓았다. 종일 우울한 표정으로 내 사진만 붙들고 있었다.언니의 생활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신이한은 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 언니에게 왜 나를 지하실로 밀어 넣었는지 물었다.“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사람은 이미 죽고 없는데 왜 이제 와서 지랄이냐고요.”“나는 그 애가 너무 미워요. 돌아오지 말아야 했어요.”신이한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었다.“설마 그때 인성이 파탄 났다고 소문낸 것도 다 가짜야?”언니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걔 원래 그런 애예요. 7살에 몹쓸 짓을 당해도 싸요.”“그냥 더러운 애라고 생각해요.”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악독하기 그지없었다.신이한이 눈을 감았다가 뜨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정말 너무 소름 끼친다. 나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잖아. 넌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언니가 매달리자 신이한이 힘껏 얼굴을 후려갈겼다. 파혼은 물론이고 언니에게 선물했던 집까지 회수하겠다고 말했다.언니는 모두가 받들던 공주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울며불며 집으로 돌아간 언니는 엄마를 찾아가 억울함을 쏟아냈다.“엄마, 이한 씨가 나 때린 것도 모자라 파혼하겠대요.”“라희가 죽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언젠가 다시 무릎 꿇고

  • 하이, 바이, 가족   제9화

    [엄마는 나를 미워해.]엄마는 사진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나는 너 미워한 적 없어.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어.”“그냥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야.”나는 가슴을 움켜쥔 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고통을 덜려 했다.나를 미워하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엄마는 오빠에게 모든 램프를 빠짐없이 다 옮기라고 하더니 사진을 조심스럽게 메고 온 가방에 넣었다.[엄마, 지금 이러는 거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난 이제 그 램프들 필요 없어. 아무리 비춰도 내 마음까지는 비치지 못하거든. 난 여전히 무섭더라.]...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언니의 서재를 치워버리고 램프를 모두 안으로 옮겼다.“아빠, 엄마 좀 봐봐요. 도대체 왜 저러는 거예요?”“죽은 사람의 물건을 들이는 게 얼마나 불길한 일인데요.”언니가 문 앞에 선 채 아빠의 팔을 꼭 잡았다.“이미 죽은 사람의 물건을 남겨서는 뭐 해?”“집에 두면 재수 없다고.”잔뜩 화가 난 아빠가 램프를 들어 바닥에 던지려 했다.“그대로 내려놔요. 건드리기만 해봐요.”엄마가 갑자기 흥분하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오빠가 얼른 엄마를 부축했다.엄마는 아빠 손에서 램프를 앗아오더니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 램프가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라희 유골을 전에 살던 시골에 묻을 건데 같이 갈 거예요?”“죽어서라도 편안하게 해줘야죠.”엄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앞에 선 사람들을 훑어봤다.“가야죠. 당연히 가야죠.”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었다. 언니도 엄마의 매서운 눈빛에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죽은 사람을 기념해서는 뭐 한다고.”아빠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하긴. 죽었는데 기념해서는 뭐 해요.]엄마는 이 일에 꽂힌 것 같았다. 나를 꼭 외할머니 곁에 묻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그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햇살도 온화했다.나는 우습게

  • 하이, 바이, 가족   제8화

    “오빠. 나 너무 무서워.”언니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오빠 품에 기댔다.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를 지하실에 가두고 괴롭힘을 당하다 죽어가게 만든 사람이 바로 언니였기 때문이다.엄마는 그런 언니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경찰서를 나와서야 언니는 마음껏 숨 쉴 수 있었다.집에 돌아온 엄마는 여기저기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불상 어디 갔어?”엄마가 끊임없이 캐묻자 언니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진작에 지하실로 버렸다고 말했다.엄마는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표정은 덤덤해 보였지만 행동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지하실은 정말 너무 어두웠다. 평소에 켜두던 불도 망가진 것 같았다.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불상은 구석에 두 동강으로 잘린 채 내가 죽은 곳에서 단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버려져 있었다.나는 잘린 불상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 외할머니가 특별히 구해온 물건이었고 외할머니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라 내겐 보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불상 덕분에 지금까지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은 불상도 깨지고 사람도 죽었다.엄마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불상을 주워 들더니 언니의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엄마, 왜 갑자기 서연이를 때리고 그래요?”오빠가 언니를 품속으로 보호했다.“이거 너희 외할머니가 라희에게 선물한 거야. 그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서연이 너밖에 없어.”엄마는 오빠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언니는 엄마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단번에 알아챘다.언니는 왼쪽 볼을 움켜쥐더니 눈물을 흘렸다.“어두운 거 무서워하는 거 알아?”“알아요. 그런데 정말 죽으라고 한 적은 없어요.”언니가 울면서 오빠를 밀쳐내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엄마가 뒷걸음질 치더니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으며 스스로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다들 내가 어두운 걸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를 관심해 준 사람은 없었다. 이미 다 죽은 판에

  • 하이, 바이, 가족   제7화

    사실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상상해 봤다. 내가 죽은 걸 알았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어떨지 말이다.[일말의 슬픔이라도 느낄까?]하지만 엄마는 꽤 덤덤하게 전화를 끊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임준수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달려왔다.“엄마, 전화를 받았는데 라희 죽었대요.”“거짓말이야.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겠지.”엄마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이렇게 말했다.[도대체 얼마나 후진 딸이기에 죽었다는데도 안 믿는 거야.]“정말이에요. 정말 죽었대요.”오빠가 엄마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던 일을 멈추게 했다.엄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손을 파르르 떨었다. 나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이 준비를 마치고 문 앞까지 걸어 나오는데 더 당황한 표정의 언니를 마주쳤다.“먼저 지하실로 내려가서 물건 좀 챙기고 올게요.”엄마가 허둥지둥하는 언니의 손을 잡았다.“거기는 뭐 하러 가?”언니는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밖으로 끌려 나갔다.이틀 전 지하실로 내려와 내 상태를 확인하려던 언니가 망가진 자물쇠를 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세 사람이 경찰서에 도착했지만 아빠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엄마는 경찰서로 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 나를 죽도록 미워하던 임준수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엄마, 설마 정말 라희겠어요?”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시체 검안실.안은 지독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엄마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헛구역질하며 앞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엄마가 하얀 천을 거둬내고 그 사체가 나임을 확인하더니 경찰에게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했다.한 법의관이 나는 강간을 당해 아래가 찢어진 채로 두려움에 떨다가 숨이 멎었다고 말해줬다.엄마는 벽을 짚어야만 겨우 제대로 설 수 있었다.“엄마, 라희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알아요?”언니가 코를 움켜쥐고는 겁에 질린 표정

  • 하이, 바이, 가족   제6화

    그 뒤로 시체가 어디 갔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거긴 너무 어두워서 영혼이 된 지금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외할머니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저번처럼 나를 품에 꼭 안아주며 할머니 여기 있다고 다독여줬을까?하지만 나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런 장면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외할머니는 내가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을 바랐지만 나는 늘 어둠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죽으면서까지도 어둠을 벗어나지 못했다.이 세상에 더는 망설임 없이 나를 선택할 사람이 없었다. 그 말은 나는 영원히 편애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나는 가슴을 움켜잡고 애써 진정하려 했다.[엄마, 나는 당신들이 너무 미워요.][당신들이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내가 당신들을 버린 거예요.][당신들과 가족이 된 건 이번 생의 제일 큰 불행이었어요...]...오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나를 재수 없다고 연신 욕해댔다.언니는 켕기는 게 있는 듯한 표정으로 아빠, 엄마를 위로했다.“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라희가 왜 이런 장난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우리 생일에 이런 말을 하다니 너무 불길해요.”화가 잔뜩 치밀어오른 아빠가 코웃음 쳤다.“죽으면 차라리 잘된 거지 뭐.”“양심 없는 년은 살아있어도 문제야.”외할머니가 나를 데려간 후로 아빠의 사업도 점점 커졌고 주문량이 급증하면서 자산도 몇 배로 불어났다.아빠는 언니 덕분에 행운이 깃든 거라고 말했다. 엄마도 퇴원하고 언니와 오빠도 건강하니 집안에 핀 꽃도 전보다 더 흐드러져 보였다.이런 이유로 아빠는 나를 더 미워하며 재수 없는 사람으로 몰아갔다.나는 아빠가 나를 볼 때마다 짓는 증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아빠는 내가 가문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칠까 봐 엄마에게 앞으로 나를 라희로 부르라고 하면서 호적도 일단은 그대로 두라고 했다.나는 집이 있었지만 집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아빠는 언니와 오빠를 위해서라면 큰돈을 써가며 좋은 학교로 보내 엘리트 교육을 받게 했지만 나는 편입으로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했다.

  • 하이, 바이, 가족   제5화

    전화가 끊기자 임준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재수 없다며 욕설을 퍼부었다.하지만 그 목소리가 나를 공포에 빠트렸다.생일 전날, 나는 미친 듯이 하던 업무를 마감했다.엄마가 전화해 집에 경사가 났다며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생일에 외할머니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외할머니가 남겨준 불상을 집에 흘리고 나온 게 생각났다.집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언니, 그리고 신이한과 마주쳤다.“라희야. 내일 우리 생일인데 같이 참석할 거지?”“이한 씨와 나의 약혼식도 그날로 잡을 거니까 꼭 참석해.”언니는 신이한의 품에 안긴 채 눈부시게 웃었다.나는 그제야 엄마가 말한 경사가 언니의 약혼식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라희야. 넌 내가 행복한게 거슬려?”언니가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요청하는 게 아니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그래요. 얼마나 행복한지 지켜볼게요.”언니의 기분을 잡치게 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목숨을 잃게 될 줄은 몰랐다.집을 샅샅이 뒤져봐도 불상이 보이지 않자 나는 너무 급한 나머지 눈물을 뚝뚝 떨궜다.안 좋은 일이 몰래 일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라희야, 이거 찾아?”언니가 내 목숨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말했다.“지하실에 버렸을걸? 집에 둬도 자리만 차지하니까.”나는 고민할 새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문을 열어보니 안이 너무 어두웠다.뒤에 서 있던 언니가 뭔지 모를 물건을 안으로 던져넣더니 나를 안으로 밀쳤다.“내 약혼식에 참가하겠다고? 꿈 깨.”“나는 평생 너랑 같이 생일 파티할 생각 없어.”“여기서 기다려.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보여줄 테니까.”언니가 자지러지게 웃더니 지하실 문을 잠갔다. 내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여기에 외할머니가 준 불상이 있다고 했던 게 떠올라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보일 듯 말 듯 한 불빛으로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그러다 뭔가에 걸려 넘어졌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나는 까마득한

  • 하이, 바이, 가족   제4화

    “나는 엄마만 무사하면 돼요.”이 말을 들은 아빠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생일은 무슨 생일이야. 눈에 거슬리게 하지 말고 얼른 방으로 꺼져.”그 잔치 국수는 아빠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바람에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리 빨리 죽었는지 알 것 같았다.언니는 일부러 내 방으로 들어와 내 마음을 후벼파는 말들을 스스름없이 내뱉었다.“엄마가 만든 면을 먹겠다고? 정말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네.”“너처럼 재수 없는 년은 왜 죽지도 않는 거야.”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언니를 밀쳤고 언니는 마침 머리를 문에 부딪쳤다.그날 밤 아빠는 처음으로 나를 지하실에 가뒀다. 이게 내 명을 재촉하는 화근이 되었다.너무 어두워서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를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미친 듯이 문만 두드렸다.악몽이 나를 삼켜버렸고 귓가에는 옷이 찢기는 소리만 들렸다.나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온몸을 웅크리고 외할머니를 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둠에 갇힌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다시 눈을 떠보니 엄마가 병원에서 나를 안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놀라서 구석으로 숨어들며 중얼거렸다.“나는 엄마 싫어요. 엄마 싫어요.”하지만 나는 잊었다. 그날 엄마가 처음으로 나를 먼저 안으려 했다는 걸 말이다.엄마가 내민 손은 허공에서 굳어버렸고 표정도 점점 싸늘해졌다.“머리 검은 짐승 맞네.”나는 어둠 공포증을 진단받았지만 엄마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바로 병원을 나섰다.그날 밤, 나는 후회에 휩싸였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지만 나의 절망과 초조함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그날을 기점으로 엄마와 내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내가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언니가 서재를 갖고 싶다고 하자 엄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물건을 빼버리고 내 방을 서재로 만들었다.정말 한시라도 빨리 나를 집에서 쫓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제 괜찮았다. 나는 죽었으니 이제 다시는 집

  • 하이, 바이, 가족   제3화

    엄마가 죄책감을 느꼈는지 며칠은 잘해줬다. 하지만 고작 그 며칠이었다.저녁이 되어서야 약혼식은 원만하게 막을 내렸다. 오늘이 나의 생일이라는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손님들을 보내고 나니 아버지의 표정도 따라서 굳어졌고 임준수더러 내게 전화해 보라고 했다.꺼져있던 전화가 켜지긴 했지만 여전히 받는 사람은 없었다.언니가 폭주하려는 오빠를 말리며 말했다.“오빠, 됐어. 라희는 내가 보기 싫겠지. 괜찮아.”언니는 늘 그렇듯 사려가 깊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언니의 모습에 아빠가 마음 아파했다.“안 오는 것도 좋지. 외할머니도 죽게 만든 년인데 오면 재수 없어질 수도 있어.”“태어날 때부터 골칫덩어리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졸라 죽이는 건데.”이 말에 둥둥 떠 있던 내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빠는 외할머니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었다.엄마는 나를 낳을 때 출혈이 너무 커 하마터면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뻔했다. 언니는 태어날 때 산소가 부족해 바로 인큐베이터로 옮겨졌지만 나만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그러다 아빠의 사업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자 모든 불행을 내 탓으로 돌렸다. 내가 재수 없는 년이라 나쁜 운만 가져온다고 말이다.아빠는 나를 집에서 내보내려고 했지만 외할머니가 미신을 믿지 말라며 억지로 나를 남겼다.나는 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 할머니가 온갖 정성을 다해 길러주셨다. 나의 이름도 외할머니가 지어준 것이었는데 영원히 즐겁고 행복해지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내가 7살이 되던 해 엄마가 외할머니를 보러 왔지만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나는 왜 나를 보려조차 하지 않는지 묻고 싶어 엄마가 탄 차를 울며 뒤쫓아갔다.그렇게 악몽도 찾아왔다. 나는 어둡고 허름한 집에 갇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외할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울기만 했다. 엄마에게 전화해 내가 아프니 빨리 돌아오라고 했지만 아무리 타일러도 엄마는 나를 보러 오는 걸 거절했다.그 뒤로 나는 더는 엄마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외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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