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조금도 내외하지 않고 온몸을 권하윤에게 기댔다.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당장이라도 연약한 어깨에 금이 갈 것만 같았다.하지만 이게 방금 모른척하려던 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권하윤은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죽원으로 데려가면 돼요?”“나 죽으라고?”:민도준은 권하윤 어깨에 기대며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걱정 마. 오늘 나 죽으면 그쪽은 꼭 함께 데려갈 테니까.”연인 같은 자세에 그렇지 못한 말투에 권하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민씨 저택인데 저들은 어떻게 이런 짓까지 했대요?”“민씨 저택은 뭐 그렇게 안전한 줄 알아? 여기가 더 위험해.”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권하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심스럽게 민도준을 부축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솔직히 거실에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누가 보기라도 하면 설명하기 귀찮아지기 때문에 안간힘을 쓰며 그를 방안으로 옮겼다.민도준은 내외하지 않고 권하윤의 침대에 눕더니 손을 들고 옷을 벗기라는 시늉을 했다.외투를 벗기자 그제야 아랫배 쪽을 흥건하게 적신 피가 눈에 들어았다.“대체…….”권하윤이 놀라 어쩔 줄 몰라하던 그때 민도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더니 배에 난 상처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씨발, 개자식들.”탄탄한 복근과 근육을 덮고 있는 옅은 구릿빛 피부는 그야말로 야성미가 넘쳐흘렀다.권하윤은 깨끗한 수건 하나를 꺼내 상처 주위를 깨끗이 닦았다. 그제야 점점 상처가 보이기 시작했다. 흉기에 찔린 상처였지만 다행히도 너무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상처 소독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구급상자 찾아올게요.”권하윤은 다시 매원을 나섰다. 아까 본 사람들과 다시 마주칠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이상하게도 방금까지만 해도 사람 하나 없던 저택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밖에서 경비를 서는 보다가드들도 마당을 청소하는 메이드들도 모두 다시 나타났다.
상처에 바르는 약 하나가 권하윤의 손에 놓였다.하지만 설명서에 쓰인 상처 부위를 보는 순간 권하윤의 얼굴은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 열기는 본채 정원에 도착해서야 겨우 식었다.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치고는 규모가 대단했다.휜 국과 꽃에 둘러싸인 중심에는 흑백으로 된 사진 두 장이 놓여있었다. 사진 속 사람은 다름 아닌 민도준의 부모님이었다.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알려진 건 크게 없었다. 그저 해외에서 폭동이 일어날 때 피습당했다는 것밖에는.권하윤이 자리에 서기 바쁘게 강수연이 아니꼬운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기도 뭣해 째려보고 홱 돌아섰다.그때 민승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일부러 나 망신 주려고 그래? 친척들 모두 아침 일찍 모였어. 민정이도 아침부터 엄마를 도와 제사 음식에 이것저것 일손을 도왔는데 넌 지금껏 잠이나 자다 난타나? 예의를 쌈 싸 먹었어?”권하윤은 눈을 들어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어르신들께 차를 나르는 강민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밤낮으로 참 대단하네. 내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너 뭐라고 했어? 씨발 다시 한 번…….”화를 내던 민승현은 민상철과 민도준이 나타나자 다급히 말을 삼켰다. 멀리서 걸어오는 민도준은 간밤에 칼에 찔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했다.주위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냈고 그 사이에 권하윤도 속해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이 곁을 지날 때 몸에서 나는 담배연기와 시원한 향이 한데 섞여 코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권하윤은 심장이 요동쳤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때문에 앞에서 걸어가던 민상철도 뒤를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래?”권하윤은 순간 머리가 찌근거렸다. 민도준이 또 이상한 말을 해댈까 봐 불안해났다.그런데 민도준의 눈빛은 권하윤의 몸을 슥 훑고는 민승현에게 멈췄다.“승현아.”민도준의 앞에 서자 민승현의 건방진 태도는 순간 사그라들었다. 목소리마저 미약하게
“부른 지가 언젠데 이제야 기어 들어와?”권하윤을 대하는 강수연의 태도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하지만 권하윤은 그런 그녀 대신 제발 저리는 듯 눈을 피하는 강민정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왜 부르셨어요?”“그걸 내가 꼭 말로 해야겠어? 여자애가 행실이 그렇게 천박한 것도 모자라 감히 승현의 얼굴에 먹칠을 헤? 권씨 가문에서 그렇게 배워먹었어?”“어머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언제 천박하게 굴었다고 그러세요?”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천진한 표정에 강수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승현에게 매달려 몸에 그런 자국까지 남겨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밖에서 몸 파는 년들하고 뭐가 달라!”하지만 강수연의 말이 끝나는 순간 권하윤이 아닌 강민정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듯한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숨기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수연을 위로했다.“이모, 심장도 안 좋으신데 화내지 마세요.”“언니도 얼른 이모한테 사과하세요.”뻔뻔한 태도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제가 잘못했다면 사과하겠는데 어제 승현 씨와 같이 있은 사람 저 아니에요.”“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아니면 누군데?”“민정 씨 어머님이 묻잖아요. 어제 민승현이 누구랑 있었는지.”강민정은 훅 들어오는 공격에 당황하더니 이내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빠가 누구랑 같이 있었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어제 저는 제 방에만 있었는데.”“민정 씨는 당연히 방에 있었겠죠. 민승현과 같이.”“닥쳐!”강수연은 화가 잔뜩 나서 권하윤의 말을 잘랐다.“민정과 승현은 친남매나 다름없는 사이야.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에게 그런 누명을 씌워!”아주 적재적소에 눈물이 강민정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언니. 아무리 인정하기 싫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내요? 전 승현 오빠를 친오빠처럼 생각해요.”그녀는 강수연이 권하윤의 말을 믿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어릴 적부터 두
“씨발, 살살 좀 해.”:“쏘리.”한민혁은 익숙한 동작으로 민도준의 복부에 난 상처를 치료했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상처를 보아하니 그렇게 깊은 건 같지 않은데 왜 이렇게 찢어졌어?”‘어제 그렇게 해댔는데 안 찢어지고 배겨?’민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하지만 치료를 마치고 민도준이 옷을 입으려고 일어선 그때 한민혁이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형, 등에 이거 뭐야? 이것도 민재혁 그놈이 보낸 사람이 그런 거야?”이상한 반응에 거울에 등을 비춰보는 순간 등에 난 손톱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민도준은 한심하다는 듯 한민혁의 손을 때렸다.“너 바보냐?”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한민혁이 이번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달라붙었다.“혹시 여자야?”민도준은 그를 가볍게 무시했다. 하지만 한민혁은 민도준의 싸늘한 반응에 나가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흥미진진한 얼굴로 꼬치꼬치 캐물었다.“설마 권씨 집안 그 여자야? 아닌데, 형 지금 막 본가 저택에서 돌아오는 거잖아. 그런데 본가 저택에 있는 권씨 집안 여자면…….”민도준이 말없이 눈빛을 보내자 한민혁은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낮췄다.본가 저택에 있는 권씨 집안 여자. 답은 뻔했다. 한민혁은 한 사람을 떠올리고는 민도준에게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역히 대단해. 놀 줄 안다니까. 평범한 건 취급 안 하고 스릴만 즐긴다 이거야?’“그런데 그 여자도 대단하긴 하네. 어떻게 형 등을 이렇게 만들어?”민도준은 외투를 입으며 낮게 웃었다.“대단하지는 않은데 손톱이 날카롭긴 해.”“형 설마 맛 들였어?”“새롭긴 하지.”‘와, 말투를 감겼네 감겼어.’그러던 그때 마침 민도준의 핸드폰이 울렸다.그의 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올 사람은 그중에서도 극소수다.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그의 눈빛은 싸늘해졌다.-“쿵.”객실 바닥에 던져진 권하윤은 눈앞이 핑 돌았다.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이젠
“첫째 사모님. 지훈 도련님이 왔습니다.”“뭐?”‘민지훈이 왜 하필 이 시간에 왔지?’원혜정은 권하윤을 힐끗 흘켜보며 명령했다.“위층으로 데려가요. 절대로 소리가 새어 나오지 못하게.”입이 틀어막힌 채 질질 끌려 계단을 오를 때 웃음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누가 왔어.’사람이 온 걸 확인 한 권하윤은 있는 힘껏 버둥거리며 보디가드를 뿌리치려고 애썼다.그 때문에 보디가드는 소리를 막기 위해 하는 수없이 그녀를 바닥에 눌렀다.그 시각 아래층.원혜정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민지훈을 맞이했다.“도련님, 여긴 웬일이에요?”“형 찾으러 왔어요. 형 집에 있어요?”“이걸 어쩌나. 형은 아까 나갔는데.”“그래요?”민지훈은 아무 일 없는 듯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마침 계단 아래에 떨어진 여자 신발에 눈이 고정되었다. 이내 고민되는 듯 주위를 서성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사실 형한테 물건 빌리러 왔거든요. 급하게 쓸 데가 있어서.”“무슨 물건이요? 제가 찾아서 보내드릴게요.”“제가 어떻게 형수님께 막 시키고 그래요? 제가 형 방에서 직접 찾을게요.”원혜정의 대답을 듣기 전 민지훈은 이내 위층으로 올라갔다.“아, 지훈 도련님.”“…….”그리고 2층에 도착한 순간 보디가드들에게 입이 막힌 채로 잡혀 있는 권하윤과 맞닥뜨렸다.뒤에서 따라오던 원혜정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권하윤은 깜빡깜빡 점등되는 눈을 애써 부릅뜨며 두 사람의 입모양을 살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 순간 마치 물에서 빠져나온 물고기라도 된 듯 숨 막히고 목마르고 더웠다.간질간질한 느낌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와 고통스럽고 기분이 이상했다.흐릿한 의식 속에 권하윤은 누군가 자신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가는 걸 느꼈다.무의식적으로 상대의 목을 끌어안고 차가운 피부에 닿으면 편안하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갖다 댔지만 상대가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안 돼요. 이러면 저 형한테 맞아 죽어요.”민지훈은 권하윤을 방 침대에 눕히고는 마치 농락이라
갑자기 들려오는 호통에 권하윤은 억울했는지 나지막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그 목소리는 전화를 통해 민도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씨발, 기다려.”곧이어 낮은 욕지거리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민지훈!”“응, 형. 무슨 일이야?”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민지훈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권하윤 데리고 집에서 나와.”“뭐? 본가 저택이 어떤 곳인지 형도 알잖아. 보는 눈이 그렇게나 많은데 내가 무슨 수로 사람 하나를 빼돌려?”“흥. 뭐라도 얻어내겠다는 꼼수냐?”“에이, 내가 설마 그러겠어?”민지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그런데 내가 오늘 큰 형수님한테 원한을 산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남평 건물 네가 가져.”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오케이 콜. 사람은 걱정 마. 내가 무조건 빼돌릴게.”-돈이면 뭐든 가능하다는 말이 다른 사람한테는 어떨지 몰라도 민지훈한테는 그야말로 진리였다.반 시간 후, 마대에 꽁꽁 싸맨 사람 하나가 아무도 모르게 민 씨 저택을 빠져나왔다.그리고 사람을 실은 순간 차는 쌩하고 떠나버렸다.미처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민지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헤실 거리며 떠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 시각 차 안.대충 맨 마대를 홱 풀어버리자 뜨거운 열기와 함께 습기가 얼굴을 뒤덮었다. 원래도 더워 미칠 지경이었는데 안에 묶여있은지라 권하윤은 이미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젖은 채로 얼굴에 들러붙어 있고 눈은 흐릿했으며 양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런 그녀는 민도준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품에 폭 안겨왔다.지금껏 긴장하고 부끄럼을 타며 어색해하던 모습과는 달리 주동적인 모습이었다.민도준은 권하윤을 자기 무릎에 눕히며 외투를 벗어 여자의 몸을 덮었다. 앞쪽에서 슬쩍슬쩍 보내는 시선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한 번 더 봤다가 눈알 뽑아버리는 수가 있어!”민도준이 슬쩍 눈을 들며 경고하자 앞에서 운전하던 한민혁이 이내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끌어 몸을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을 때 비로소 옷차림이 단정하고 온몸의 끈적거림이 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씻겨줬나 보네.’“그쪽…….”“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전 계속 저쪽에서 게임했어요.”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민혁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권하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끝으로 가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어서기 바쁘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한민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둬들이며 입을 열었다.“혼자 걸을 수 있겠어요?”“네.”권하윤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가요.”그리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자기가 있었던 곳이 정원이 달린 단독 주택이라는 걸 발견했다. 환경은 아름다웠으나 아무도 살지 않은 것처럼 썰렁했다.묻지도 않았는데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한민혁이 입을 열었다.“이건 도준 형 별장이에요. 민씨 저택과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 고요함은 한민혁이 그녀를 민씨 저택으로 데려갈 때까지 계속됐다.그리고 거의 도착할 무렵 한민혁은 의아한 듯 물었다.“왜 도준 형이 어디 갔는지 물어보지 않아요?”“그걸 저한테 알려주고 싶었다면 민혁 씨를 대신 보내진 않았겠죠.”돌아오는 대답에 한민혁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그녀의 말을 묵인하기라도 하듯.권하윤은 창밖으로 고요한 거리를 바라봤다.민도준이 어렵사리 자기를 꺼내준 걸 생각하면 감동받지 않았다는 게 거짓말이다.하지만 이렇게 다시 집으로 보낸다는 건 뜻이 아주 명확했기에 더 이상 굴욕을 자초할 수 없었다.게다가 민도준이 사람을 시켜 원혜정 손에서 그녀를 구출하고 도와줬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큰 호의를 베풀어 준거나 다름없었다.‘처음부터 지나가는 인연이었어. 상대가 이렇게 명확한 의사를 표현했으니 더 이상 얽히지 말자.’권하윤은 스스로를 충고했다. 민도준은 원래부터 건드리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이렇게 관계를 끝내는 것도
하지만 생각 밖의 일이 벌어졌다.이불을 걷은 순간 권하윤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느게 아니겠는가?소리에 놀란 그녀는 흐릿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어머님, 형님, 왜 다들 여기 계세요?”권하윤은 잠옷을 입은 채 방금 잠에서 깬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불 아래 하반신은 여전히 들어올 때 입고 있던 바지를 입고 있었고 신발도 미처 벗지 못했다.원혜정은 놀란 눈으로 권하윤을 살피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동서가 갈 때 상태가 많이 안 좋았던 것 같아 보여 보러 왔어요.”“흥, 잠이나 퍼자고 있었어?”강수연은 아니꼬운 말투로 권하윤을 쏘아붙이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두리번거렸다.“근데 왜 너 혼자뿐이니? 승현은?”“엄마, 저 여기 있어요.”얘기를 듣고 달려온 민승현은 뭔가 찔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원혜정은 권하윤과 민승현을 번갈아 보면서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도련님,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동서 혼자 외로웠겠어요.”“네? 아…… 그게, 민정이 보러 갔다 왔어요.”강수연은 민승현이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이런 야밤에 민정이 방엔 무슨 일로 갔지?’“아까 민정 씨가 아파 보여서 제가 갔다 오라고 했어요.”생각지도 못한 권하윤의 말에 민승현은 이상함을 느낀 것도 잠시 곧바로 맞장구쳤다.“맞아요. 민정이가 구급상자를 찾지 못하겠다고 해서 찾아주고 오는 길이에요.”그리고 더 확실히 하기 위해 한 마디를 더 보탰다.“하윤이도 저랑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먼저 휴식하라고 했어요.”그 소리에 원혜정은 낮게 웅얼거리더니 활짝 웃었다.“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동서가 괜찮다니 다행이네요.”그 모습은 마치 권하윤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해하고 상냥했다.하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원혜정을 다시 보니 구역질이 났다.다행히 일은 머물다간 바람처럼 훅하고 지나갔다.원혜정이 간 뒤 강수연은 의외로 권하윤에게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오히려 민승현을 따로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